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반세기 요람이 잿더미로

1969년 가을 전고·북중은 개교 50년만에 최대 참사를 맞았다. 10월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전고와 북중 교사에 연속적인 대화재가 발생, 교실 태반을 전소시킨 것이다. 이 화재로 전고 교실 23칸, 북중 교실 24칸이 불타버려 3천여 북중, 전고인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고 망연자실해졌다. 이 날(10월27일) 목조로 된 전고가 불탔고 이튿날 같은 캠퍼스 안의 벽돌조 건물 북중(10월28일)이 또 불탔다. 이로 인한 교사, 학생, 동문의 경악과 슬픔은 말할 나위 없고 지역 중심에서 전북을 이끌어온 명문이 삽시간에 불탔다는 점에서 지역사회 전체가 술렁댈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 재학생으로 밝혀진 일이다. 나중에 조사결과 심신미약자로 나타났지만, 재학생이 모교에 방화를 해서 그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고, 북중 역사상 가장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놀라운 이 재화에 당시 교사, 학생과 동문의 충격, 슬픔, 흥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세간의 충격도 매우 컸다. 불타버린 전고 건물(목조)은 낡고 허술한 교사였지만 거기에는 전고의 전통과 혼이 보물처럼 담겼으며, 일제하 압제와 항일 등 50여 년을 견딘 온갖 풍상 어린 역사적 사적이었다. 북중 건물(벽돌 연와조)은 광복 직후 당시 김가전 교장과 교사들 지휘 하에 학생들이 손수 벽돌을 찍고 완주군 소양 등지에서 손수 재목을 날라다 지은 건물이었으므로 그 애착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48년 완공됐으며 건물 정면 화강석 판에 태극 마크와 함께 한자로 ‘獨立記念’(독립기념)이 음각된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화재 이틀간 화마의 불길은 전주 시내 먼 데서도 알아볼 정도로 훤히 타올랐다. 날벼락같은 재난을 눈앞에서 겪은 신강호 교장이 현장에서 졸도 했으며 동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화재현장에 들어가 의자 한 개라도 건지려 동분서주했다. 전고·북중을 20년째 지키던 정문 경비직(당 시엔 ‘순시’) 홍성신136) 씨는 화재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전주고 2학년이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진입했던 조순래 동문(48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0월 27일은 선배들 입시가 얼마 안 남은데다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도서관이 꽉 찼습니다. 해 진 지 얼마 안 된 초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북중 후배들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도서관으로 피난오듯 몰려오는 거예요. 학교에 불이 났다고요.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우르르 전고 교사로 달려갔지요. 이미 불은 활활 붙었는데 1층 서무과로 달려가 캐비넷, 금고, 타자기 할 것 없이 닥치는대로 꺼내서 운동장에 던지고 또 들어가고 했어요. 학생 수 십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리창 깨진 게 널렸던지 그때 새끼 손가락 찢긴 상처가 50년이 지난 아직도 있어요. 제 집은 전고 바로 옆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8일은 집에 있다 불난 걸 봤어요. 야밤에 화광이 충천해서 또 뛰쳐나갔습니다. 안타깝게 발 구르고 혹시라도 화재현장에 도난이 있을까봐 밤새 학우들과 모닥불 피워놓고 지켰습니다. 화재 후 연기 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화재 소식에 전주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동문들은 한결같이 제일성으로 “학적부를 건졌냐”며 물었다. 다행히 재학생들 활약으로 북중, 전고 졸업생 명단과 생활기록부 등이 온전하다는 소식에 동문은 한줄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난날 김가전 교장이 “교장실이 비좁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교내에 즐비하던 수십년 동안의 각종 대회 우승컵과 우승기를 비롯해 학생문집, 교지, 옛 사진, 대통령과 국회의장 휘호 등 수많은 기록물·기념물들이 화재와 함께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교사(校舍) 어느 구석에나 수많은 영재들이 거쳐 간 자취와 흔적이 있었으며 때 묻은 손길이 닿아 있었다. 겨레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얼과 뜻이 담긴 곳이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제2절 힘찬 재건 노력

전북교육의 대표적 전당이고 요람인 북중, 전고 교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비통한 심정이야 비할 데가 없었다. 화재가 발생한 것은 마침 전고·북중 개교 50주년이 되던 해로서 반세기 역사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웅비의 날개를 펼치려던 시점이어서 한층 충격과 슬픔이 컸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교사와 학생, 동문들이 보여준 재기의 몸부림은 세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다. 그들은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화재 사흘 후 10월30일부터 즉각 정상 수업을 실시했다. 체육관, 강당, 도서관 신축 중인 건물 등에 얇은 베니어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설치하고 전주시내 각급 학교에서 급히 보내준 책상과 의자를 배치해 차가운 늦가을 바람 속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와 슬기, 애교심과 학구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의 배움터가 재난에 처했을 때 젊은 학생들이 보여준 애교심은 실로 뜨거운 것이었다. 특히 화재 당시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화재 현장에 뛰어든 북중·전고인들의 용감성과 의기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으며, 화재 직후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학업에 정진하는 태도는 오히려 선배 동문에게 귀감이 됐다. 화재 직후부터 북중, 전고를 아끼고 안타까와하는 각계각층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연일 쏟아졌다. 학교 당국은 각계에서 보내준 격려문을 새로 설치된 대형 게시판에 가득 붙여놓아 이를 읽는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격려했다.

