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1930~40년대 줄기찬 항일

제 1장 관립에서 공립 전환

제 1절 광주학생만세운동 이후 교내 움직임

제 2절 더욱 강화된 일본화 교육

정진일지의 강요
병영훈련강화

제 3절 중일전쟁과 전주북중

제 4절 이철승 동문의 항일저항

제 2장 격랑 속 학창생활

제 1절 19회 전주고보 마지막 입학생

제 2절 전주고보에서 북중으로 교명 바뀌어

제3절 노다 교사와 스트라이크

제 3장 수학여행 보고회 파문

제 1절 일제의 기만성 폭로

제 2절 사태수습과 야마시다 교사

제 4장 학도동원령, 근로보국, 군사훈련

제 1절일제강점 말기 시대 상황과 태평양전쟁

제 2절 3차 교육령 개정과 학도 동원령

학업 중단하고 강제 노력 동원

제 5장 일제 말기 반전 항일운동

제 1절 더욱 삼엄해진 학생 사찰

제 2절 연행, 구속, 투옥, 사제들의 고난

구속 교사, 학생들에 대한 관제 판결내용
노환 교사 투옥 이유
학생동태 감시 내용

제 3절 전고생들의 묵음시위

동맹휴학, 교장 축출 등 개교 이래 그치지 않고 이어진 일제에 대한 항거는 1040년대 들어 무언의 묵음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묵음 시위는 22회 동문들이 입학하던 1940년대부터 시작됐다, 행렬이나 대열의 뒤에서부터 음...하는 소리로 집단 시위를 하는것이다, 주변 교사가 다그치면 소리는 사라지지만 교사가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또 묵음이 나오는 등 신경질적이고 게릴라적인 시위방식으로 교사들 골머 리를 앓게했다. 당시 5학년 유승렬 동문은 남들이 다 조용한 데도 혼자서 음.:하다가 그만 들 통이 나서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줄 나기도 했다. 평소 운동장 조회 때 일본인 교사가 지휘대 단상에 올라 한국인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얕잡 아 혈뜬는 훈화를 하거나 행렬 중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음...음.." 하며 입을 다물고 여기저기서 콧속으로 소리를 내는 항변의 시간을 가졌다. 일본인 선생들은 아무리 단속하려고 해도 아예 허사였다.

제 4절 유청동문의 증언, 전고와 항일정신

제 5절 전주고 교지 회지 발간

1939년 당시 교세
학교일지 20년사

제 6장 강점기 말 교사,교정과 학생의 모습

제 1절 학교시설

제 2절 자긍심 대단했던 전주고생

1940년대 초 북중생의 학창생활

제 7장 광복이전의 교사들

제 1절 한국인교사

백용희
고(高) 교사
김성율
이진문
김용환
정학모
노환

제2절 일본인 교사

야마다 다이고로
야마시다
구와타
구와모토
우치다

제3절 한국인 고용직원

제 8장 수업 외 특별활동

미술부
육상경기부
야구부
정구부
축구부
농구부
문학 동인지 산호초
특수체육 교련과목

당시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1941년 전국에서 모인 많은 우수한 지원자중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영광의 합격자 명단을 우천체조장 벽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합격자는 3개반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학기는 1년을 3학기로 하고 학년초는 4월초순에 시작하였다. 1학기의 학업 성적에 따라 우수반을 뽑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들기 위해 학업에 정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우수반 제도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여 폐지되었다.그 당시 국방색의 교복을 입고 ‘데바리’ 모자를 쓴 우리 전주북중 학생들은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의 교훈 아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중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에 시간을 빼앗겨 4학년 때는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인 전형적인 일제 식민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전쟁중이라 사열을 받기 위한 군사훈련에는 노일전쟁 당시 사용했던 9·9식,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모의 공포탄을 쏘아 실전을 방불케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전주시내의 중등학교들은 남중학교에 집합하여 사열을 받고 수류탄 던지기, 포복, 총검술 등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습득하기 위한 국방경기(國防競技)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북도내의 중등학교를 남군(전주북중, 전주남중, 전주사범, 전주농업, 전주공업)과 북군(군산중, 군산상업, 이리농림, 이리공업)으로 나누어 총을 메고 야간행군한 다음날 아침 삼례들판에서 양군의 전투 대결훈련이 실시되었다. 치고 밀리는 그 당시 훈련상황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이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심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은 ‘근로 보국대(勤勞 報國 隊)’라는 것을 결성, 학생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이용했다. 덕진 야산 솔밭을 개간해 고구마 밭 일구기, 군산 불이(不二)학교에서 숙 박하면서 비행장 공습에 대비한 비행기 방공호 파기(이 당시 취침전 친구들과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실로 끌려가 몽 둥이질을 당하고 정학처분 당한 암울한 기억이 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모교의 뒷산을 허물어 기숙사를 지을 부지 조성 등 은 좋은 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