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개요
1950년대는 시련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미증유의 동족상잔, 파괴와 살육으로 시작되었으나, 바로 그 포연 속에서 생존과 재건의 의지가 불타오르기도 했다. 1950년대 내내 지배한 6·25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의지는 조국애와 적개심으로 종종 표현되었다. 당시 '괴뢰 도당', '섬멸', '소탕' 등의 단어들은 이후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내세운 '제1 국시' 반공(反共)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오랫동안 지속된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애국심, 정열, 재건, 반공, 승공(勝共)이 동일시되던 시기였다.
교육 현장은 전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초토화되었다. 6·25 전쟁 중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261개교와 2,303개 교실이 파괴되어, 건국 이후 막 호전되기 시작한 교육 인프라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터전이 파괴된 초등학교와 중학교들은 노천이나 동리 회관, 또는 유휴 건물을 이용하여 수업을 진행했다. 피난 학생들은 피난지의 원주민 학교에 등록해 수업을 받았고, 피난민이 많이 모인 부산, 대구, 대전에서는 전쟁 발발 10개월 후인 1951년 4월부터 피난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수용했다. 이러한 초토화된 환경 속에서도 문교부는 1951년 2월 16일 '전시하 교육 특별조치 요강'을 발표해 일시 중단되었던 학교 교육의 재개를 지시했다. 대학들 역시 전국에서 전시연합대학 형태로 공공시설이나 빈 터 등에 천막을 치며 교육을 이어갔다.
전북공립중학교는 전쟁 발발 20여 일 후인 1950년 7월 16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이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호전되자, 같은 해 10월 4일 다시 문을 열었으나, 피란과 학도병 참전 등으로 인해 돌아온 학생은 많지 않았고, 학교 운동장에는 군대(국군 11사단, 8사단)가 주둔했다. 학생들은 군대에 안방을 내주고 인근 전주 남중학교(현재 전주제일고), 풍남국교 등을 빌려 수업을 해야 했다. 1951년 11월, 전시연합대학이 전주고에 개설되었고, 이듬해 6월에는 신설된 국립 전북대학교 개교식이 전주고에서 열렸다. 궁핍한 시대에 본교는 그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다.
최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자부심은 시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본교는 개교 이래로 줄곧 현실에 민감하게, 적극적으로 반응해왔다. 항일과 반탁을 거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1950년대는 그 시대적 분출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전북중학교 제3대 교장인 유청 동문(13회)은 당시의 에토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북중이 걸어오던 길은 문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으며, 파란곡절의 중첩이었다. 일제의 탄압 하에 단연 민족혼의 간판을 내걸고 항쟁을 거듭하여 대한학생의 애국정열을 중외에 선양한 것도 우리 북중이었고, 해방 후 세태가 혼돈하여 좌우의 분열이 심화되어 국민의 대다수가 민족의 진로를 가릴 바를 몰랐을 때에 단연 반공 반탁의 기치를 높이 들어 민중의 선봉이 된 것도 우리 북중이었으며, 6·25 사변을 맞아 솔선하여 군문에 수많은 학생들이 지원 입대하여 위급한 조국의 운명을 우리들의 힘으로 막아내겠다고 요소요소에서 청사에 빛날 공훈을 세워 공산 괴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도 우리 북중이었다."
위기에 닥쳐 과감히 배움을 떠나 전장으로 뛰어든 전국의 수많은 6·25 학도의용군 중에서도 전북과 전주북중·전주고등학교는 단연 눈에 띄었다. 6·25 전쟁 중 전국에서 산화한 전몰 학도 총 1,394명 가운데 무려 396명이 전북 출신이며, 그 중 전주북중·전주고등학교 출신은 48명(교직원 10명 포함)에 달했다. 이러한 희생을 기리고자 1951년 건립된 '충혼탑'이 현재까지 교정에 서 있다.
