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1930~40년대 줄기찬 항일
제 1장 관립에서 공립 전환
1906년, 일제(日帝) 사범학교령과 동시에 고등보통학교령이 공포, 실시된 이래 서울·대구·평양 등에 고등보통학교가 설치됐다. 이로부터 13년 후인 1919년, 전고는 전국에서 관립(官立)으로는 다섯 번째인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官立 全州高等普通學校)로 개교를 했다.
개교 직후엔 비교적 평온하게 초기 4년제에서 차츰 5년제 정규 고등보통학교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25년 관립 고등보통학교가 공립(公立) 전주고등보통학교로 바뀌면서부터 평온한 듯하던 전고 내부 분위기가 실은 표면적인 일면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점차 학생수가 증가했고,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이 다감한 청년학도의 가슴마다 서서히 일고 있던 이 시기 전주고보는 대한의 민족혼이 영구히 망각의 피안(彼岸)에 버려진 것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줬다.
제 1절 광주학생만세운동 이후 교내 움직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만세운동이 터지자 그 운동은 결국 독립운동으로 요원의 불길이 되어 전국 중, 고, 전문학교에 번져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위정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격문이 전국 각지에 전달되고 각 지방에서는 일본 배척운동이 계속 일어났으며, 전주고보에서도 일인 배격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졌던 두 차례의 맹휴 사건 이래 전고는 경찰의 주목과 대처가 삼엄하여 좀처럼 그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30년 1월 24일, 광주학생운동 관련자로 전주고보 3학년 유돌기(柳乭基)가 검거됨에 자극된 학생들이 4학년 은학기(殷學基), 김후수(金後琇) 등이 주동이 되어 일본인 배척운동을 벌여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는 친일학생들의 밀고로 사전에 탄로되어 수업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일경에 잡혀갔다. 이 사건으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학생 14명이 퇴학 또는 자퇴를 강요당해 학교를 떠났거나 정학을 당했다.
이 무렵, 전주고보와 전주농업학교가 제휴하여 동시에 각각 거사를 단행하기로 전주농업학교 스케이트장에서 모의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발각되어 주모자가 검거됨에 따라 전농생(全農生) 6명과 함께 전고생 5학년 고정동(高晶東)을 비롯한 10여 명이 경찰에 구속, 퇴학되었거나 혹은 자택에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남은 학생들은 또 다시 일본이 건국했다는 그들의 명절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을 기해 시위를 결행하기로 은밀히 모의하고, 극비리에 각자 태극기를 만들어 남학생은 상의 단을 타고, 여학생들은 치마 단을 타서 감추어 넣고 등교했다. 그러나 그중 한 학생의 부주의로 경찰에 태극기가 발각당해 전국에 비상이 걸렸으며, 전고는 물론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전주농업학교, 전주여고 학생들이 노상에서 몸수색을 당해 수백 명이 검거 구속됐다.
그 당시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퇴학은 물론 재판 끝에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던 한 동문은 “사실 그때 나는 나이 겨우 18세여서 민족사상이 얼마나 뚜렷하고 철저했을까만 그래도 어느 학생에게서 태극기의 모형을 받아 그걸 하숙집에서 잉크로 그려 양복 단에 꾸겨 넣고, 일본 기원절에 참석하기 위해 하숙집을 나설 때는 지금 생각해도 약간 떨리며 가슴이 뿌듯했지만 몸 수색에서 그 태극기를 빼앗겼을 때는 무서운 것을 넘어 분한 마음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 당시 조선인 고등계 형사였던 사람이 생전에 한 동문을 만나 “선생님, 내가 그 죄로 지금까지 죽지 못하고 회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소, 미안하오”라고 했다는데, 이럴 때면 “감개가 또 다르더라”던 동문의 회고는 당시 일제 경찰의 강제 구금과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말해 준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주고보를 비롯한 전주 시내 각 학교의 항일투쟁은 사실상 시위다운 시위도 벌이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견 평온한 듯한 학원 내 학생들 가슴마다 민족혼(民族魂)이 꿈틀댔고, 일제와 일본인 교사에 대한 강한 반발감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제 2절 더욱 강화된 일본화 교육
갈수록 노골화하던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은 마침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송두리째 집어삼켜 버렸다. 일본은 관동군을 중심으로 만주를 강점하고 중국 청말(淸末)의 황족 후예 부의(溥儀)를 내세워 이른바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웠다.
이 무렵 전주고보에는 오우치(大內) 교장 후임으로 이시카와(石川賴彦)란 일본인이 부임해 왔는데 그는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일본 신민화(臣民化)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시카와 교장의 일본화 지도 방침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강행되어 학교는 실로 감옥으로 급변해 갔다.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쓰라고 강요했고 정진일지(精進日誌)라는 반성문을 매일 기록, 담임교사에게 제출하여 검열을 받게 했다.
또한 비교적 유연하게 실시하던 교련과목을 체육과의 일부가 아니라 군대식 훈련으로 강화해 갔다. 이에 따라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던 학원 생활은 딱딱해지고 일본인 교사들의 명령에 조금이라도 위배되면 무조건 퇴학이요 정학일 뿐 아니라 걸핏하면 학부형을 호출하여 호된 힐책을 했다.
이에 울분을 느낀 많은 학생들이 서울의 사립학교로 전학해 가고 별다른 대책이 없어 학교에 남은 학생들도 매일 ‘오늘은 어떻게 지낼까’ 하고 전전긍긍하거나 혹은 고초 속에 그저 교문을 들고나는 형편이었다. 이시카와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은 심지어 일부 특정 학생들을 매수, 밀정으로 삼아 동료 학생들을 감시하게까지 했다.
정진일지의 강요
당시 이른바 ‘정진일지’는 특히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요,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당국은 학생들에게 매일 일지를 써 내고 가정생활에서, 학교생활에서, 부모에게, 교사에게, 친구 간에 행동한 착한 일을 기록하고 잘못된 일을 반성하라고 무조건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알맞은 사례가 매일 일어날 수 없어 학생들은 ‘오늘은 몇 시에 아침밥을 먹고 몇 시에 집을 나와 몇 시에 학교에 도착했다’는 식으로 쓰고 교사들은 또 이같은 관성에 대해 신경질을 내곤 했다.
교사들은 “일지(日誌)는 오늘은 누구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으며 학교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좋은 일을 했고 교장 선생님 훈화에 어떻게 반성하였는지 등을 기록하라”고 성화였으나 학생들은 그저 곤혹스럽기만 했다. 이 일지를 제출하는 시각이면 고민하지 않는 학생이 없었고 간혹 깜박 잊고 일지를 못 내면 으레 교무실에 불려가서 몇 시간이고 벌을 받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
특히 ‘교무실에 와 서 있어’라는 교사들의 지시는 학생들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체벌이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교사 기분만 나빠도 이 벌책(罰責)이 가해지지만 수시로 가해지는 이 벌이 학생들에게는 극심한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이 벌이 내려지면 가슴이 철렁하고 ‘또 죽었구나’ 하며 무서워했다.
때로는 교사들이 이 벌을 가하고도 거의 잊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우두커니 교무실 밖에 서 있으면 다리도 뻣뻣하게 아프려니와 오고 가는 교사들 눈총이 따갑고 동료 학생들에 대한 창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떤 교사는 퇴근할 때에 “오늘은 가고 내일 또 서 있어” 하며 체벌을 이틀간 지속시키기도 했다.
한 동문은 재학 당시 이 “서 있어” 체벌의 단골학생이었는데 하루는 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이 벌을 당했다. 교무실 밖에 서서 해가 지고 교원들이 모두 퇴근을 했는데도 담임선생에게서는 아무 지시가 없었다. 마침 숙직하는 교사로부터 “네 담임이 퇴근했으니 오늘은 가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캄캄한 교실로 가 책 보따리를 챙겨 교문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튿날 담임교사가 또 아무 말도 없어 등교 직후부터 다시 교무실 밖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병영훈련 강화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전국토 병영화는 학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군대 병영에 나가 실시했던 소위 ‘병영숙박’이라는 훈련은 교련과의 한 과정으로 5학년 전학생이 2주일간의 입영생활을 통해 군인정신을 익히는 훈련인데 한참 나이의 학생들이 일본 군인들에게 걸핏하면 죽도록 얻어맞고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어쩌다 밥을 한 공기 더 달라면 일본 군인들은 금세 ‘한국인은 돼지 같다’는 식으로 욕하기 일쑤였다.
1934.10.6.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병영숙박 훈련. 1937. 정진일지. 1934.8.31.
당시 전주고보 재학중 소위 ‘병영숙박’ 훈련에 참가한 T동문은 새까맣게 탄 빵이 배급되어 그걸 바꾸어 달라고 했다가 군대용 슬리퍼로 뺨이 부어 오르도록 맞았으며, 어느 날엔 실탄사격 훈련 때 탄피 하나를 분실했는데 땅거미가 진 후임에도 이를 찾아오라고 했다. 배는 고프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피곤하지만 결국 탄피를 찾지도 못했거니와 호되게 벌을 받은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술회했다.
1936년 중일전쟁 직전, 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 2개 사단에서 이본(梨本)이란 일본 황족대장(皇族大將)이 통제관이 되어 대항연습(對抗演習)을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천황과 인척인 황족대장이니 피식민지 조선에서의 삼엄한 경계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기차나 버스 탑승객에게까지 검열이 극심했다.
이때 앞서 T동문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일본인 동료 학생 소대장에게 한마디 불평을 했다 해서 T동문은 연습을 끝내고 귀교한 후 총기고에서 목검(木劒)으로 엄청 두들겨 맞고 집에 돌아와 며칠 간 등교도 못한 채 앓아 누웠다. 2~3일 후 교관이 찾아와 “네가 일본학생에게 반항해서 그랬으니 이후 주의하라”고 해 그제서야 난타당한 이유를 알았으나 T동문은 졸업할 때까지 혹시 퇴학 등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제 3절 중일전쟁과 전주북중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일전쟁,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일본은 중국 대륙침략의 의도로 중국 북경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중국군이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다고 조작하고 그 구실로 중국을 침공하며 전쟁을 개시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학교는 수업을 아예 도외시하고 모든 학교 운영을 전쟁 수행 목적에 집중시켰다. 북경 함락 축제행렬과 상해 함락 야간 등불행렬 등 전쟁 선전 행사에 예외 없이 학생들이 동원됐다. 전쟁으로 밤낮 영일이 없고 1939년경부터는 근로봉사작업이라는 명목으로 학생 노동력 착취를 아예 정식교과로 만들어 한국 학생들을 몰아 부쳤다.
1940년 2월 민법을 개정하여 한국인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도록 하여 한국어를 아예 말살하려 했으며,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토록 했다. 이를 실행하지 않는 가정을 서로 고발하게 하고 한국과 일본은 원래 뿌리가 같은 이른바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한국말은 방언이란 역사까지 날조하는 등 학생들을 전쟁터에 몰아넣기에 혈안이 되었다. 학생들은 근로 동원 작업이나 각종 행사에 들볶이게 되고 일본인 교원 중에도 하나 둘 군대에 입대하는 교사가 생기고 중좌(中佐) 계급의 배속장교가 소좌(少佐)가 되고, 중위(中尉)가 되는 등 학교가 전쟁터 일색으로 변모해 갔다.
중일전쟁에서 돌아와 전주고보로 배속된 어느 일본인 소위(少尉)는 중국에서 중국인을 살육하던 전쟁 담을 늘어놓고 중국인 재산을 강탈하고 닭이나 돼지를 잡아먹던 이야기를 큰 공훈이나 세운 양 자랑했으니, 학생들은 공포와 혐오 속에서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 4절 이철승 동문의 항일저항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선열들의 해외 항일독립운동이 민족정기를 지키고 조국 광복을 앞당기는데 크게 기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일제 식민통치 암흑기에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을 통해 민족정기를 보존하면서 기약 없는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비, 그 내부 역량을 축적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같은 역할에 앞장선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이철승(李哲承·19회, 1922~2016) 동문이다. 이 동문은 1936년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남다른 정의감과 용기를 보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日本語)를 ‘국어(國語)’라 하며 철저히 사용할 것과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시정방침을 발표해 본격적인 일본화, 이른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이미 1936년부터 전주고보에서는 이른바 ‘국어’(=일본어) 사용을 강요했고, ‘정진일지’ 작성을 강제하며 학생들의 사상을 사찰했다.
