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970년대의 전고·북중 =

제1절 시대의 서막 ― 전고, 전국 첫 유신반대 데모

1. 10월 유신, 그들을 격동시키다

1961년 군사 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강압적인 경제성장 드라이브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러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집권세력은 1968년 3선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장기집권 의도를 노골화했다. 갖은 무리한 수단으로 3선 개헌 통과에 성공했으나 이마저 모자라 임기 말이 다가오자 박정희 정권은 아예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을 획책하기에 이른다. 바로 ‘유신헌법’ 제정이다.

또 다른 헌정 쿠데타인 유신헌법 제정에 야당과 국민 불만이 들끓자 정부는 이를 누르기 위한 초강력 수단으로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내용은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대학은 휴교시키며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논의를 할 경우 국민 누구에게나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통일과 안정이었으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을 총을 들이대고 국민들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자유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급서했다.

계엄령 선포 하 전국 주요 지역에 탱크부대가 주둔하고 군인들이 관공서, 은행 등 정문에서 총칼을 번쩍이며 출입자를 주시하던 강압적 상황에서 국무회의는 유신헌법 개헌안을 발의, 공고했다. 이에 대한 추인 격으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11월 21일로 예정됐으나 이는 이미 통과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1월 초부터 거의 매일이다시피 유신헌법 ‘찬성’과 ‘통과’를 외치는 관제 데모가 전국에서 빈발했다. 전고에서도 전주시내 통반장 수천명이 모여 각색 플래카드 수백 개를 들고 운동장을 꽉 메운 채 학생들 수업엔 아랑곳 없이 대낮부터 시끄럽게 확성기로 ‘유신’을 외쳐댔다.

대학 입시를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전고 3학년생(전고 50회)들은 입시 공부에 여념 없었으나 교실에서 배운 상식에 반하는 이 같은 정치 폭거, 소음, 불합리에는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이미 3년 전인 1969년 북중 3학년생(북중 47회) 시절에 ‘3선 개헌 반대’ 구호를 외치며 교실을 뛰쳐나와 운동장으로 진출하던 전고 선배(전고 45, 46회)들을 여러 차례 보아온 이들이다.

당시 전고 3학년으로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한 장영달 동문(45회)에 따르면 교사들의 적극적 만류로 교외 진출에 실패했다 한다. 이들의 시위 기미를 미리 감지하고 학교 당국이 하루 동안 휴교 조치를 할 정도로 당시 전고 학생들의 정치의식은 높았다. 그러나 ‘3선 개헌’ 당시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비합리적 상황이 3년 후 코앞에서 다시 연출되고 있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모 고등학교 교사 등 몇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학생들은 유신헌법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압살임을 느꼈으나 대학입시를 위해 그 ‘정당성’을 외워야 했다.

역사 담당 등 일부 교사들은 정국에 관한 학생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답변 대신 유구무언,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헌법을 사석에서 비판해도 선고 가능한 ‘7년 징역’은 학생과 교사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인에 대한 족쇄였다. 박정희 당국은 각급 공무원 뿐 아니라 전주 시내 중·고등학교 교사들까지 강제 동원했다. 교사들은 당시 전주 구도심 중심인 전주 시청에서 종합 경기장까지 간선도로를 따라 걸으며 유신헌법 찬성 시위를 했다. 당시 이를 지켜보던 이들에 따르면 전고 교사를 비롯한 그들 표정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았다고 한다.

마침내 계엄령 선포 한 달 여 후인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강행된 유신헌법은 투표 참여율 90.9%, 찬성률 91.5%로 통과됐다. 전반적으로 코미디였으나 박정희 독재정권에겐 기쁨과 희극, 민중들에겐 절망적인 비극이었다. 개교 이후 반세기 이상 항일과 반공, 반독재로 일관하며 불의를 외면치 않았던 전고인들에게 역시 이는 비극의 절정이었다.

11월9일 하숙집에 모이다 /

1972년 11월 9일, 전고 학생들의 유신헌법 반대 데모 모의

1972년 11월 9일 저녁, 전고 3학년생인 최규엽과 소병훈의 전고 뒤 노송동 하숙집에 전고 3학년 학생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최규엽의 방에는 소병훈, 채수찬, 박종영, 최수열, 오용석, 최규엽 및 당시 전고 학생회장인 2학년 은세창이 모였다. 이들은 유신헌법 반대 데모를 모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최규엽과 소병훈은 평소 진보적 잡지 ‘다리’, ‘신동아’ 등을 보면서 시국 토론을 자주 하던 사이였다. 10월 17일 유신헌법이 공고되자마자 최규엽은 분개하여 소병훈에게 유신헌법 반대 데모를 하자고 제안했으며, 소병훈도 이에 흔쾌히 승낙했다. 두 사람은 상황을 살피고 있던 중, 바로 뒷집에서 하숙하고 있던 박종영이 “징역 7년 살아도 좋으니 한 번 해 보자”면서 힘 있게 합류했다.

마침내 세 사람은 11월 9일 소병훈과 최규엽 하숙집에서 유신 반대 데모 모의를 하기로 하고, 각자 역할 분담을 통해 학생 ‘동지’들을 모으기로 했다. 특히 소병훈의 연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이들은 모포를 쳐서 창호지 문을 가려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고, 반(反)파쇼 선언문 초안과 플래카드 구호 등을 작성했다. 스피커 확성 앰프와 준비물 등 역할 분담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구체적 행동 계획을 합의했다.

훗날(1974학년도) 서울대 자연계 입시 전체수석을 한 수재 채수찬은 시위를 성공시키기 위한 ‘2원 전략’을 제안했다. 이 전략은 은세창이 학생회장 자격으로 교장에게 ‘전고 전교생 유신헌법 지지 시위’를 지난번처럼 전주 시청에서 하자고 제안해 교장과 교사의 관심을 딴 데로 쏠리게 한 뒤, 주동자들은 시위 준비와 실행에 전력하자는 것이었다. 3학년들은 2학년 은세창에게 이 제안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물론 비밀을 지킬 것도 약속했다. 이는 2학년 후배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은세창도 흔쾌하진 않았지만 동의했다. 이와 같은 ‘2원 전략’을 구상한 이유는 삼엄한 상황에서 교문을 박차고 나가 유신 반대 데모를 하는 것이 결코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고생 전체가 참여할 수 있는 위력적인 시위를 위해서는 이것이 유일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전략은 은세창 학생회장의 소극적 행동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11월21일 운동장으로 뛰쳐 나가다

11월 19일, 전국 예비고사가 치러졌고 11월 21일에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유신헌법 통과가 확실시되고 영구 집권이 현실화된 11월 21일 밤, 전고 학생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내일(22일) 하자’고 굳게 맹약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시위를 계획했다.

채수찬, 소병훈, 최수열 등은 22일 아침 1교시 직후 교무실에 진입해 방송실을 점거하고, 채수찬이 ‘유신 반대 반파쇼 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했다. 이 신호를 받아 전교생이 교실을 나와 전주시내에서 유신 반대 데모를 벌일 계획이었다. 박경희는 앰프와 플래카드를 준비하고, 글씨를 잘 쓰는 박종영이 플래카드를 작성했다. 플래카드 문구는 ‘파쇼헌법 망국헌법 유신헌법 반대한다’로 설정되었으며, 앰프와 플래카드는 오용석과 박경희가 전고 후문을 통해 미리 운동장으로 반입하기로 했다. 또한 데모 시 배포할 삐라도 미리 준비되었다.

최규엽은 1교시 직후 도서관 시청각실에 1, 2학년 대의원들을 소집하여 반파쇼 선언문이 각 교실로 방송되면 각 학급 학생들을 독려해 운동장에 집결할 수 있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박종영은 황의인, 김점동 등과 함께 3학년 각 반 교실에 들어가 3학년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동원했다. 황의인은 채수찬이, 김점동은 오용석이 각각 맡아 데모 주동에 동참토록 권유하기로 했다.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나, 실행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착오가 발생했다. 박경희가 하숙비를 털어 준비한 시위 용품을 전고 후문을 통해 아침부터 나르는 것을 동네 주민이 보고 중앙정보부 전주 분실에 신고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즉각 전고 교무실로 전화를 걸어 “지금 전고 운동장에 학생들이 나와 있는가, 데모를 할 것 같으니 빨리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교사들은 급히 교문과 방송실 캐비넷을 잠그고 학교 전체 교사들이 신속한 감시 진압 체제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진두지휘한 이는 당시 채수찬의 부친이자 전고 수학 담당 채용석 교사였다.

교무실로 진입한 채수찬, 소병훈, 최수열 등은 교사들의 저지에 부딪혔다. 소병훈은 의자를 들어 올리며 “선생님들, 이건 나라를 살리는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움직이시면 이 의자를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이는 대단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행동이었다. 소병훈의 ‘위협’을 틈타 채수찬이 선언문을 읽으려 방송실로 달려갔으나, 방송실 캐비넷이 잠겨 있어 실행할 수 없었다.

오용석과 박경희는 앰프와 플래카드 등 시위용품을 갖고 신속히 이동해 교사 정면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로 가져가 학생들이 나오길 기다렸으나, 선언문이 방송되지 않아 학생들의 합류도 실패했다. 플래카드를 본 일부 학생들이 교실 베란다에 나와 웅성거리자 교사 몇 명이 급히 운동장으로 나와 시위용품을 빼앗으려 했다. 오용석과 박경희는 시위용품을 지키기 위해 도망쳤으나, 결국 시위용품을 압수당하고 말았다.

3학년 1반은 황의인의 열심히 독려로 교실 문을 나와 분수대 쪽으로 진출했다. 황의인은 짧은 시간 안에 급우들을 설득하여 운동장 진출을 시도했으나, 다른 반 학생들이 나오지 못하고 담임 교사의 적극적인 만류로 인해 3학년 1반 학생들은 교실로 돌아갔다. 황의인은 채수찬과 시국 토론을 하며 유신헌법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채수찬의 ‘동참’ 제안에 적극 동의하고 학우 독려에 나섰다.

최규엽은 도서관 3층 시청각실에 올라가 1, 2학년 대의원들에게 시위를 선동하려 했으나, 최득엽 교장이 교사 여럿을 대동하고 올라와 대의원들에게 교실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최규엽은 데모의 필요성을 설명했으나 교사 압력에 밀려 대의원들은 하나둘 시청각실을 떠났다.

박종영과 김점동도 교실에서 학생들을 선동하려 했으나, 담임 교사가 이미 도착해 교사 저지로 성사되지 못했다. 김점동은 다른 교실로 들어가 학생들을 독려했으나, 친형이 파출소 소장으로 와서 김점동을 파출소로 연행해버렸다.

이날 전고의 유신헌법 반대 시위는 결국 주민의 신고로 인해 계획대로 교문을 뚫고 시내까지 확산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들의 실행력과 의지는 대단히 강고했으며, 훗날 많은 동기들이 데모 주동 학생들에게 "왜 내게는 사전에 귀뜸도 안 했나, 서운하다"고 말했다. 당시 전고인들의 정의감과 연대 의식은 매우 높았다.

3명제적, 3명 무기 정학

11월 22일, 전고의 유신헌법 반대 시도 후, 학교측은 학생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주동 학생들을 평소처럼 등교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시위 이틀 후인 11월 25일, 계엄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학교측은 데모 주동 학생들을 교장실로 집합시켰고, 이들은 담임 교사 인솔 하에 전주 경찰서로 인계되었다.