이 시기부터 교사·학생 통합 학내 군대형 조직체로서 학도호국단이 본격적으로 활동(1951년 8월 대통령 제523호,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 개정 공포)했으며, 종래의 6·4·2·4던 학제도 6·3·3·4를 근간으로 최종 개혁(1951년 3월 20일, 교육법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개교 이래 전주고등보통학교(1919),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1925), 전주북공립중학교(1938), 전북공립중학교(1946), 전북고등학교(1950) 등으로 불리던 교명은 1951년 7월부터 각각 3년제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로 분리·정착되었다.
혼란 속에서도 디테일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1950년대 본교가 시련 앞에 좌절하지 않았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주고등학교 교가, 교훈, 모표, 교복, 교기가 확정되었으며, 전쟁 중에도 연 1회 발행되는 교지인 **<북중>**이 1952년에, **<전고>**가 1953년에 각각 창간되었다. 타블로이드 8면 짜리 월간신문 <전고학보>(1954년 7월 창간)도 발간되었다. 다양한 학생 활동(문예·미술·웅변·음악)과 체육 활동(농구·유도·무술·정구·육상·권투) 등 역동적이고 체계적인 전인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제자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존경 속에 전북중학교를 이끌던 제2대 김가전, 제3대 유청 교장은 거목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육자이면서도 대외적으로 지사, 정치인, 행정가의 역할을 겸했다. 이에 비해 1950년대 교장들은 본격적인 교육 행정으로 노송대를 이끌었다. 북중에는 김영배, 정성익, 강택수, 백환기 교장이 차례로 부임했다. 전주고에서는 제4대 배운석 교장이 1950년대 말까지 8년을 봉직하며 확실하게 학교의 틀을 다졌다. 배운석 교장은 ‘첫째도 공부, 둘째도 공부, 셋째도 공부’를 강조하며, 그의 재임 시 전주고는 장학회를 설립(1953년)하고, 졸업생 전원이 대학에 진학(31회 338명, 1954년)하는 등 학력 면에서 금자탑을 쌓아 나갔다.
제 2장 교육제 변화와 한국전쟁
제 1절 6.25 직전 3년제 전북고등학교 창설
그간 교육제도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던 학교명이 6·25 직전 또 바뀌었다. 중학교 6년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신제(新制) 3년제 고등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교육령 공포로 전북고등학교(全北高等校)를 창설하고 12학급을 인가 받아, 문교부 지시에 의하여 옛 전주고등보통학교(全州高等普通學校) 및 전북중학교(全北中學校)를 계승하게 됐다. 이에 따라 전북고등학교는 신입생 2학급(문·이과 각 60명)을 모집하여 1950년 6월 22일 수업을 시작했다. 신입생 입학식을 거행하며 희망차게 출발했으나 6·25 발발 불과 사흘 전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국식 학기제 도입으로 학년초를 매년 9월 1일로 바꾸었으나 5년간 시행해 본 결과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드러났다. 정부는 2개년의 과도기를 거쳐 학년초를 광복 이전과 같이 4월 1일로 환원키로 했다. 이에 따라 1949학년도를 3개월 단축하여 1950년 5월 말까지로 하고, 1950학년도를 2개월 단축하여 1951학년도를 4월 1일에 시작하려는 계획에 맞춰 신제 전북고등학교를 1950년 6월 22일 개교했다.
학교 건물은 지난 1969년의 화재로 소실된 목조본관(木造本館, 지금의 교훈탑과 본관 사이에 위치했었음)을 사용하였다. 당시 신입생은 L(문과), S(이과)의 과 배지를 달고 ‘高’(고)자 모표에 5mm 두께 흰 띠를 두른 모자를 썼으며 우수 선발 집단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교장은 전북중학교 유청(柳靑) 교장이 중·고등학교를 겸임하였고, 고등학교 교감은 김교선(金敎善) 교사가 맡았으며 문과 담임은 영어과 신강호(申剛浩) 교사가, 이과 담임은 수학과 김희철(金熙哲) 교사가 각각 맡았다. 북중학교 교감은 김일옥(金一.玉) 교사였다.