그러나 이철승 동문은 1학년 신입생 때부터 ‘정진일지’ 작성을 거부한 것은 물론 교내에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만 썼기 때문에 1937년 ‘가정근신’이란 처벌을 당해 조행(=품행)이 낮은 ‘병(丙)’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 동문은 불온한 요시찰 학생으로 학교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37년 이철승 동문이 2학년 때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발표함과 동시에 이른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제정해 전 한국 학생들에게 이를 외우게 하는 등 1938년에 이르러서는 ‘황민화’를 극단으로까지 밀어부쳤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거드름은 극치에 이르렀고 민족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이철승의 항일투쟁에 불을 당겼다. 이 동문은 일본인 학생들이 민족적 우월감을 표출한다든가 한국인 학생을 괴롭히면 무조건 두들겨 팼다. 특히 전주남중(=일본인 학교)의 학생 거두를 자처하며 북중 하급생들을 상습적으로 괴롭히던 남중생 마쓰오(松尾大佐, 태양당 인쇄소를 경영하던 일본인 아들)를 목검으로 구타했다. 이 사건으로 이철승 동문은 정학 처분을 당하며 조행(=품행)이 제일 낮은 ‘정(丁)’을 받음으로써 원급(=낙제)돼 2학년을 두 번 다녔다.
이 동문은 일제가 1935년부터 각 학교에 강요해온 ‘신사참배’에 의도적으로 빠졌고 1940년 전국적으로 시행된 ‘창씨개명’마저 거부, 한국인 대부분이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가운데서도 ‘이철승’(李哲承)을 고수하였다. 운동을 좋아했던 이철승 동문은 농구부 주장이었다. 이 동문과 가까웠던 김 도(金燾) 동문의 술회에 의하면 그는 방과 후 농구연습이 끝나면 농구부원 중에서 비교적 체구가 큰 하급생 몇을 따로 모아놓고 부친 이석규(李錫圭) 공과 숙부 이석주(李錫柱) 공으로부터 들은 민족지도자들의 국내외 독립운동 활동상을 들려주었고 또한 사회주의자도 계급투쟁을 항일과 접목시켜 독립운동에 동참했다는 내용 등을 들려주며 후배들을 의식화시켰다고 한다.
1942년 이 동문이 5학년 때 일본인 역사 지리교사 노다 곤베이(野田近平)가 북중에 부임했다.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상이군인이 된 노다는 일본의 이른바 ‘황도역사’(皇道歷史)를 신봉, 식민지 교육의 전위임을 자처하면서 조선인을 극도로 멸시해 평소 입버릇처럼 “조선인(朝鮮人)은 야만족이고 한글은 야만인의 부호 같다”고 말하고 다녔다. 어느 날 지리 시간에 노다 교사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철승 동문 옆자리에 있던 송경진(宋京鎭, 前)전주 송외과의원 원장, 제5대 전고·북중 총동창회장) 동문과 말다툼 끝에 분노를 터뜨렸다. 노다(野田) 교사는 목검을 치켜들고 쫓아와 송경진을 내려치려 할 적에 이 동문이 벌떡 일어나 목검을 받아 빼앗고 노다 교사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이 같은 소동이 벌어지자 모리 히로미(森廣美) 교장이 달려오는 등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상이 나쁜’ 이철승을 평소 눈엣 가시처럼 여겼던 노다 등 일본인 교사들은 ‘이철승을 퇴학시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학급담임인 야마다(山田大五郞) 교사와 한국인 정학모(鄭學謨) 교사가 적극적으로 이철승 학생을 옹호했다. 특히 정 교사는 “철승이를 퇴학시킬 것이 아니라 노다 선생을 먼저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이철승 동문은 최고학년인 5학년, 그 중에서도 2반이었다. 5학년 2반은 상급학교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로만 구성된 ‘특수반’ 격으로 북중의 명예가 달린 집단(진학반)이었다. 교내에서 이 동문의 퇴학이 거론되자, 2반 50여 명 모두가 ‘철승이를 퇴학시키면 전원 연대 자진 퇴학 하겠다’고 결의하는가 하면 하급생들까지 여기에 동조, 전교생이 들고 일어설 기세로 번졌다. 문제가 대외적으로 확대될 경우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진학반’ 학생들이 모두 자퇴하여 상급학교에 합격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모리 히로미(森廣美) 교장은 물러나야 하고 학교 존립까지 관련될 수 있으므로, 이에 당황한 학교 당국은 거듭된 교무회의 끝에 이 문제의 외부 확대를 막고 5학년 2반의 집단 자퇴를 무마하기 위해 이철승 동문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당연히 퇴학을 예상했던 이 동문은 이로써 졸업 직전 정학이 해제돼 간신히 졸업장을 받게 됐다.
지난 1980년 19회 졸업생들 초청으로 내한한 야마다(山田) 교사는 당시 상황을 술회하며 이 사건을 학적부에 기재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철승(李哲承)의 상급학교 입학원서 소견표에 이 사실이 기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 학교가 큰 타격을 받게 되므로 기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제는 황민화 정책(皇民化 政策) 강화의 일환으로 학교 군사교육(=‘교련’)을 실시, 학교를 병영화했다. 우선 시범적으로 가장 얌전하다고 소문난 청주고등보통학교(淸州高等普通學校)와 가장 사상이 나쁘다고 생각한 전주고등보통학교에 ‘교련’을 실시해 본 결과 전주고보가 월등하게 성적이 우수하였으므로 ‘이 교육이야말로 황민화 정책에 가장 알맞다’ 판단하여 식민지 조선 전체 학교에 실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주고보 선배들은 이런 현상은 황민화가 아니라 바로 ‘극일(克日)의 발로’라고 말했다.
이철승은 이 군사교육을 극구 반대하며 교련 시간을 자주 빼먹었다. 이에 따라 졸업 후 당연시되던 교련검정합격서(敎鍊檢定合格書)도 받지 못했다. 5년간 군사교육을 받으면 졸업과 동시에 수여되는 교련검정합격서는 당시 일본군 장교나 하사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인정서로서 일본인이나 친일 한국인들에겐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휴지조각처럼 여긴 이철승 동문의 기개는 당시 울분에 떨던 전고인은 물론 한국사람 모두에게 카타르시스이자 민족의 희망으로 환영받았다.
이철승 동문은 생전에 동기인 이기원(李起元·19회, 前 전주고등학교 교장) 동문이 전주고 교장 재임 시 보내온 자신의 학적부를 몇몇 동기생과 함께 볼 기회를 가졌다. 당시 ‘이철승’ 관련 내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조선어만 사용하여 가정근신 처벌을 당해 조행이 병(丙)이 된 학생
- 일본인 학생의 구타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당해 조행이 정(丁)이 되어 원급(낙제)된 학생
-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은 학생
- 군사교육을 반대, 교련검정합격서를 받지 못한 학생
이철승 동문은 일제하 ‘사상이 나쁜’ 대표적인 ‘불온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엄혹했던 1941년 ‘조선사상 예방구금령(朝鮮思想 豫防拘襟令)’ 등 철통 같은 일경의 감시 속에서도 구속되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이는 그를 감싸고 아껴준 일부 은사와 19회 동기들의 동포애의 발로이자 애족 애교 정신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동기인 송경진(宋京鎭), 배정걸(裴貞傑) 동문은 “이철승은 항일 가문 출신으로 갖출 것은 다 갖춘 당시 ‘문제학생’이자 민족주의 리더”라고 입을 모았다.
제 2장 격랑 속 학창생활
제 1절 19회 전주고보 마지막 입학생
일제는 1930년 후반부터 노골적으로 세계침략 야욕을 드러내면서 전쟁을 주도했다.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다. 재학중 두 번의 전쟁을 겪고, 학교 이름도 입학 당시 전주고보에서 전주 북공립중학교로 바뀌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동문들이 19기다. 이 장에서는 19기들이 겪었던 격랑기 학창생활 증언을 종합해 생생하게 구술식으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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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수학여행 보고회 파문
제 1절 일제의 기만성 폭로
1937년은 특히 중일전쟁 발발 직전이여서 일제 학교당국으로서는 수학여행 보고회에 엄숙한 의미와 기대를 걸고 당시 5학년(15회) 중 모범학생을 엄선해 보고회에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 이하 교사들이 엄선에 엄선을 거듭해 믿고 뽑은 ‘모범생’들이 학교당국의 기대를 송두리째 저버리고 말았다. 보고회 시작과 함께 첫번째 학생부터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멸시관념이 노골적이어서 학생들이 지금까지 교사들에게서 배워온 내선일체(內鮮一體)니 문화일본이니 하는 따위의 언행은 전적으로, 그리고 상상 밖으로 격차가 있어 이제까지 우리는 교사들의 기만교육, 사기교육을 받아 왔음을 실제로 견문했노라고 보고했다.
교장을 비롯하여 담임교사들은 놀라움을 넘어 파랗게 질려 버렸고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첫 번째 보고자가 발표를 끝마치고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하단하자 일본인 교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번째 보고자에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두 번째 학생은 첫 번째 학생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학교교육의 허위 및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적 생활상과 일본인의 한국관이 전적으로 기만적이고도 악독하기 이를 데 없음을 낱낱이 폭로했다.
“일본이 아름다운 나라라더니 무엇이 아름다운가? 후지산(富士山) 같은 곳은 한국에도 얼마든지 있다. 금각사(金閣寺)니 은각사(銀閣寺)니 하고 일본예술문화를 자랑하지만 그 따위 절은 한국에는 부지기수다. 한국이야말로 절마다 예술이요,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일본 3경(景) 중 하나로 꼽는 이쓰쿠 시마(嚴道·엄도)라는 곳이 있어 얼마나 기막힌 절경인가 했더니 겨우 자그마한 섬 두 개를 새끼줄로 묶어 놓은 데 불과하더라. 이런 섬은 한국에는 몇 백 개도 더 있다”고 말을 계속하니 일본인 교사들은 아연실색 노골적으로 분통을 터뜨리며 하단을 명령하고 말았다.
뒤 이어 그들은 세 번째 학생을 지명했다. 이 학생 역시 격한 언성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우리는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을 무시해 본 일이 없다. 우리는 일본인과 역사적으로 친근한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고 배웠다. 그러니 조선과 일본은 일체라고 생각해 왔고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런 데 그런 친근감에 찬물을 끼얹고 배반당했다고 느꼈을 때 우리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는가? 대중교통 등에서 빈 좌석에 우리가 같이 앉으려고 하면 일본인들은 우리를 마치 도적이나 전염병 환자처럼 기피하고 자리를 떠나더라. 심지어 어느 일본 여인은 자기 아들이 무슨 위험물 곁에나 앉은 것마냥 정신없이 아이의 손을 이끌고 우리 곁에서 떨어져 달아나듯 딴 곳으로 데리고 가더라. 그들에게서 ‘내선일체’(內鮮一體)니 ‘일시동인’(一視同仁)과 같은 느낌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한국이 어디냐고 되묻더라. 이게 내선일체(內鮮一體)인가? 여관에 들어보니 이게 또 가관이다. 여관주인은 우리에게 ‘무슨 놈의 밥을 그렇게 많이 먹냐’며 핀잔이다. 밤에 그에게 요를 달라니까 ‘한국인도 요를 까느냐’고 비웃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상황이 여기 이르자 ‘다음 학생은 좀 낫겠지’ 하고 기대했던 담임교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상에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결국 일본 수학여행 보고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는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보기 좋게 웃음거리가 된 셈이었다.
