光州學生抗日運動.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 시내에서 학생들이 항일 시위를 전개한 이래 1930년 5월까지 조선 각지에서 동맹휴학, 거리 시위 등이 전개된 대규모 민중운동. 3.1 운동 이후 국내 최대의 조직적인 민족운동이다.
배경
일제의 민족교육차별
1920년대 국내의 교육체제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교육령에 기초했다. 제2차 교육령의 특징은 '내지연장주의'를 채택한 것으로, 학교 종류 및 수업연한에 있어서 일본과 동일한 학제를 채택하고 소위 '내선공학'을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어(일본어) 상용'과 '국어 비상용'으로 구분하여 소학교-중학교(국어 상용)의 계통과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국어 비상용)의 2원적인 체계로 이뤄졌다. 즉, 일본인 학교와 한국인 학교를 구별하여 시설, 지원 등에 차별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에 입학한 학생수는 날로 급증했다. 1919년 당시 보통학교수 517개교, 학생은 8만 9천여 명이었지만, 1920년부터 학교 및 학생이 급증하여 1929년에는 학교수 1,584교, 학생 수는 47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일보 1929년 1월 1일자 기사는 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너나 할 것업시 신교육을 바드려고 경향의 각 학교에 문이 미어지게 달려들든 것이 과거 십년간의 조선교육계의 남다른 현상이엇다. 실로 만세 이듬해에 손자나 증손까지 보앗슬듯한 상투장이들이 중등삼종학교나 강습소 문압해 홍수가티 모혀들든 긔억을 우리들은 아즉 가지고 잇지아니한가.
보통학교의 대부분은 공립 보통학교였다. 전체 보통학교 학생 중 공립 보통학교 비중은 1920년 96%, 1930년 95%에 달했다. 사립학교 설립율이 낮은 이유는 일제가 보통학교 설립 인가권을 장악하고 교육의 목적과 교육과정, 교사의 자격 등에 대해 강력한 통제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립학교는 수업료에만 의존해야 해서 경영난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학교 설립의 통제는 중등학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중등학교의 서립기준을 강화해 각종사립학교의 중등학교 전환을 막았다. 이에 따라 각종사립학교의 중등학교 전환운동과 학교 시설개선 등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이 빈번하게 전개되었다.
한인 교육과 일본인 교육간에는 명백한 차별이 있었다. 먼저 취학률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1920년 당시 초등학교의 경우 인구 만명 당 한인 학생이 63명인데 비해 일본인 학생은 1,265명으로 20배의 차이가 있었다. 1929년 보통학교에 다니는 한인 학생은 인구 만명 당 252명이었으나, 일본인 학생은 1329명으로 5배에 달했다. 중등학교의 경우엔 1929년 당시 한인 학생이 인구 만명 당 15명에 불과한데 비해 일본인 학생은 361명으로 24배에 달했고, 고등학교에서는 인구 만명당 한일 학생 수가 39배의 차이를 보였다. 1928년 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실업보습학교 등의 입학 지원자는 31,387명이었지만 입학자는 8.969명으로 합격률이 28.6%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총독부는 중등교육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 모두 중등 및 고등교육 기관의 절대 부족 문제를 들어 중등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려 했지만, 총독부는 이를 억압하여 한인을 우민화시키고자 하였다.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도, 한인 학교의 교육 여건은 열악했다. 일본어를 조금도 말하지 못하는 한인 아동을 가르치는 보통학교에서만 조선인 교원이 일본인 교원보다 2배 정도 되었지만, 그 외의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원이 월등히 많았다.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학교로서 한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일본인 교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 일본인 교사들은 경찰과 긴밀한 연락하에 한인 학생을 감시하고 학생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이 블랙리스트는 상급학교 진학시에는 진학사정의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기에, 요주의 학생은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학생에 대한 감시는 교사에 의해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교외 감독도 학생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니, 학부형 또는 상급생 중에서 선발된 보조감독이 교사를 도와 학생의 행위를 조사, 보고하였다.
이렇듯 각급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를 대거 채용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신규 교사를 수입해야 했다. 이들은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고 한국말은 물론 한국의 풍속과 역사를 전혀 몰라서, 자연히 교육 현장에서 한인 학생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학교에서는 한인 교사가 일본인 교사보다 2배 이상 많았으나,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1927년 당시 전국 1,338개의 보통학교 중 한인 교장은 18명에 불과했다. 총독부 학무당국에서는 일본인을 전부 채용하되 모자라는 경우 한인 교장을 특별히 채용하겠다고 공언했다. 학교 운영의 재량관은 교장에게 있었으므로, 보통학교 교장이 일본인이라는 건 일본이 의도하는 식민지 교육의 실시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인 사회에서는 보통학교에 한인 교장 채용 증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인 학교의 차별은 총독부 당국의 지원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25년 안주지방의 일본인 학교에서는 천여 원씩의 국고금과 지방비가 보조되었으나, 한인 학교에는 국고금 1원과 지방비 2원이 전부였다. 당시 안주지역의 일본인 학생이 129명, 한인 학생이 1806명으로 한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보다 15배에 달했다. 이는 안주 지역만 국한되지 않았다. 1929년 당시강원도에서는 지방비 보조가 보통학교는 아동 1명당 7원 51전인데 반해 일본인 학교인 소학교는 평균 27원 90전이었다. 또, 1927년 당시 평양부의 한인 학교비 예산 총액이 17만 3천원인데 비해 일본인 학교조합 예산액은 30만 1천여 원이었다. 이 지역의 한인 인구가 일본인의 4배였으므로, 교육비의 비율은 8배의 차이가 있는 셈이었다.
이러니 교육 여건에서의 민족적 차별이 상존했다. 한인 공립학교와 일본인 공립학교는 교사 1인 당 학생수, 교육경비, 학교 자산액 등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1921년 교사 1인 당 학생 수에서 한인 학교는 평균 39.8명이었지만 일본인 학교는 31.5명이었다. 학생 1인당 경비에서도 한인 학교는 57.9원인 반면 일본인 학교는 65.5원이었다. 학생 1인당 학교 자산액의 경우 한인 학교는 59.8원이나 일본인 학교는 그 2배에 필적하는 106.7원이었다. 1927년 당시 서울의 초등학교 평수는 소학교는 1인당 3평 반인데 비해 보통학교는 1인당 2평 반에 불과했다. 교사 1인당 학생 수도 42명대 60명으로, 한인 보통학교의 학급이 현저하게 열악했다. 이렇듯 한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매우 빈약한 시설과 재정의 학교를 다니면서 초과밀 학급 안에서 교육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지속적으로 요구된 것은 교육 시설에서 일본인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강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제기된 이 요구는 교과과정 상의 요구보다는 교육 시설, 교원 등 외형적 측면에서 한인을 우선으로 한 교육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192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많은 한인 초등, 중등 교육기관이 신설되면서 제기된 문제였다. 하지만 한일 학생의 차별은 이러한 외형적인 지원의 차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교육내용에서도 식민교육이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 중 보통학교의 교육 목적은 "생활에 필수한 보통의 지식 및 기능을 수여하여 국민으로서의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습득시킬 것"이었다. 고등보통학교 교육의 목적도 이와 유사하여 "국민으로서의 성격을 양성하고 국어에 숙달시킬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교과과정은 일본어의 습득과 일본 정신의 주입에 맞추어 구성되었다.