개교하자마자 6·25를 맞았고 한 달도 채 못된 7월 16일 휴교를 하는 등 시련을 겪은 신생 전북고등학교는 수복 후 다시 문을 열었으나 이듬해 학제개편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완전 분리)으로 1951년 9월 2학년에 진급할 때 전북중학교 5, 6학년 진급생이 각각 전주고등학교 2, 3학년으로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혼성 학급이 재편성될 때까지 질시 대상이 되고 학내 위화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제 2절 6.25발발, 휴교, 재개교
9월 1일을 학년 초로 하던 광복 직후 학기제를 다시 4월 1일 학년 초로 환원하기 위하여 1949학년도를 3개월 단축하였기 때문에 1950학년도는 6월 1일에 시작되었다. 신학년도가 시작되어 한 달도 채 못 된 6월 25일(일요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전혀 대비가 없었던 터라 사흘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이 북한군 손에 들어갔다.
전북중학교에선 이때까지도 학교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리와 남원에서도 아침 통학열차가 통학생들을 싣고 정상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6월 28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통학열차를 타려고 시간을 맞춰 전주역 (현재의 전주시청 자리)에 나간 기차 통학생들은 사정에 의해 열차가 운행되지 못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에는 불리한 전황이 일체 보도되지 않았던 터라 몰랐으나 실은 바로 그날이 서울 함락일이었다. 행여나 하고 몇 시간을 더 기다리던 통학생들은 각기 친척이나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만 했다.
다음날 등교하여 열차가 무기한 운휴한다는 철도 당국의 연락을 받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기차 통학생에 한해 등교 대신 귀가를 허용하였다. 그 당시에는 철도 주변에는 정기버스가 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통학반장 인솔 하에 폭염 속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50리~150리를 걸어서 귀가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기차가 불통돼 기차 통학생들은 6월 29일 사실상 휴교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학교 수업은 최후까지 진행되었다.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져서 수원, 평택, 천안에 이어 대전까지 함락됐으나 긴박한 순간에도 수업은 이어졌다. 그러나 전주에 북한군이 진입(7월 20일·목요일)하기 나흘 전인 7월 16일부터 전북중학교도 무기한 전면 휴교에 들어가고 만다.
휴교에 앞서 전국의 학도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책 대신 총을 들고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전북중학교에서만도 몇 번에 걸쳐 이 숫자가 총 4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불과 며칠 간 훈련 끝에 전선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오로지 우국충정으로 임했으나 실전 경험은 물론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보지도 않은 상태에 전쟁에 투입돼 큰 희생을 치렀다.
국군과 학도병, 유엔군은 전세를 뒤집고 북진을 계속하여 전쟁 개시 3개월 만에 서울을 되찾고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처 피난을 못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적의 총칼에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10월 3일 그간 뿔뿔이 흩어졌던 전북중학교 학생들이 오랜만에 모여들어 전주에 개선하는 유엔군 환영대회를 가졌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10월 4일 그간 쉬었던 학교가 80일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학도병으로 입영하여 끝내 돌아오지 못한 학우의 빈 책상은 살아남은 이들로 하여금 재회의 기쁨 대신 눈물바다를 이루게 했다. 엇갈린 기쁨과 슬픔 속에서 다시 학업은 계속됐다.
제 3절 혼재된 졸업장, 6년제 4년제 3년제
8·15 광복 후 실시해오던 6·6·4학제(초등학교 6년, 중학교 6년, 대학 4년)를 6·3·3·4로 하여 중·고를 분리하는 학제 개편이 1951년 9월 1일을 기하여 시행됐다. 따라서 전북중학교는 4, 5학년이 진급과 동시에 전주고등학교(全州高等學校) 2, 3학년으로 각각 자동 편입케 되었으니 이들이 각각 제30회, 제29회 졸업생들이다. 그런데 4학년 학생들은 희망에 의하여 졸업장을 주기로 되어 1951년 7월 23일 28회 졸업식장에서 6년제 제28회 졸업생 348명과 함께 18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이들이 전북중학교(全北中學校) 4년제 제28회 졸업생이다.
한편 3학년 학생들은 1951년 8월 31일에 졸업식을 갖고 3년제 전북중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게 되었으니, 이들이 3년제 중학교 제28회 졸업생들이다. 이렇게 하여 제28회 졸업생은 모두 전북중학교의 이름 밑에 졸업을 하였으되 6년제, 4년제, 3년제의 세 종류가 있다.