보고회에서 발표를 듣고 있던 학생들도 처음에는 그저 ‘야! 이것 봐라’며 흥미롭게 듣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분노의 동질감을 느꼈으며, 마침내 교사가 강제로 중단시키자 이상야릇한 감정에 휩쓸렸고 마지막엔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소곤대게 됐다. 더러는 ‘그것 봐, 일본인이 무엇이기에 결국 우리는 모두 만주로 쫓겨나고 이 강산은 일본인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거야’하고 노기 서린 말투로 소리치는 학생도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몇몇 5학년 학생은 일본 수학여행을 하면서 일본 대학에 유학 중인 선배들로부터 “동경 일모리(日暮里)란 곳에 한국인의 빈민굴이 있는데 그 처참한 생활상은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이미 들은 터였다. 또한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일본인을 습격한다’는 루머를 퍼뜨려 닥치는 대로 한국 사람을 학살했고 일본에 거류 중인 한국인은 개만도 못한 학대 속에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들이며,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은 한국 독립에 대한 사상을 가슴 속에 열렬하게 감추고 있노라”는 등의 말을 수학여행 중 듣고 왔기에 이 같은 사정을 은밀히 전파코자 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고회에 참가한 후배 등 전교생 대부분에게 이런 사실들은 듣느니 처음이요, 워낙 엄청난 일들이라서 놀라움과 분함에 ‘진정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강탈당했고 3천리 강산은 일본의 속령(屬領)이 되어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 우리 주변에 매일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불현듯 현실로서 느껴지게 됐다. 이 같은 말과 생각은 그때까지 은연중 전해지고 느껴졌을 뿐 일본인 교사들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즉시 퇴학은 물론이요, 일경에게 끌려가 곤욕을 당할 것은 뻔해 서로 믿을 만한 친구가 아니면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학여행 보고회로써 ‘일본화’를 완성시키려는 학교 당국 의도와 정반대로, 보고회 파문은 전교생 전체에 ‘나는 한국인이고 교사들은 일본인’이라는 자각을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도록 했다.<
제 2절 사태수습과 야마시다 교사
사태는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다. 보고회에서 폭탄 발표를 한 학생들이 학교당국의 조사와 힐책을 받았을 법 한데 그들이 경을 쳤다는 소문도, 학생들이 처벌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일본인 교사 한 사람이 깊이 개입하여 한국 학생 처벌을 완강히 반대했다는 후문과 그 주인공이 체육교사 야마시다(山下)라는둥 과학교사 야마다(山田)라는둥 불확실한 말만 은밀히 퍼질 뿐이었다.
사실 여부야 어쨌건 체육교사 야마시다 선생은 이시카와(石川) 교장의 교육 방침에 반대해 평소에도 가끔 교장실에서 언성을 높였고 심지어 조회시간이 늦춰질 정도로 아침부터 장시간 교장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 의견 충돌 원인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생들간 입소문으로 야마시다 교사가 교장실에서 나오면서 노기가 서려 있더라느니, 혹은 어느 학생에게 “너희들은 무얼 생각하는 바보들이냐”고 호통을 쳤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갔다.
15회로 입학해 3학년 재학중 서울의 한 사립학교로 전학 간 학생 박종명(朴鐘鳴)은 야마시다 교사 자택에 여러 차례 드나들었고 때로 반일적인 언사도 서슴없이 하곤 했다. 이 학생은 야마시다 교사가 교무회의에서 보고회 발표 학생들의 엄벌론(嚴罰論)에 정면으로 반대한 덕에 학생들이 처벌을 면했다고 동기들에게 귀뜸했다. 야마시다 교사가 교장에게 “학생들의 수학여행 보고는 아무런 허위도 아니고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 만일 그들을 처벌한다면 일본인들의 한국 멸시관을 은폐 호도하려는 근시안적인 사고를 노출하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937년 5학년생(제15회 졸업횟수)들의 수학여행 보고회 파문은 일제가 전시체제로 달리던 엄혹한 시기에도 전고생들의 민족혼과 청년학도다운 기개가 살아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대 사건이었다. 아울러 이 엄청난 사건이 별다른 처벌 없이 수습된 것은 학생들에게 무척 다행이자 뜻밖의 일이었다.
제 4장 학도동원령, 근로보국, 군사훈련
제 1절일제강점 말기 시대 상황과 태평양전쟁
한국을 침략한 일제는 동시에 만주까지도 자기들의 판도에 넣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지면서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인 1932년 일본은 위성국인 만주국 수립에 성공하게 된다.
만주사변으로 격화된 중국과 일본의 투쟁은 마침내 1937년 북경 남쪽 교외의 작은 다리인 ‘노구교(蘆溝橋)’에서 빚어진 예정된 충돌로 본격적인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중일전쟁이 예상외로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은 한정된 병력과 자원으로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일제는 물자가 비교적 풍부한 남서 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미국·영국 등 연합세력에 의해 제지당했다. 더욱 미국은 자국내 일본 재산의 동결 및 석유를 비롯한 전쟁 물자의 수출 금지와 같은 수단으로 일본의 전력 약화를 기도했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을 상대로 이른바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개전 초기 1년여 동안 일본은 거의 준비 공백 상태이던 연합군에 대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둘 수 있었으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 전쟁이 일본 군부에 의한 무모한 도발이었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반격해오는 미군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어려웠고 이 대규모 소모전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저력이 없음이 여실히 노출됐다.
이같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제는 비상 수단을 필요로 했다. 인적·물적 자원을 보충하기 위한 국민 총동원 증산운동 전개, 계속되는 패전으로 인한 염전사상(厭戰思想) 대두 저지책으로서 정신운동의 전개가 급선무였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비교적 온건해졌던 일제의 식민시책이 다시 한번 공포 정치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제가 한국에 대해 취한 비상조치는 지원병 제도 실시, 노무자 징용 근로 동원, 헌금·헌품 운동, 미곡 등 물자 절약 운동, 저축 장려, 창씨 제도의 설정,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의 전개, 신사참배 강요, 국방복 착용 강요 등이었다.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국을 향해 치닫던 일제말기 최대 피해자는 식민지 한국이었다. 일본병참기지로서 사회, 경제적 피폐를 강요당한 상황에서 한국내 각급 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고 전주고 역시 예외일 수도 없었다. 사립학교는 폐지되고 학생들에 대한 사상적 검열이 강화되는 한편 우리말은 이미 공공장소에서 말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으며 적국(敵國) 언어라 해서 영어과목 수업시간도 대폭 단축되었다. 한국 청년과 학도는 징병(徵兵)으로, 강제 지원병으로 일본 각지의 탄광과 군수공장 등에 끌려갔으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낯선 정글과 바다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억울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각 가정마다 ‘일본신주’(日本神主)를 강제로 들이도록 했고 일본 천황이 있는 동경을 향해 절하도록 하며 매일 ‘신사참배’다 ‘묵도’(黙禱)다 하여 한국인의 24시를 옥죄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귀(餓鬼)요 단말마의 광태였다. 학교가 배움터일 수 없었고 일시에 가장을 잃고, 아들을 잃고, 아버지를 빼앗기고, 심지어 처녀들까지도 정신대란 이름으로 굶주린 야수 같은 일본군의 제물로 희생되니 피 끓는 한국 학생들의 가슴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제 2절 3차 교육령 개정과 학도 동원령
태평양전쟁, 이른바 그들의 ‘대동아전쟁’을 도발하면서 점차 전쟁 수행에 부담을 느낀 일제는 전쟁 지원을 위한 전반적인 착취 일환으로 한국 교육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 교육시책의 특징은 철저한 일본화 교육과 교육의 전시 체제화라 할 수 있다. 중국과 만주를 그들 세력 범위 안에 넣으려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은 교량적 역할을 해야 하며, 이 일을 수행하는 데 교육의 수단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전시 체제에 부합한 3차 조선교육령을 1938년 3월에 공포했다. 같은 해 4월부터 실시에 들어간 개정 조선교육령은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및 여자 고등보통학교의 이름을 바꾸어 소학교, 중학교 및 고등학교로 일본 본토 학교 이름과 같이 명칭상 통일시켰으며, 남자 중학교와 사범학교, 실업학교 학생에게는 체조와 교련, 유희, 경기(競技), 검도, 유도, 궁도, 스모 등 8개 운동종목을 필수과목 내지는 선택과목으로 하여 체조시간을 이용하여 반드시 이수하게 하고, 시설과 지도자가 있는 경우에는 수영, 스키, 스케이트도 교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국방 체육의 일환으로 체조 시간을 강화하여 전시 동원이 가능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다.
또한 필수과목이었던 ‘조선어’(=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격하시키면서 ‘국어’(=일본어)와 ‘국사’(=일본사) 수업을 강화하고, 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게 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했다.
한마디로 3차 조선교육령은 한민족 말살을 통한 내선일체와 국방력 강화를 위한 인적 자원 육성이라는 교육 방침을 실행하려는 것이었다. 3차 교육령 개정에 이어 일제는 한국에 대한 전시 교육을 강력하게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미 일본 본토에서 1938년 중학교 이상의 학생에게 일정 기간 집단적 근로작업의 실시를 명령했고, 1940년 가을 일제는 학교 보국단(保國團)의 조직요강을 결정하였으며, 1941년 8월 학교 보국대(保國隊)의 편성을 지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고등전문 이상의 각 학교 및 실업학교의 수업연한을 6개월 단축시키도록 했다.
같은 해 12월 1일에는 14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자 및 14세 이상 25세 미만의 미혼 여자를 근로 봉사에 동원하라는 ‘국민 근로보국협력령’이 시행되었고 여기에 학생도 포함시켰다. 일제는 이 같은 잇단 사전조치들로 태평양전쟁 이전에 이미 학생들을 전장과 군수공장으로 끌어갈 수 있도록 미리 동원 조직화를 서둘렀던 것이다.
1942년 8월에는 재학연한이 중학 4년, 고교·대학 예과는 2년으로 단축되었다. 1943년 3월에는 ‘황국의 도(道)에 바탕을 둔 국민 연성(鍊成)’이라는 취지로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으며, 일제는 같은 해 6월 학도 전시 동원 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학생들에게 전기(戰技)·특기·방공대대에 관한 훈련을 강화할 것과 7월에는 여학생의 동원을 결정했다.
1944년 2월 이후 중학교 이상의 학생은 ‘금후 1년간 상시 근로 및 기타의 비상근무에 출동할 수 있는 비상체계’를 갖추도록 결정하였으며, 그리하여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추방되어 군수공장 및 여러 작업장에 강제 투입되었다. 7월부터는 국민학교 고학년까지 동원하였으며, 중학교 3년 이상의 여학생도 야간 작업을 하도록 하고, 9월에는 학도 동원령과 여자 정신대령(挺身隊令)이 공포되었다.
1945년 3월 ‘결전교육조치요강’에 따라서 ‘1년간 수업 중지’를 시키고 학생 인력을 모두 결전체제로 몰아넣었다. 빈집이 된 학교는 병사(兵舍), 군용창고, 비상용 병원 등으로 전용되었다. 1945년 5월에는 전시교육령을 공포하고 학부 학과 학년 학급 단위로 학도대(學徒隊)를, 그리고 지역에는 학도연합대의 조직을 명령했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셈이다.
여러 곳의 전장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 밀리면서 패전을 앞두고 일제는 더 가혹한 행정력을 동원하였고, 한국 학생들을 명분 없는 노역과 병역에 혹사시켰다. 수업은 뒷전으로 한 채 국민학교(=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노예와 같은 사역을 시켰던 것이다.
전주고등학교에도 일제의 이 같은 정책에 따라 ‘근로보국대’가 결성되면서 학생들의 노동력이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 전주 근교에서는 덕진, 건지산 등지의 벌목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공부는 제쳐두고 벌목공이 되어 목선(木船) 수송선 제작용으로 100여 년씩 된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운반했다.
1944년 10월에는 군산 비행장 건설에 북중학교 4, 5학년 전체가 동원되었고, 군산 미룡(米龍)국민학교에서 2주일, 불이(不二)국민학교(현 문창국민학교)에서 2주일 숙식하면서 비행장 활주로 확장 등 건설작업에 나섰다. 도보로 새벽별을 보면서 왕복 10km를 걸어 하루 종일 삽과 곡괭이와 씨름하다 보면 학생들 온몸은 녹초가 되었다. 이후에는 비행장 내의 숙소로 옮겨 똑같은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때로는 작업 도중 흙더미가 무너져 다른 한인 인부들이 압사당하는 모습도 볼 정도로 작업 환경은 위험하고 열악했다. 폭파한 광석을 적재하여 나르는 소형 열차인 ‘도록고’에 흙과 돌을 삽이나 손으로 퍼담아 활주로를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날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중노동을 하니 몸은 천근 만근인데 감시 나온 일본 군인들의 악독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2개월여 동안의 강제노역을 마치고 12월 초순 이불 보따리를 걸머지고 군산역을 출발하는 귀가길은 정말 처량하고 쓸쓸했다고 동문들은 술회했다. 전주고(당시 북중) 22, 23회 동문을 비롯 일제 말엽에 졸업한 동문들은 강제 근로 노역 및 훈련에 동원되느라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다.