소병훈, 채수찬, 최규엽, 박경희 동문은 전주 경찰국 반공분실의 지하실로 끌려가 날이 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오용석, 박종영, 최수열 동문도 여관에서 밤새 조사를 받았다. 최규엽 동문은 당시 반공분실에 대한 설명과 조사의 강도에 대해 회고했다. 그는 “그곳은 여관으로 위장해 있었고, 고문 등 비밀 조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수사관들은 ‘김대중이 시켰냐’고 윽박지르며, 물고문은 없었지만 급소를 가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소병훈 동문은 조사를 받는 도중 담당 형사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장교가 권총을 꺼내 머리에 대며 협박하는 상황도 있었다. 최규엽 동문은 취조실에서 무릎을 꿇고 태극기를 보고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박경희 동문 역시 유사한 대우를 받으며 새벽까지 조사를 받았다.

계엄법에 따르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언행은 징역 7년 이상의 처벌을 받을 수 있었으나, 이들 학생은 학생 신분과 시위가 미수에 그쳤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최득엽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데모 주동 학생들을 형사처벌로부터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당시 도지사, 경찰국장, 교육감 등 전고의 선배들이 이들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소병훈 동문의 부친은 청와대 고위층과 계엄사령관을 만나 주동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계엄사 측은 비상계엄 하에 고등학생들이 유신 반대를 외친 사실이 전국에 퍼지는 것을 우려하여 학교가 책임지는 선에서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학교측은 소병훈, 채수찬, 박경희 세 학생을 제적 처분하고, 최규엽, 박종영, 오용석 학생은 무기정학, 최수열과 김점동 학생은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제적된 학생들은 1년 후 학교의 배려로 다시 복학해 졸업했다. 무기정학 당한 학생들은 정시 졸업했으며, 최규엽 동문은 이후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채수찬과 소병훈 동문은 각각 열린우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전고의 정의로운 기풍은 50회 동문들의 유신헌법 반대 시도로 또 한 번 극명하게 드러났다. 당시 시위는 전국의 어느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전고의 ‘유신 반대’는 대한민국 전체의 함성으로 확산되었다.


제2절 ‘혼식 위반’ - 군사문화에 억눌린 교육현장

일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답게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 하 각급 학교 교육도 군대식 체제를 갖추길 원했다. 전고를 비롯한 전주시내 남·녀 고등학교들은 1970년대 초·중반 일주일에 두 차례씩 운동장에서 전교 조회를 했다. 하나는 교장이 주최하는 교육과 훈시 위주의 조례며 다른 하나는 전교생이 교련복을 입고 교관으로부터 받는 교련조회였다. 1970년대엔 집단 체조, 마스게임, 카드섹션 등이 많았다.

1973년 여름 전주종합운동장에 카드섹션 연습을 위해 전주시내 남녀 고등학교 1, 2학년생이 집합했다. 뙤약볕 아래 연습도 중 한 고등학교가 계속 틀리자 교육청 담당 장학관이 해당 고등학교 교감을 불렀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교감에게 ‘열중 쉬어, 차려’를 반복시켰다. 학생들은 카드 섹션을 멈추고 이를 쳐다봤다.

군사문화와 관료문화는 지역 명문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1973년 6월 16일 전고 테니스장 준공식 때 일이다. 오전에 교문 앞 히마라야시다 나무 등교길에 교장과 교감, 보직교사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특히 최득엽 교장은 손에 잘 개어진 수건을 들고 있어 학생들 눈길을 끌었다. 얼마 후 교문으로 검은 색 관용차 몇 대가 들어섰다. 그중 선두 차량이 교문에서 일시 정지를 하자 최득엽 교장이 90도로 절을 하며 예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선두차는 불과 몇 초 정지한 뒤 곧바로 창문을 올리고 등교로를 따라 체육관 뒤 테니스 장으로 직행했다. 최득엽 교장은 교문 앞에서 선두차 귀빈과 인사 나누고 그의 권유로 승용차에 동승, 테니스장까지 갈 것으로 알았던 듯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최 교장을 뒤로 한 채 검은 관용차가 유유히 떠나가자 학생들이 보건 말건 최 교장은 승용차 뒤를 따라 달렸다. 손에 수건을 든 채였다. 교문에서 달려 숨이 턱에 차게 테니스장에 도착했을 때 귀빈은 이미 차에서 내려 테니스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최득엽 교장은 그에게 다시 경례에 가까운 인사를 한 후 수건을 바쳤다. 이 귀빈은 당시 문교부 장관 민관식 씨였고 이날 정계 거물 이철승 동문(19회)과 전고 테니스장 개장 기념 경기를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최 교장은 이 경기를 위해 수건을 준비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 자신을 따돌리고 앞서 가는 관용차 뒤를 따라 달린 것이다. 최 교장의 과도한 영접은 1969년 대화재 후 신축 본관, 수영장, 테니스장 등 전고 재건을 위해 전폭적으로 시설을 지원해준 문교부 장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권 하 최고위 관료는 명문고 교장의 이 같은 성의를 학생들 면전에서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당시 관료들이 교육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최득엽 교장 후임인 김병문 교장은 상식 밖의 불이익을 받고 아예 전고를 떠나야 했다. 학생들 도시락에 보리가 적게 섞인 데 대한 관리감독 소홀이 이직 이유였다.

1960년대 군사정부는 통일벼를 보급하는 등 쌀 생산을 독려했으나 쌀은 태부족이었다. 정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잡곡 혼식(=섞어먹기), 분식(=밀가루 음식먹기)의 건강상 이점을 선전하며 1969년 1월 23일 행정명령 고시로 전국 각급학교에서 혼·분식을 의무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각급 학교 담임 교사들은 일주일에 몇 차례씩 학생들 도시락을 일일이 까보며 혼식인지, 쌀밥인지를 확인했고 혼식의 경우에도 보리 및 잡곡이 25% 이상 섞였는지를 계산했다. 이를 위해 도시락의 보리알, 콩 등 수를 헤아리고 혼분식 일지를 매일 작성했다. 쌀밥 도시락을 싸온 학생은 부모까지 불려가 ‘재발 방지’ 각서를 제출하는가 하면 ‘도시락 혼식’ 충실도가 성적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고 제11대(1975.3.1.~1976.8.9.) 김병문 교장은 정부의 ‘혼식’ 방침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1976년 8월, 부임 1년 5개월 만에 타 학교로 전출됐다. 같은 이유로 당시 교감과 3학년 담임 교사 세 명 역시 본인들 뜻과 상관 없이 전고를 떠나야 했다. 다음은 ‘혼분식 위반’으로 징계, 감봉 당하고 몇 달 후 이임인사 한 마디 못한 채 모교 교단을 떠나야 했던 영어 담당교사 박형규(34회) 동문의 증언이다.

인용되는 말을 적어주세요.

한 많은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듬해 정식으로 허가받은 쌀 막걸리가 나왔다. 김병문 교장은 군산상고 교장으로 발령났다. 전임과 후임이 각각 5~6년씩 재임했던 것에 비해 그의 재임기간 1년 5개월은 이례적으로 짧았다. 그는 정년퇴직 후 상산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국어 담당 채무산 교사는 임실 청웅중학교 교장을 지냈고 박형규 동문은 전주 교육대 교수로 퇴직했다. 이와 달리 사회 담당 윤명한 교사는 이직 후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작고해 한을 남겼다.

군대식 획일주의, 지시복종 문화가 교단까지 옥죄던 시절이었다. 교사와 학생들의 희생, 불만, 의기분출 등으로 1970년대 전고는 내면적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사회 전체가 수출과 경제성장으로 내달렸던 것과 같이 전고 역시 학력, 시설 면에서 이 시기 비약적인 성장과 풍요의 시기로 줄달음쳤다.

제3절 건설과 재도약

전고는 1970년대를 맞으면서 본격적인 안정과 성장 궤도에 올랐다. 4·19와 5·16 및 대화재 등 교내외 시련이 이어진 1960년대를 뒤로 하고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무엇보다 대화재로 교사(校舍)를 잃은 지 불과 1년도 안 돼 현대식 매머드 교사가 완공돼 학교 면모를 일신했다.

1970년 6월 16일 51주년 개교기념일에 본관 3층 37개 교실과 신관 3층 18개 교실의 준공과 아울러 분수대 개수, 정원 정비 등을 마치게 되었다.

화재 후 8개월간 학생들의 복구 노력은 실로 눈물 겨웠다. 전시를 연상케 하는 열악한 임시시설에서 오전, 오후로 나뉘어 수업받으면서 그나마 일부 시간을 할애해 벽돌 자재를 나르고 교내 타다 남은 잔재를 말끔히 치우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같은 학생 노력과 함께 대화재 직후 부임한 제10대 최득엽(崔得燁·14회) 교장은 학내외 및 문교당국 등으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이끌어 단기간 내 현대식 교사 신축을 달성했다. 동시에 그는 공부 일변도만 강조하던 전고 풍토와 달리 학생들의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외치는 등 뛰어난 리더십과 비전으로 전고의 물적·심적 토대를 일거에 혁신시켰다.

교사가 소실된 공터에 들어선 현대식 교사는 두 동 모두 전관에 보일러 시설을 하는 등 여느 국내 중·고교보다 나은 당시로서 ‘초(超)고교급’ 시설을 갖췄다. 신축 교사와 함께 무도관, 분수대, 수영장, 테니스 코트 등 각종 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1970년대 초반 훌륭한 시설은 ‘반(半)세기 명문’ 북중·전고의 도약을 가속시킬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시설을 완공하고 개교 기념행사 등을 가질 때마다 문교부장관과 국회의원 등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여, 전고가 전국 굴지의 명문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1970년대는 전주북중학교 폐교의 아쉬움을 남겼다. 문교부의 중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라 1972년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은 전주북중학교는 1919년 개교 이래 53년 간 숱한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전주북중 동창뿐 아니라 전주 시민들 역시 폐교의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전북을 이끌어온 인재의 산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1970년대는 또한 전국 명문고끼리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대학 합격 성적이 단연 뛰어난 ‘학력 제일’ 전고의 명성을 한껏 떨친 시기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대 합격자 수가 전국 톱 랭킹에 오르는 쾌거로 동창과 학부모 등 관계자를 흐뭇하게 했다. 이 같은 학력 성과로 인해 전남과 충남·북 심지어는 서울에서까지 모교에 유학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 노송동 일대 하숙집이 붐비기도 했다.

한편 전고·북중 학생들의 과외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미술과 문예, 음악 등 특별활동 부서가 확대 정비되면서 전국 규모 대회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뒀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농구와 럭비, 축구, 야구부가 전국대회 우승과 상위 입상을 보고했다. 이 같은 성과로 전고는 학업뿐 아니라 예체능 분야에서도 전국 명문고로서 지위를 굳혔다.

1970년대는 이처럼 모교가 대화재 시련을 극복하고 전통이라는 탄탄한 반석 위에서 학력, 문화, 체육 등 다방면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뜻깊은 시기였다.

제4절 안정된 학교

70년대 초반 교육목표

대화재 이후 폐허를 딛고 일어선 모교는 1970년대에 들어 학교 발전을 위한 각종 계획들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면서 영재 육성을 통해 모교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교육 목표를 세웠다.