고등보통학교 국어의 경우 '일본어급한문'은 주당 32시간으로 배정되었지만, '조선어급한문'은 12시간에 불과했다. 조선어급한문 교과서도 조선어는 총 62개 단원 중 8개 단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한문 단원이었다. 그나마 조선어 단원이라는 것도 '일선양어 어법의 비교' 등과 같이 일본 문화와 관련되어 '내선일통', '내선동원'을 강조하는 것들이 많았다. 1924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에서는 일제 기원절의 유래를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십오 기원절신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p.78~79.
신무천황께옵서는 금상 천황폐하의 제122대 선조이옵신대, 처음에 사방을 평정하옵시고 지금부터 2280년전 신서년 2월 1일에 개원하옵섯스니, 곳 우리나라의 제1대천황이 되옵셧소, 그 즉위하옵신 날을 기원절이라 하야, 우리 국민들은 매년 그 날을 당하면, 집집마다 국기를 달아서 경축하며, 학교에서도 행사를 거행하오.
이와 같이 어떤 교과목이던지 일본 문화를 선전하는 내용을 삽입해 일본 정신을 가르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역사의 경우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6년제 보통학교 교과 과정에 일본 역사와 지리 교과가 신설되었다. 5, 6학년에 각각 주당 2시간씩 배정되었고, 고등보통학교에서는 역사와 지리가 분리되지 않고 <역사지리>로 통합되어 매학년당 주당 3시간씩 배정되었다. 한국의 역사 및 지리는 교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 과목에서는 일본 역사의 장구함과 위대성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특히 고등보통학교 규정에 일본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에 관한 사항을 상세히 하라"고 명시하여 한국사를 일본사와 관련된 부분에 한하여 부수적으로 교육하도록 하였다. 일본사에 관련된 조선에 관한 사항은 '임나일본부', '신공황후의 신라 침공' 등 식민사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동맹휴학 당시 교과과정에 관한 요구사항 중 일본사에 부수되지 않은 독자적인 한국사 교육을 요구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교육과정에서 일본인 교사의 한인 멸시적 태도는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이러한 교사의 태도는 학생들의 반감을 야기하여 동맹휴학의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교육 내용에 대한 반감도 강했다. 1928년 가을 공주공립보통학교 6학년생이었던 이도원(李道元)은 참고서인 <국사의 신연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기사가 있는 것을 보고 게재된 천황, 황후, 황태후의 사진에 붉은 색으로 칠했다. 후에 이 사실이 들어나면서 재판에 회부되어 1933년 2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1]
무엇보다도 한인 학생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교수 용어가 일본어라는 점이었다. 배우는 내용이 일본어일 뿐만 아니라 교사의 지시와 설명, 그에 대한 학생의 대답이 모두 일본어로 이뤄졌다. 일본어 교과만이 아니라 모든 교과의 교수 용어는 일본어로 해야 하는 것으로 법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읿론어에 익숙하지 않은 초등학생들은 교과과정에서 도태되기 쉬웠다. 사립학교에서는 교수용어가 한국어였기에, 1928년 한일공학의 법제화가 거론될 때 한인 사회에서 "공학으로 할 경우 교수 용어를 일본어로 해야 하니 안된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 교육은 자연히 이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빈번해지는 동맹휴학
192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동맹휴학 투쟁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일정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등교 거부, 수업 거부, 농성 등을 행하는 것이었다. 동맹휴학은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증가하여 전국 13도 전체에서 72건이 전개되었고, 1928년에는 83건으로 늘어났다. 1928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전국 54개 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전개되었고, 참가 학생은 1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인 학교에서는 이러한 동맹휴학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동맹휴학이 전적으로 한인 학생들의 투쟁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929년에도 전국적으로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그해 7월초까지 전국에서 28건의 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중 21건이 보통학교에서 일어났다. 동맹휴학의 이유는 '생도의 대우 개선, 학교의 설비 충실, 교장 선생의 인격 문제'였다. 이렇듯 식민지 교육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전 학생층으로 확상되고 있었기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터지자 전국 각지에서 호응하는 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다.
동맹휴학의 원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교원 배척'이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발생한 교원 배척 건수는 434건에 달했는데, 이는 전체 동맹휴학 404건보다 많았다. 그중 228건이 일본인 교원, 197건이 한국인 교원, 7건이 외국인 교원 배척이었다. 교원 배척의 원인은 '인격 및 소행 언행 등이 원인'인 경우가 123건, '교수법에 대한 불만'이 120건으로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은 1926년 일본인 교사의 퇴진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이들은 일본인 교사가 "일본인의 장점을 말할 때는 반드시 조선인의 단점을 들어 비교하는 것, 세계 제일의 일본인이라고 말마다 자랑하는 것, 조선인은 교활하기가 야만에 가깝다고 항시 다반사로 야만이라는 극언과 폭언을 사용하는 것, 노예적 정신을 주입시켜 학생을 무조건 굴종시키려는 것" 등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또 1928년 북청농교에서는 교장의 망언에 반발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교장은 수신과목의 수업시간에 "너희들이 불량한 행동을 하면 아국의 군대를 풀어서라도 너희를 전멸시킨다"고 말하는 등 모멸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또 수신시간에 '생도심득'이라는 문제를 낸 후 사회과학 연구도 가능하다고 답변한 학생을 문제삼아[2] 학부형을 호출한 후 경찰서에 가서 개과증명을 받아오라고 강박했다.
한편 '교수법에 대한 불만'도 1925년 10건, 1926년 19건에 비해 1927년 39건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일제도 1927년의 동맹휴학을 분석하면서, "맹휴의 이유로 표방하는 바가 대체로 교장, 교원의 배척에 있는 것 같지만, 내실은 현재의 교육이 정부의 압박하에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삼으려는 것이므로 조선혼을 양성하기 위해 이러한 교육제도를 배척"한다고 봤다. 1927년 10월 휘문고보 학생들은 친일 인사 민영휘 동상 건립 반대, 학우회의 자치 등과 함게 김형배 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때 김형배 교장의 사퇴 이유로 주장한 근거는 그가 조선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등 한인으로서 조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28년에 가면 인격 및 소행 언행 등의 이유가 18건으로 줄고, 일본인 교원 배척은 9건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대신 '민족의식 및 좌경사상으로 인한 맹휴'가 전년도에 비해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는 동맹휴학의 성격이 민족 감정으로 인한 것에서 식민교육 자체를 투쟁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변화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총독부 당국에서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1927년 중반까지만 해도 동맹휴학의 원인이 무자격 교원이나 인격, 소양, 지식 등의 소양이 부족한 교원에 대한 저항, 또는 민족적 반감에 의한 일본인 교사 배척 등 교사 개인 신상의 문제로 파악했다. 그래서 학생의 입학 당시에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엄중한 선서식을 갖고,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한 학생은 타교에 입학시키지 않는 등 학생 개인 관리를 철저하는 선에서 끝냈다.