3년제 전북중학교의 첫 졸업생들은 1948년 9월 1일에 6학급 360명이 입학했다. 이들은 북중·전고 사상 가장 고생한 횟수 중 하나다. 입학 초부터 교실 부족으로 이리, 남원 방면의 기차 통학생과 구이, 소양, 용진, 우전, 이서 등 원거리 도보 통학생 (당시에는 시내버스가 전혀 없었음)만으로 구성된 1학년 6조(組) 74명을 제외한 나머지 5개 학급은 모두 야간수업을 받았다 (1학년 6조는 지금은 없어진 우천체조장을 개조하여 임시로 만든 6개의 교실 중 하나를 사용하였다). 2학년 진급 후에도 이들은 교정 정면 붉은 벽돌 본관(1969년 화재로 소실)이 완성될 때까지 선배들과 더불어 형무소(=교도소)에서 벽돌을 운반하고, 소양 송광사에서 목재를 운반하는 중노동을 했으며, 밤이면 건물과 자재를 지키기 위하여 한 학급씩 윤번제로 야간 경비까지 하였다.
이들이 3학년에 진급한 뒤엔 한 달도 안 돼 6·25가 터졌다. 수업이 중단된 것은 물론 중학교 3학년 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책 대신 총을 들고 학도병에 지원한 학생도 많았다. 수복이 되어 1950년 10월 4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애초 6학급 중 불과 1개 학급 수의 학생만 모였다. 전쟁 이듬해인 1951년 5월까지도 다시 복교한 학생은 2개 학급에 불과하였다. 당시 전북중학교에는 국군 제11사단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근의 전주중학교(옛 전주상고, 현재 전주 제일고)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제11사단에 이어 주둔했던 제8사단이 1951년 5월 19일에 철수하고, 다음 날인 5월 20일에 학교에 복귀하게 되었으니 전란으로 인한 휴교 이래 실로 10여 개월만이었다. 이때 3학년 학생들은 5개 학급으로 편성될 만큼 불어나 있었다.
1951년 8월 31일 강당에서 거행된 졸업식에서는 339명이 졸업장을 받게 되었으니 이들이 곧 3년제 중학교의 첫 졸업생이었다. 이들은 8월에 전주고등학교(全州高等學校, 당시는 ‘전북고등학교’였음) 입학시험을 거쳐 6개 학급(문과, 이과 각 3개 학급)이 9월 1일 입학식을 가졌는데 이중 전북중학교 출신이 약 3분의 2였고 나머지는 다른 중학교 출신의 수재들이었다.
이들 전원이 입시를 거쳐 선발된 첫 고등학생이다. 전북중학교에서 자동 편입된 제29회를 전주고등학교 제1회로, 제30회를 전주고등학교 제2회로 부름에 따라, 완전 개편된 학제에 의하여 전원이 시험을 거친 사실상의 전주고(全州高) 첫 회인 제31회는 제3회로 그 회수를 계수하는 등 두 가지의 졸업 회수를 제4회까지 병용하다가 그 뒤로는 전주고보 이래의 통산 회수 하나만을 사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 4절 정부 전시 교육방침
제 5절 문교부 교육제도 개선
문교당국은 전시 비상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비상조치를 강구하는 한편 교육제도를 개선했다.
중등교육 학제 변경
1947년 12월 31일 법률 제86호로 제정된 교육법 제정 이후 몇 차례 개정을 거쳐 1950년 3월에 수정된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의 학제는 1951년 3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학제로 최종 변경되었다. 이 개정에 따라 한 캠퍼스 내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한 행정기구로 운영하느냐 아니면 전면 분리하느냐의 갑론을박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나 문교당국은 완전 분리의 방침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전주고등학교(全州高等學校)와 전주북중학교(全州北中學校)가 분리 개교되었다.