1971학년도의 교육 목표를 살펴보면 우선 일반 목표로서 첫째, 민족적 주체의식이 강하고 반공정신이 투철한 인간을 기른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으로 이를 구현해 나가기 위해 민족적 주체의식과 반공정신, 애국애족심의 함양 등 각종 세부적 지침들이 마련돼 시행됨으로써 큰 성과를 거뒀다.

둘째, 민주적이며 신의 있고 예의 바른 인간을 육성한다는 것도 교육 목표의 하나였다. 구체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상은 협동심이 강한 인간, 신의 있는 생활태도의 육성, 예의 바른 태도의 육성이었다.

셋째, 창의성을 가지고 자립하는 인간을 기르는 것이었다. 당시 교직원들은 학생들의 창의성을 개발하고 개성을 신장하며, 기초 학력을 배양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과학적으로 생활하는 인간의 육성 교육 목표 중 하나였다. 이는 학생들이 자연을 이해하고 탐색하는 태도를 가지며 매사에 과학적 태도를 잊지 않도록 함으로써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신체 건강하고 공중위생을 지키는 인간을 육성한다는 내용 역시 교육 목표에 포함됐다. 특히 명문 일류고로서 학업에만 편중해 나감으로써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신체 건강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이밖에도 1971학년도 기본 교육 목표에는 민족 문화를 이해하고 정서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생활 경제를 실천하는 인간 등 구호도 나타나 있다.

1972학년도 교육 목표는 전년도와 같았으나 구현하는 인간상은 ‘민주시민으로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른다’고 되어 있다. 특히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에서 발전을 도모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의 재학생들은 지난날 학교 성적에만 매달려 인간 교육이 소홀했다는 학교 당국의 자성과 함께 바람직한 인간상 정립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재학생들은 학교의 교과 이외에도 교양 서적 탐독과 체육 ‘1인 1기 기르기’ 등에 시간을 할애했다

다시 불붙은 면학열기

당시 교사들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명문 전주고를 중흥시켜야 한다는 중책을 자각하고 어느 때보다도 학생 지도에 열과 성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들 역시 이러한 교사들의 노력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학생과 교사들은, 동창과 학부모는 물론 일반 시민과 국민들까지도 화재 이후 ‘전고 중흥’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한시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서관은 연일 학생들로 가득 찼고 교실마다 뜨거운 면학 열기로 달아올랐다. 이러한 노력 결과, 1970년대 초반 대학입시에서 예년에 못지않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72년 당시 전고생들의 출신교 분포는 2, 3학년의 경우 동일계 무시험 진학으로 북중 출신이 전체의 약 65% 이상을 차지했으며 전주 시내 출신이 90%에 이르는 높은 비중을 점했다.

이러한 출신교나 출신지역과 대조적으로 당시 우수 학생들 가운데는 전북 도내 벽지 출신이 많아 ‘유학파’의 무서운 집념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최득엽 교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학교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아침 조회 때마다 ‘예스냐 노냐를 분명히 하라’는 말을 되풀이 강조하는 등 분명한 행동거지로서 교내 기강을 바로잡았다.

교사들 수준도 크게 높아 전고 중흥 분위기를 가속시켰다. 다년간 교육 경력을 가진 우수 교사들이 운집해 있던 당시 모교는 10년 이상 도시 학교 근무자의 순환근무제로 일부가 바뀌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가장 우수한 진용으로 짜여져 전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학생들은 이 같은 스승에게 존경심을 갖고 따랐으며 교사들 역시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실력으로 학생들을 인도했다. 이러한 점을 증명하듯이 서울대학교 주최 수학 경시대회를 비롯한 독일어 경시대회 등 각종 학력 경시대회에서 전고 인재들이 당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함으로써 매번 화제가 됐다. 당시 매주 월요일 열린 조회 시간은 이러한 상을 전교생에게 알리는 박수와 축하의 장이었다.


제5절 새 교사(校舍), 새 시설

전주시 노송동 488번지에 자리한 모교 신축 교사는 전체 면적이 1만8천8백 평에 달했다. 육중한 돌기둥의 문을 들어서면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각 건물과 건물 사이를 사통팔달 통과했다.

특히 운동장 북편에는 지나온 수십 년의 역사를 증언하는 히말라야시다가 줄지어 서 있었고 체육관 앞에는 철쭉 동산이 조성돼 있었다. 교문 정면에 북중·전고의 정의로운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자리 잡고 신축 본관 앞에는 푸른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대가 세워졌다. 당시로서 이러한 시설은 전국 최상 수준이었고 한때 전국 각지에서 전고를 견학하기 위해 올 정도였다.

특히 본관 앞 ‘프랑스 식’ 정원과 그 중앙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대는 당시 대화재 좌절을 딛고 도약하려는 북중, 전고 분위기의 상징과 같았다. 국어교사 최 형(崔 炯) 시인은 그 분위기를 이렇게 노래했다

◇산맥(山脈)처럼 최 형

줄기마다 휘내달은 세월 아득히 하늘을, 하늘만을 우러러 푸러러 오고 하고한 풍운을 훑어 내리며 훑어 내리며 성좌를 헤아리는 밤. 문득, 불길로 덮쳐 온 시련도 다져 내고, 줄기차게 치오르는 분수의 새 계절! 빛나는 아침 가득히 산맥처럼 햇살을 두르고 서서, ‘노송원’은 하늘만큼 천추(千秋)에

슬기로와지리다.

최 형 교사의 노래처럼 대화재 후 1970년대 초반 전고는 매일 새로워지고 매일 빛났다. 1970년대 교내 들어선 주요 새 시설은 다음과 같다.

  • 어학 실험실(LAB)

전주고는 시청각 교재 교구를 이용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보고 1971년 9월 전북도내 중·고교 처음으로, 전국에서도 몇 안 되는 어학 실험실(랩·LAB)을 갖췄다. 이 랩 시설은 전북 도내 일부 대학에 있는 것보다 최신이며 성능도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이 랩 설비 덕으로 전고생들은 외부 소음이 적고 방음이 잘 된 교실 안에서 녹음된 외국인의 대화 또는 발음을 듣고 자신의 발음과 비교함으로써 그릇된 발음, 억양, 강세 등을 교정하고 정확한 언어를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전고는 랩실을 도입하여 최신 교육 기술을 적용했다. 랩실은 원래 레코드에서 나오는 소리가 학생들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한 문장씩 자동적으로 정지되는 휴지 기능과 반복 연습 기능 등을 갖추고 있어 타 학교의 부러움을 샀다. 총 72개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고, 한 학급 전원이 들어가서 1학년 영어 수업이 매주 2시간씩 진행됐다. 정규 수업 외에도 회화반 등을 중심으로 랩을 활용함으로써 전고인의 회화 실력은 급신장했다.

  • 보일러실

전고는 보일러실을 도입하여 전북 고등학교 중 최초로 스팀 난방을 실시했다. 보일러 공사는 본관 전체에 걸쳐 설계되었고, 1971년 9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보일러실의 크기는 23평으로, 당시로서는 꽤 큰 공사였으며, 공사비만도 150만 원이 투입되었고 굴뚝의 높이도 25m에 달했다. 이 굴뚝은 ‘첨단 전고’의 상징처럼 한 동안 서 있었다.

  • 무도관

무도관은 총 공사비 1천9백여 만 원을 들여 1971년 9월 26일에 준공됐다. 연건평 288평의 2층 건물로, 1층은 무도관으로 사용되고 2층은 식당 겸 반공관으로 활용되었다. 개교 초 전주고보 시절부터 정식 과목으로 유도를 채택하고 신체 단련을 중시한 전고에게는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 대수영장

대수영장은 1972년, 전북 수영 발전을 위해 최득엽 교장과 이철승 동문 등의 열성 어린 노력과 민관식 문교부 장관의 지원으로 도내 유일의 국제규격 대수영장이 교내에 마련됐다. 10개 레인과 50m 길이의 대수영장에 민관식 장관은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신체에 깃들며 강인한 체력은 활달한 기상과 젊은이의 꿈을 가꾸어 나라와 겨레에 이바지할 학생 제군의 수련도장입니다’라고 석각으로 새겨 수영장 건설의 의미를 밝혔다. 전고 대수영장은 여름철에 개방되어 여고 등 각급 학교의 수영 수업 교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수영장에서 훈련한 전고 수영부는 1974년 제55회 전국체육대회 남고부 평영 100m와 200m에서 당시 3학년 이상호 동문이 3위에 입상하여 모교의 명예를 높였다.{{[[틀:{{{1}}}|{{{1}}}]]}}

  • 테니스 코트

테니스 코트는 1973년 본관 북쪽 체육관 뒤에 2면으로 조성되었다. 테니스 광인 민관식 장관과 이철승 동문의 도움으로 마련된 클레이 코트에서 전고생들은 고급 스포츠인 테니스를 즐겼다. 아울러 오원식, 김춘호 등의 테니스 선수의 활약으로 전고는 전국체육대회 남고부에서 네 차례나 우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973, 1975, 1976, 1978년).

  • 온실

본관 서쪽에 자리잡은 온실은 1978년 12월30일 공사비 1백47만원을 들여 새로 지었다. 온실의 크기는 15평으로 사철 꽃을 피워 메마르기 쉬운 남고 학생들 정서교육에 도움을 줬다. 또한 학교 화단 조성을 위한 꽃묘 제공처가 되기도 했다.

제6절 학생활동과 의식구조

각 부 활동상황

학업 외의 면에서 1970년대는 학생 활동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다. 특히 최득엽 교장의 ‘전인교육’ 소신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소양을 장려해 ‘교양 전고인’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체육부

체육부는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테니스의 경우, 창단 1년 만에 전국을 제패하는 영광을 누렸다. 1974년에는 광주에서 열린 전국 춘계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단식, 복식, 단체 우승을 독차지했으며, 한국 주니어 선발대회와 한·일 고교 교환 경기 최종 선발 대회에서 3명이 선발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과는 농구, 럭비, 수영부와 함께 ‘스포츠 전고’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교육 프로그램 참여

전주고 재학생들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1974년에는 독일 유학기, 미국 레슬링 전지훈련 참가기, 일본 방문기 등 해외 교육 프로그램 참가기가 교지에 게재되었다. 학생들은 외국 고교생들의 자유로운 생활을 관찰하고 한국 교육의 개선점을 모색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전고는 재학생들의 자기완성 노력과 교직원, 동창들의 후원에 힘입어 계속해서 발전을 이어갔다.

미술부

미술부의 활약도 눈에 띄었다. 1963년 창설되어 10년이 된 1973년, 미술부는 19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었다. 1973년 4월 20일과 21일에는 조선대학교 주최 미술대회에서 2명이 우수상, 1명이 특선에 입상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1973년 미술대회 입상자: 경희대학교 미술대회: 최고상 - 김윤진, 김호석, 양방운, 유경원, 박인현 / 우수상 - 김철, 김익규 / 특선 - 최원, 안태종, 김홍철, 이승우 수도여자 사범대학 미술대회: 최고상 - 김철 / 준특선 - 김충순, 안태종, 유흥배, 박인현 조선대학교 미술대회: 최고상 - 김윤진 / 우수상 - 송익규, 안태종 / 특선 - 김철, 박상규, 여태명, 최원 중앙대학교 미술대회: 동상 - 김철, 김충순 / 특선 - 백석만, 송익규, 유경원 홍익대학교 미술대회: 최고상 - 유흥배 / 특선 - 김호석, 윤용선 / 가작 - 김철, 안태종 미술부는 1976년에도 홍익대학교 주최 미술대회, 조선대학교 미전, 경희대학교 미전, 원광대학교 미전에서 최고상을 받는 등 국내 미술 실기 대회에서 호조를 보였다. 유흥배, 유경원, 안태종, 백석만, 김호석, 송익규, 김종인 등 14명이 ‘전북의 별’로 지정되어 표창을 받기도 했다.