그러나 동맹휴학의 요구사항과 투쟁사항이 1927년 중반 이후 정치성을 띠기 시작하자, 총독부의 동맹휴학 대책도 변화했다. 당국에서는 사상단체나 노동운동 단체가 개최하는 강습회, 연설회 등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각 도지사에 훈령을 내려 학생들과 사회인사의 연결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맹휴학이 끊이지 않자, 학무국에서는 1928년 전국 중등학교장 회의를 개최하여 학생 맹휴문제, 사상문제 등의 대책을 논의헀다. 당국에서는 고등보통학교 입학 당시부터 학생의 소질과 가정환경을 엄밀히 조사하여 사상 검증을 거치도록 하였다. 학생의 소행조서는 보통학교 교장이 작성하도록 하였다. 또한 학생 집회를 엄중히 취체하기로 했다.
1929년에는 사립 중등학교 교원의 사상, 취미, 독서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성향조사를 극비리에 실시하였고,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하면서 교원의 자격에 사상문제를 중시하기로 협의하는 등 학생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이러한 대책은 학교 질 개선이 아니라 학생들을 억압하는 데만 치중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불만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동맹휴학은 1929년 11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조직적으로 전개하기에 이른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1920년대초 광주의 중등학생들은 지역 청년운동 조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중등학생들이 20세 전후의 청년이기 때문에 청년운동 단체의 활동자들과 비슷한 연배였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광주지역 사회운동은 광주청년회와 광주노동공제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광주청년회는 서울청년회계, 광주노농공제회는 화요계가 주도했다. 서울청년회계는 신우회, 화요회계는 십팔회라는 사회주의 단체를 통해 지도되었다. 화요계는 전남동부청년연맹을 조직하여 전남일대의 세력기반으로 하였다. 반면 서울청년회계는 광주청년회를 활동공간으로 하여 전남해방운동자동맹을 통해 전남지역 서울계 인사들과 광범위한 연계를 형성했다. 양측은 서로 세력다툼을 일삼았는데, 급기야 1926년 초 광주청년회원들이 노동공제회관을 습격, 파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1925년 말과 1926년 6월 조선 총독부가 조선공산당을 탄압하면서, 광주지역 화요계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광주 일대의 세력 균형은 서울계 쪽으로 기울었다. 1926년 9월에 조직된 광주협회는 '전광주 사회운동 단체의 통제기관'을 자임하며 각 부문운동의 유기적 통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울계와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광주지역의 사회운동은 서울계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1926년 가을 이후 서울계 인사들이 ML과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에 참여하면서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지형도 복잡하게 변화했다. 서울계의 리더 강석봉은 1927년 초 ML파 조선공산당의 전남지역 책임을 맡았고, 김재명은 1926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에 참여한 후 1927년 초 고려공청 전남 책임을 맡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광주, 전남 지역 서울계 사회운동자들이 대거 입당했다.
강석봉, 김재명은 1927년 8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군부 단위 단일 청년동맹 결성 등 중앙의 신지도방침을 전남, 광주지역에 실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강영석, 강해석, 장석천, 국채진 등이 창립준비위원에 선임되어 광주청년동맹의 설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광주청년동맹은 각파 인사들간의 대립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28년 1월 김재명이 중앙 당 활동을 위해 광주를 떠나자, 광주 지역의 청년운동은 장석천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장석천은 그해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회에 국채진, 나승규와 함께 광주 대표로 참석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6월에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회의 사회와 임시의장을 맡아 전남 일대의 사회운동자 간에 핵심적인 활동가로 부상했다. 장석천은 1929년 9월에 개최된 전남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장을 맡아 전남지역 50여 명의 대의원을 주도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장흥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던 왕재일이 집행위원 후보에 그친데 비해, 그해 6월 귀국하여 학생 독서회 조직에 나선 장재성이 집행위원에 전격 선임된 것도 장석천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1929년 8월 ML당 활동 도중 체포된 강해석의 뒤를 이어 동생 강석원과 제수인 신경애가 광주 대표로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여기에 장석천과 더불어 조선청년총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된 국채진, 나승규도 전남청년연맹의 집행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이리하여 전남청년연맹은 장석천을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었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세력 역시 장석천을 중심으로 뭉친 전남청년연맹이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사회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5년 3월의 전남지방 청년대회에서는 '현 교육제도를 조선인 본위로 주창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1928년 1월에 개최된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회에서는 '학생, 소년운동의 옹호, 식민지 교육정책 반대, 조선인본위의 교육제도 실현' 등 학생 관련 사항 등을 표어로 선정해 학생층과의 연대에 노력했다.
또한 청년, 사상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강연회 등은 지식욕이 왕성한 학생들의 사회과학 연구열을 자극했다.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남해방운동자동맹에서는 1926년 2월 23일 광주보통학교 대강당에서 연설회를 개최했다. 농민, 노동, 청년, 종교, 형평, 소년운동 부문으로 나누어 연사들이 민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운동자의 사명을 역설했다. 이 연설회에 2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1926년 1월 23일 광주직공청년회 총회에서는 사회과학 연구를 위한 강연회를 상설기관으로 설치할 것을 결의했다. 전남청년연맹에서는 1927년 7~8월 보름 동안에 걸쳐 광주의 흥학관에서 하기 대강좌회를 개최했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 전남도당의 배후지도로 80여 명의 사회운동가가 참여하여 이론 통일, 사회과학 학습활동을 전개했다.
공개적인 강연회 외에 사회과학 연구모임도 있었다. 1925년 3월 강석봉 등이 주도하여 전남지방의 22개 단체 대표가 참석한 청년대회에서는 강좌회, 강연회의 개최는 물론이고 독서회와 도서 비치, 잡지 구독을 통한 사회과학 지식의 함양을 결의햇다. 1926년 2월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정기총회에서도 노동야학 강습회를 설립하여 독서회, 연구회, 토론회, 강습회를 수시로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신우회에서도 자체 교양을 위한 연구회를 개최했다. 이와 같이 광주 청년단체, 사상단체에서 독서회, 연구회 등을 통해 사회과학을 학습하고 있던 상황은 당시 지식층에 속하는 중등학생의 사회과학 학습열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학생 독서회 결성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1926년 9월, 과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이던 왕재일은 동창생 장재성, 광주농업학교의 박인생 등과 친분을 맺고 십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규합해 성진회를 결성했다. 성진회원 임주홍은 1932년 11월 잡지사 <사상월보>에 글을 게재해 성진회 결성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무릇 과학은 역사적 필연의 인식을 위한 탐조등이며, 인간의 동물성에서 인간성으로의 해방, 즉 필연에서 자유로의 발전을 위한 나침반인 것입니다. (중략)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서 불가결적인 필요물, 즉 과학적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동물성적인 생활 영역에서 이탈하고 인간적인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적 생활을 영위할 것을 희망함으로써 자연과학분 아니라 사회과학도 포함한 바의 광범위한 과학을 연구할 것을 최상 또 최대의 목적으로 하여 학생간에 독서회인 성진회를 조직한 것입니다.