1919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 고등보통학교령 개정으로 개교를 본 전주고등보통학교가 1925년 4월 1일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로, 1938년 4월 1일 전주북공립중학교, 1946년 9월 1일 전주공립중학교로 개칭되어 호남의 유일한 명문학교의 전통을 유지해 오다가 1951년의 중·고등학교 분리에 의해 7월 17일 전주북중학교(全州北中學校)는 18학급으로 본관(本館)을 차지했으며 동년 9월 17일 전주고등학교(全州高等學校)는 후관 교사(校舍)에서 개교를 했다.
이 같은 교육제도 개혁으로 종래 6·4·2·4의 학제는 6·3·3·4의 새로운 학제로 개혁됐다. 또 1952년 6월 4일에는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면서 교육행정의 전문성과 지방교육의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시·군 단위의 교육자치제를 실시했다. 전라북도에는 전주·이리·군산의 3개 시에 교육위원회가, 13개 군에는 교육구청이 각각 일제히 문을 열었다.
사상 첫 중학교 입학 국가고시제
1951년 7월 31일 한국 교육 사상 처음으로 ‘중학교 입학 지원자에 대한 국가고시제’ 개혁이 단행되었다. 6·25 한국전쟁으로 학생 거주지의 유동과 수업 진도의 불균형, 부정입학 등 폐습을 시정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학교 입학 지원자의 국가고시제가 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전고 34회, 북중 31회 졸업생들이 이 국가고시제를 뚫고 첫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전주완산초등학교 출신의 신정용(申禎容) 동문이 수석으로 합격했다. 6·25 한국전쟁으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채 이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듬해 2학기마저 보충수업으로 띄엄띄엄 교육을 받은 당시 중학교 입학 지원자들에게는 비교적 어려운 출제였다. 또 최초로 시행된 국가고시제였기 때문에 초기 조사가 충분하지 못했던 점도 사실이었다.
당시 국가고시제를 강행한 문교당국은 고사와 선발을 분리하기 때문에 학교 개편을 실시할 수 있고 지역 단위로 실시하기 때문에 피난 학생과 원거주 학생을 동일하게 다룰 수 있으며, 국가에서 출제하느니 만큼 수업 진도의 차이를 조정할 수 있다는 등의 이점을 내세웠다. 하지만 피난 학생들에게 시험 준비 기간이 짧은 등 난점은 어쩔 수 없었다.
제 3장 도전과 응전 - 6.25와 전주고
제 1절전북 학도병, 전국 최다 희생
전쟁 회오리 바람 속에서 9·28 서울 수복 후 본교는 10월 4일 다시 문을 열고 적은 수 학생으로나마 수업을 재개했다. 학교 교사(校舍)는 처음엔 제 11사단이 사단본부로 쓰기 위하여 징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제 8 사단 본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북중학교는 당시 인근 전주중학교(현 제일고등학교)의 교 사(校舍)를 빌어서 수업을 실시했다. 1951년 5월 19일에 제 8 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본교생들은 약 11개 월만인 5월 20일 그리던 교사(校舍)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대부분 학교에 복귀했으나 군데군데 빈 책상이 많았다. 6·25 전쟁 직후 붓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간 본교 총 400여명 중 숨진 학생들이었다. 전선에서 조국 수호 신이 된 전국의 중·고생 전몰학도 수는 총 1,394명이다. 이중 전라북도가 396명으로 전국 최다희생이며, 그중에서도 본교생은 48인(교사 포함)이나 되는 아픔을 겪었다. 시·도별 전몰학도 수는 이렇다.
제 2절 전쟁의 광풍
전쟁은 초반부터 맹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전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출처불명 소문만 난무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원해서, 또는 정부 입대 소집에 응해 전장에 나갔다. 6·25 발발 직후 신태영 소장이 호남 위수사령관으로 부임, 국군과 경찰을 장악하고 신병을 모집했다. 신태영 사령관과 육군보병학교 교장 민기식 대령이 전주 북중 강당에 와 학도병 지원을 격려했다. 당시 북중학교는 7월4일부터 임시 휴교에 들어갔고 전북도청은 7월18일 해산돼 부산으로 향했다.