  • 동아리 활동

1960년대 50여 개의 동아리 숫자가 정리되면서 거송회, 사마리탄 등이 활동을 이어갔다. 이 동아리들은 친목을 넘어 토론회, 봉사활동, 영어회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토론회는 발표의 힘을 기르고 사회성을 함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거송회는 ‘건전한 이성 교제’, ‘일본의 중국 승인과 그 영향’, ‘과학과 예술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관심의 폭을 넓혔다. 고전독서회는 완주군 운주면 가천리에서 멤버십 트레이닝을 갖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고전 독서회의 목적은 ‘우리는 인류의 정신적 유산인 고전을 읽음으로써 조상의 찬란한 문화를 계승하고 해외 문화를 올바로 소화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학생들의 교외 활동은 그 뒤로도 계속 활발히 전개되어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전북의 별들’ 예체능 교육 발전을 위해 전북도교위가 지정한 ‘전북의 별’들은 개인 뿐 아니라 학교의 명예이기도 했다. 1975년 12월 13일에 전고생들에게 주어진 별은 다음과 같다.

△테니스: 임지호, 오원식, 이희진, 김학만, 박홍구, 박기석

△농구: 노완기, 최낙빈, 안종관, 고태창, 김태범, 정인종, 김숙현, 김범익

△수구: 송재상, 김영선, 안해영, 장항규

△레슬링: 유생렬

△수영: 문성원, 오화섭, 이한로

△웅변: 채건호

△미술: 이우승, 김흥철, 임종인, 박인현, 윤용선, 안태종, 김호석, 유경원, 유흥배, 백석만, 양방운, 송익규, 김종인

전고인의 의식구조

인생에 있어서 각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과 행동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문제다. 그 중에서도 한 집단 내에서의 일반적으로 소망되고 있는 요인을 파악하는 것은 그 집단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즉 ‘전고인들이 궁극적으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그 시대의 전고생들의 가치관 결정 요인일 것이며 이것은 그 시대의 반영이고 당위일 것이다. 다음은 1976년 전고생에 실시한 ‘당신은 어느 것이 가장 값지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앙케이트 결과 얻어진 의식의 내용이다.

①높고 원만한 인격 ②건강상태가 지속되는 장수 ③변함없이 아름다운 우정 ④풍족한 물질생활 ⑤넓고 깊은 학식 ⑥뜨겁고 영원한 이성간의 사랑 등의 순서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격에 중론이 모아진 이상적인 것이었다.

또한 ‘풍족한 물질생활’이 ‘넓고 깊은 학식’보다 앞서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세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전고인의 기질

1973년 발간된 19호 교지에서는 졸업생 좌담회로 ‘전고 그 기질의 재확인을 위한 방담’이라는 내용이 게재됐다. 교장을 비롯 교직원과 학생 대표들이 참석한 이날 좌담회는 3년 동안 학교생활을 통해 느끼는 전고의 기질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석 학생들은 도내에서 그리고 전국에서 모교를 가리켜 호남의 명문이라고 말하며 또한 자신들도 전북의 엘리트라고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전제했다.

참석 학생들은 이어 이러한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경제개발에 병행하는 정신개발의 필요성에 따라 이 방향에로의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참석자들은 이어 모교 학생들이 개인주의적이라는데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다. 외부에서 흔히 전고생을 일컬어 ‘에고이스트’라고 한다는 내용의 발언이 먼저 있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생들은 화재사건 당시의 동창과 재학생들의 애교심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했다. 이 좌담회에서는 또 ‘걸레 북중’이라는 속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참석자들은 이 별명에 대해 선배들이 타 학교 학생들이 유행병에 걸려 사지바지를 입고 다닐 때 오불관언 대마지 바지를 입고 오직 학업에 열중한 데서 얻어졌다는 노 교사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어 전고인들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반성도 나왔다. 이러한 논의들은 긴 역경과 시련 뒤에 찾아온 안정기를 맞아 전고인으로서 나아갈 방향을 탐색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1973년은 더구나 유신체제가 본격 시작된 정치적 격변기였기 때문에 재학생들로서는 상당히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울분을 느껴 나름대로의 소견을 펴면서 진정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당시 좀 더 문제의식을 가졌던 재학생 일부는 체제 논쟁과 교내의 소규모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파문을 던진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 정의감으로 타올랐던 당시 학생들의 불의에 항거하는 뜨거운 가슴은 일제 강점기 이후 전고인에게 흐르던 면면한 전통이었다.

  • 장래희망 경향

학교 당국의 조사로는 1972년 재학생 대상으로 ‘장래 희망’을 묻는 앙케이트에서 전체 1,815명의 응답자 가운데 정치가가 71명, 실업가가 279명, 법관 247명, 외교관 58명, 은행가 64명, 행정가 57명, 문학인 32명, 미술가 7명, 음악인 6명, 언론인 55명, 과학자 149명, 의사 130명, 자선가 28명, 교육자 55명, 체육인 19명, 군인 103명, 철학자 35명, 심리학자 34명, 마도로스 100명, 기타 276명 등의 분포를 이루고 있었다.

장래의 직업 가운데 실업가가 약 15%로 가장 많았고 법관이 14%로 2위, 그리고 과학자 8%, 의사 7%의 순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당시까지만 해도 문과에 편중된 장래 희망이었던 점이었다. 특히 일류고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1973년의 2, 3학년 학생들의 장래 희망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인문계 학생들 가운데 실업가가 가장 인기가 끌었던 직업으로 전체 대상 학생 1,046명 가운데 198명이 희망해서 단연 수위에 올랐다.

또한 자연계 학생들은 135명이 과학자를 희망함으로써 역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상대적으로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 언론인, 철학자, 심리학자는 모두 10명 미만으로 학생들의 관심 밖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일류고의 희망직업 분포에서 당시의 시대상황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었다는 시각에서 이러한 결과는 자연스럽게 예상되면서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 각종 대회 입상 실적

제7절 아, 북중! 문을 닫다.

. 중학교 무시험 입시 세칭 ‘일류교’ 폐지

1

1968년 3월, 문교부는 어린 학생들을 과열 입시 경쟁에서 해방시켜 성장기에 있는 아동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과외수업을 해소해 초등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를 공포했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7월 15일 시행세칙을 발표하며, 1968년에는 서울특별시만 실시하고, 1970년에는 전주를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 6개 도시에 적용하며,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평준화 취지를 강화하기 위해 서울의 경기중을 비롯한 전북의 전주북중, 전주여중 등 전국의 소위 ‘일류 명문 중학교’를 폐교 조치했다. 이 입시 제도 실시로 어린 학생들이 입시 지옥에서 해방되고, 초등학교 교육은 정상화 기틀을 잡았으며, 중학교도 우열의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전주북중이 폐교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동문들이 아쉬워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중학교 무시험 입시까지 입시 제도를 살펴보면, 1945년에서 1950년까지 5년간은 학교 관리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3년간은 국가연합고사제, 1954년부터 1961년까지는 학교 관리의 유무시험 연합출제 병행제, 1962년에는 국가고시제, 1963년부터 1965년까지는 다시 시·도 공동출제 제도로 바꾸어 가면서 보완 개선하려고 노력했으나, 입시 과열 현상은 해소되지 못한 채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 입시는 전 과목을 모두 시험 보는 것이었다. 1964년에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국어와 수학 두 과목만 보았으나, 이듬해에 다시 원래대로 전과목 시험으로 환원됐다.

사라진 반세기 요람 북중

1972년은 무엇보다도 전주북중이 문을 닫은 해로 기록해야 할 것이다. 1968년 문교부의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에 따라, 1970년에는 부산 등 대도시에서 중학교 추첨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북중학교도 1970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1972년에 마지막 졸업생 521명(북중 49회)을 배출하면서 학교가 문을 닫기에 이른 것이다.

중학교 평준화의 목적은 아동들의 정상적인 발달 촉진, 초등학교 교육 정상화, 과열된 과외공부의 지양, 극단적인 학교 차 해소, 가정 교육비 부담 경감 등으로 열거되었다. 이러한 합목적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동문은 물론 그밖의 외부 인사들까지도 북중학교의 폐교에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동창들은 붉은 벽돌 교사와 주변의 울창한 히말라야시다 숲, 그리고 복도마다 격언이 적힌 기둥 등을 돌이켜 생각하며 북중학교의 영원한 사라짐을 안타까워했다. 동창들은 1969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24개의 교실에 얽힌 과거를 사진을 통해서나 애써 추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만 당시 석축의 교문주(校門柱)는 현재 모교 정문의 내주(內柱) 석축으로 옮겨져 있다.

  • 전주북중의 역사와 전통

1919년 3월 31일 4년제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로 문을 연 전주북중은 그 후 1925년에 공립으로 격하되었고, 1938년에는 ‘전주북공립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8·15 광복 후 1946년에는 다시 ‘전북공립중학교’가 되었다. 그 후 1951년 중·고 분리에 따라 전주고등학교가 신설되고 북중은 3년제로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가 실시되면서 세칭 명문 중학교였기 때문에 폐교를 맞게 되었다.

그동안 북중학교는 49회까지 모두 11,2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졸업생 중 졸업증서 제1호는 백길원(白吉元) 동문, 마지막 졸업증서 번호는 11,259호의 황용연(黃溶淵) 동문이었다. 8·15 광복 후 제1대 교장으로 김용환(金龍煥)씨가 취임한 이래 15대 최득엽(崔得燁) 교장을 끝으로 모두 14명의 교장(배운석 교장은 두 차례 역임했다)이 북중을 거쳐 갔으며, 실력 있는 교사와 학생들이 모인 전북 유일의 엘리트 코스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왔다.

  • 마지막 북중생들

문교당국의 중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라 폐교를 앞두고 있던 전주북중학교는 1971년 당시 3학년 학생 521명(북중 49회)만이 남아 학교의 명맥을 이었다. 북중학교는 전고의 동생뻘이 되는 학교로 문교당국 시책이 바뀔 때마다 북중에서 전고 진학이 무시험이었다가 다시 시험제가 되는 등 변화가 많았다. 그러나 1971년 당시에는 다시 고교시험제가 부활되면서 북중학교 재학생은 전고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러야 했고, 이를 위한 준비로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하는 등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북중 학생들의 정복과 정모는 당시 시중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모자에 둘러진 굵은 흰 선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어 시선을 집중시키는 바람에 학생들의 긍지를 높여주는 상징이었다. 마지막 북중학생이었던 당시 521여명의 학생들은 이러한 긍지를 충분히 살리면서 면학에 힘써 모범이 되었다. 고등학생과 합동조회 때에는 당시 북중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던 최득엽(崔得燁) 교장이 관심을 표하며 전고 진학 성적을 높임으로써 선배들이 쌓아 올린 위대한 전통을 빛내 달라고 당부하곤 했다.

