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정치사회적 변동과 교육정책
제1절 군사독재에서 민주정부로
고문과 인권유린 등을 일삼던 군부독재 세력에 대한 저항과 민주정부 수립을 향한 국민들의 염원은 1987년 절정에 달하였다. 1987년 4월 13일 통일주체대의원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각 부문의 민주세력들은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를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동시에 다발적인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5공화국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는 6·29선언을 하게 되었다.
12월 16일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단일화였다. 당시 민주화 운동은 정권의 정당성이 없는 군부독재 집권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의 큰 축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한 기대와 지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신들에 대한 지지를 과신한 민주 세력은 단일화를 하지 못했다.
민주세력의 분열과 안보위기가 고조되면서 신군부 세력 2인자인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8올림픽 성공적 개최, 남북한 UN 동시 가입, 동구 공산권과 교류 확대, 경제 활성화 등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기업들을 압박한 비자금 조성과 많은 부정부패 사건으로 노태우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한다.
김영삼은 민자당의 총재가 되어 1992년 제14대 대통령에 나섰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당 합당에 대한 비난과 독재 세력과 야합했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하고 군사 독재 잔재 청산과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취해 나갔다. 1993년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 불법 정치 자금 문제를 해결하고 지하경제를 양성화하였다.
획기적인 교육 개혁 정책을 제시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 재산을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였으며 정치자금 및 뇌물을 일체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하여 공직자들의 윤리적인 행동 강화와 부정부패 척결, 기강 바로잡기 등을 통해서 임기 초부터 개혁 조치들을 취해나갔다. 또한 이전 정부(특히 5공 ~ 6공)에 가려져 있었던 정치사 및 과거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여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하였다.
광주직할시 주관으로 열렸던 5·18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격상시켜서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도록 하였고 유족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등 과거사 청산에 힘썼다. 특히 전직 대통령 노태우, 전두환을 법정에 세워 구속하는 과감한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을 이어나갔고 일본과는 한일수교 30주년을 맞은 1995년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와 일부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및 위안부 관련 망언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1995년에 국민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넘기고 이듬해인 1996년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에도 성공하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한편 재벌들의 연쇄 부도와 금융위기와 외환위기에 대한 대처 미흡으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무분별한 기업들의 투자와 국제 경제 여건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였으며 해외 채권자들이 한국 대부 자금을 동시에 회수함으로써 유동성 위기가 왔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금융기관이 부실 채권으로 타격을 받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부랑자로 거리에 떠도는 비상 상황이 되었다.
위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36년 만에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 실천을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새 정부를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국민의 정부’로 규정하였다. 1998년 IMF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IMF 원조 조건에 따라 구조조정을 실시함으로써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다. 규제를 철폐하고 국유화된 기업을 민영화하며 정부 지출을 축소하고 금리를 올려야 했다.
기업 구조조정, 금융개혁, 외환위기 탈출 등의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고 화해와 협력의 ‘햇볕정책’을 내세워 긴장과 대립의 시대를 극복하는데 주력하였다. 1998. 6. 16.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은 소떼 5백 마리와 함께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이후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동해선 연결 등 교류 활성화와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그리고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의 확대를 통해 화해·협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토대로 북한·미국의 대립 속에서도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였고, 대 미국 관계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 밖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의 극복과 2002 한일 월드컵 대회와 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 개최 등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역대 정권 최초로 정권 기간을 종합하여 무역수지 흑자, 경상 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외환 위기 극복과 정보기술(IT)의 활성화, 생산적 복지 개념의 도입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내었다
제2절 교육정책과 학교교육 현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노태우 정부 6공화국에서는 5차 교육과정이 실시되었으며 교육정책과 교육제도는 1985년에 발족한 교육개혁심의회가 의결한 개혁안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민정부의 5·31교육개혁안이 실시되기 전까지 교육개혁심의회가 마련한 개혁안이 교육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1985년 3월부터 1987년 말까지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2000년대를 향한 교육개혁안을 마련하였는데 42개의 개별과정과 10개 영역의 종합조정안을 포함한 미래교육의 청사진이었다.
교육개혁심의회는 교육개혁의 기본방향을 21세기를 주도할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한국인상을 창조하고 타고난 발전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시키며, 교육의 선진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원 확보 등 제반 교육 여건 조성에 두었다. 국가 발전과 교육의 관점에서 제시한 ‘바람직한 한국인상’을 제시하였다. 첫째 자주적 인간, 둘째, 창조적 인간, 셋째, 도덕적 인간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전라북도교육청의 교육계획에 그대로 반영되며 이를 바탕으로 일선학교는 상위기관의 교육계획을 바탕으로 학교교육계획을 수립했다. 전주고도 이러한 기저 위에서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세부실천계획을 마련했다. 물론 이러한 인간상이나 교육이념은 선언적인 의미를 지닌 경우가 많지만 교과활동, 체험활동, 특별활동, 각종 행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노력을 하였다.