제3절 전고·북중 화재사건(일간지 보도)

전고·북중 대화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 전북일보 등에 연일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첫날은 누전으로 추정했으나 화재 즉시 한전의 단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이틀 화재가 나자 경찰은 방화로 보고 수사에 총력, 대화재 며칠 후 범인을 특정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특히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조 아무개 학생으로 밝혀져 동창회 및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의 충격과 긴박상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대화재 관련 수사 상황, 시민 표정, 범인체포 및 재판 등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들을 모아 전재한다.File:스크린샷 2024-08-17 092039.png File:스크린샷 2024-08-17 092052.png File:스크린샷 2024-08-17 092106.png File:스크린샷 2024-08-17 092114.png File:스크린샷 2024-08-17 092121.png

제4절 사과문, 호소문

화재 직후 동창회장 명의로 동문 도움을 촉구하는 호소문이 발표됐고 11월1일엔 학교 교장과 학부형 (=기성회장) 명의로 지역사회 및 교육당국, 선후배 등에 대한 사과문이 발표되는 등 전고 사회는 발빠르 게 대처했다. 이는 사회 각계로부터 전고 재건을 위한 성금 등 온정의 손길이 쏟아지는 계기가 됐다.

사과문 이번 본교의 불의(不意)의 화재로 말미암아 학부형, 동창 그리고 강호제위(江湖諸位)께 큰 충격과 염려를 끼쳐드린 데 대하여 우선 지면을 통해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입니다. 1969년 10월 27일과 28일 양일 밤에 걸쳐 일어난 불의의 재난으로 인해서 삽시간에 전주고등학교 교사 23개 교실과 전주북중학교 교사 24개 교실을 전소케 하여 막대한 국고손실을 가져오게 했고 3천여 학생들의 공부할 방을 잃게 했으며 학부형, 동창, 그리고 강호제위(江湖諸位)에게 충격과 초조와 염려를 끼쳐 드리게 된 것은 오직 불초본인(不肖本人)들의 불찰과 불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무엇이라 변명의 여지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학부형, 동창, 그리고 강호제위(江湖諸位)의 적극적인 성원과 문교부 당국, 도교육위원회와 그리고 각 교육기관의 적극적인 지도 아래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30일 현재로 전주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가 전 학년 공히 정상수업에 임하게 된 데 대하여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릴 따름입니다.

비록 본교의 교사(校舍)가 삽시간에 잿더미로 화하였다 하더라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저희들 몸이 있는 한 열과 성, 피와 땀을 바쳐 복구에 진력하여 학부형, 동창, 그리고 강호제위(江湖諸位)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끔 분투노력할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맹세합니다. 평소 부실하고 부덕한 본인들의 이번 과오에 대하여 많이 꾸짖어주시고 또한 복구사업에도 많은 격려 있으시기를 학부형, 동창, 그리고 강호제위(江湖諸位)께 간절히 비는 바입니다.1969년 11월 1일.

전주 북중·고등 학교장 신강호(申剛浩)

전주 북중·고등학교 기성회장 길병전(吉秉典.

호소문 친애하는 전고·북중 동창 여러분! 건강한 결실의 계절에 풍요를 구가(謳歌)하여야 할 이 호시절에 우리는 모교의 불의의 재난을 서로 알려드리는 슬픔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지난 10월27, 28 양일에 걸친 전고·북중 양교사(校舍) 전소의 비보(悲報)는 이미 우리 동창들의 심금을 처절한 비통(悲痛)으로 몰아넣고 우리의 젊은 뼈와 같이 자라고 아름다운 정조와 전도의 웅지(雄志)를 배양케 해준 어머니 상과 같은 인자한 전당이 하루 아침에 무참하게 회진(灰燼)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흡사 산이 무너지는 양친상(兩親喪)을 당한 것 같은 비루(悲淚)로써 폐허가 된 50년 전통의 보금자리를 서성거리면 다만 쓸쓸한 가을바람이 노송대를 휘감고 있을 뿐 어린 후배들은 책가방을 들고 교정을 방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 역사에 빛나는 고색창연한 형태는 순시간(瞬時間)에 사라졌어도 모교란 태반에서 인생을 육성 받은 우리 동창들은 한국 전역에서 쟁쟁히 건투(健鬪)하고 있음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황량(荒凉)한 무(無)에서 새로운 학당의 건설을 다짐하는 유(有)에의 의지와 용기를 서로 고무할 때는 다가왔습니다.