성진회는 광주지역 중등학교에서 최초로 조직된 학생 비밀결사로서, 이후 사회과학 연구모임에 기반을 제공했다. 그들은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최규창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참가인원은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생 16명이었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삼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왕재일이 성진회의 총무를 맡았으며, 장재성은 회계, 박인생은 서기를 맡았다.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 등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회원 중 한 사람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결사 5개월 만인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전술상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비밀보장을 위해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들 구성원들은 각 학교 단위별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1927년 11월 성진회 출신의 광주농교생인 문승수, 정동수 등이 김복만, 김재용, 유상걸, 주당석, 유치오등과 함꼐 사회과학 연구를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왕재일이 참석하여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항는 등 간접적으로 관여, 지도하였다. 또, 1928년 2월 제3차 고려공청의 광주지역 야체이카 회원인 강해석, 지용수는 최규창, 문승수, 임주홍, 김광용, 정종석, 주당석, 유치오, 하의철, 이동선, 박무길, 정귀석, 임종근 등 광주 각 학교의 대표들을 지용수의 집에 초대했다. 지용수는 이 자리에서 각 학교에 졸업생이 생겨 사회주의 연구 지도자를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학교를 졸업하는 자는 후계자를 선정하여 재학생을 지도하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주의를 보급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지도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 결과 농업학교에서는 주당석, 유치오가 후계자로 선임되었다.
한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1928년 11월 초순경 장재성의 여동생인 장매성을 중심으로 장경례, 박옥련, 남협협, 고순례(高順禮), 이금자(李錦子),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金錦嬿), 김귀선(金貴善) 등이 독서회를 조직했다. 결성의 계기는 1928년 4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이후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성진회가 1927년 초 해산된 후 각 학교 단위로 사회과학 연구 모임이 결성되어 학생들을 포섭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장석천 등 전남청년연맹 인사들의 지도를 받았다. 여기에 1929년 6월 일본 중앙대학에서 퇴학당하여 귀국한 장재성이 광주의 여러 학생 조직들을 독서회로 통합시키고 각 학교의 독서회를 통제하는 중앙지도기관으로 독서회중앙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책임비서가 되면서, 광주 일대의 학생운동은 보다 조직화된 양상을 보였다.
1928년 4월 이경채가 불온문서를 과주 일대에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뒤 취조를 받을 때 광주고보가 취조가 끝나기도 전해 권고 퇴학을 단행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광주고보 4,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학교 측에 이경채의 퇴학 이유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학부형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대표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고, 2~5학년 학생 300여 명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이경채의 무죄 방면 시 복교를 주장했고, 교우회의 자치 활동 보장, 교장의 기만적 행동 반성, 무자격 선생 사직, 일본인 교사의 양심적 반성 촉구, 무도장 신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 11명의 근신 처분 취소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동맹휴학 주동자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에 퇴학생 보호자들은 학교 측의 호출에 불응했고, 광주농업학교 역시 동맹휴학을 감행해 광주고보 동맹휴학생과 연합하여 맹휴 중앙본부를 발족시켰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하여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며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가 하면, 학생들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여 결속을 다졌으며 학교장에게는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으며, 학생들에게 경찰 취조 시의 답변 요령까지 열거된 실행 요목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에 일제는 맹휴 중앙본부 지도자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동맹휴학은 1928년 9월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과 타협하여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일에 자제들을 등교시키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광주 한국인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일꺠우는 계기가 되었고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전개
나주역 사건과 1차 시위
이광춘과 박기옥.
1929년 10월 30일 저녁, 나주역에서 열차가 멈춰서고 통학생들이 하차했다. 그런데 개찰구에서 광주서중 3학년생인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을 비롯한 여러 일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생 박기옥을 비롯해 이광춘, 이금자(李錦子)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이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가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후쿠다 슈조가 대꾸했다.
“ 뭐냐, 센징 주제에. “
박준채는 이에 격분하여 후쿠다 슈조의 따귀를 때렸고, 이로 인해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간의 격투가 벌어졌다. 나주역의 일본인 순사가 이를 제지하며 박준채의 따귀를 때렸고, 현장에 있던 십여 명의 한인 학생들이 항의헀다. 나주역을 나온 한인 학생들은 후쿠다 등 일본인 학생들을 쫓아가 이광춘의 부친이 경영하는 조면공장의 창고 부근에서 이들을 구타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통학열차 안에서 다시 박준채와 후쿠다의 다툼이 있었다.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하여 시비가 벌어졌고, 박준채 등이 후쿠다를 구타했다. 이를 본 차장이 박준채와 후쿠다를 2등실로 연행하였고, 일본인들이 대부분인 2등실 승객들은 무조건 일본인 학생을 두둔하고 박준채를 비난했다.
11월 1일에는 박준채와 후쿠다의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날 광주역에서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유도 교사까지 동원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 이에 한인 통학생들도 플랫폼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대치하며 일전을 불사했다. 그러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교사들의 제지로, 학생들은 큰 충돌 없이 학교로 돌아갓다.학교에 집결한 광주고등보통학생들은 사태의 선우책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고 오쾌일의 제안으로 해산했다. 한편 광주중학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호위를 받으며 나주와 영산포에서 숙박했다.
11월 3일, 한일 학생들은 다시 충돌했다. 이날은 일제의 명치절이자 전남지역 산출 6만석 돌파 축하식이 거행되는 날이어서 광주 시내는 많은 인파로 붐볐다. 11시경 수기옥정 우편소 앞에서 황남옥, 김향남 등 고등보통학생 수 명이 신사참배를 끝내고 돌아가는 일본인 학생 십여 명과 시비가 붙어 격투를 벌였다. 이를 본 최상을 등 고등보통학생들이 격투에 가세햇다. 이에 열세에 몰린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광주역으로 도주하였고, 고등보통학생들은 이들을 추적하여 역전 광장에서 광주중학교 학생들과 집단 난투를 벌였다. 이 소식을 듣고 고등보통학생 백여 명이 달려와 광주중학교로 통하는 통학로로 쇄도하자, 중학생 백 수십명이 뛰쳐나오면서 양측은 산사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사태가 확대되자 양교의 교사들이 막아섰고, 경찰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을 제지, 해산하였다.
이후 고등보통학교 강당에 300여 명의 학생이 모여서 선후책을 논의했다. 오쾌일은 시위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였고, 이형우 등은 광주중학생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할 것을 주장했다. 학생들은 창고를 열어 장작, 곤봉, 배트 등으로 무장하고 시내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광주농업학교, 사범학교생까지 가세한 300여 명의 학생들은 운동가를 부르며 광주중학교를 향해 행진했다. 중간에 경찰의 제지가 있었으나, 학생들은 이를 무시하고 시가 행진을 마친 후 학교로 돌아와 해산했다. 이 일온 광주 지역 일본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일본인 신문들은 무기를 소지한 300여 명의 고보 학생과 150여 명의 광주중학생들이 격투를 벌였으며, 광주중학생 측에서 중상자 3명, 경상자 13명, 고보 측에서 경상자 9명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인 소학교 학생 70~80명이 한국 학생들에 의해 부상당했다는 허위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일본인 유지들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경찰서, 전남도지사, 학무국 등에 주동학생들의 처벌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폐교 등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 일본군사령부에 군대 출동을 요청하고, 청년단과 제향군인이 출동할 수 있도록 인쇄물을 준비했다. 그 결과 11월 5일 경찰 당국에서는 당초 중학, 고보 각 5~6명만 체포하려던 입장을 바꾸어 시위 주동 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해 60여 명의 한인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 일은 고보학생들 뿐만 아니라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의 위기감을 자극하여, 2차 시귀가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2차 시위
장재성은 11월 4, 5일 전남청년연맹 간부 장석천, 국채진, 나승규, 강석원, 박오봉 등과 함께 시위운동의 선후책을 논의했다. 장재성은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시위운동을 제안하였고, 참석자들이 모두 찬성하여 시위계획이 추진되었다. 한편 광주의 학생시위와 이로 인한 대규모 학생 검거 사실은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져 큰 방향을 일으켰다. 6.10 만세운동 이후 학생의 시가 행진과 대규모 학생 검거는 초유의 사태였기 때문이다. 11월 7일 서울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중앙청년동맹에서 파견한 권유근, 부건이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 두 사람은 강영석, 장석천과 회담하여 사태를 파악한 후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합의하고, 강영석, 권유근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 8일 상경했다. 이어 11월 9일 장석천은 신간회에서 현지조사를 위해 광주에 온 허헌, 황상규, 김병로를 만나 전국적인 시위운동과 신간회의 자금지원에 합의했다.