당시 북중학교 3학년 학생들(북중 49회)은 중학교 입시에서 전체 시험문제 중 1개 이내를 틀려야 합격이 가능할 만큼 어려운 관문을 뚫고 들어온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타 학교와의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전주서중을 비롯한 다른 경쟁학교에서도 전주북중을 능가하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강행군을 했고, 이러한 여건을 감안한 북중학교 교사진도 더욱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했다. 북중 49회는 북중의 ‘막내’로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입학 첫해 가을 북중, 전고 대화재(1969년 10월 27, 28일)로 교실이 전소되면서 강당에 합판으로 칸막이한 임시교실에서 찬 바람 맞으며 공부했다. 이들은 학교 재건을 위해 화연(火烟) 가시지 않은 교정을 청소하고 벽돌을 실어나르면서 잿더미에서 신축 교사가 지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북중 수난의 산증인들이었다.

  • 마지막 졸업식

1972년 2월 5일 북중학교의 마지막 제49회 졸업식이 모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521명의 졸업생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모교를 되돌아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학부형, 교사들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전주북중은 1919년 모교가 개교한 이래 실로 53년 동안 이 고장 명문으로서 12,000여 명의 영재를 배출해 냈으며, 숱한 영고성쇠에도 불구하고 명문의 전통을 꿋꿋이 이어왔으나 이날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전 해(1971학년)까지 북중 졸업생 전원이 전고로 자동 진학 후 두 개 반만 타 중학교 출신에게 시험 문을 연 ‘북중→전고 동계 진학’이었으나 1972학년부터 동계 진학을 폐지, 전고 12개 반 전원을 입시로 선발했다. 이에 따라 당시 전북의 모든 중학교들이 ‘전고!’를 목표로 예년 없이 치열하게 경쟁한 탓에 이들 마지막 북중생(북중 49회)의 당해 년도 전고 진학률은 졸업생의 반을 밑돌았다. 이로써 북중 ‘막내’들은 폐교와 함께 동기간 이별의 아쉬움을 나눠야 했다.

= 고교 평준화와 전고

1969년부터 중학교 무시험 진학이 시행되면서 중학교 입시에서의 과열 경쟁은 사라졌으나 고교 입시는 더욱 치열해졌다. 고교 입시의 과열 경쟁은 명문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비롯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등 갖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이 같은 고교 입시 과열 경쟁에 따라 문교부는 1973년 2월 고등학교 입시제도 개선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서울과 부산 지역에 고교 평준화 제도를 시범 적용한 후 이듬해 대구, 인천, 광주 등 5대 도시로 확대했다. 이어 1979년에는 전주를 비롯 대전, 마산, 청주, 수원, 춘천, 제주 등이 평준화되었고, 1981년에는 전국 21개 도시에까지 고교 평준화 지역이 확대 적용되었다. 학생 선발은 시·도 단위 연합 고사와 체력 검사를 거치도록 하고, 학군의 설치는 세칭 일류, 이류, 삼류의 적절한 혼합으로 남녀 별로 인문과 자연 두 과정을 구분하도록 했다.

  • 전고도 추첨 배정

고교 평준화가 1979년 전주시로 확대 적용되면서 평준화에 의해 추첨 배정된 학생을 뽑아야 했다. 이때 노송 동문회는 심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평준화되면 자연 수준 저하가 불 보듯 뻔한데 전고의 명맥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평준화 이전 횟수인 58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전고 동문회를 일단락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 모교와 동창회 앞날에 관한 의구심이 팽배했다. 일류대 합격자 숫자 등에서 추첨 이후 전고인의 성과가 이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낮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평준화의 목표한 바긴 했지만 대학입시 성적 하락이 노송대를 졸업한 선배 동문들 가슴을 아프게 한 건 사실이었다.

  • 동문들 단합 더욱 다지는 계기로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움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은 전주에 앞서 평준화를 실시했던 다른 지역 명문 고교들과 같았다. 즉 현실적이고 유일하게 합리적 결론인 ‘모두 똑같은 동문이다’로 합의를 도출했다. 이 같은 방향이 정해지자 전고인들은 다시 한 번 무서운 단결력과 동문애를 발휘했다.

행여나 전통 명문의 명예를 해칠 우려가 있는 요인은 없는지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지도편달 했으며, 야구 후원회 활성화 등 동문회의 활기는 날로 성원을 더해 갔다. 학교의 학습지도 면에서도 능력차가 다양한 학생집단에 학력별 이동학습반을 편성, 운영하는 등 명문의 전통을 잇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학교 밖에서 전고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지난날 입학시험으로 선발된 이들과 마찬가지로 평준화 이후 전고생들이 전고 뱃지 의젓한 교복을 차려 입고 도서관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전주시민들은 내심 ‘역시…’ 탄성을 발하며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선배들의 정성 어린 동문애와 사회적 성원, 학내 구성원 스스로의 노력이 삼위일체 되어 ‘영원한 전고’는 더욱 탄탄히 앞날을 다졌다.

제8절 ‘옥동자’의 출현과 성과

‘옥동자’ 형성의 시대적 상황

전주고등학교는 1919년 6월 16일 개교한 이래,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얼과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서를 확립해 가며 민족 학원의 선구로서 대의를 위해 투쟁하였다. 미증유의 재난인 1950년 6·25 한국전쟁을 당해서 역시 많은 전고인들이 국가와 민족,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책 대신 총을 잡은 채 전쟁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같은 자랑스런 전고 전통에 대한 최대 위기는 뜻밖에 내부에서 제기됐다. 배움의 전당을 송두리째 앗아간 1969년 10월 27, 28일 이틀간 연쇄화재의 방화범이 뜻밖에 전주고 3학년 재학생으로 밝혀진 것이다. 나중에 경찰 조사 결과 심신 미약자로 나타났으나, 재학생이 모교에 방화했다는 것은 호남 제일 명문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해온 전고·북중의 프라이드에 심각한 내상을 입혔다.

화재는 전교적 단합과 전사희적 성원으로 뜻밖에 빨리 치유됐다. 화재 후 8개월도 안 돼 1970년 6월 16일 개교 51주년을 기해 신축 교사 두 동이 산뜻하게 단장됐고 교내 중앙 분수대도 신선한 물줄기를 뿜었다. 그러나 달라진 외관과 달리 내면에서는 교육 본연의 관점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대화재가 던진 질문, 즉 ‘왜 명문고 학생이 자신의 학교에 방화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학력 일변도, 입시 위주 교육의 문제점이 제기됐다. 입시를 향해 달린 결과 명문고 성가는 얻었으나 학생들의 인격적, 심리적 불안정은 도외시했다는 점도 지적됐다.

신임 최득엽 교장의 ‘전인교육’(全人敎育)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제시된 새 교육 방향이었다. 학교가 한낱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장소로 전락하고 있다는 문제점에서 출발한 최 교장의 ‘전인교육’ 소신은 1972년 전고 신입생들에게서 그 구현을 기대했고, 최 교장은 희망을 담뿍 담아 이들을 ‘옥동자’라고 불렀다.

옥동자’에 건 기대

최득엽 교장은 전체 교무회의와 교무부, 연구부, 상담부, 체육부, 새마을부 등의 부별(部別) 교사 반성회(反省會)를 자주 개최했다. 이로써 학교 교육 전반에 대한 재검토와 반성을 한 결과, 결국 지식주입 위주 교육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 인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당시 오동근 상담 교사는 학생들에게 학교생활에 대한 설문지 조사 결과, 재학생들의 정서불안이 30 ~ 40%라는 심각한 결과가 나온 것은 입시 위주 교육으로 인하여 발생되었기 때문에 전인교육이 필요하다 고 역설했다.

최득엽 교장은 미국의 83개 학교를 시찰하는 등 미국 교육제도 및 철학, 특히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의 진보주의적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존 듀이에 따르면, 넓은 의미의 교육이란 인간 사회가 그 생명을 사회적으로 존속시키는 하나의 수단이요, 학교의 기능은 적당한 환경을 선택해야 하며 사회 환경 요소의 균형을 도모하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탄생한 사회 집단의 한계와 제한에서 벗어나서 한층 광범한 환경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의 좋은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보다 좋은 환경을 준비하는 곳이므로, 학생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중대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이 학생 스스로에게 자각되어 행동하도록 하는 판단의 근거를 몸소 작용시키는 일일 것이며, 학생들의 주관 이전의 강요된 의식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년기의 특징은 심리적인 불안정에다 일류고에서 나타나는 성적 경쟁심에 의한 도덕관념의 빈약이 나타나게 되어 개인주의적인 이기주의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주입되는 지식이 아니라, 풍요로운 삶의 터전의 연마이며, 교육의 명실상부한 전인교육의 목표에 가일층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최득엽 교장은 자신을 찾은 전고 교지 학생기자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용되는 말을 적어주세요.

최 교장은 전인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클럽활동의 활성화, 테니스장과 수영장 등과 같은 체육 시설 확충에 힘썼다. 보충 수업을 철폐하고 자율 학습을 실시하였으며, 학생 저마다 소질을 계발하는 특기 양성에 전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옥동자’ 지도 방안

1972년에는 마침내 몇 년 동안의 무시험 제도(=‘북중 → 전고’ 동일계 진학)가 종식되고 12학급 720명(52회) 전원이 입학시험을 치르고 전고에 입학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선발되었기에 최득엽 교장은 이들을 전주고의 ‘옥동자’(玉童子)요, 호남의 ‘옥동자’라고 하였다. 특히 예·체능계(藝·體能系)를 뽑기로 하고 신문 광고를 냈는데, 8교시까지 정규 과목을 공부하고 그 후 자기 전공을 하면 예·체능계 육성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최교장은 52회 ‘옥동자’들이 동일계 무시험 진학이 아닌 완전한 자유경쟁을 통해 진학했으므로 기초실력이 충분히 다져졌으며,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규정된 수업 시간 이외에는 자율과 자유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옥동자’들은 하루 8시간의 정규수업을 받았고, 나머지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교외 활동을 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학교 교과 이외의 교육적 서적을 탐독하거나 체육 ‘1인 1기 기르기’ 등에도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당시 교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사들은 정규수업 후 희망에 따라 1시간의 클럽 활동을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는 전인교육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당면목표, 즉 ‘대학 진학’이라는 사회적 기대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다수의 교사들은 최 교장 방침이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 가까운 것이며, 학부모들의 관심과도 동떨어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 교장의 교육 철학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최 고집’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옥동자들은 1학년 때 정규수업 후 매일 1시간씩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었으며, 보충수업은 실시되지 않았다. 최 교장은 교장실 앞 발코니에서 매일 1시간씩 후배이자 제자들이 클럽활동을 하는 것을 지켜봤고, 생기발랄하고 즐겁게 뛰는 그들을 보고 매우 흡족해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전주고를 나오면 적어도 테니스와 수영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1972년 6월 16일 52주년 개교기념 행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민관식 문교부 장관을 비롯하여 전고 출신 국회의원, 다수의 동문, 학부형 등이 참석한 가운데, 수영장, 테니스장, 무도관 등의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날 기념식에는 최득엽 교장의 식사, 민관식 문교부 장관의 치사, 이춘성 지사의 내빈 축사, 이정우 동창회장의 회고사, 이철승 국회의원의 축사가 있었다.