학업 중단하고 강제 노력 동원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1943년 전남북 학생동맹사건이 일어났다. 전남의 광주서중(光州西中)과 전북의 전주북중, 순창농교(淳昌農校), 고창중 등 여러 학교가 동맹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애석하게도 배반자의 밀고로 사전에 광주서중 주모학생이 체포됨에 따라 전남북 각 학교 주동자들이 검거됐다.
이 사건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에 일어났다. 일경도 비상한 수단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모조리 전쟁터로 끌어갔고, 일반인은 물론 당사자의 가정에서조차 이들이 왜 끌려가는지도,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전장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이 무렵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준 교사가 물리 담당 노환(盧桓) 교사(13회 동문)였다. 노 교사는 1939년 모악산에 근로동원을 나갔다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친일적인 한국인 교사를 나무란 적이 있다. 이때부터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된 그는 끝내 1942년 반일교사로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반신불수가 되다시피 했다.
1944년부터 학업은 거의 전폐 상태로 북중생 전원이 군산 비행장 건설이나 모악산 등지를 비롯한 고지대에 방공호와 참호 파기에 동원되었다. 학교 밖에서의 훈련도 있었는데 1년에 한 번씩 호남(湖南) 벌판에서 야간 강행군을 하며 2개 군(軍)으로 나누어 대접전 연습을 실시했다.
또 5학년 때는 강원도 평강(平康) 군사기지에 가서 일주일간 야외훈련도 실시했다. 이곳에서의 특별한 훈련은 한 밤중에 깊은 산중으로 학생들을 끌고 가서 한 사람씩 따로 따로 떼어놓고 기지로 찾아오게 하는 훈련인데 밤중에 무서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방향을 착각해서 밤중 내내 산중을 헤매다가 아침에야 겨우 기지에 돌아온 학생도 있었다.
이 같은 혹독한 훈련 속에서도 학생들은 평강 훈련장이 금강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훈련이 종료된 후 구경이라도 할 수 있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해 두고두고 실망과 아쉬움을 남겼다. 훈련장 교관들도 ‘시간이 있으면 하루 정도 구경도 가능할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기대감을 주었으나 실행되지 않아 학생들의 실망감은 더욱 깊었다.
일본이 패망한 1945년에는 마침내 북중 학생들의 둥지인 노송동 교사(校舍)마저 일본 군인들에게 병영으로 내어주고 학생들은 전주공업고등학교로 이동을 강요당했다. 북중생 전원이 군수공장에 동원됐기 때문에 사실 교사(校舍)도 교육적 존재 의미를 상실했던 시대였다.
제 5장 일제 말기 반전 항일운동
제 1절 더욱 삼엄해진 학생 사찰
태평양 전쟁 발발(1941년) 이후 일제는 한반도 전역에 감시의 눈을 번득였다.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노소남녀 불문하고 사상검열의 대상이 됐다. 전고 3학년 재학생이던 김도(金燾·23회) 동문은 1943년 6월 어느 날 오후 8시쯤 전북도 경찰국 고등계 형사들에게 조사실로 연행됐다.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 서해안으로 상륙하게 되면 영어가 필요하게 될 것이니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자는 제의를 친구들에게 한 일이 있는가?”, “영어 실력이 딴 성적보다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당시 영어 교사는 민족주의자 유청 선생이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군 옥쇄(玉碎)는 일본국의 패망이 다가온 것이라고 발설한 적이 있는가?”, “이옥동(李玉童) 선배가 동경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 이송되어 전북경찰국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 이런 선배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등을 꼬치꼬치 신문한 뒤 김도 학생을 귀가시켰다.
고등계는 이튿날 김도 동문을 다시 은밀히 불러서 밤 9시부터 신문하였는데, 이를 담당한 일본인 천인(川姻) 형사와 한국인 히라다(平田) 형사는 “신문 받은 사실을 다른 이에게 발설하면 종신 형무소(=교도소) 살이를 하게 된다”고 협박했다. 이 때문에 김도 동문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일체 이 사실을 발설하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당시 전고 배속 장교인 일본인 북빈(北濱)은 하희주(河喜珠·22회), 김효영(金孝泳·21회) 학생에게 전고 교장인 강의(岡毅)의 비행을 조사해서 정보를 제공토록 요청하였으나 하, 김 동문은 응하지 않았다. 하희주 동문은 마음이 괴로워서 학업을 중단하고 승려가 되려고까지 했다.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곳저곳 고적 사찰 등을 찾아다니고 한문과 시조 공부 등을 하며 문학 동호인들과 어울렸으나 항상 일경 고등계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한편 박윤하(朴潤河·22회) 동문은 전주시 완산동 320의 2번지 자택에서 친구인 최순기(崔淳基), 김태기(金泰基), 김병순(金炳純·이상 22회) 등과 “만주에서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한다”, “일본군 산본(山本) 오육 대장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일본의 대본영 발표가 있었는데 이는 미군기의 기총소사에 명중되어 죽은 것 아니겠는가?”, “일본은 불원간 망할 것이다” 등등을 담론하며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심야까지 전축을 크게 틀고 시국적인 대화를 했다. 그러던 중 박윤하 동문은 1943년 8월 이리시 주현동에 있는 형 박윤창(朴潤昌)의 집에서 전라북도 경찰국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연행 구속되어 전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전라북도 경찰국으로 이송되었다.
제 2절 연행, 구속, 투옥, 사제들의 고난
물리 수업을 담당했던 야마다(山田大五郞, 1936년 1월 19일 취임) 교사 퇴임 후 전고 출신 노환(盧桓) 교사가 1942년 가을 모교에 부임했다. 정학모(鄭鶴模), 백환기(白煥基), 김일옥(金一玉), 유청(柳靑) 교사에 이어 한국인 교사이자 선배인 노 교사는 부임 첫날 취임식장에서부터 민족 감정이 다분한 인사말로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노 교사는 이후 수업 시간마다 민족적인 차원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학생들 외에는 누구 하나 알 길 없는 그 민족혼의 응어리가 밖에 새어 나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고등계 형사 등 일제 당국은 이 소문만 듣고 증거를 잡을 수 없어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 교사 수업 중 한국인들끼리 오간 무형의 대화를 밝히기 위해 몇몇 학생을 지목하고 그들을 신문해 ‘학생 증언’이라는 형식으로 수업 중 강화(講話) 내용에 대해 캐내기로 했다.
일경은 마침내 1년여의 관찰과 끈질긴 미행 끝에 1943년 7월 28일 학생들을 연행, 구속 신문하여 노환 교사 수업 중 반전·반일적(反戰·反日的) 발언과 민족혼 고취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1940년 여름(7월 21일)부터 시작된 교내 숙박 집단 작업, 이른바 ‘근로봉임작업(勤勞奉任作業)’이 매년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1943년에도 역시 예년처럼 7월 21일부터 학교에서 숙식하며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뒷산 개모 작업(기숙사 부지, 현 도서관 자리)과 교내 제초 작업을 계속한 후 7월 28일 오전 11시에 1학기 수료식을 마쳤는데, 갑자기 몇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 불려갔다. 그들은 김도(金燾), 심윤구(沈允求), 최명재(崔明在), 은의기(殷義基), 김동구(金東九) 등 4학년 학생과 하희주(河喜珠), 백남인(白南仁), 이웅재(李雄宰), 김태기(金泰基) 등 5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기다리던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당일 오후 전북도경 고등계 형사실로 연행되어 그 길로 구속됐다. 이 소문이 도내에 퍼져서 전주북중학교 학생은 전부 붙잡아 간다는 소문으로 바뀌어 당시 학생들은 좌불안석(坐不安席), ‘혹시 나도’ 하는 불안 속에 공포의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김도 등 연행된 학생 9명은 5개월간 명분 없는 옥고를 치른 뒤 1943년 12월 31일 밤 그들이 처음 끌려갔던 북중학교 교정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연말연시 엄동설한을 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하면서 1주일간 이른바 ‘정신교육’을 받은 후에야 부모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은 노환 교사와 앞서 박윤하 학생 등에 대한 일제 법정의 판결 내용이다.
구속 교사, 학생들에 대한 관제 판결내용
일제가 당시 구속된 교사 및 학생에 관해 기록한 판결이유(1944년 6월 12일의 형공(刑公) 제374호 기록)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이하 일본어 번역.
노환(盧桓), 본적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 율촌리 백칠팔 번지(전주북중학교 청탁교원), 당 29세. (중략)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 떠 내선인(內鮮人=일본인과 한국인)은 상용(相容)할 수 없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어 도저히 융합할 수 없으며 한국 민족의 행복의 길은 한국 독립의 길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여 이의 실현을 교망(翹望)한 자.
박윤하(朴潤河), 본적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후정리 이백육 대번지의 일(당시 무직), 당 20세. (중략) 전주북공립중학교 입학 후 학교에서 엄격 준열(峻烈)한 훈육을 받자 그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감을 품고 일본인 생도라면 이렇게까지 엄격하지 않을텐데 우리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혹한 훈육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마치 학교 훈육에 내선(內鮮) 차별이 있는 것 같이 편견을 가지게 되어 마침내는 한국병합(韓國倂合)은 불순한 동기에 기인한 것이라 하여 내선 양민족의 일체화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한국 민족 행복의 길은 오로지 독립하는 길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의 실현을 교망(翹望)하기에 이른 자
최순기(崔淳基), 본적 전주부 완산정 이백구 육번지(무직), 당 21세. (중략) 신단(神但) 정측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학업 중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매 귀국하여 이래 향리에서 무위도식하는 자로 피고인 박윤하와 교우하면서 민족사상을 품게 되어 한국 민족의 행복은 한국 독립의 길 밖에 없다는 편견하에 이의 실현을 갈망함에 이르는 자.
김태기(金泰基), 본적 전라북도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백삼 이번지(元 전주북공립중학교 5년생), 당 19세.
김병순(金炳純), 본적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만경리 삼백팔 번지(元 전주북공립중학교 5년생), 당 19세.}} 김태기, 김병순 동문의 판결이유는 모두 “노환으로부터 민족의식의 주입을 받아 박윤하, 최순기 등과 교유하면서 동인 등의 감화로 민족의식이 농후하게 되어 마침내 한국독립을 교망함에 이르렀던 자”라고 돼 있다.
또한 이 판결은 노환 교사 관련 부분에서 “금차(今次)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일본의 국력 특히 경제적으로 파탄되어 궁극에 있어서는 패전케 되어 더욱 한국 독립의 호기가 도래할 것으로 망단(妄斷)하여 이의 실천운동의 일단으로 교직에 있는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생도에게 민족의식을 주입함과 동시에 독립 기운을 양성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기도하여 한국을 일본 제국의 기반(羈絆)에서 이탈 독립케 할 목적으로”라고 적시(摘示)하고 있다.
노환 교사 투옥 이유
노환 교사가 수업시간 중 가르쳤다는 구체적인 내용과 그 강의 대상 학생은 다음과 같다.
“(일제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신(修身) 교과서에 쓰여 있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나도 학교에서는 내선일체를 배웠지만 실(實) 사회에 있어서는 전연 다르다. 내선(內鮮)은 차별투성이다. 나는 화가 나서 수신 교과서를 불살라 버렸다” - 학생 김태기 외 45명에게
“세계의 민족 중 약소민족처럼 불쌍한 민족은 없다. 약소민족은 강대한 민족의 억압을 받아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른다. 너희들 젊은 청년들은 우리 한국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크게 노력하여야 된다” - 하희주 외 4명에게.
“너희들은 현재의 시국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시국은 우리들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중대한 시기로써 한국 청년으로서 크게 분기해야 할 시기에 즈음하여 군들은 너무 게으르다. 군들의 조국을 생각하라” - 박윤하 외 5명에게.