1987년 12월 교육개혁 최종보고서에 들어 있는 유아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특수재능교육, 사회(평생)교육, 미래대비교육, 교원, 교육시설환경, 교육 행정, 재정운영에 관한 10대 교육개혁 과제는 다음과 같다. ① 학제의 개편 ② 입시제도 개선 ③ 학교환경의 현대화 ④ 우수교원 확보 ⑤ 교육내용과 방법의 쇄신 ⑥ 과학두뇌의 개발 ⑦ 대학 교육의 수월성 추구 ⑧ 평생교육체제의 확립 ⑨ 교육행정의 자유화 ⑩ 교육 투자의 획기적 증대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과제 추진을 위해 2001년까지 GNP 대비 문교 예산을 4.7%까지 확보해야 한다. 재원 마련의 어려움과 개혁의 혼란과 부작용으로 교육개혁사업의 완성을 2001년으로 잡고 여건 조성을 강조하면서 차기 정부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후속 기구 설치를 건의하였다. 1988년 3월 중앙교육심의회가 발족하여 교육정책 및 교육발전에 관한 중요 사항을 협의 또는 연구하여 문교부장관의 자문에 응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2월 5일에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21세기 첨단과학기술시대,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대비하는 확실한 투자가 교육이라는 인식하에 교육개혁을 위한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 즉 5·31 교육개혁안을 내놓았다. 문민정부에서 만들었지만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현재까지 교육 정책의 대체적인 골격과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개혁안은 ‘문민정부’의 정권 말에 완성되었지만 ‘국민의 정부’가 구체화하여 실천하였고 ‘참여정부’도 5·31 교육개혁 정책을 이어받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교육을 바꿔 놓은 교육정책은 없었다. 장기적 시각으로 계획되고 실천된 국가 정책이었기에 내용이 방대하고 혁신적이며 미래지향적 조치들로서 교직사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현장을 크게 변화시키고 일반 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내용이 많았다.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과 차별화에 중점을 두고 사회 전 부문에서 민주화 자율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펴려고 하였는데 특히 권위주의와 획일주의 교육을 벗어나 개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변화를 시도하였다. 지방교육자치의 실시 및 단위학교의 자율성 확대, 교직단체의 활성화 및 학교운영의 민주화 확대 등의 조치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WTO(세계무역기구) 체제의 출범과 세계화의 바람이 불면서 외국어 교육 강화 정책으로 세계화는 곧 영어를 잘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영어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원어민을 초빙하여 학교에 배정하였다. 영어 관련 사교육 시장 규모도 커졌다.
독재타도가 곧 민주화 운동이었던 시대에서 각 부문의 민주화 운동으로 사회 분위기가 변했다. 문민정부의 교육 민주화 요구는 교육수요자의 요구에 맞추어 교육 공급자를 경쟁하게 만드는 차원으로 변질되어 전개된다. 교육공급자의 자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각종 정책들이 마련되었다. 특수목적고 및 자립형 사립학교, 자율형 공립학교 등의 설립으로 공급자 시장의 다변화가 모색되고 탈규제의 원리와 기업 경영 방식의 도입을 주장하게 되었다. 학교와 교원을 ‘교육서비스’의 공급자로, 학생·학부모·기업을 소비자로 보게 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교육 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에게는 다양한 교육서비스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예: 학교정보공개 및 학교선택권 등)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학교가 평균 시험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를 공개해 학생들로 하여금 보다 성적이 높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또 학교 내에서는 수준별 수업 및 선택형 교육과정의 운영을 통해 학생의 선택권을 확대해 주는 방식을 택하게 하였다. 그밖에도 교육부의 규제 완화 및 학부모의 견제 및 감시 강화 등이 소비자 주권론의 핵심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국공립 초·중등학교는 학교운영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사립학교는 권장했으나 후에 의무사항으로 바뀜) 예산·결산, 선택교과 결정, 기부금, 방과후 활동, 학교 운영 전반에 관한 심의·의결·자문 기능을 하며 학부모, 지역인사, 교사, 동창회 대표 등으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초기에는 위원회의 성격과 활동이 애매했으나 점차 기능이 강화되고 교육감 선거권이 주어져 관심이 증대되었다. 선택교과제를 실시하여 학생 능력과 적성, 희망에 따라 교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교과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이동식 수업을 하도록 하였다. 교장초빙제, 교사초빙제를 실시하여 교육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도록 하였다. 학생들이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정보화 교육을 강조하였다.
소비자주권론의 원안은 5·31 교육개혁의 수립과정에서 상당부분 정제되었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일부 완화되었으나, 자립형 사립고 정책, 학교정보 공개, 대학 자율화 등 소비자주권론의 문제 항목들이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를 통해 다시 제기되었다.