사랑하는 모상(母像)은 가도 정은 남듯이 그래도 폐지(廢址)는 우리 동창의 혈육적 사랑을 바라고 있습니다. 마음 없는 까치도 반포(反哺)의 은혜(恩惠)를 잊지 않고 있다 하거늘 사람으로서 동문의 정의(情誼)로써 어찌 눈물없이 처참한 광경을 수수 방관하고 있겠습니까. 더구나 철없는 재학생들도 한 때는 발을 동당거리며 울부짖다가도 이제는 어린 힘이나마 서로 모아 교사복구에 앞장서겠다고 절규로써 단합대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친애하는 전고·북중 동창 여러분!
여러분은 경애하는 부모를 여윈 그 수심(愁心)을 그리고 육친간의 애통스런 사별(死別)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모교란 누구한테나 생애를 두고 잊지 못할 거룩한 어머니 상(像)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동문생은 서로서로 모교의 허전하고 쓰라린 현실을 직시하시어 한줌의 흙을 빚어 벽돌 한 개를 희사(喜捨)하는 알찬 마음으로 우리의 뼈를 깎아 한 토막의 철근으로 대용하는 순애(殉愛)의 성의로 다같이 촌지(寸志)를 모아 한국에서 제일가는 회고의 모상(母像)을, 참신한 배움의 전당을 또한 호남의 명문을 이어가는 터전을 길이길이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 동창은 한 분도 빠짐없이 우리 모교의 영예로운 재건의 우렁찬 행진에 앞장서 주시는데 있어 물심양면으로 이바지해 주시기를 뜨거운 눈물로써 호소합니다.

친애하는 전고·북중 동창 여러분! 사회의 떳떳한 일꾼 동문 여러분!
노송대의 빈터는 지금 우리 동창 한분 한분의 긴급수혈(緊急輸血)같은 사랑의 구원과 보람찬 협조를 마치 어두운 가을밤 찬란한 별빛을 맞이하듯이 두 손 모아 고대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동창 여러분 만세! 우리 모교재건 행진만세!

1969년 10월 일, 전주북중·고등학교 동창회장 이정우

제5절 전국에서 성원 답지, 의연금 기탁 명단

제6절 법원, 조 피고에 3년 선고

전고·북중 화재의 증거보존신청에 따라 전주지법 손제희(孫濟喜) 판사는 11월 5일밤 9시부터 11시 50분까지 화재현장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조불원(趙不遠) 학생(가명·19)은 순순히 방화사실을 시인했고 방화 경위를 재연함으로써 조군이 방화범인 것으로 더욱 굳어졌다. 밤 9시부터 실시된 현장 검증에서 손 판사는 조군이 방화 직전 도서관에서 나갈 때 시간을 물은 학생들과 화재를 처음 목격한 숙직교사들, 조군이 ‘현상금을 타먹어라’고 말한 학생과의 대질심문 등도 청취했다. 조군은 처음 화재 얘기를 할 때 이제까지 경찰에서 진술한 ‘울적한 영웅심’과 ‘파괴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말 외에 ‘신축교사에 낡은 책상을 옮긴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불태워 버리고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새로운 동기를 밝혔다. 조군은 시종 여유있는 태도로 범행을 재연했는데 증인으로 나온 학생과 시간차 등이 대립될 때는 자신의 말을 내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조군은 5일밤의 현장검증에서 단독범행임도 시인했다. 조군은 그해 11월 7일 검찰에 송치되어 11월 24일에 전주지검 송두영 검사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27일에 선고공판이 있었고 전북일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법형사합의부(재판장 이병호 판사, 배석 박정서(朴政緖)· 이돈희(李敦熙)판사)는 27일 전고·북중 방화사건 선고공판을 개정, 조불원(趙不遠)(가명·19) 피고인에게 방화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조피고인이 심신의 중추작용을 하는 의식과 감정, 의지 중에서 범행당시 감정과 의지가 박약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의식만은 기능면에서 건실했던 것으로 본다’고 정신감정의뢰서 분석결과를 지적하고 따라서 심신미약상태에서 온 범행으로 단정, 유죄로 판결한다고 밝혔다.(전북일보, 1970년 4월28일자)

이 재판에서는 이만용(李萬鎔) 박사(전주뇌병원장)와 김제권 광주뇌병원장이 조아무개 학생의 정신감정을 했다. 감정 결과 그는 심신미약자로 인정되었으나 시비선악(是非善惡)은 분별할 정도의 의식능력은 있으므로 책임은 면하지 못할 것으로 보아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아무개 학생은 3년 복역 후 출소하여 정상인으로 원만한 생활을 하며 생업에 전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