이같은 무정부, 무학업의 급박한 와중에서 전주 일대의 18세 이상 입대 학도57)들은 전북중학 교정에 일차 집결, 7월13일 전주지역 제 1,2,3,4기 학도병 장행회(壯行會)58)를 가진 다음 전북 각처에서 온 학도병들과 이리(=현재 익산)에서 만나 순천을 거쳐 경상도 대구, 포항 등지로 가 초스피드 집중 훈련과 빈약한 장비로 불과 한달 이내 실전에 투입됐다. 대부분 소총 분해 조립만 배우고 몇 차례 실전 사격 후 훈련된 적군에 맞서는 식이었다. 군용 헬멧은 물론 군화, 군복도 지급될 처지가 아니어서 대부분 평상복과 운동화 차림으로 총을 잡은 이들은 그야말로 육탄(肉彈) 그 자체였다. 군번은 받았으나 기록이 남지 않아 대부분 ‘군번 없는 병사’가 되고 말았다. 전종환(28회·전 군산시장) 동문은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은 누구의 가슴에나 피멍으로 남았다. 학도병 학생도, 의용군 학생도, 숨어버린 학생도 모두 10대 학우들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북측 의용군으로 간 학우는 물론 빨치산 체포 후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한 동문들도 있다. 이들은 아예 역사현장에서 잊혀져버렸다. 전쟁은 동시대 누구에게나 미친 바람, 광풍이었다. 9·28 수복 후 이듬해 엄동에 1·4 후퇴를 하는 등 장기간 시달린 중부권 학교들과 달리 전북에는 그 바람이 머문 기간이 약간 짧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디서건 급우 친지를 잃은 피눈물 나는 절규는 마찬가지였다.
남 학도병
북 의용군
제 3절 충혼비 건립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자 본교에서도 적기(赤旗)가 내려졌다. 본교가 휴교 에 들어간 7월4일 후 약 3개월만이었다. 학도병으로 출전했던 400여 학생들이 드문드문 돌아오고 10월 3 일엔 임시학교 사무소가 유청 교장댁에 개설됐으며 이튿날인 4일 복교를 선언했다. 10월 21일엔 휴교 후 첫 직원회의를 풍남동 전주여중에서 개최했다. 본교는 국군 11사단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교와 함께 전장에서 스러진 전몰(戰歿) 꽃봉오리와 교직원들을 기리는 운동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북중·전고인 모두의 가슴에서 용솟음 쳐 터져 나왔다. 전몰 학도병과 순직 교직원의 위국단충(爲國 丹忠)을 기리는 충혼비(忠魂碑)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인공(人共) 치하에서 여러 차례 사경을 당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피 흘리는 제자들 생각에 끝내 지조를 지켰던 유청(柳靑) 교장의 의지는 한층 각별했다. 모교 후배이자 어린 제자들의 입대 상황에서 ‘가라, 말라’ 말도 못하고 차마 그들을 떠나보낸 스승의 심정은 언설로 이루 담기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들 모두의 뜻을 모은 충혼비가 1951년 9월 28일, 9·28 수복 1주년을 맞아 제막됐다. 정면(동 쪽)에 이승만(李承晩) 당시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 깊게 새겼고 후면(서쪽)에는 유청 교장이 쓴 비문이 새겨졌다. 전면 하단에는 당시 본교에서 국어과 교사이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시를 새겼다.
제 4절 최복수 준장 순국과 장의식
제 5절 6.25 참전 전주북중, 전주고등학교 학생 명단
대한민국 육군은 6·25 발발 43주년을 맞아 지난 2013년 6월12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1950년 6월 전주북중과 전주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동문 총 145명에게 ‘전주고등학교 6·25 참전용사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 패는 “위국헌신의 정신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눈부신 선진 조국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참전 학생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6·25 참전이 인정돼 감사패를 받은 동문은 다음과 같다.