“너희들은 너희들 때문에 다수의 한국인들이 빨간 벽돌집에서 썩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 최명재 외 4~5명에게.
“내가 경성의 학교에 재학 중 여름 방학 때 농촌을 시찰해보니 당시 농촌의 피폐상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며 농민은 식량이 결핍하여 겨우 술찌꺼기를 먹고 노명(露命)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휴가 후 등교하여 휴가 중의 소감을 발표하였는데 연단에서 그 실정을 폭로하고 한국 시정(施政)의 죄라고 논단하였더니 당국의 비위에 거슬리긴 하였으나 오히려 동지가 증가되었다. 제군들도 자기의 의사는 결단을 내려 실행에 옮겨라” - 최명재 외 약 50명에게.
“한국에는 예로부터 훌륭한 문화나 풍속이 있었다. 너희들은 덮어놓고 새 문화만을 추구하지 말고 이 아름다운 한국문화를 버리지 않도록 힘써라” - 김태기 외 54명에게.
“소금은 일상생활에서 불가결의 필수품인 고로 정치와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동양을 지배하는 지배국은 제염의 실권을 장악하여 원주민들이 반항할 경우 당장에 소금의 배급을 정지시켜 원주민을 굴복시킨다. 군(君)들 젊은이들은 장래 민족운동을 생각할 때 반드시 이 소금의 문제는 잊어서는 안된다” - 김도 외 50명에게.
“사탕(砂糖) 뿐 아니라 모든 물자를 배급함에 있어 한국인을 차별함은 괘씸하다. 맥주 같은 것도 전연 배급이 없다” - 은의기 외 50명에게.
“우에다(上田)는 한국인이면서 한국역사를 모르는 녀석이다. 고래(古來)로 한국에 문화가 없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한국에는 고래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 - 은의기 외 50명에게.
“저네들(일본군)은 무엇 때문에 마래(馬來=말레이지아) 기타 지역을 점령했다고 생각하는가? 자국에 부족한 고무 석유 등의 주요 군수물자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 하희주 외 50명에게.
“면(綿)은 국제상 필요한 물자로써 영령(英領) 인도에서 다량 생산된다. 면 뿐이 아니라 미, 영측은 석유 기타 전쟁 수행에 요한 물자가 풍부하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여 전쟁이 장기화되면 경제적으 로 파탄을 가져와 마침내 패전할 것이다” - 박윤하 외 50명에게.
“미국은 자원이 풍부하다. 따라서 금차(今次)의 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은 경제적으로 파탄되어 패전할 것이다” - 박윤하 외 50명에게.
“일본인은 단기(短氣)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비유할 수 있으며 중국인은 인내력이 강하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비유할 수 있으며 한국인은 그 중간으로 그 성격이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필적한다 할 수 있다. 금회의 전쟁은 장기전으로써 중국인과 같이 인내력이 강한 국민성이 지닌 자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으로서 중국은 동양을 지배하기에 이를 것이다” - 김도 외 50명에게.}}
학생동태 감시 내용
판결문은 박윤하(朴潤河), 최순기(崔淳基), 김병순(金炳純), 김태기(金泰基)에 대해 “일본 제국의 기반에서 이탈 독립하여 일본 국체를 변혁시킬 목적”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최순기, 김병순, 김태기 등은 박윤하 자택에서 모여 대화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박윤하: “바야흐로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다. 장기전화하면 일본은 불리하게 되며 우리들 한국이 독립되는 날도 가까워지고 있다”, “인도의 간디는 실로 세계적 위인이다. 영국정부의 박해에 단호하게 반항하여 인도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시국이 우리들 한국민족에게 독립의 호기를 부여하려 하고 있는 지금, 우리들은 간디와 같이 한국을 위해서 분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저 고령자(高齡者)가 저렇게 분투하는데 우리들이 무위하게 지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힘을 내자”, “한국에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은 반대한다”.
김병순 :“일본은 지금 병력 부족을 초래하고 있는 고로 우리들 한국청년을 징모(徵募)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한국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징병제를 실시해서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우리들 청년은 한국을 위해서만 피를 흘릴 것이지 일본을 위해서는 피를 흘릴 수는 없다”, “우리가 현재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것은 결코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에도 간디와 같은 인물이 출현하면 한국도 차제에 단숨에 독립이 가능할 것인데 한국에는 인물 부족의 감이 있다”.
최순기 :“결코 그렇지 않다. 목하 당국이 강압하고 있음으로써 표면에 나오지 않는 것이지 김일성은 현재 만주에서 무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노리고 있고 경성에도 상당한 거물 민족주의자가 있으므로 그들이 시기를 포섭하여 내외 상응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킨다면 한국 내에 잠재하는 민족운동자는 일제히 봉기(蜂起)하여 의외에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입으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지만 무엇이 내선일체란 말인가. 내지인(=일본인)은 자유롭게 한국에 오는데 우리들이 일본에 여행하려면 마치 외국에 가는 것과 같이 엄중한 취체(取締)를 받고 있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한국 독립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창씨한다 하더라도 결코 한국인의 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동지들과 함께 민족운동을 전개 중임으로 이에 참가하라. 우리들 한국 청년 된 자는 민족을 위하여 활동을 해서 도래하는 시기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간디는 숭배할 위인이다. 그가 몸을 희생하여 인도 독립을 위하여 분투하고 있음은 매우 부럽기 그지없다. 한국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와 같은 인물이 출현하여 한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게 되리라. 군들도 우리들과 함께 손을 잡고 신념을 가지고 민족운동에 매진(邁進)하자”.
김태기: “지원병에 혈서 지원하는 녀석은 못되어 먹은 녀석이다. 한국인이 무엇 때문에 혈서 지원까지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한국에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여기에 반대다. 나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모두 반대할 것이다”.
김병순: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최초 기습적으로 승리하였으나 장기전이 되면 패전할 것이다”, “산본 오십육 원수(山本五十六 元帥)가 비행기상에서 전사하였다는 발표는 거짓말이다. 일본의 주력함(主力艦)이 당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판결과정을 거쳐 노환 교사는 1944년 6월 1일 징역형을 선고받아 전주 형무소에 복역하였으며, 박윤하 동문 등은 김천(金泉) 소년형무소에서 고초를 겪고 8·15 광복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노환 교사는 신문 과정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제 3절 전고생들의 묵음시위
동맹휴학, 교장 축출, 수학여행 보고회 파문 등 개교 이래 그치지 않고 이어진 전고인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는 1940년대에 들어 무언(無言)의 묵음(默音)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묵음 시위는 22회 동문들이 입학하던 1940년부터 시작됐다. 행렬이나 대열의 뒤에서부터 ‘음…’ 하는 소리로 집단 시위를 하는 것이다. 주번교사가 “누구냐? 누구냐?”고 다그치면 ‘음…’ 소리는 사라지지만 교사가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또 묵음이 나오는 등 신경질적이고 게릴라적인 시위방식으로 교사들 골머리를 앓게했다.
당시 5학년 유승렬(柳承㤠) 동문은 남들이 다 조용한 데도 혼자서 ‘음…’하다가 그만 들통이 나서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쭐 나기도 했다. 평소 운동장 조회 때 일본인 교사가 지휘대 단상에 올라 한국인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얕잡아 헐뜯는 훈화를 하거나 행렬 중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음…음…” 하며 입을 다물고 여기저기서 콧속으로 소리를 내는 항변의 시간을 가졌다.
일본인 선생들은 아무리 단속하려고 해도 아예 허사였다. 왜냐면 “음…음…”하는 소리는 입을 열지 않아도 가능하였고, 따라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내기 때문에 주동자를 색출해내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교사들이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면 그쪽에서는 소리가 멎고, 다른 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면 또 다른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 등 숨바꼭질이 되풀이됐다.그 당시 이 “음…음…” 소리는 전주북중에 다니는 학생이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신호였다. 즉 인기 없고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일본인 교사에 대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요,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욕구 불만의 표시였다
제 4절 유청동문의 증언, 전고와 항일정신
제 5절 전주고 교지 회지 발간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전주고보의 교지가 발간됐다. 일본어로만 제작된 이 교지 제호는 <회지>(會誌)며 발행소는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우회(校友會)’로 되어 있다. ‘교우회’는 요즘의 ‘학생회’와 같다.현재 확보돼 있는 <회지>는 제 6호, 제 7호, 제 10호 단 3권 뿐으로 언제 창간호가 발간됐으며, 언제까지 발간됐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제 10호에 개교 20주년(1939년) 기념 특집을 다룬 점으로 볼 때 도중에 발간 중단이 없었다 치면 1930년에 창간호가 발간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지>는 국판 크기로 제 6호는 174페이지, 제 7호는 182페이지, 제 10호는 200페이지로 제작됐다.<회
지>의 인쇄는 국내가 아닌 일본 후꾸오카(福岡)시의 인쇄소에서 했으며,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80년이 지난 현재도 알아보기에 전혀 불편이 없을 정도이다.
개교 20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제작된 제10호 <회지>를 기준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첫 장에 일본 제국주의 상징인 교내 ‘봉안전’20)(奉安殿)을 비롯해 교사(校舍)와 개교 20주년을 맞아 낙성된 강당 전경 모습이 실려있고,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새 교가(校歌)와 전·현 학교장 사진, 전체 교직원과 강당 조회 사진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개교 20주년을 맞아 개최한 기념전람회의 각 부문별 사진 및 학교생활인 미화작업, 등교 모습, 운동장 조회, 분열, 전교 운동회 사진 등이 실려 있다. 이밖에 벌채와 모내기 벼 수확 등 근로작업에 동원된 학생들 모습 등이 16페이지 분량의 흑백 사진 화보로 실려 있다. 본문 내용으로는 조선 총독의 ‘근화’(謹話)에 이어 당시 학교장인 모리(森廣美) 교장의 개교 20주년 기념사와 교사 및 졸업 동문들의 회고 글 등이 실려 있다.
개교 20주년 기념 특집답게 <회지> 제10호는 개교 이후 학교 연혁과 약사(略史) 등이 기록돼 있고, 당시까지 재직했던 교직원들의 직위 및 재직기간, 학교를 떠난 뒤 발령 받은 학교 등 개인 신상이 상세히 소개됐다. 또한 개교 20주년 당시 근무하고 있던 교직원 신상도 기록돼 있고, 특히 당시의 학교 교세(校勢)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개교 20주년을 맞아 1940년 10월25일 강당 낙성식과 겸해 열린 기념식 관련 내용을 많은 부분을 할애해 실었다. 식전(式典) 개요부터 학교장 식사, 전북도지사 축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축전을 보내온 인사들 명단도 게재했다.
이어 개교 20주년을 맞아 시행한 각종 기념사업 내용과 교내에서 진행한 기념 전람회의 분야별 세부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기념 전람회에서는 전주고 재학생을 비롯 도내 및 전국 다른 학교 학생들이 출품한 각종 작품도 함께 전시됐다. 작품은 서예·수채화등 도서(圖書) 수공(手工) 작품을 비롯, 이과(理科) 제작품등 여러 분야에서 갈고 닦은 솜씨를 겨뤄 분야별로 심사를 거쳐 우수 작품에 대한 시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관련 포스터, 전사자 유물 등도 전시하고있어 순수 전람회라고 할 수는 없다. 이밖에 <회지>에서는 1년 동안의 각종 학교 행사 및 소식 뿐만 아니라 개교 당시부터 20년 동안의 학
교일지도 실었다. 또한 교지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학생들의 산문과 시, 단가(短歌)등 문예작품도 실었으나 이중 상당수는 역시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각 특별활동부의 활동내용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육상경기부·야구·축구·농구부등 체육부의 경우는 1년동안 출전했던 각종대회 성적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아울러 교우회(=학생회)의 한해 예산을 세입·세출 항목별로 공개했으며 끝 부분엔 당시까지 졸업생 전체 명단 및 주소를 실었다. 개교 20주년을 맞아 낙성된 강당은 180평 규모로 실내조회 등 각종 행사 때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건립된 학교 건물 중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현재도 학생들의 유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39년 당시 교세
학교일지 20년사
제 6장 강점기 말 교사,교정과 학생의 모습
전고가 관립 전주고보로 설립 개교한 상황은 이미 기술했거니와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전주군 이동면(全州郡 伊東面)인 현 위치에 교사(校舍)를 신축, 가(假) 교사에서 이전했던 당시에는 시멘트 합벽으로 된 목조 2층 건물 1동으로 1층에 교장실 교무실 등이 있었고 2층엔 교실 5개가 있는 지금의 전고의 위용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제 1절 학교시설
제 2절 자긍심 대단했던 전주고생
당시 전주고생들이 교복에 구두를 갖춰 신고 교문을 나서면 타교생이나 시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주시 남자 중학교는 전주고 외에 전주농업교(全州農業校)와 신흥학교 그리고 중일전쟁 이후 개교한 본 전주사범학교가 있었지만 신흥학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22) 되었기에 몇 안 되는 전주시내 소수의 중학교 학생들이 기념행사 등에서 대열을 지어 시내를
행진할 때는 전주시민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개중에서도 명문 전주고 학생들은 어깨를 펴고 으스댔다.