이후 광주에서의 시위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부건은 광주에 잔류하면서 광주고보, 광주농교, 전남사범학교 등 각 학교의 기숙사를 방문하여 학생들의 동맹휴학 참가를 독려하다가 광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장재성은 전남청년연맹 간부들과의 합의에 따라 9일 학생들에게 배부할 전단을 작성했다. 이어 10일 밤 고보의 오쾌일, 이영범, 사범학교의 이신형, 황상남, 농업학교의 조길룡, 김남철, 정욱 등 각 학교의 독서회 중심 인물들을 소집했다. 이들은 임시휴업이 끝나는 11일의 수업시작 시간을 기해 3개 학교가 일제히 선전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합의했다. 원고는 오쾌일의 책임하에 인쇄하여 조길룡, 이신형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한편, 장석천은 10일 밤 김향남 등 광주고보생 6명을 규합하여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이 자리에서 장재성이 거사일을 11일로 약정하였음을 알게 된 장석천은 거사일을 12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11월 11일은 임시휴업이 끝나고 첫 등교일이므로 학생들의 등교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장재성은 다시 11일 오전 일반 민중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전단 원고를 작성하였다. 동일 오전에는 장재성, 장석천, 박오봉, 강석원, 나승규가 모여 시위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장재성은 미리 작성한 원고를 보이며, 기회를 잃지 말고 선전 전단을 인쇄 배부하여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전개해야 함을 역설하였고, 참석자들은 12일 수업 개시 시간에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장재성이 오쾌일에게 격문 원고를 넘겼고, 오쾌일은 독서회 학우들과 함께 4종의 선전 전단 4천 부를 인쇄했다. 인쇄된 전단은 조길룡, 김안진, 강민섭 등의 독서회원을 통해 고보와 농교의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11일 밤 장재성, 장석천, 강석원, 박오봉, 국채진 등은 조선만의 집에 회합하여 광주의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장재성, 장석천은 학생측의 선동, 박오봉은 인쇄직공 등 노동자측의 선동, 강석원, 국채진은 타지방 동지들과의 연락을 담당하기로 했다. 장석천은 11일 밤 농교생 조길룡과 고보생 김향남에게 12일 수업 개시와 동시에 시위운동을 감행할 것, 학생 전원이 체포, 구속될 때까지 시위운동을 감행할 것, 형무소 앞까지 행진하여 함성을 질러 수용된 자에게 용기를 줄 것 등을 지시했다. 이후 그는 16일 서울로 올라가서 서울 지역 시위를 추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거사일인 11월 12일, 김남철, 박종주 등은 조길룡을 통해 받은 격문을 교실에 살포하여 시위를 격발시켰다. 고보에서는 장석천의 지시를 받은 김향남이 5학년 을조 교실에서 학생들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개시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교의 학생 500명은 수업 개시와 동시에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독서회원들을 통해 미리 배부한 격문이 시가에 살포되었고, 학생들의 시가행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위에는 4종의 격문이 제작 배포되었다. 3종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1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격문은 모두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정황 설명은 생략되고 표어만을 제시했다.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우리의 승리는 오직 우리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가) 우리 투쟁 희생자를 우리의 힘으로 탈환하자!
나) 검거자를 즉각 석방하라!
다) 교내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방지하라!
라) 수업료와 교우회비를 철폐하라!
마)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사) 직원회의에 학생대표를 참석시켜라!
아)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자)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차)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카) 전국 학생대표자 대회를 개최하라!
일반인에게 배포된 격문은 이와는 달리 일본인 사회의 반응에 대항한 성격이 강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청년대중이여 죽음을 초월하여 투쟁으로!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검거자를 탈환하자!
재향군인단의 비상소집에 절대 반대하라!
경게망을 즉시 철퇴하라!
소방대 청년단을 즉시 해산하라!
만행의 광중(光中)을 폐쇄하라!
기성 학부형위원회를 분쇄하자!
학부형대회를 즉시 소집하라!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획득하자!
경찰은 즉각 투입되어 광주형무소로 향하던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고, 60명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후 추가 수사로 20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일제는 시위가 전국에 확산되는 걸 우려하여 보도통제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전해졌고, 3학년생 박종식, 최창호, 이재실, 그리고 2학년생 양재욱 등은 이상원의 집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결과 최창호와 이인형이 광주로 가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장재성이 경영하는 빵집을 방문하여 장재성과 면담했다. 장재성은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단도를 가지고 공격해온 일본 중학생을 단지 방어한데 불과한 조선인 고등보통학생을 검거하는데 일본인 학생은 겨우 7~8명인데 반해 조선인 학생은 수십명에 이르니, 민족적 차별에 의해 고보생에 편파적이고 가혹한 조치에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당국자와 싸워야 하니 협력하라. “
최창호와 이인형은 목포로 돌아와 동지들에게 장재성의 말을 전했다. 그들은 논의 끝에 목포상고의 전조선인 학생을 규합하여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동조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시위 방법은 학생을 3개 대로 편성하여 2대는 학교 앞에서, 1대는 송도공원에 집결하여 선전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행진하기로 했다. 이재실(李在實)이 「피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木棉) 대기(大旗)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小旗) 약 120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찬규(鄭燦圭)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박종식 역시 이에 가담하여 태극기 140매를 제작했다.