제 6절 유청 교장 퇴임과 배운석,김영배 교장 부임
제 7절 교정 내 전시 연합대학교, 전북대학교 개교
제 8절 학도호국단 활성화와 정전 반대
학도호국단 운영위 발족
휴전반대의 함성
제 4장교가,교훈 제정, 장학회 설립
제 1절 교가, 교훈, 교기
교가
중·고 분리 학제 개편으로 인해 1951년 9월 1일 전주고등학교가 새로 개교하자 기존 북중과 다른 새 교가, 새 교훈이 필요하게 됐다. 8·15 광복 직후 1945년 10월 1일 정식 개교한 전북공립중학 교가인 “麒 麟(기린)의 높은 峰巒(봉만) 구름을 뚫고 ~”는 북중학교에서 그대로 사용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전주고등학교는 1951년 마침 낙향하여 전고에서 국어를 강의하던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 시인에게 새 교가 작사를 의뢰했다. 작곡은 역시 전고 음악 담당 박용흡(朴鏞洽, 1919~1976) 교사가 맡았다. 미당 서정주는 당시에 이미 한국 시단의 거목이었거니와 작곡자인 박용흡 교사 역시 동 경 중앙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인재였다. 경남 사천 출생인 그는 1946년부터 1951년까지 본교에 재직하며 전북 음악발전에 기여했다.
박 교사는 밝은 음색의 바리톤으로 6·25 전쟁 후 부산에 정착하여 부산여고, 경남여고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박 교사에게 가르침 받은 본교 원로 동기들은 아직 까지 박 교사 작사, 작곡인 ‘옹달샘’ 86)을 기억하고 있다. 마침내 교가가 완성되자 학생들은 새 전고 교가를 강당에서 학년별로 배웠다. 전란 와중에 쓸 만한 등 사시설 하나 없던 당시 사정상, 학생들은 악보는 물론 가사까지 일일이 노트에 받아써야만 했다. 당시 건 물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붉은 벽돌 강당(1940년 준공) 마룻바닥에 앉은 채로였다. 첫 부분인 “백두(白頭)와 금강(金剛)과”가 음악교사 입에서 나왔을 때 학생 일부에서 웃음이 나왔다. 접속조사 반복이 좀 어색하게 들렸던 탓이다. 이어 “태백(太白)과”가 나오자 웃음이 한층 커졌다. “~와 ~ 과 ~과”로 세 번 접속조사가 반복되자 그 다음 또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며 와르르 웃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가사를 끝까지 받아 쓰고 난 뒤엔 “과연!” 하는 탄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었다. 평범한 접속조 사 반복으로 역사와 전통, 스케일, 조국애를 표현한 대(大) 시인의 기량에 감탄한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교가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고인에 의해 애창되고 있다. 그런데 1절의 맨 끝 소절에 이르면 졸업 세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가사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풍운(風雲)을 뚫고”로, 어떤 이는 “풍설(風雪)을 뚫고”로 부른다. 연로한 동문들 간에 “분명히 1960년대까지는 ‘풍운을 뚫고’로 배워 불렀다”고도 하는데 어찌 해서 ‘풍설’로 바뀌게 되었는지 연유가 분명치 않다. 심지어 같은 횟수끼리조차 ‘풍운’, ‘풍설’을 두고 설왕설래가 다반사였다.87) 정식 절차를 밟아 개정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원래 가사를 확인하자는 여론이 일자 시인이자 교수인 김해성 동문(당시 서울여자대학교 교수)이 지난 1996년 9월26일 스승인 미당 서정주 시인을 방문, 직접 문의를 했다.
이에 따라 이후 전고 교가는 공식적으로 ‘풍운’으로 통일됐다.