수영장의 마련으로 불모지 전북의 수영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며, 전북의 수영 대표와 전주 시내 여고생들도 오후에 수영하러 오는 모습도 보였다. 전주고는 수영장 시설과 더불어 수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최 교장은 엄격한 외모, 말투답게 학생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최 교장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지만 미국 사람은 노는 시간이 적고, 그곳엔 자기의 교실이 없고 담당 교사의 교실만이 있고, 자그마한 휴게실이 있고, 이 직원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잡담을 하지 학생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보지 않았노라고 했다. 이처럼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에서조차 규율이 엄격한 데 비해 전주고 학생들의 규율은 해이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장은 인격은 외부의 규제나 체면 등을 억압함으로써 형성된다고 생각하여, 비품 관리를 위하여 유리창에 번호를 붙이기도 하였고, 규정 위반의 경우 졸업반에서 낙제를 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군부 집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이기도 했으나, 화재사건 이후 학교 기강을 확립하려는 시도로도 보였다. 최 교장은 지각생을 교장실로 데려가 직접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최 교장은 엄격한 가운데서도, 학교 운영의 목표가 서울대 다수 입학에만 있지 않고 고등학교 교육 목표 일반에 맞춰 다방면으로 학생들의 재능을 발전시켜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운동부를 많이 활동시키고 예·체능반을 설치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옥동자’ 지도 결과

하지만 최득엽 교장 자신 역시 서울대에 학생들을 많이 진학시키는 것을 지상목표라고 여겼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제도권 교육행정가였다. 최 교장은 ‘옥동자’들은 200명 이상 서울대에 진학할 것으로 믿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3학년 1학기까지 전 과목을 공부하게 하여 서울대 입학 준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1975년 서울대에 진학한 재학생(52회)들이 18명에 불과해 예년의 3분의 1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지상목표’다시피 한 진학 지도에 실패했기 때문에 최 교장의 ‘학생 자율에 의한 교육’은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52회 ‘옥동자’들의 대학 입시 성적이 유례없이 부진하자 당시 전주고 교무실 전화번호인 ‘2-2020’번에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렸으며 학부모 욕설과 선배들의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군산종고가 인문계인 군산고등학교와 실업계인 군산공업고등학교(신설)로 분리되자, 최 교장은 ‘옥동자’ 졸업식 한 달도 되지 않은 1975년 3월 1일 군산공고로 전출됐다. 그 후 ‘옥동자’들도 재수와 삼수를 거쳐 결국 서울대에 총 80명 이상 진학, 평년작을 거두긴 했다.

급변하는 사회는 교육 현장까지 정보화, 세계화 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교육적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 개혁 과제의 하나로 방과후 교육활동 활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학교는 일반적으로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교과 학습 위주의 교육 활동이 타성화되고 있어, 학생들의 요구와 필요에 부합되는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 제공이 절실한 실정이다.

이렇게 보면 최득엽 교장이 뚝심 있게 추진한 ‘전인교육’과 ‘옥동자’ 육성은 매우 선진적인 측면이 있다. 그 당시 서울대 위주의 일류대학 진학 성과를 크게 내지 못했고 입시만을 향해 달린 사회 분위기나 동문들 기대치와 동떨어졌으나, 2000년대 교육이 강조하고 있는 방과후 활동과 부합되는 면도 있다. 왜냐하면 최 교장의 교육 방침은 학교시설과 인적 자원의 활용도를 높이고, 학생들에게 청소년기의 핵심과제인 ‘정체성’(identity)을 확립시켜 건전한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옥동자’들의 당시 대학 입시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그들이 성인이 된 뒤에도 건전한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명문고 출신다운 교양인이며 사회인으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만족도는 어떠한지 등은 대입 성적과 별도로 거시적이고 교육적 관점에서 다시 검토될 여지가 있다.

52회처럼 시인, 작가, 음악가, 화가, 체육인 등이 많은 횟수는 전고 100년 사상 찾기 힘들다. 인문계 고교 출신들 치고 남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이 같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인생 후반기로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고 52회들은 자평한다. 이와 함께 많은 ‘옥동자’들이 최득엽 교장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난날 그들을 운동장에서 뛰놀게 하고 예술 등 다양한 방면으로 ‘해찰’을 허용해 준 스승에게 보답은커녕 저조한 입시 성적으로 최득엽 교장의 교육행정가 경력에 커다란 흠을 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을 계량하는 절대기준은 없다. 그러나 입시지옥 속에서도 스승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은 전고 52회 ‘옥동자’들은 가장 행복한 횟수였음에 틀림없다.

제9절 각종 행사

개교 51주년 기념식

1970년 6월 16일 개교 51주년 기념일 행사는 불의의 역경을 딛고 모교 역사의 뜻 깊은 한 획을 긋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녹음이 한창 빛을 내던 6월 15일 전야제 행사는 전주고 동문들과 재학생, 학부모, 교직원들에게는 축제의 날이었다.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에는 본관 3층 옥상에서 50발의 폭죽이 발사돼 초여름의 하늘은 오색 꽃으로 타올랐다. 또 한 이날 밤 모교 출신 음악인 25명이 참여하는 개교 51주년 기념 음악회가 시민문화관에서 성대히 베풀어진 가운데 동문과 재학생을 비롯 많은 시민들이 참석해 성황리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애초 1969년도 가을에 개교 반세기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를 계획이었으나 뜻밖의 대 화재로 행사 일체가 취소되고 그 이듬해에야 51주년 기념식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시련 뒤 기쁨과 감동은 한층 더 깊었다.

6월 16일 개교기념일에 맞춰 잿더미가 됐던 공간에 최신식 교사 두 동이 우뚝 섰고 프랑스식 잔디 정원과 그 한 가운데 분수대가 하늘 높이 푸른 물줄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최득엽 교장은 식사에서 “갖가지 어려움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송대의 위대한 지성의 횃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오늘 51주년 개교 기념행사와 본교 교사 낙성식을 계기로 이 횃불은 더욱 빛나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감격적으로 강조했다. 이어 행사에 참석한 교육감과 동창회장, 육성회장 등 동문들과 교육계 인사들도 한결같이 역경을 딛고 새 출발하는 전주고에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 학교공개

재학생들은 개교기념일 교정을 메운 동문들과 학부모 내빈들 앞에서 일사분란한 열병 분열로 강건한 기상을 떨쳤다. 학교 당국은 이날 행사에서 1시간의 공개 수업과 ‘다함께 노래 부르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해 서 좌중을 기쁘게 했다. 이어 16일 본 행사에서는 교내 체육대회가 열렸다. 재학생들은 매스게임과 유도 시범발표, 육상경기, 내빈 경기, 교내 구기대회 등을 통해 발랄하고 건강한 기상을 선보였다. 특히 이날 행사에서는 일류고의 폐단으로 지적되는 문약성을 탈피하여 생동하는 젊음을 보여줌으로써 주위를 흐뭇하게 했다. 한편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학교의 체육시설을 비롯한 새로 마련된 각종시설을 둘러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행사 참석자들은 특히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스팀 난방시설을 비롯해 최신형의 각종 체육시설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하면서 이러한 훌륭한 시설 밑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양성된다는데 대해 이 나라 장래를 위해 믿음직스러운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 음악회, 문예발표, 대수영장 개장

오후 4시부터 전주시내 시민문화관에서 전고 개교 51주년 기념 시민음악회가 베풀어졌다. 특히 이날 음악회는 수준이 높아서 모교가 학교성적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탁월한 바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아울러 교내 각 전시장에는 그 동안 재학생들이 꾸준히 연마해온 기량을 발휘한 갖가지 작품들이 전시됐다. 미술과 서예, 시 등 다방면에 걸쳐 출품된 작품들은 상당한 수준으로 호평 받았다. 미술작품 전시장에는 데생 8점을 비롯해서 수채화 23점, 유화 10점, 판화 25점, 조소 10점, 기타 7점 등이 전시됐고 사진 전시장에는 중학생 작품 20점, 고교생 작품 85점 등이 나왔다. 이밖에도 서예 5점, 공예 4점, 구성 13점, 도안 7점 등의 정성 어린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이날 다채로운 행사는 모교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장으로서 손색 없다는 각계 격려와 찬사가 줄을 이었다.

이태 뒤인 1972년 6월 16일에 거행된 개교 53주년 행사도 여느 때 못지 않은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다. 운동장 열병 분열식에 이어 대 수영장이 개장됐으며, 미술전시회, 시화전, 사진전도 규모있게 마련됐다. 개교기념일의 매스게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당시 재학생들은 일류고로서 단합과 협동정신이 부족하다는 주위의 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협동을 근본정신으로 하는 매스게임 연습에 힘을 다 했다. 체육시간과 일과 후의 시간을 틈내 연습을 했던 매스게임은 화려한 율동과 형상미로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행사에서 북중 마지막 졸업생이 주축된 1학년 신입생(52회)들은 특히 우수한 기량을 발휘해 참석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환갑맞이 개교 기념식

1979년 6월 16일 ‘전고 개교 회갑 기념식’이 열렸다. 노송의 청청한 대지 위에 을미년 민족 투혼의 기개를 뭉치고 다지어 올린 지 60개 성상, 우렁찬 찬가 속에 회갑을 맞이하게 된 노송대 구석구석까지 광명으로 그득했다. 민족사와 영욕을 같이한 모교는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6·25의 전란 속에서도, 부정과 부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전고인의 의지는 투쟁의 가시밭길을 뛰고 달려오며 민족의 횃불로서 이념의 푯말을 세웠고 그 맥은 해를 거듭하며 이어 내려왔다. 명실공히 전국 최고 명문의 위치를 확고히 한 때에 모교 회갑연이 베풀어져 많은 동문들이 참석했다. 이날 기념행사는 개식사와 국민의례, 국민교육헌장 낭독에 이어 열병(1호차 문교부장관, 학교장 / 2호차 도지사, 교육감)이 있었고 학교연혁 소개(교감), 표창(모범공무원 및 모범학생), 감사패 증정(25명) 순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감사장 수여(학교장), 식사(학교장), 치사(문교부장관), 축사(내빈), 교가 제창 및 분열이 있었다. 이날 표창 및 감사패를 받은 이는 다음과 같다. △교육감 표창(교사) / 이동률, 이성희 △학교장 표창(학생) / 충(忠) 오승환, 효(孝) 김명균·조연기, 지(智) 김제권, 체(體) 김운진 △동창회장 감사패 / 문교부장관 박찬현, 교육감 류재영, 학교장 김순만, 김석환, 이정우, 유청, 고주상, 양용태, 유기수, 김종두, 김용, 엄재후, 윤용섭, 송삼석, 서정상, 임채홍, 임방현, 임철수, 최낙철, 송창진, 신동욱, 송현섭, 백화기, 허진규, 강일부 △육성회장 감사패 / 이용현, 오상록, 전준섭 △학교장 감사장 / 임남수, 이춘영, 차재천, 김기성, 최봉규, 김택영, 박재섭 △동창회장 표창 홍성신(순시), 조양린, 홍성기.

이어서 기념 식수, 국민체조, 재학생 체육대회(3학년 축구, 2학년 농구, 1학년 배구), 동창회 정기총회(강당), 내빈·동문·직원·학부모 체육대회 및 파티(동창회관), 동문음악회(시민문화관), 전시회(도서관, 시화전 및 미전), 대미술전(동창회관·미술·서예)이 있었으며 기념엽서 발행과 벽걸이, 접시제작, 행운권 추첨으로 이어졌다. 재직 동문들의 노력으로 동창회원 명부도 발간됐다.