도내 각지는 물론 충남 등지에서 모여든 많은 입학 지원자 중에서 소수만이 선발되어 입학했기에 북중 뱃지를 붙인 학생은 잘해야 한 면(面)에 한 두 명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전고를 졸업해도 대부분 학생들은 취직을 해야 했고 상급대학에 진학하는 수라야 한 학년에 10명 정도였다. 하지만 북중학교를 졸업하면 그 당시 한국사람으로서는 쌀 속의 뉘처럼 희
소한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장차 희망이 있었기에 북중생은 긍지가 하늘을 찌르고 젊은이 특유의 허세까지 곁들여 자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일쑤였다. 두꺼운 백선(白線) 하나에 높을 ‘高’(고) 모표가 덩실한 교모(校帽)에다 상의 깃에 학년을 표시한 양복을 입고 나서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고 동문들은 술회한다.
이와 같은 자랑의 바탕은 역시 민족정신, 민족전고 자부심에서 비롯했다. 무언중에 일제에 항상 항거하는 반일정신과 때로는 선배 동문 다수가 일경에 체포되고 영어의 몸이 되는 곤욕을 치렀으며 5년의 학교 생활 동안 같은 횟수 동문 거의 반수가 사상불온이니 폭행이니 하는 죄 아닌 죄로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를 강요당해 잡초처럼 교문을 쫓겨나는 것을 직접 곁에서 지켜본 전고생들의 가슴속에는 민족 정기와 함께 항일 저항정신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이로 인해 전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전주고보는 일제에 항거하여 맹휴를 자주 하는 학교’란 인식이 퍼져 있었다.
1940년대 초 북중생의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
제 7장 광복이전의 교사들
일제하 관립(官立)학교로 설립된 탓에 일제 패망시까지 전주고보(全州高普) 교장은 당연히 일본인(日本人)이었으며 교사들 역시 대부분 일본인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일제 학교 당국으로선 ‘조선어’(=한국어) 교사 채용이 고민이었다. 일본인 아닌 한국인 교사로 임명할 수 밖에 없던 탓에 한국어 교사 선발은 매번 교육행정을 맡은 일본 위정자들 골머리를 앓게 했다. 한국어를 지도하자면 당연히 우리말로 수업을 해야겠고 혹은 불가피하게 한국사에도 더러는 접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어서, 그렇게 되면 의당 민감한 한국인 청소년들 심저(心底)에 역사의식과 민족사상을 주입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본당국은 이같은 고뇌 속에 비교적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한국어 교사를 엄선했지만 그들이 번번히 한국어 외에 한국사를 강론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등 각 학교에서 한국어 교사 ‘사건’들이 빈발했다.
사건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어 교사, 특히 사립학교 한국어 교사들이 은연중 비친 민족혼 고취가 학생들의 자각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한국어를 담당한 교사들은 대부분 조선어학회와 관계를 가졌거나 선비로서 민족사상을 가슴 한 구석에 담은 경우가 많았다
제 1절 한국인교사
백용희
개교 초기 한국어와 한문(漢文)을 지도한 백용희(白庸熙) 교사는 교유(敎諭=정교사)가 아닌 촉탁(囑託=임시직 강사)이었으나 어느 정교사보다 학생들로부터 존경받고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재학 동문들 증언에 의하면, 백(白) 교사는 노골적으로 민족성을 학생들에게 호소하진 않았으나 은밀하게 한국사를 강의한다거나 오세창, 김구와 헤이그 만국회의에서 이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등 열사들의 사실(史實)을 자주 알려줘 학생들을 감명시켰다고 한다.
백 교사는 동맹휴학 사태가 발생하면 으레 맹휴 주동 학생을 찾아와 “이 사람아, 내 처지가 딱하이” 하고는 그들 손을 꼭 잡고 그저 눈으로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백용희 교사는 전주고보 설립에 기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한문교사로 근무하다 1927년 6월 사임한 뒤 신간회 전주지회장과 검사위원장을 역임했고 1930년 4월에는 소작쟁의 행위로 일제에 구속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건준’(建準=건국준비위원회) 전북위원장과 전국농민조합(農民組合)총연맹 위원장, ‘전농’(全農=전한국농민회) 전국대표, 민주주의민족전선(民族戰線)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존경받는 민족주의자였으나 6·25 한국전쟁 와중에서 안타깝게 실종됐다. ===== 고(高) 교사=====백용희 교사 후임으로 고용주(高埇柱) 선생이 부임했다. 고 교사는 경상도 출신으로 수려한 수염을 길렀는데 한국어 시간이면 가끔 금지된 한국사를 강론하며 “내가 발을 구르면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그가 한창 한국사 이야기를 하다 교실 밖 복도에서 누가 오는 기척이 나면 교단에서 ‘쿵’ 하고 발을 굴렀고 이를 신호로 학생들은 아무 일 없는 양 소리 높여 한국어 교과서를 읽었다고 한다. 한국어 수업을 감독하기 위해 일본인 교장이 자주 순시(巡視)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같은 눈속임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 선생은 비교적 재임기간이 짧아서 곧 퇴임했다.
김성율
김성율(金聖律) 교사는 광주학생만세운동 다음해인 1930년 정식 교유(敎諭)로 취임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말엽에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인천시장을 지낼 정도로 친일 성향이 강했다. 일제 말기 ‘사실(史實)에서 본 내선일체(內鮮一體)’란 친일 책자를 펴냈고 광복 이후엔 정신적 고뇌와 경제적인 고통으로 불행한 노후를 보내다 작고했다고 한다.
김성율 교사 역시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한학(漢學)을 하다 한국어 교사로 발탁됐는데 두뇌가 명석했으며 앞의 백(白), 고(高) 두 교사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 했다고 한다. 일본어 시를 암송하고 한국어와 일본어를 학문적으로 비교할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중일전쟁(1937년) 이후 일제가 한국어 말살에 광분해 한국어 수업을 일본어로 강의할 때 그의 일본어 실력이 특히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한다.
김 교사는 중일전쟁 이전만 해도 점심시간이면 곧잘 점심을 먹고 있는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어디 사느냐? 성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고 “네 호(號)가 무엇이냐?” 하고 묻는 말에 “호(號) 없습니다” 하면 “이놈 상놈이구나”하고 농담도 하곤 했다.
그런데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전쟁에 광분하게 됨에 따라 김 교사 스스로 점차 일본화 교육에 열을 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학생들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다 우리말을 하는 학생을 발견하면 교무실에 불러다 세워놓고 혹독하게 꾸짖고 때로는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으로 학교를 병영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예외가 아니고서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일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친일성’ 구타는 학생들에게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어·한문 과목 중 한문이 먼저 없어지고 1938년 4월에는 조선어까지 폐지돼 담당과목을 잃어 김 교사 역시 사퇴했다. 학교 사임 후로는 각 학교나 혹은 교원 강습회에 나가 일본 정신을 고취하는 강연을 했다. 이후 강점기 말기 인천시장으로 발탁되고 친일 서적을 집필하는 등 그는 득의(得意)한 듯 했으나 그의 예상과 달리 광복의 날이 일찍 오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 교사는 당시 전주여고(全州女高) 한국어 지도도 겸했는데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 하고는 여학생들의 규수감정(閨秀鑑定)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당시 전고 졸업생과 전여고 졸업생과의 결혼이 비교적 많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양교 졸업생 혼인 중매에도 매우 적임이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지도교사가 민족의 영원성(永遠性)을 일순 착각 오인하고 이민족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의 맹주(盟主)로 군림하리라 굳게 믿었던 까닭에 김성율 교사는 제자들 마음속에 아픔과 공허감을 남겼다. 친일행위로 한국인에게 갖은 고초를 주거나 손해를 끼친 부역(附逆) 친일파와는 달랐으나 그가 남을 지도하는 스승이었으며 더구나 명석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김성율 교사의 친일성향은 당시 학생들을 무척 쓸쓸하게 만들었다.
이진문
이진문(李鎭文) 교사는 다케다 진문으로 더 많이 불리웠다. 그가 한국인이면서 일본에 귀화, 처가 성인 ‘다케다’(竹田)를 썼기 때문이다. 경남 진주가 고향으로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당시의 일본 제3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센다이에 있는 명문 동북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한 재사(才士)로, 대학시절에 일본인 하숙집 주인 딸과 결혼해서 1남1녀를 두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한 환경의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 성과 한국 이름을 가진 어중간한 ‘다케다 진문’이 된 사연은 매우 가슴 아프다. 이 교사는 한국인들에게 날벼락 악몽이던 관동대지진(1923. 10.)을 동북제국대학 재학 중 센다이에서 맞았다. 지진은 도쿄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나 이 대재앙 와중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전국에서 무참히 학살됐다. 일본인들은 대지진 비극과 혼란의 이유를 한국인 탓으로 돌리고 맹목적 인간사냥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생 이진문은 이 엄청난 학살, 구타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 다케다 씨 집에 피신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집에 하숙하면서 주인 딸과 결혼, 성을 다케다로 바꾼 것이다.
이진문 교사 부인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일본의 4대 명절에는 일본인 교사 부인들이 화려한 일본 고유 복장으로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학생들은 이때 ‘○○ 선생 사모님이 예쁘다, ○○ 선생 사모님은 못 생겼다’고 평하며 낄낄거렸는데, 이 교사 부인은 다른 교원 부인에 비해 미모가 월등하다고 했다.
이 교사 부인은 미모뿐 아니라 다소곳한 자태와 우수 넘친 표정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다른 일본 부인들과 달리 식민지 한국인과 결혼했다는 보이지 않는 그들 간 조소가 이 교사 부인으로 하여금 쓸쓸하고 무표정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진문 교사는 1935년 아예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어찌나 학생들을 들볶아 대던지 학생들에게는 독하고 가혹한 교사로 정평이 났다. 걸핏하면 사상이 나쁘다고 ‘교무실에 와 섰어’의 체벌로 학생들에게 괴로움을 주고 학부형이나 학생들의 보증인을 불러대니 학생들이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학은 어찌나 잘 가르쳤던지 이 교사 외에 수학교사가 여럿 있었지만 실력으로는 제일이란 평을 받았다.
이 교사는 무척 엄격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정신 이상이 생겨 수업 시간에 수업을 제쳐두고 싱글싱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웃는가 하면 자신의 모교인 일본 제3고등학교의 교가를 불러댔다. 평소 그렇게 까다롭고 혹독하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동료 직원들의 일상생활을 재미있게 소개하고는 또 혼자 껄껄 웃어대기도 했다.
이 교사 집은 전고 서쪽 울타리 부근에 있었는데, 학생들이 그 집을 지날 때면 매일같이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리고 아이들 울음소리와 그 미부인(美婦人)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고 한다. 당시 이시카와(石川) 교장은 “다케다 선생이 병을 앓고 있는 중이니 학생들은 잘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교사 자신은 “나보고 병자라니 말도 안 되고 나는 경조증(輕燥症)으로 아주 유쾌하고 명랑해지는 성격으로 가끔 변할 뿐이니 병원에 갈 필요도 없다”면서 칠판에 병명(病名)을 적어놓고는 또 싱글싱글 웃어댔다.
그 얼마 후 이 교사는 마침내 교직을 그만 두고 부인 고향인 일본 센다이(仙臺)로 가족과 함께 훌쩍 떠나갔다.