교훈
- ‘자유·박애·지성·노력’과 ‘자강·자율·자립’ 전북공립중학교 제2대 김가전 교장은 1946년 4월1일 부임하자마자 일제 강점기 교훈이던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을 폐기하고 ‘자유·박애·지성·노력(自由·博愛·至誠·努力)’을 새 교훈으로 제정했다. 이는 1951년 9월 중·고 분리 전까지 북중과 전고에서 한동안 같이 쓰였다. 그러다 1952년 말 전주고등학교 제4대 배운석 교장 부임 이후 전고는 새 교훈인 ‘자강·자율·자립(自彊·自律·自立)’을 따로 제정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북중 교훈 ‘자유·박애·지성·노력’은 1959년까지 이어지다 배운석 전고 교장이 북중 교장(제9대)을 겸임한 1960년 이후엔 전고와 같은 ‘자강·자율·자립’으로 통합, 변경됐다. 북중학교 학도호국단이 발행한 교지 <북중> 창간호(1952년)부터 7호(1959년)까지는 속 표지에 옛 교훈(왼쪽·1952년)이,8호(1960년)부터는 전고와 통합된 새 교훈(오른쪽·1960년)이 인쇄돼 있다
모표
모자에 붙인 모표는 1950년 전북공립고등학교(全北公立高等學校, 2학급)가 전주고등학교로 개칭되면서 이전까지 학생들이 달았던 ‘高’(고)자를 삼각구도의 노송 솔잎 한 가운데 ‘高’자를 배치한 현행 디자인으로 확정했다. 당시 유청(13회) 교장은 무려 10만원을 걸고 새 모표 디자인을 교내 현상 모집했다. 현재 화폐가치로 치면 1,000만원이 넘는 거금이었기에 응모자도 많았으나 정작 당선자는 시인이던 전고 국어교사 이철균 동문(21회)이었다. 시인의 디자인이 모표로 확정되던 상황을 유청 당시 교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교복
전고는 1951년 9월 신학교 개교와 함께 이미지를 쇄신하고 명문 전고 신입생으로서 자부심을 기른다 는 의미에서 일제 잔재인 ‘쓰메 에리’ (=‘호크’ 식) 대신 노타이 식의 깃을 단 교복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 는 학생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해 1년 후 원상 환원, 1983년 3월 교복 자율화 전까지 ‘호크’ 스타일을 입 게 되었다.
교기
역사와 전통의 상징인 푸른 바탕에 백선(白線), 그리고 그 중앙에 황금빛 ‘노송 모표’가 그려진 교기는 1951년 모표 제정과 동시에 제작됐다.
전고인들에게 무한한 자부심과 영예의 상징으로 길이 가슴 속에 새겨지는 이 교기는 제3대 유청(柳靑) 교장이 제정하여, 1952년 11월 7일 전고 제4대 배운석 교장 취임식에서 새 교기로 전달했다.
제 2절 장학생 설립과 시행
개교 34주년을 넘기고 제30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도 전주고와 북중에는 장학제도가 없었다. 전라북도는 물론 이웃 전남과 충남 등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명문이었지만, 수석 입학생에게조차 장학금이나 학비 감면 혜택이 없었고, 오히려 기부금 명목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돈을 징수해 왔다.
이를 통감한 전주고 제4대 배운석 교장은 결단을 내려 장학회를 설립하고, 다음과 같이 장학회 규약을 제정했다. 이 규약은 1953년 10월 1일부터 시행됐다.
전주고등학교 장학생 규약
전주고 장학생
북중 장학생
3절 교육방침, 지도목표
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가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됨에 따라 1950년대에는 정부와 교육 지자체의 교육 방침과 지도 방침이 수시로 하달되었다. 각급 학교들은 교훈과는 별도로 교사 지도 방침과 목표 등을 강조해 교육의 대강을 명확히 하려 했다.
당시 교지인 **<북중>**과 **<전고>**에는 이러한 노력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1950년대 초반 교지 앞부분에 필수적으로 인쇄된 ‘본교 학사 지도 방침’, ‘본교 교육의 목표’ 등이 그 반영이다. 이러한 구호적인 분위기는 1960년대 국민교육헌장으로 이어지는 전초가 되며, 시대가 요구하는 목표와 그 진지함을 엿볼 수 있다.
새 교장이 부임할 때마다 교내 지도 중점, 방침, 목표 등이 바뀌었지만, 1950년대에는 기본적으로 ‘도의’(道義), ‘생산’, ‘건강’, ‘체력증진’ 등이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다. 특히 물자가 열악하고 식량이 빈곤한 전시 상황 아래서 학생 건강은 국가사업에 비견될 정도로 중시되었다.
다음은 북중과 전고 학도호국단이 펴낸 1950년대 중·후반 교지에 나타난 교육 방침과 목표 등이다. 전란 와중에 구호적 색채가 짙었던 1950년대 초반의 교육 방침과 지도 목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세하게 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