거사 당일인 11월 19일 아침, 50여 명이 정명여학교 앞에 집결하여 적새 대기를 앞세워 선전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하며 목포 역전까지 시내를 행진했다. 송도공원에서 준비 중이던 1대는 경찰의 제지로 격문만을 살포한 채 시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들은 학교 측이 경찰에 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화선을 절단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박준채의 고종사촌으로 박준채의 집에 기거하던 나주농업보습학교 2년생 유찬옥이 광주학생들의 항쟁 사실을 전해듣고 동조시위를 기획했다. 그는 나주청년동맹 검사위원장이자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인 박공근에게 협조를 구했다. 이들은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의 연합시위를 계획했다. 거사일을 27일 장날로 정하고 유찬옥이 격문을 기초하여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 아는가? 우리가 얼마나 강압과 폭압을 받고 있는가를"이라는 격문과 행동강령을 적은 삐라 약 2천 부를 제작했다. 거사 당일 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나주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일제히 교문을 나와 대열을 이루어 나주 시내를 행진했다. 이들은 나주시장에 이르러 삐라를 살포하고 "조선민중 만세", "조선학생 만세"를 고창했다.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하여 해산되었고, 주모자들은 체포되었다. 11월 29일에는 영산포의 영산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
장석천은 11월 16일 서울로 올라온 뒤 조병옥, 김병로 등 신간회 중앙간부들에게 제2차 시위의 전말을 보고하고, 이어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곽양훈, 차재정 등에게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를 전국 항일 시위운동으로 확산하자고 주장했다. 조선청년동맹은 논의 끝에 서울 시내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를 통해 시위운동을 서울로 확산하기로 결정했다. 장석천은 특별히 휘문고보 5년생이었던 후배 장홍염을 설득하여 장홍염이 서울 시내의 주요 조선인학교들의 학생운동가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당초 계획에서는 격문이 배포될 때 각 학교가일제히 시위를 전개한다는 전술이 구상되었으나, 실제 연락이 여의치 않아서 각 학교의 사정에 따라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2월 3일, 격문이 각 학교에 조선청년동맹이 작성한 격문이 뿌려졌다. 이 격문에는 광주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과 독립운동에 동참을 호소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본 경찰은 예비 검속 차원에서 서울 일대의 청년동맹 주동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하지만 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12월 5일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권태동의 인솔하여 서울에서 먼저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사전에 연락된 각 학교에서 순차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고 9일에 이르러서는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시위는 학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결행한 다음 교정에 집합한 학생들이 교외로 진출하여 시가행진을 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경찰의 저지로 시위대가 해산되면 각자 종로에 다시 집합하여 대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12월 9일 전개된 시위에는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등보통학교 700여 명,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월 9일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동맹휴학에 참여하였고, 그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중 서울 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간회는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12월 10일 권동진, 허헌,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한용운, 주요한 등의 주도하에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12월 13일에 개최하여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전개하며,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은 사전에 이를 탐지하고 12월 13일 아침 6시 신간회 주요간부 30여 명을 예비검속하여 서울의 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했다.
그래도 지방지회에 보낸 지시문은 이미 전달되었고,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1930년 3월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시위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1930년 1월 8일, 신의주고보에서는 개학식이 열렸다. 교장의 훈시 후 3학년 학생 계경순이 강단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광주학생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이에 호응하여 동맹휴학을 전개하자고 연설하다 제지당했다. 이어서 2학년생 김두성, 3학년생 김도흡, 김서휘, 5학년생 윤갑빈 등이 차례로 등단하여 동일한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학교 당국에서 교문을 닫고 경찰이 주모학생들을 검거해서 동맹휴학에 이르지 못했다.
1월 9일 개성 송도고보에서 개학식 후 학생이 등단하여 일제의 광주지역 학생에 대한 편파적인 조치를 규탄하자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했다. 송도고보 학생 240여 명은 만세를 고창하며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시내에 있는 호수돈여고보 앞에서 여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촉구했다. 이에 호응하여 호수돈여고보생 250여 명이 합류하면서 연합시위대로 발전했다. 이들은 다시 미리흠여학교와 개성상업학교 앞에서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학교측의 제지로 학생들은 시위대에 합류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개성 남대문 부근까지 행진하다 경찰의 저지로 주동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 1월 10일에는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던 미리흠여학교생과 호수돈여고보의 일부 학생들이 학교 밖의 시내에서 집합하여 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되었다. 호수돈여고보생 20여 명은 시내 개성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며 만세를 고창하였고, 시민 백여 명이 동참했다. 이에 놀란 일제 당국은 경기도경찰부는 물론 서울 각 경찰서에서 차출한 경찰까지 동원하여 개성 전 시내를 철야로 삼엄하게 경계했다.
광주에서도 재차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의 시위는 백지동맹, 즉 시험거부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광주고보 2학년의 독서회원인 강문영은 신간회원의 지도를 받아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재결속하여 시험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두 학교 학생들을 1월 9일부터 시작된 학기말 시험에 수감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백지답안을 제출했다. 1월 14일에는 광주고보 4학년 이하 319명 중 254명이 결석하였고, 1월 17일에는 2학년생이 일제히 토ㅚ학계를 제출했다. 광주 경찰서는 1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양교 학생들을 감시하고 주모자 5명을 검속하였으며, 광주고보 당국은 백지답안을 제출한 학생 65명을 퇴학 처분하였다.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백지동맹에 참여했다. 광주여고보 학교 당국은 1월 7일부터 학생들의 백지답안 제출의도를 탐지하고 학부형을 호출하여 주의를 주었으나, 학생들은 1월 10일 백지답안을 제출하며 항거했다. 1월 13일에는 학교 당국의 엄중한 추궁으로 학생들이 시험에 응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광춘이 교단으로 뛰어올라가 동교생들에게 백지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급우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눈치를 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 어저께 헌 약속 어떻게 된 거냐? 친구들은 감옥에 있는디 우리만 시험을 볼 것이냐? “
그 직후 시엄지를 놔두고 교실을 뛰쳐나오자, 이에 동조한 친구들이 삽시간에 뛰쳐나오고 전교생이 호응하여 시험을 집단 거부했다. 이 일로 이광춘은 체포되어 1월 15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고 일본 경찰에 다시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다. 경남에서도 동조시위가 일어났다. 1930년 1월 8일 신학기 개학 직후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먼저 시위를 전개하여 부산 시내에 격문을 살포하였고, 부산공립여고보도 이에 호응하여 1월 11일 동맹휴학을 기획하였으나 사전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산제2상업학교 2학년생 중 2명이 퇴학, 80명이 무기정학 처분되었으나, 1월 13일 퇴학생과 무기정학생이 전부 등교하여 재시위를 추진하다 경찰의 저지로 실패했다.
1월 11일 동래고보에서는 1929년 겨울방학 직전의 동맹휴학 활동으로 퇴학당한 12명의 복교를 요구하는 제2차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경찰과 학교와의 연락을 끊고 퇴학처분을 해제할 때까지 맹휴함"이라는 선언서를 제출하고, 경찰의 교내 침입 반대와 퇴학생의 복교를 요구하며 5학년을 제외한 전교생이 맹휴를 전개헀다. 학교측에서는 맹휴 학생 전원을 정학처분하고 사복 경관이 학교 내에 상주하며 경계했다. 1월 12일 마산공립상업학교 3학년생을 중심으로 "광주학생 구금자 무조건 석방" 등의 격문을 준비하며 맹휴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3명이 검거되고 격문이 압수되었다.
경북에서는 1월 12일 대구고보 2학년생 문학봉이 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함흥에서도 1월 11일 함흥사립 영생학교 학생 200여 명이 조회 후 광주학생사건에 관한 연설을 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3대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대는 함흥 큰 거리를 돌며 만세를 고창하다 경관과 충돌하여 쌍방에 부상자가 발생했다. 2대는 영생여고보에 이르러 동참을 호소하였고, 여학생 수백명이 만세로 호응하였으나 교사가 교실문을 잠그자 여학생들이 통곡하며 저항했다. 일부 남학생들이 유리를 부수고 교실문을 개방하면서, 여항색들이 교실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남녀 학생들은 군청 앞 거리를 지나 큰 거리를 거쳐 가장 번화한 우편국 앞에서 만세를 고창했다. 이어서 본정에서 기다리던 3대와 합류하여 시위 운동을 지속했다. 그러자 군인, 경찰, 소방대가 총출동하여 자동차로 추격하며 학생을 검거했다.