이 교사가 정신병을 앓기 전 그로부터 혹독하게 체벌과 고통을 받았던 한 19회 동문 회고에 따르면, 일본으로 떠난 다케다(竹田) 교사 부인으로부터 “남편의 병세가 날로 악화해 가면서 남편이 간혹 한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 편지를 내라고 조르기에 전고에 조회하여 당신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노라”는 장문의 서신을 받았고, 그 얼마 후에 “남편이 센다이 다리(仙臺橋) 아래서 자살함”이라는 부인의 전보를 받았노라고 했다.
김성율 교사나 이진문 교사 모두 비슷한 수재형(秀才型) 인간으로, 그 예리한 두뇌가 잘못된 판단으로 조국에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과 후회를 멈추지 못하도록 해 그들 목숨을 단축시킨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진문 교사 부인은 앞서 편지에서 “남편이 일본에 온 후 ‘나는 한국사람이니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했다. 이 편지 사연을 읽은 동문은 “선생으로부터 받았던 고통을 모두 잊고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고 술회했다.
김용환
김용환(金龍煥·2회) 교사는 전주고보 선배이자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를 나온 준재(俊才)였다. 경성제국대는 당시로서 한국 유일의 제국대학이요 수재들 집합처여서 김 교사는 후배 학생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김 교사는 특히 일본인 교사들에 비해 영어 발음이 좋았고 일본인 교사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친밀감이 있었다. 학급담임도 맡지 않아 직접 학생들과 언짢게 부딪칠 일이 없었으려니와 성격상으로도 불필요하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일본화 교육에 열을 내지도 않았다.
비교적 원만한 성품에 무난한 처신으로 인해 광복 후 별다른 이의 없이 모교 제1대 교장 책임을 맡게 됐고 전고를 떠난 후엔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 사대교수로 발탁됐다.
김 교사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전고의 교유(敎諭)로 부임하였으니 그 당시 나이 많은 학생으로는 24~25세 되는 사람도 있어 이런 학생들과는 거의 친구 뻘이었다.
학생들도 선생님이란 실감이 없었고, 엄하기만 했던 당시의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김 교사 자신이 권위적이지 않아 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김 교사 등 뒤에 대고 농담을 하곤 했다.
이런 농(弄)이 일본인 교사들에게 퍼대는 식의 욕은 아니고 친밀감에서 나온 것이긴 했지만, 어떤 농을 하더라도 김 교사는 못 들은 척 뚜벅뚜벅 교무실을 향해 걸어갔다고 한다.
정학모
정학모(鄭學謨) 교사는 1937년께 부임해왔다. 경성제대 출신의 그는 부임초 ‘조선어’(=한국어)를 교수했는데 1938년 부임 한 해만에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고 영어와 ‘국어’(=일본어)로 담당과목이 바뀌자 불쾌하고 우울한 기색이 역연해 학생들을 안타깝게 했다. 독특한 성품, 야릇한 발음, 모자 앞뒤를 거꾸로 쓰는 등 학생티 가시지 않은 태도 등으로 제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처음에는 학교 뒤에서 하숙 생활 하며 인근의 제자들과 자주 어울리고 때로는 술도 사오게 할 정도로 다정하였다. 정 교사도 광복 후 서울로 가 모교 서울대 교수로 교편을 잡았으나 6·25 한국전쟁 때 납북돼 돌아오지 못했다
노환
노환(盧桓) 교사는 전고 13회 졸업 동문이다. 전주고보 재학 당시에는 공부를 잘하는 조용한 모범생으로 크게 동기들 주목을 받지 않았으나 모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단연 학생 시절과는 판이하게 정열적이고 지사적 면모를 드러내 후배 겸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역시 학생들 신망을 받던 일본인 물리·화학 담당 야마다 다이고로(山田大五郞) 교사 권유로 모교 교사가 됐다고 하는데, 노 교사 취임 첫 인사가 뜻밖이었다.
1942년 4월, 학생들 앞의 단상에서 취임 제일성(第一聲)으로 “남자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며 숨 차게 열변을 토했다. 이는 부임하던 날 한국 학생 정모 군이 업기(業崎)라는 일본 교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호되게 얻어맞는 광경에 분노를 느낀 나머지 항일 감정이 가슴에 맺혀 이렇게 제일성을 발했다는 것이다.
노 교사는 항일 전선에서 고생한 선열들의 공훈을 현창(顯彰)하는 일에 여념 없이 활동했는데, 학생들에게 반전·반일적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로 일경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광복이 되자 겨우 자유를 찾았으나 반신불수 되다시피 한 고문 후유증으로 오래토록 고생했다.
노 교사는 8·15 광복 후 한때 광복회 전북지부장을 역임했고, 그 뒤로는 저술과 서예작품 활동을 했다. 1993년 10월 16일 함열-이리 간 시내버스를 탔다가 버스 전복사고로 병원에 입원 가료 중 위 수술까지 받고 투병 중 1994년 9월 14일 한국보훈병원에서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노 교사는 후배들에게 민족혼과 북중혼을 심어주었고, 남아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고 정의를 구현하려고 애써 평생 후배 겸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환 교사는 애국지사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199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다른 교사들
수학 담당 이수천(李壽千) 교사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전주신흥학교에 근무했으나, 태평양전쟁 막바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신흥학교가 1937년에 폐교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고창고보로 편입되고 교사들은 뿔뿔이 각처로 분산된 가운데, 그만 유일하게 전주북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교사는 비교적 언행이 자유로운 사립학교에 근무하다가, 갑자기 일본화 교육의 도가니 속에 갇혀 쉽게 융화될 수 없었던지, 학생들과 친숙해질 틈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이호근(李皓根) 교사도 혹독했던 일제의 독아(毒牙)를 피해 잠시 시골 학교의 무명교사로 은둔하였다가, 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갔다.
이 무렵 북중뿐 아니라 한국 각지의 시골 학교에는 피신하기 위해 교편을 잡은 교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광복 이후 서울로 가 학자나 교수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일본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동문들의 모교 교사 취임이 많아졌다. 유청(柳靑·13회), 백완기(白完基·14회) 교사 및 항일교사로 학생들의 기억에 오래 남았던 노환(盧桓·13회), 김일옥(金一玉·18회) 교사 등이 모두 모교 동문이었다.
제2절 일본인 교사
야마다 다이고로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전주고에 재직했던 야마다 다이고로(山田大五郞) 교사는 물리·화학을 담당했으며 농구부장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 군마현(群馬縣) 출신으로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를 졸업, 고사(高師=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정통파 교원 못지않게 실력이 있었다. 특히 다른 일본인 교사들과 달리 한국인 학생에게 비교적 관대하고 동정적인 편이었다. 담임교사로서 학생들 잘못을 무조건 꾸짖지 않았고 일본화 교육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야마다 교사는 재직 중 함경북도 경성중학교(鏡城中學校) 교장으로 발령나 전주를 떠났다. 교사가 전근가게 되면 전교생이 전고 인근 전주역까지 나가 송별하는 게 일반적 상례였다. 하지만 야마다 교사의 경우엔 학교 측이 어떤 이유인지 전주역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5학년 전원과 그의 담임 학급이던 3학년 1반에게만 전송을 허용했다. 3학년 학생들은 ‘야마다 선생이 3학년 담임이었으니 5학년보다 3학년 전원이 전주역에 나가게 해달라’고 학교에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3학년 2반과 3반 학생들은 와르르 전고 울타리를 넘어 전주역까지 몰려가 야마다 교사를 불러댔다. 야마다 교사는 손수건을 흔들며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야마다 교사는 전주고를 떠난 지 40년 만에 재직 당시 제자들의 초대로 1981년 6월 전주고를 방문, 제자들을 직접 만나는 감격을 누렸다.
방문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1980년 일본 동경대학에 교환교수로 초빙된 노병순 전 전북대 교수(19회)가 야마다 교사의 소재를 알고 동창들에게 “선생님께서 건강하실 때 우리 모교를 돌아보시도록 하자”고 제의한 데서 비롯했다. 이날 감격적으로 사제가 해후한 모교엔 19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90여명이 모였다. 그 중엔 재학당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19회)도 있었다. 이 총재를 비롯해 이날 모인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야마다 교사가 전주고 재직 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학생들이었다.
야마다 교사는 당시 학생지도를 맡은 훈육 주임으로서 철권(鐵拳) 제재도 불사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항일에 적극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는 학생들을 처벌하진 않았다.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야마다 교사는 ‘퇴학처분만은 말아야 한다’고 다른 교사들을 설득했다. 당시 퇴학을 면한 이 중 하나인 이철승 동문은 이날 40년 만에 만난 은사 손을 잡고 “선생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라고 고마워했다.
야마시다
야마시다(山下) 교사는 체육 담당으로 일본 체육학교 출신이다. 전고로서는 처음 맞이한 체육 전문교사였다. 그는 실력도 대단했지만 그보다는 이시카와(賴彦) 교장과 교장실에서 가끔 고성을 지르며 벌였던 그 유명한 ‘언쟁’으로 학생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각인됐다. 전해지는 말로는 이시카와 교장에 대한 야마시다 교사의 항변은 “한국 학생 지도 방법이 너무 교육 정신에 위배되니 그렇게 해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요지였다고 한다.
광복 전에 북중학교를 사임하고 일본에 돌아가 일본 후생성 근무 중 패망과 더불어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는 후문이 들렸다.
구와타
고사(高師=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정통 교유(敎諭=교사)로서 영어 담당 구와타(桑田) 교사가 있었다. 그는 실력파 교원으로 수업에 열중했으나 때로 운동장에서 야구 선수를 지도하는가 하면 가끔 음악 수업을 했고 직접 정구를 즐기기도 했다. 크리스천으로서 온순한 성격에 멋쟁이 선생으로 학생들 신임도 얻었다.
이 같은 능력 덕에 그는 전고 재직 중 서울 제1고보(=경기고)로 발령 받았고 교내외에서 ‘영전’(榮轉)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구와타 교사가 일제 강점기 말엽 사립에서 공립으로 전환된 어느 시골 학교 교장으로 발탁된 뒤엔 또 다른 성격의 일면이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 학생들에게 너무 심하게 대해 학교를 퇴학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학부형이나 지역 사회에서까지 공립학교 전환을 반대하고 후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구와타 교사가 전주고보에 있을 때 이시카와(石川) 교장의 한국인 학생 교육 방법을 보고 본받은 게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구와모토
미술교사로 일본 미술학교를 갓 나온 젊은 구와모토(桑本)란 교사가 있었다. 그는 ‘독사눈깔’이란 별명이 붙은 사실주의 화풍의 후쿠사와(卜澤) 교사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대담한 필치와 낭만적 화풍의 미술가였다. 처음에는 미술 안목이 낮은 학생들의 냉시(冷視) 속에 별로 인기가 없었으나 올백 머리의 젊음과 성품이 좋은, 비교적 한국 학생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인연으로 인해 미술부에 종전보다 두드러지게 활기를 주었던 교사였다
우치다
자그마한 키에 하얀 얼굴, 까만 굵은 테의 안경을 끼고 눈이 둥글고 음성이 약간 굵은 지성적 풍모를 지닌 선생이었다. 이지적이며 깔끔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제자들은 기억한다.생물을 담당했던 우치다(內田) 교사 강의는 매우 흥미 있고 요령이 있으며 세련된 명강의였다. 특히 분필로 칠판에 동물을 그리는 그림 솜씨가 일품이어서 학생들 인기를 끌었다. 또한 온실 관리를 담당하여 아름다운 꽃들을 많이 가꾸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가을이 되면 그윽한 향기를 지닌 여러 종류 국화를 전시해 학생 정서를 순화시켜 주기도 했다
우치다 교사는 생물 과목을 담당이면서도 항상 독서를 많이 할 것을 학생들에게 권장했다. 이에 감화된 학생들은 위인전과 문학 서적 등에 접하는 기회를 많이 가짐으로써 성장기 인격 도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제3절 한국인 고용직원
교원이 아니었지만 조(趙) 씨 성을 가진 한국인 고용직원(雇傭職員)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약간 나이가 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당시 30대같이 보였는데 숙직실인 별채 건물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리며 겨울이면 방마다 난로를 피우고 학생들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을 청소하는 등 많은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별로 말이 많지 않았고 교사들 명령에 “예! 예!”하고 심부름하던 모습이 퍽 처량해 보였다고 한다. 또 마이크 시설이 없던 터라 수업 중 긴급히 교사나 학생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총각 사환 한 명이 쪽지에 그 사연을 적어 각 교실을 돌아다녔다.