교련과 연구학교 지정

교련과(科) 지정 연구학교로서 1970년 4월에 두 번째의 교련과 시범공개 수업 발표회를 개최했다. 여기엔 전라북도 교육감, 문교부 교련과 장학관을 비롯해 도내 고등학교 교장과 교련 담당 교관들이 대거 임석했다. 이 시범 발표회를 통하여 전주고는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과거 50여 년간 선배들이 쌓은 찬란한 전통에 손색없이 보다 알차고 새로이 줄기차게 뻗어나는 노송대의 기상을 보여줘 참관자들을 감탄케 하였다. 특히 여러 도를 순방하며 교련과를 지도하고 있는 문교부 교련 담당 장학관의 소감발표는 전주고의 학교직원 및 재학생들을 흐뭇하게 하였다. 전고 교련은 1968년 9월부터 전국 11개 고교에 교련과를 설치해야 한다는 국가 시책에 따라 전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1969년 봄에 첫 번째로 교련과(科) 시범공개 수업 발표회를 가졌으며 동년 10월에는 교련과(科) 공개수업 발표회를 개최해서 문교부장관상을 탔다.

1973년 5월 1일에 열린 교련시범 발표회는 때마침 내리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강건한 학도의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다. 학생들은 행사 당일 내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열병과 분열식과 총검술, 도수 각개 훈련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행사를 지켜보던 학부모와 임석관들은 폭우에도 끄덕않는 전고인의 의지에 찬사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 전국 과학전람회 개최

전국과학전람회 개최 1973년 3월 23일부터 열흘간 모교 체육관에서 전국 과학전람회가 성황을 이룬 가운데 개최되됐다. 아울러 대강당에서는 교과서 개편 후 전국 교육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 열람을 가져 전국의 교육자 대표에게 모교를 공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행사를 계기로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은 더욱 긍지를 갖고 학교생활에 임하게 됐다. 당시 민관식(閔寬植) 문교부장관은 체육관 앞에 청청한 오엽송(五葉松)을 기념식수했다.

. 현직 대통령, 전고 방문

현직 대통령, 전고 방문 1973년 3월 23일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교육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전고를 방문했다. 이날 대회가 끝난 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전고를 방문한 박대통령은 최득엽(崔得燁) 교장의 안내로 학교시설을 둘러본 후 “이처럼 잘 꾸며진 학교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전고가 도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이름 높은 명문 고등학교라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날 박 전대통령은 “이번 교육자대회에 참가한 전국 교육자들은 반드시 전고를 한 바퀴 돌아보고 가라”고 특별 지시하는 등 깊은 관심을 표해 교직원들을 흐뭇하게 했다. 일찍이 1951년 ‘충혼비’ 비문을 써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내교한 바 있으므로 전고는 현역 국가원수 두 명이 방문한 전국 최초, 전국 유일의 학교가 됐다. 국가원수 두 명이 방문하고 휘호까지 한 사례는 이후에도 국내에 없으며 이는 전고인의 자부심을 더욱 북돋운 계기가 됐다.

제10절 북중, 전고 통합교지 ‘노송원’(老松苑) 창간

1951년 문교부는 학제 개편을 단행하여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제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전주고등학교(당시 명칭은 전북고등학교였다)는 전주 고등학교와 전주북중학교로 분리됐다.

중·고교 분리 후 전주북중은 1952년 7월 교지인 ‘北中’(북중) 창간호를 국판 118 페이지 분량으로 발간했다. 전주고는 문예지 성격의 교지 ‘전통’을 1951년 12월 발간했다가 이태 뒤인 1953년 12월 이를 종합지 성격의 교지 ‘全高’(전고)로 바꿔 창간했다. ‘전고’ 역시 국판 크기로 120 페이지 분량이었다.

‘북중’과 ‘전고’는 1967년까지 따로따로 발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두 학교 뿌리가 같으며 같은 교정을 사용하고 교장도 한 사람이 관리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교지 합본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68년 1월 교지 ‘북중’과 ‘전고’를 합친 통합 교지 ‘노송원’(老松苑)이 발간됐다. 당시 ‘노송원’ 표지엔 ‘1호’로 표시됐으나 이태 뒤(=제15호)부터는 ‘북중’과 ‘전고’ 지령(紙齡) 계승했다.

‘노송원’은 편집 후기에서 “초기부터 말썽이다. 합본을 하느니, 않느니, 겨우 합의를 봐서 노송원 제1호를 내게 됐다”고 밝혀 합본 과정에서 진통과 난관이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 “한자(漢字) 역시 말썽이다. 고등학교를 위해서는 넣어야겠고, 중학교를 위해서는 그럴 수도 없고, 간곡한 부탁에도 아랑곳 없이 한자는 넣지만 중학교에 미안한 감이 구석을 차지한다”고 밝혀 교지 내용의 수준과 표현에서도 조정이 쉽지 않았음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나 뿌리가 같은 북중, 전고가 교지 통합으로 정서적, 지적으로도 일체가 된다는 의미는 컸다. 국어 교사 김해강 시인은 통합교지 첫호인 ‘노송원’ 13호(당시 표시는 ‘1호’)에 권두시 ‘노송원송(老松苑頌)’을 실어 ‘모두가 늠름히 자란’ 그들의 통합을 축하, 격려했다.

노송원송(頌) 김해강(金海剛) 모두가 늠름히 자란 나무들이어라.

모두가 기개를 자랑하며 청운(靑雲)을 품고 자란 나무들이어라. 돌밭에 뿌리를 박고 일월(日月)로 더불어 맵찬 풍상(風霜)을 마시며 자란 보라! 햇빛에 번쩍이는 억센 용린(龍鱗)을 하늘을 향하여 용트림 하는 저 우람한 웅자를 오오 겨레의 빛이여! 빛의 대열이여! 여기 해돋는 노송원두(老松原頭)에 오늘도 아름다운 아침은 찬란히 떠오르나니- 빛나는 진리와 함께 샘솟는 지혜는

바로 그대들 곁에 용솟음 치고 있나니-.

이 ‘노송원송’은 오늘날까지도 교지 ‘노송원’ 매호 첫머리에 실리는 전고인들의 교지 찬가가 되고 있다.

‘노송원’ 13호는 통합교지답게 북중과 전고생의 원고를 모두 야심차게 수합해 분량도 332p나 됐다. 이는 이전까지 ‘북중’, ‘전고’ 교지의 두 배 이상 분량이며 현재(2020년, 제63호)까지 통틀어서도 역대 가장 두꺼운 분량이다. 편집위원도 이전 5~6명보다 많은 9명이며 지도교사도 두 명이었다. 책 말미에 발행 겸 편집은 ‘문예부’이며 발행은 ‘전주북중고등학교’로 표시돼있다.

‘노송원’은 이후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1981년과 1982년 2년간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휴간한 것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같은 이름으로 매년 초 발간되고 있다.

제11절 ‘동창회보’ 창간

제12절 전고 야구부 재창단

. 전주고 야구 약사

전주고 야구는 일찍이 1925년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시절 특별활동 일환으로 취미와 소질이 있는 학생들로 팀이 창단되어 특별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에 개인적으로 남아서 연습을 했다. 창단 초기 전북에는 전고만 유일하게 야구부가 있고, 타교에 야구부가 없어 교내에서만 활동하고, 선후배 사이에 스포츠맨십과 우의를 다지며 대회가 있을 때는 참가에서 의의를 찾는 정도였다. 1930년대 들어 다른 학교도 야구부를 창단하고 대회가 생겨나자 여기서 우승을 거두는 등 활발하던 야구부는 그러나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해체됐다. 광복 직후 재결성, 당시 슈퍼스타던 김영조 감독으로부터 훈련받고 단숨에 전국최강으로 도약한 전고야구부는 6·25 후 박종석(30회), 장세권(32회), 김만두, 형성우(37회) 동문에 의해 맥을 이었으나 예산상 문제점과 선수 기근, 대학입시라는 지상 과제에 밀려 1967년 다시 해체되고 말았다.

‘야구부 재건’ 논의

전고 야구부가 해체된 몇 년 후부터 전국에 고교야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고교야구는 1970년대 벽두부터 국내 프로야구 리그(1982년)가 생기기 전까지 약 10년간 실로 엄청난 광풍으로 전국적 인기를 모았다. 전국 고교야구 대회가 열릴 때면 전 국민이 라디오 또는 TV 앞에 모여 지역 연고팀을 응원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출신 지역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콘크리트와 같았다.

당시 서울고, 경북고, 경남고, 광주일고, 대전고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고등학교들은 이미 야구부가 있어서 이 학교 출신들로 하여금 저마다 모교를 응원하며 명문고 출신임을 자부케 했다. 하지만 ‘명문’이라면 빠지지 않는 전고 동문들로서 야구팀이 없다는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야구 명문 군산상고가 전북 지역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었지만 군산상고 경기에 손이 부숴지도록 박수를 치면서도 그럴수록 모교에 야구팀이 없다는 아쉬움에 전고인들은 허전해 했다.

이같은 아쉬움과 열망 속에서 마침내 1976년 6월 16일, 개교 57주년 맞이 총동창회 정기총회가 모교 야구부 창단과 함께 경향 각지에서 야구부 후원 성금을 모금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동문들은 전폭적인 참여와 성원으로 단기간에 ‘전고 야구부 창단’의 위업을 달성했다.

당시 동문들의 ‘야구부’ 열망을 대변하고 논의를 촉발시킨 이들 중 한 사람이 최득엽 동문(14회)이다. 전고 교장이던 그는 1975년 초 동창회보에 ‘야구부를 재건하자’는 기고문을 실어 공개적으로 동문들의 재정 뒷받침을 요구했다.

야구부 재건

을유년의 새해가 밝았다. 모두가 새해를 맞으면 새로운 계획과 실천을 다짐한다. 모교도 새해를 맞아 꼭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기필코 전국 수준에 올려 놓아야 하겠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동문들도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야구부의 전국 제패의 계획과 그 실천이다.

본교에서 야구부가 운영된 지는 16년 전으로 생각된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유야무야되었을 줄 믿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재정적인 뒷받침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교에서 오래 전에 중단했었던 야구가 작금에는 전국민의 지대한 열의로써 클로즈업 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모교의 젊은 동문들의 이에 대한 갈망은 거의 광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전국 명문학교 중에서 야구부가 형성 운영되지 않는 학교는 거의 없다. 시세(時勢)에 따르는 것이라고 혹평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시대에 뒤처지는 것 또한 교육적인 면에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모교에서도 이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하루 빨리 육성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구부를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가장 큰 문제점은 재정적인 뒷받침이다. 학교의 재정적인 여건은 한정되어 있다. 학교 교육의 역점사업에 대한 특별한 지원도 없다. 그런데 타교에서는 그 많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잘 운영되고 있다. 그 이면을 분석하면 우리 모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문들의 모교애이다. 이 모교애란 일시적이어서 는 아니된다. 사랑이란 끊임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교 동문들의 그들 모교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열렬한 것으로 듣고 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우리 모교의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사랑이 적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교는 호남의 명문으로 노송대에 터를 닦은 지 장장 56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가 하면 3만 여 명의 동문들을 배출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케 하고 있다. 69년 대화재로 페허화되었던 옛 보금자리에 다시 새로운 현대식 우람한 교사를 마련했는가 하면 수영장, 정구장, 무도관 그리고 학생회관 등 새로운 시설들을 갖추어 명실공히 세계적 수준으로 모교가 발전했다는 사실은 자타 모두가 공인하고 있는 바이다.

이는 전고만이 자랑할 수 있는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모교애에서 우러나온 단결력의 과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떤 유사시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모교애로써 뭉치는 단결력은 이와 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외 여타의 경우는 또 타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교에 대한 관심도가 얕은 편이라는 것은 동문들 스스로가 자인하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모두가 훌륭하고 우수하다.