1월 14일 아침 조례 후 함흥공립상업학교 2~3학년생 60여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최상의 목적, 조선의 독립"등이 기재된 적기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출하여 신탄시장 등 번화가를 거쳐 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며 "싸워라, 피압박 민중이여. 3천리 강산을 붉은 피로 물들이더라도, 싸워라 조국을 위해". "들으라 무산대중이여, 미래를 고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싸워라 우리의 원수 지배 계급을 향하여" 등의 격문 200여 매를 살포하며 시가행진 하였다. 학생들은 저지하는 경찰과 격투 끝에 해산되었는데, 일제는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학생 20여 명을 검거했다.
평양에서는 1월 12일 시가지 중앙인 종로 각처에 조선ㅇㅇ회 명의로 편으로 쓴 "여러분 학생여러분, 우리 조선을 위하여 독립만세를 외칩시다", "1월 14일 오전 10시부터 평양 종로에 집합, 대한독립 만세 합창"이라 기재된 격문이 살포되었다. 1월 13일 오후 평양 사립 숭인학교 학생들이 비밀 회의를 갖고 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14일 오후 전교생 200여 명이 교정에서 만세 고창 후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시내 중심지인 종로로 나오며 시위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1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되고 기마경찰까지 동원되어 경계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듯 1930년 1월 신학기 개학 초부터 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5월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페미니스트 계열도 행동에 나섰다. 동아일보 여기자 허정숙 등은 서울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며 동맹휴학과 시위를 홍보, 독려하였다. 또한 1930년 1월 15일경에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이화여전 외에도 동덕여대, 배화여전, 근화여자상업학교, 경성보육학교, 정신여학교, 실천여학교, 태화여자미술학교, 숙명여자고보 등 13개 여학교의 여학생 수백명을 포섭했다. 그러나 이 일은 총독부 경무국 밀정에게 발각되었고, 허정숙과 여학생들은 1930년 1월 경성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어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경성 항일학생 시위 주도, 조선공산당 재건 등의 혐의, 유언비어 날조 및 선동 혐의 등으로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해외에서의 호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한 상하이에서는 광주학생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11월 중순에 전해졌다. 1929년 11월 20일 임시정부 사무소에서 민족주의 계열 인사 30명이 비밀 회합을 가져서 향후 대책을 협의했다. 이어 12월 1일 개최된 중국공산당 산하 상해호제회 창립대회 석상에서 한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대만인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참석한 한인들에 의해 국내 학생운동 상황이 전파되었다. 그들은 1만 8천여 명이 일경에 감금되었으니 일제 타도를 위해 각 단체가 협조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국내의 학생운동을 사회혁명의 발단으로 간주하고, 일본제국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일본, 중국, 인도, 대만, 한국의 동방피압박약소민족의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계획했다. 동맹에서는 12월 31일 상해지역 각 단체의 대표자 회합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1930년 1월 3, 4일의 이틀간 불조계내 최창식의 집에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 주최로 좌우파를 망라하여 대항책협의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 재중국한인청년동맹, 흥사단 원동지부, 병인의용대, 노병회 등 각 단체의 대표 21명이 참가했다. 윤기섭, 안창호 등이 임시의장이 되어 국내학생운동의 대처방안을 논의한 결과 좌우파가 연합하여 상해각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상해각단체연합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1. 조선학생운동을 적극 원조함과 동시에 일제와 대전, 대항함.
2. 조선내에서 피살 및 피검거 학생, 유지의 근황을 조사하여 진상을 적발, 천명, 국내외에 알려 일본의 폭정을 국제적으로 소개, 선전할 것.3. 근일 중 민국로 침례회당에서 상해 한인군중대회를 소집하고 학생 피살 사건을 근본적으로 토의하고 추도회를 개최할 것.
4. 군중대회에는 상해의 각 피압박 민족혁명운동자의 출석을 요청하여 본 사건을 세계에 알리고 각국의 동정을 환기할 것.
한편 사회주의계열 단체들은 1930년 1월 11일 군중대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선전 격문을 배포하여 한인 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등 반제세력의 광범위한 대회 참여를 독려했다. 이후 1월 11일 불조계 민국로 침례회당에서 한인군중대회가 개최되었다. 중국인 100명, 대만인 3명을 포함하여 약 450명의 군중이 참석했다. 주석인 안창호의 개회사, 김원식의 상해각단체연합회 조직 경과 보고가 있었다. 구연흠은 '국내운동의 진상'이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광주에서 40명의 학생이 살해되고 경성 각지에서 약 2천 명의 학생이 체포되었으며, 계속해서 학살과 체포가 자행되고 있다고 보고해 참석자들을 격동시켰다. 내빈으로 참석한 중국, 대만의 단체 대표자의 축사와 한위건, 조소앙 등의 연설에 이어 좌중에서 광주 피살학생의 추도회 개최를 위한 긴급동의가 있었으나 장소 사용시간이 지나 폐회하였다.
안창호, 김원식, 구연흠 등 연합회 간부 20여 명은 별도 모임을 갖고 선후책을 강구했다. 이들은 "동경, 만주, 하와이, 북경, 천진, 북미 등 재류 동지들에게 사건을 전달하여 분기를 촉구하고 세계적 운동을 시작할 것", "경성, 신의주, 평양, 대구 등에 결사대원을 파견하여 원조하되 국내와 일본의 대관 및 관청, 은행 등도 폭파 기도할 것" 등을 협의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의내용이 그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이는 좌익계가 학생시위의 지원운동을 공산주의 운동 확산의 일환으로 전개하고자 하는데 대한 민족계의 반발로 인해 좌우파가 연합하여 적극적인 지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창호, 김구 등은 매주 토요일마다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원들의 자유 토론회를 개최하여 상호 협조의 기운을 조성코자 하였다. 1월 27일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는 지원활동의 성과를 발표하며 향후의 계획을 천명하였다.
상해재류한인의 임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조직된 본회는 과거 24일간 내지 동포 혈전의 진상보도, 전단, 전황보고 등 2만 매를 전동방피압박민족 및 전세계 통신사에 배부하고 재미동포에는 전보통지를 한 결과 각지에 여론을 환기하여 각 방면의 동정을 얻었다. 우리는 이 운동을 조장하려고 노력함과 함께 일변 독립전보를 발행하여 내지 전황보도의 민황을 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좌우익의 기본적인 입장 차이가 심해서 간극이 좁혀지지 않았다. 더욱이 흥사단 계통의 민족계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 계통의 사회주의계의 주장이 서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2월 26일 상해각단체연합회는 해산되었고, 구심점을 상실한 학생운동 지원활동은 더는 진전되지 못했다. 더욱이 상해총영사관측의 항의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소속의 각 기관과 신문 등에서도 1930년 2월말 이후로는 지지 격문과 신문기사 등의 지원 활동을 중단했다.
학생운동은 중국 내 언론을 통해 중국 각지에 전파되었는데, 국내에서 일제가 학생 수십 명을 학살하고 수천 명을 검거하는 대규모 탄압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베이징의 민족주의자 손일민, 이천민 등이 1930년 1월 22일 조성환의 집에 모여서 학생 문제에 대한 대책 협의회를 가졌다. 그 결과 1월 26일 분투학생에 대한 격려, 미온적인 학부형 행동의 문책, 중국인에 대한 후원 요청 성명서 등을 각각 제작, 배포하기로 했다. 아울러 재외 독립운동자의 통일회의 개최를 권유하는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기로 합의했다.