학교 직원은 아니었지만 학생들 기억에 남는 이도 있다. 그는 학생들 구두나 실내화를 고치는 중년의 수선공으로서 학생들은 그를 ‘김씨’라 불렀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단화(短靴)를 많이 신었고 1933년경부터는 검은색 편상화(編上靴)28) 가 통학 신발이었다. 학교 내에서는 흰색 운동화로 갈아 신었는데 김씨는 이 신발 수선을 도맡아 종일 애썼다.
당시 수선비는 2전~5전, 많아야 1원(圓) 정도(당시 구두 한 켤레에 5원 정도)로 저렴했지만 김씨는 매일 적어도 몇 원씩 벌어 술을 마셨고 주벽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학을 졸업하고 관청에 취직하면 첫 월급이 30원 미만이었다. 김씨로서는 결코 적잖은 벌이었으나 학교 수선공을 그만둔 뒤에는 퍽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제 8장 수업 외 특별활동
개교 초기 학생들의 과외 특별활동은 무척 미미한 실정이었다. 민족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축구를 즐기는 정도였고 그것도 타교와 경기를 갖는 게 아니고 때로 개최되는 지역대항 시합에 몇 몇 학생이 끼어 불려 다니는 형편에 지나지 않았다.
정구(=연식 정구)가 일찍 유행되어 학교 설립 당시 학교 동쪽과 북편에 하나씩 설치되었던 코트에서 일부 교사와 학생들이 정구를 즐겼다. 야구는 서원(書院) 너머(=지금의 중화산동 ‘선너머’) 예수병원에 근무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돼 점차 동호인을 넓혔다. 개교 초엔 주로 투수와 포수만이 글러브를 끼고 야구 흉내를 냈으나 1930년대부터 정식 구단이 생기고 유니폼과 장비도 갖췄다. 개교초 스포츠 특별활동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고 미술부와 음악부 활동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축구부, 정구부에 이어 야구부가 생기고 1930년 앞뒤로 중학교 간의 경기도 벌어지게 됐다. 다음은 주로 6, 7회 졸업생(1929, 1930년) 이후 각 부 활동 양상의 개관이다
미술부
일본 미술학교 출신인 복택(卜澤) 교사가 부임해 비로소 정식 미술교육을 실시했다. 다만 미술부라고 해서 특별한 지도를 받았다기보다 교내 미술전람회에 대비해 출품작을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전람회에는 후쿠사와(卜澤) 교사의 특별출품작을 위시로 지련해(池蓮海·10회), 김대옥(金大玉·10회) 등 여러 동문 작품이 눈길을 끌었고 후일 한국 서양화 화단의 대가가 된 천칠봉(千七峰·17회) 동문도 재학 당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밖에 오래 미술 교사로 활동한 김용봉(金用鳳·11회) 동문과 김형수(金亨洙·13회), 문윤모(文鈗模·14회) 동문도 재학 당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졸업한 후로는 일본 미술학교를 거친 정용식(鄭龍植) 동문,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퇴임한 김주익(金周益·17회) 동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들도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수채화가 주가 되었고 유화나 동양화, 서예는 특별히 지도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또 그 당시 한국에서 열린 유일한 전람회인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학생이 있는 것도아니어서 교내 미술전이 끝나면 전시 작품들이 복도에 게시되어 환경미화를 하는 정도가 미술교원들의 자랑거리였다. 일부 한 두 학생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술공부를 계속하지도 않았다. 미술부는 구와모토(森本) 교사 부임 후 점차 활기를 띠기도 했으나 강점기 말 일제가 전쟁 일변도로 달리면서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져 버렸다
육상경기부
육상부 역시 개교 초기에는 가을철 운동회에 대비한 연습이 과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나 광주학생만세운동(1929년) 이후 교내 육상경기 기록대회가 열리고 일본 체육학교 출신의 체육전문 야마시다(山下) 교사가 부임한 이래 과외활동이 시작돼 각종 육상경기가 제법 활발해졌다.
장대높이뛰기(봉고도·棒高跳), 높이뛰기(주고도走高跳), 넓이뛰기(주폭도·走幅跳) 선수가 생겼고 1932년부터는 육상경기에 뛰어난 군산중학과의 학교 대항 육상경기도 열렸다. 단거리에서는 야구선수를 겸한 윤기병(尹麒炳), 유태백산(劉太白山) 동문이 명성을 날렸다. 특히 윤기병 동문의 100m 기록(11초 2)은 가히 ‘비호’(飛虎)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는 유태백산 동문의 기록(11초 5)과 함께 전(全) 한국적인 기록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윤, 유 두 동문의 기록은 깨어지지 않았다.
단거리에서는 정응진(鄭應珍), 김창순 동문에 이어 박대근(朴大根), 김인득(金仁得), 김응만(金應萬) 동문도 대단한 활약을 했다. 결국 일본체육학교를 나와 광복 후 이화여대(梨花女大) 체육학교 교수를 역임한 김종섭(金鍾燮) 동문이 위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장거리 기록은 지금에 비하면 저조한 기록이었겠지만 전북중학교가 전주-군산 역전마라톤대회에서 좋
은 성적을 거두었고, 400m 800m의 계주도 정응진(鄭應珍), 윤기병, 유태백산 등 여러 동문의 대를 이어 박대근, 김응만 동문이 있었고 다음으로 차재인(車在仁), 최경선(崔京善) 동문의 활약 또한 컸다.
또 조수연(趙壽衍)·홍정표(洪正杓) 동문의 장거리, 강대원(姜大元)·차재인 동문의 허들 3단도(3段跳), 넓이뛰기의 박대근, 장대높이뛰기의 유수복(柳壽福), 투포환의 김대옥(金大玉)·손동순(孫東順)·임남수(林南秀), 투원반·투창의 박병선(朴炳鮮), 높이뛰기의 이기순(李基順) 동문의 활약과 기록들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박병선 동문은 1937년 8월 개최된 제4회 전(全)조선중등육상선수권대회 투창부문 3위를 차지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에피소드는 1936년부터 교내 단축마라톤이 실시되었는데 제2회 대회 때 당시의 오귀남(吳貴男) 동문을 중심으로 한 마라톤 선수 10여명이 서로 짜고 발을 맞춰 결승 테이프를 끊고 들어오자 야마시다(山下) 체육교사가 화가 나 그 선수들을 호되게 꾸짖고 제1회 기록을 경신한 이들 모두에게 기록경신 기념메달 수여를 거부한 일이다. 기록경기 마라톤에서 동시 골인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이들은 물론 스포츠정신을 위배한 게 사실이지만 당시 활동 선수들의 일면을 말해 주는 이 에피소드는 장난꾸러기들의 해프닝으로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다.
육상경기 역시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로는 다른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수행 목적을 위한 각종 훈련으로 대체되고 그 명목마저 사라져갔다.
야구부
전주고보 야구부는 1925년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취미와 소질이 있는 학생들이 팀을 이뤄 창설돼 특별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에 남아 연습 했다. 전라북도 체육회가 펴낸 ‘전북체육 1백년사’(2002년)의 기록에 따르면 1925년 9월27일 전주에서 전주고보 대 이리농림과의 야구경기가 열렸는데 이 경기가 도내 학교간 대항 야구경기의 효시라고 한다. 이 경기에서 전주고보가 3대2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 팀 창설 초기 전주고보 야구부 실력이 축구와 더불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1931년 7월에는 오사카 매일신문사 주최 중학야구선수권대회 호남예선에 전주고보가 출전하여 전주농업, 광주중을 차례(15대3, 13대1)로 물리치고 군산중과 예선결승을 치러 4대1로 승리, 호남대표로 중학야구선수권대회 본선에 출전했으나 준결승에서 경성상업에 2대7로 패했다. 같은 해 10월 열린 제7회 조선 신궁(神宮)경기대회에 출전해 1회전에서 용산중에게 4대6으로 아쉽게 패했고, 1933년 7월에 열린 중등학교 야구 호남예선에서는 전주고보가 목포상업에 8대14로 패해 1회전 탈락했다. 특히 이날 경기에서 전주고보 팀이 초반 활발한 공격으로 홈런을 친 공이 운동장 옆에 있던 기숙사 옥상에 날아가 경기가 한때 중단되기까지 했다는 일화도 남겼다.
1930년대 전주고보 야구부 멤버로는 유철수(柳喆壽) 동문을 주축으로 유태규(柳泰圭) 동문이 크게 활약했고, 명 중견수 윤기병(尹麒炳) 동문, 명 포수로 전고 야구부 창단에 진력한 송창문(宋昌文), 김병관(金炳寬), 김종순(金鍾順) 동문을 필두로 육상선수를 겸한 김광호(金光鎬), 씨름에다 정구, 육상 선수까지 겸한 만능선수 김창순(金昌順), 명유격수 유태백산(劉太白山) 동문들의 활동이 대단했다. 투수였던 중본(中本)이란 일인 동문은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해 명투수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초기 선배들에 이어 명 유격수 이영식(李榮植) 동문이 있었고 대를 이어받아 명 유격수 남궁세원(南宮世元), 투수로, 1루수로 혹은 중견수로 명성을 날렸던 차재인(車在仁) 등 여러 동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타 선수로 박병훈(朴炳勳), 이갑상(李甲相), 박병래(朴炳來), 김재진(金栽進), 김만용(金萬容) 동문, 그 후로는 다시 송문규(宋文奎), 박기철(朴奇哲), 차재영(車在榮) 동문, 그리고 김제병(金濟炳), 이윤오(李倫吾), 김금용(金金瑢), 이용희, 허영목(許永穆) 동문, 일제 말기 무렵에는 차재철(車在喆), 이기안(李起安), 최병기, 이용재, 김종두, 김교상 동문들이 대를 이어가며 활동했다. 1936년 7월 전일본중등학교 야구선수권 호남예선대회에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대전고에 2대6으로 패하면서 탈락했고, 1937년 전일본중등학교 야구선수권 호남대회에서는 이리농림에 10대21로 패했다. 이후 야구부 또한 태평양전쟁과 더불어 유명
무실해 졌다.
정구부
축구부
농구부
문학 동인지 산호초
특수체육 교련과목
당시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1941년 전국에서 모인 많은 우수한 지원자중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영광의 합격자 명단을 우천체조장 벽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합격자는 3개반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학기는 1년을 3학기로 하고 학년초는 4월초순에 시작하였다. 1학기의 학업 성적에 따라 우수반을 뽑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들기 위해 학업에 정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우수반 제도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여 폐지되었다.그 당시 국방색의 교복을 입고 ‘데바리’ 모자를 쓴 우리 전주북중 학생들은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의 교훈 아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중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에 시간을 빼앗겨 4학년 때는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인 전형적인 일제 식민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전쟁중이라 사열을 받기 위한 군사훈련에는 노일전쟁 당시 사용했던 9·9식,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모의 공포탄을 쏘아 실전을 방불케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전주시내의 중등학교들은 남중학교에 집합하여 사열을 받고 수류탄 던지기, 포복, 총검술 등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습득하기 위한 국방경기(國防競技)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북도내의 중등학교를 남군(전주북중, 전주남중, 전주사범, 전주농업, 전주공업)과 북군(군산중, 군산상업, 이리농림, 이리공업)으로 나누어 총을 메고 야간행군한 다음날 아침 삼례들판에서 양군의 전투 대결훈련이 실시되었다. 치고 밀리는 그 당시 훈련상황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이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심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은 ‘근로 보국대(勤勞 報國 隊)’라는 것을 결성, 학생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이용했다. 덕진 야산 솔밭을 개간해 고구마 밭 일구기, 군산 불이(不二)학교에서 숙 박하면서 비행장 공습에 대비한 비행기 방공호 파기(이 당시 취침전 친구들과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실로 끌려가 몽 둥이질을 당하고 정학처분 당한 암울한 기억이 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모교의 뒷산을 허물어 기숙사를 지을 부지 조성 등 은 좋은 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