이제 전고도 대 전고로서 새로운 전통을 정립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69년도에 일치단결해서 과시했던 그 단결력을 평상시에도 유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보다 큰 도약을 위해서 튼튼한 발판이 있어야 하고 그 발판은 개인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단결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현세기가 요청하고 있는 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모교가 배출한 3만 여 동문들이 총단결한 속에서 우러나오는 모교애는 세계수준에 육박하고 있는 모교의 발전과 더불어 이제 모교가 어떤 난관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는 그러한 경우가 없게 될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대 전고로서의 새로운 전통과 명예를 과시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힘을 자라나는 후배 재학생들에게 바쳐야 하고 모교의 사기와 동문들의 기백을 과시할 수 있는 운동부문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금년에는 우선 제1차적으로 야구부 육성과 나아가서 전국 제패를 할 수 있도록 전 동문들의 뜨거운 모교애로써 뒷받침하자고 호소하는 바이다. 현재 모교의 야구부는 3년 전부터 모색해서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20명의 선수와 모교 출신 김기홍씨를 코치로 초빙해서 눈보라치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맹연습을 해오고 있는 중이다. 이에 위에서 말한 3만 여 명의 동문들의 뜨거운 모교애만 뒷받침된다면 돌아오는 금년의 스포츠 시즌부터는 새로이 각광을 받는 팀으로 전국에 그 명성이 메아리치리라 확신하는는 바이다. 끝으로 본교의 야구팀이 전국제패의 명예를 양 어깨에 걸머지는 그날, 우리 3만여 명의 동문들은 한자리에 모여 노송의 얼을 되새기고 새로운 밝은 내일을 위해서 힘차게 교가를 부르게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바이다.

전주고등학교장 최득엽(14회 졸업)


야구부 재창단

1975년 9월, 전주 시내 삼양다방에서 전북체육회 실무 부회장 양용태(18회) 동문과 전북신문사 체육부 기자였던 정종석(37회) 동문 등은 야구부 재건을 위한 실질적 논의를 시작했다. 이들은 전주고등학교의 명성을 더욱 빛내기 위해 야구부 재건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이를 1976년 개교 기념일 총동창회 정기총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다.

  • ‘준비위원회’와 ‘후원회’ 결성

1976년 6월 16일, 총동창회 정기총회에서 양용태 동문과 정종석 동문이 야구부 창단을 정식으로 발의했다.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창단 결정이 내려졌으며, 기금을 모금하고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창단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준비위원회 위원장에는 임채홍(24회) 동문이 선출되었고, 기금 모금 목표로는 우선 100만원이 설정되었다.

준비위원회는 각 시군지부를 순방하며 모교애에 호소하고 본격적인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협조가 예상보다 순조로워, 짧은 기간에 1,100여 만원을 모금할 수 있었다. 임채홍, 양용태, 이춘영(27회) 동문 등은 사업을 뒤로 하고 전국 지부를 돌며, 서울에서도 장기체류하며 재경 동문들의 협조를 구했다. 임방현(26회), 임철수(29회) 등 재경 동문들의 합세로 모금 활동은 원활히 진행되었고, 모금액은 1,100여 만원에 이르렀다. 임채홍 동문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4,000여 만원을 기부하며 전고 야구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준비위원회는 기금 목표액이 달성된 후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후원회’로 명칭을 바꿔 계속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 1977년 3월, 야구부 창단

1977년 3월 26일, 전고 운동장에서 전교생과 동문들,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고 야구부의 창단식이 열렸다. 선수들이 소개된 후, 체육관으로 옮겨 최영상(55회) 학생이 선수 선서를 하자, 참석 동문들은 열렬히 박수를 보내며 필승을 기원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 ‘야구의 아버지’로 알려진 전고 감독 김영상 씨도 참석하여 야구부 창단을 축하했다.

초대 감독 겸 코치에는 김인복 씨가 초빙되었고, 야구부장에는 모교 교사인 강일부(38회) 동문이 선임되었다. 이후 감독은 김금현 씨와 백기성 씨가 맡았고, 다시 김금현 씨가 돌아와 감독직을 이어갔다. 이후 최정상 씨가 맡다가 김만두(37회) 동문이 이끌어 나갔다.

고 야구부는 재창단 이후, 감독, 코치, 선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국 정상을 목표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끝에 불과 2년 만에 막강한 전력을 쌓기에 이르렀다. 선수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의 하드 트레이닝을 통해 기초 체력을 단련하고 타격 향상과 스피드 조절, 전술 전략을 연마하는 등 어느 팀에 못지않은 기량을 닦아 나갔다.

특히 야구 후원회에서는 전력 보강을 위해 우수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등 뒷바라지를 다 했으며, 광주동성중학교 출신 유망주를 스카우트할 때는 ‘007작전’과 같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양용태(18회), 김만두(37회) 동문은 광주에 한 달이나 진을 치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부산체전에 참가하기 위해 전남체육회 이사들이 광주를 비운 사이에 운동장에서 연습하고 있던 해당 선수를 승용차에 태워 ‘납치’해 오다시피 했다. 또한 서울 모 중학교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에도 선수를 교장실에 보호조치 해놓고 입학 시험일을 넘기게 해 모교로 데려오는 등 전력 보강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전고 야구는 1979년 4월 6일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열린 호남우수고교초청 야구 대회에서 우승, 창단 3년 만에 첫 호남 제패의 영예를 안았다. 도내 예선에서 전주상고(5:1)와 군산상고(2:1)를 차례로 누르고 전북 대표로 본선에 출전한 전고 야구부는 본선 1회전(준준결승)에서 청주고를 1:0으로 누르고 2회전(준결승)에서 광주상고를 3:0으로 이긴 뒤 결승전에서 강호 광주일고에게 3:2 승리를 거두며 감격적으로 첫 우승컵을 안았다. 이 대회에서 전고 이희용이 최우수 선수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전고 야구부가 타격상 1위(김명렬), 2위(김운진), 미기상(정상평), 지도상(백기성 감독) 등 주요 상을 휩쓸었다.

전고 야구부는 또한 1979년 여름에 열린 청룡기 지역예선 리그에서 3차전까지 치르는 대파란 속에 라이벌 군산상고를 물리쳐 동문들의 환호를 받았다. 1차 리그에서 전고와 전주상고, 군산상고가 서로 물고 물리는 바람에 2차 리그를 가졌는데 군산상고와 5:5의 동점에서 폭우가 쏟아져 재경기를 갖게 되었다. 3차 리그에서 전고는 7회까지 군산상고에 2:6으로 뒤쳐졌으나 7회 말 투아웃 후 연속 2루타 등 안타 7개로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 8:6으로 승리를 거둬 장내를 흥분시켰다.

. 전국체전서 첫 전국 정상 ‘감격’

1979년 가을 제60회 전국체육대회 고등부에서 전고 야구는 마침내 전국을 제패했다. 대회 준준결승에서 전고는 그 해 청룡기 우승팀인 광주상고를 7:1로 제압했으며 준결승에서 역시 그 해 대통령기 우승팀인 강호 부산상고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 상대는 그 해에만 전국대회 세 차례 준우승에 머물렀던 인천고였다. 인천고는 ‘이번만은’을 외치며 절치부심했으나 행운의 여신은 전고 손을 번쩍 들어줬다. 9회 말까지 팽팽한 경기로 4:4로 비긴 가운데 대회 룰에 따라 승패 추첨에 들어갔다. 가슴을 조이며 인천고가 먼저 추첨지를 뽑았으나 그들은 선명한 ‘X’자를 보는 순간 땅을 치고 울고 말았다. 반면, 비록 추첨 승이지만 대망의 전국대회 첫승을 거둔 전고 야구부와 동문들은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환호하고 어깨춤을 췄다. 이 대회에서 전고 1년생 투수 에이스 강상진은 ‘대어’로 주목받았으며 후일 전고 졸업 후 스카우트 1순위로 명문 고려대에 입학했다. 당시 우승 주역은 송영복, 정상평, 김경수, 김운진, 이종국, 이강수, 강상진, 기호봉, 김병조, 김주모, 이종팔, 김명렬, 우광춘, 김원, 신동순, 서화석, 이상호, 함주현, 고은상, 김대현, 백재우, 이성환, 이상구, 박상운, 박헌표 등이었다.


승승장구의 전고 야구는 이듬해 1980년 봉황기 전국야구 대회 16강전에서도 강호 선린상고를 6:2로 누르며 파란을 일으켰다. 투수 강상진은 이날 역시 완투와 함께 타격에서도 활약, 4타수 3안타 4타점을 올리며 전국 최고의 만능 플레이어임을 입증했다. 전고 야구는 1983년 대구에서 열린 대붕기 대회에서도 서울 배명고를 4:1로, 대구 성광고를 8:0으로 연파한 뒤 대망의 4강에 올랐으나 전통의 강호 경북고에 져 결승 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빛을 발한 전고의 막강 타선은 이후 전국 정상급 팀들의 경계 대상 ‘1호’가 됐다.

  • 해외 후원, 성금도 답지

모교 야구부를 격려하고 성원하는 동문들의 따뜻한 손길이 국내외 각처에서 끊임없이 답지되어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1977년 10월 29일 재(在)일본 북중·전고동문회(회장 유심평)는 때마침 일본을 방문한 전주고·북중총동창회 임남수 회장(12회) 환영을 겸한 회원 총회를 도쿄에서 열고 모교 야구부를 후원하기로 결의, 알루미늄 배트 10개와 현금 50만원을 임남수 회장에게 전달했다. 전년도에도 알루미늄 배트 9개와 선수 용품 일습을 보낸 바 있는 암창림산흥업주식회사(岩倉林産興業株式會社) 사장 김종두(18회·대한체육회 홋카이도 지부장) 동문은 이번에 역시 일제 야구 글러브 18개와 알루미늄 배트 9개(당시 싯가 150만원)를 모교 야구부에 전달했다. 이 같은 해외 동문 성원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47회 동기회가 선수 합숙소에 17인치 TV 한 대를 기증하는 등 각 기별로 성금과 야구 용품 전달이 빗발쳐 전고 야구부원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제13절 명문대 진학률, 단연 ‘전국 1위’

재수생 포함 서울대 137명 합격(1978)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고의 입시 능력은 1978년 들어 마침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1978년 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전주고 졸업생(55회)들은 서울대 137명을 비롯해 고려대 27명, 연세대 20명, 전북대 290명을 합격시킴으로써 전국 유수의 명문을 따돌리고 ‘전국 1위’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한 재학생 합격자가 88명이나 돼 명문 중 명문임을 입증했다. 이같은 성과는 전고 김순만 교장 이하 전 직원이 밤낮없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였다. 1978년 전국 주요 고교 서울대 합격 현황은 다음과 같다.

재학생만 서울대 110명 합격(1979)

1979학년도 입시에서도 전고의 영광은 이어졌다. 1979년 입시에서 전주고 졸업생(56회)들은 서울대에 160명을 비롯하여 고려대에 40명, 연세대에 27명, 전북대에 312명이 합격하여 압도적인 ‘전국 1위’임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한 재학생만 110명이나 돼 전교생 7명 중 1명 이상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일부 일간지에 전고가 2위인 것처럼 보도되기도 했으나 이는 해당 신문사 통계 착오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