조선환, 이천민, 손일민 등은 1930년 2월 중순 북평한족동맹회를 조직했다. 동맹회는 성명서 2천여 매를 인쇄해 중국 각지에 배포하여, 학생 및 학부형, 일반인, 중국인, 해외 동포 등으로 구분하여 각자에 합당한 행동지침을 제시했다. 먼저 학생들에게는 "당면의 부분적 문제는 우리들 민족의 최고문제인 독립운동의 성공에 의해 모두 해결될 수 있으므로 (중략) 부분적 문제를 독립운동으로 전환하여 강렬한 결전에 의해 완성할 것"을 요구했다. 학부형에게는 자제에게 "노예의 비통"을 주었으므로 "민ㄹ족의 의무, 부형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제군에 분기를 촉구하며 왜적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열망한다"고 촉구했다. 또 일반 동포에게는 "우리는 독립전선의 선봉대인 학생대중의 뒤에 서서 맞서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외제류 동포에게는 "개인적으로 무장하여 내지 동포의 혈전에 진출하여 폭동과 혈전을 계속 확장할 것"을 임무로 규정했다.
2월 16일 화북대학 강당에서 북경 한국유학생회 집행위원회의 주도로 학생사건 진상보고 및 성원대책 논의를 위해 재북평동포전체대회가 개최되었다. 협의 결과 한교대회 명의의 선전 격문을 배포하기로 하였으나 주석으로 선정된 화북대학생 이영준이 준비한 원고가 공산주의적 주장이라 하여 민족운동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이세영 등의 조정으로 수정을 거쳐 5천 매를 인쇄 배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동맹회는 이후 내분으로 인해 이천민과 강구우가 탈회하고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면서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천진 지방에서는 1930년 1월 22일 박용태, 유기석 등이 주도 조직한 조선대독립당주비회 명의로 "최후의 일인까지 일제에 대항하라"는 내용의 격문이 일본 조계 거주 한인들에 배부되었다. 이들은 국내에 암살대를 파견하여 암살, 파괴 등의 의열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학생운동을 확대하여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려 하였다.조선대독립당주비회는 1930년 6월 기관지로 <한국의 혈>을 간행하고 안창호와 함께 천진에서 해외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대회의 개최를 추진했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간도 용정의 사립 은진중학과 명신여학교, 광명여학교,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학생들은 1929년 12월말 이래 2월 초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적기와 태극기를 흔들고 '학생 만세', '독립 만세' 등을 고창했다. 지역 청년들도 동조시위운동을 전개했다. 2월 16일 연길현 상의향 천보산에서는 보조서당 학생의 부형들이 학생 수십 명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미수에 그쳤으며, 1930년 2월 27일에는 두도구 부근의 농촌 청년 수백명이 2차레에 걸쳐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내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3월 2일에는 이도구 부근 농촌 청년 150여 명이 시내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3.1절을 맞아 간도 혼춘 일대에서 학생과 청년이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하려 했으나 만주 군벌의 훼방으로 실패했다.
일본에서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재일교포들이 동조시위를 계획했다. 1929년 12월 14일 유학생학우회 주최로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광주학생사건 비판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일본인 변호사 5명의 연설 후 시위 운동을 결행할 계획이었으나, 간부들이 체포되고 출연할 변호사들도 변론 중지를 받아 실패하였다. 이후 유학생학우회 간부들은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간부와 연락하여 12월 24일 재차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60여 명이 검거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0년 1월 18일 오사카조선노동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일제 당국에 광주사건의 항의문을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1월 20일 오사카조선노동조합 확대집행위원회, 동 조합 서성지부 집행위원회, 오사카 산업노동자공장 대표자회의의 3단체는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조선 총독에게 우송했다. 1월 21일에도 조합확대집행위원회 명의로 일본 수상에게 항의문을 발송했다.
연해주에서도 한인들의 지원활동이 전개되었다. 1929년 12월 28일 고려공산당 본부는 간부회의를 열고 국내 및 동만주 각 단체에 지령을 내려 학생 운동의 확대를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선전을 위해 <선봉> 지를 살포하고, 여학생층의 결속을 위해 당원인 남스라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혁명투사구제회에서는 1930년 1월 16일 국내의 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운동자금 및 희생자 구호금을 모집할 것을 결정하고 조선인 각 호에서 기부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실황 조사와 후원책 강구를 위해 대표 13명을 국내 각지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선봉 지에서는 "일본인 교장이 한인 학생 3명을 교실에서 총살하자 한인 학생들이 농기구로 무장하여 일본인 중학생과 대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실탄을 발사하여 한인 학생 30명을 학살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었지만, 한인들을 격양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보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한인 학생 학살설은 더욱 확대되어 2월 중순에는 1,700명이 체포되고 78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미주지역에서는 국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따라서 중국 상하이의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등에서 보내오는 통문에 의지하여 학생운동의 진행경과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국내의 학생운동 소식은 한인 사회에 큰 방향을 일으켰고, 각지의 한인사회는 국내 학생 후원을 목적으로 공동회를 결성했다. 1930년 1월 26일 뉴욕의 학생을 중심으로 뉴욕한인공동회가 결성되었다. 이어 시카고 한인공동회, 나성한인공동회, 중가주한인공동회 등이 계속해서 결성되었다. 이들 공동회는 국내의 학생운동 후원을 위해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중가주한인공동회는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독립운동의 모든 활동에도 관여하기로 하고 한시기구인 공동회를 영구조직으로 변경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각지의 한인공동회는 활동에 보조를 같이하는 등 상호연합하기도 하였다.
이들 공동회는 곧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국의 언론에 국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하와이에서도 호놀룰루의 교민단이 1930년 1월 26일 회의를 개최하여 국내의 학생운동 상황을 논의하고 학생 검거 반대 결의를 하였다. 이후 상해와 뉴욕에서 교민단장 이승만 앞으로 국내의 학생사건에 대한 지원요청이 있었다. 이는 하와이 교민사회에 대한 지도력이 약화되어 있던 이승만이 다시 정치적 세력을 만회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승만은 광주학생운동 지원의 명분으로 1930년 2월 하와이섬에서 호놀룰루로 나와 그의 개인조직인 동지회를 재건하는 데 착수했다. 이승만은 2월 24일 교민단에서 개최된 제2차 대회에 한국내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미국 여론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을 담은 동지회 중앙부 명의의 공문을 발송했다. 3월 1일에는 호놀룰루 전도기념관에서 700여 명이 모여 3.1절을 기념하며 학생 사건을 미국 대통령과 국제연맹에 호소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결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고 워싱턴의 한인 교민단에도 송부했다.
결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1월 3일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5월까지 지속되었고, 참가한 학교는 194개, 학생 수는 5만 4천여 명이었다. 이중 퇴학된 학생은 582명, 무기정학은 2,330명, 피검자는 1,642명이었다. 이는 3.1 운동에 이은 국내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를 총칼로 억눌렀고, 시위가 진압된 뒤 기존의 교육 시스템을 지속했다. 이후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조선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민족 말살 정책이 조직적으로 시행되면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민족운동은 8.15 광복 이전까지 다시는 전개되지 못했다.
외부 링크
- <광주학생운동연구>, 김성민, 국민대학교, 2007.[1]
- 우리역사넷
- 일회성, 우발적 투쟁이 아니었다 - 한국일보
-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 - 오마이뉴스
각주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학생이 언급한 사회과학은 일제가 불온사상으로 간주하던 사회주의 사상을 일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