제3절 교육개혁과 입시제도 변화
4차에 걸친 교육개혁의 목표와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복 후의 교육의 틀을 바꾸어 ‘열린 교육사회, 평생학습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둘째, 암기 위주의 획일적 교육에서 다양화 교육으로, 교육공급자 위주의 교육에서 교육소비자 선택의 교육으로, 규제 위주에서 자율과 책무성에 바탕을 두는 교육으로 틀을 바꾸었다. 셋째, 교육제도와 운영에서 수월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넷째,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대학 학생 선발제도는 대학입시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고 다양한 전형 방법을 뿌리 내리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국공립대학의 국어, 영어, 수학 중심의 대학별 고사를 폐지하고 사립대학의 학생 선발 방법을 자율화하였다. 중고교 학생 선발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하되 이행 과정상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학교 선택권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도록 하였다. 1996학년도부터는 중고등학교의 학군 내 희망교를 복수 신청 받아 추첨 배정하고 학교군을 광역화하였다. 본교는 고교연합고사를 치른 학생을 대상으로 추첨 배정하던 방식에서 연합고사를 보기 전에 진학 희망 학교를 신청하고 신청자 중에서 추첨하는 방식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본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이 많아 경쟁률이 4:1에 육박하였다. 동창회와 함께 조직적으로 우수 학생 유치에 노력하였다. 전주시에 각 중학교별로 담당 교사를 정하여 학교를 방문하여 홍보하고 가정 방문하여 전고에 지원하도록 하였다. 타 시군 중학교는 지역별로 담당 교사를 두고 학교를 방문하여 전주고의 과거와 현재, 전통 계승의 과정을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우수 신입생을 많이 유치하였다. 우수 학생들이 본교에 지원하도록 각 중학교를 전담하여 상위 그룹 학생들을 찾아가 학교 홍보를 하였다. 입시설명회를 통하여 학교 교육과정, 학습 지도, 생활 지도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학생의 다양한 능력과 적성을 계발하기 위해 본교의 특색 활동을 소개하여 전주고를 지원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교육개혁과 맞물려 있는 것이 대학입시제도이다. 대학입시제도는 교육과정 실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학교 교육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제4차(1981), 제5차(1988) 교육과정 시기는 대학별 본고사가 폐지되고, 대입예비고사(19691981)를 대체하여 대입학력고사(19821993)가 시행된 시기이다. 내신 성적을 반영하기는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고 대입학력고사 성적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학교 수업은 대입학력고사 교과목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학생의 과목 선택을 늘린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선택의 폭이 아주 좁았다. 교사의 수급 등을 고려할 때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기가 어렵다.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기존의 대입학력고사(1982~1993)는 폐지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되었다. 동시에 대학별 본고사가 부활되었지만 국·공립대학교에서 본고사를 금지하는 5·31 교육개혁안에 의해 결과적으로 사립대학교까지 본고사는 폐지되었고 대학별 논술시험만 남게 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논술시험은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극복하고 범교과적인 고등사고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학교 교육은 아직 개별 교과 지식 전달 중심이었기에 사교육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학입시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내신 성적, 논술 시험이 주요 전형 자료였다. 결국 교육과정은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관련된 과목과 과정으로 운영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안은 종래의 개혁안과 확연히 다르고 21세기를 염두에 둔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개혁안을 만들었다. 첫째,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위하여 교육공급자 간 교육 프로그램 경쟁을 통하여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교육공급자의 평가를 실시하겠다는 것이 기본 특징으로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었다. 둘째, 교육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GNP 대비 5%의 교육재정 확보 방안을 명시하였다. 셋째, 신교육 3법을 제정하여 교육개혁 추진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비하였다.
5·31 교육개혁의 결과 초등학교에서 열린 교육의 확산, 중·고등학교에서 수준별 이동 수업, 대학에서 정원 자율화와 특성화 추진, 기타 평생교육과 교육 정보화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안이 시행 초기 단계에 있고 정권이 바뀐 후에 실시할 것으로 되어 있다. 위원회는 활동을 마무리 하면서 2013년까지 12개 영역을 선정하여 달성할 구체적 목표까지 마련하여 차기 정부의 몫까지 설정해 놓았다.
제4절 5·31 교육개혁의 구체화 및 실천
문민정부에서 기획된 5·31 교육개혁의 대부분은 국민의 정부에서 실천되거나 시범 운영되었다. 수요자 중심 교육의 기치 하에 출범하여 수준별, 선택형 교육과정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된 것도 국민의 정부 하에서이다. 수행평가의 도입, 학생생활기록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학입시제도의 개선, 특수목적고 및 특성화 고교, 교원성과급제 운영, 자립형 사립학교 시범 운영 등 5·31 교육개혁의 핵심 내용들이 국민의 정부 하에서 시행되었다.
교육경쟁력 강화 사업, 교육계 내의 구조조정 사업 등 시장주의적 교육개혁은 IMF 구제금융사태로 인해 돌이켜 생각할 여지도 없이 강행되었다. 물론 정권 초반에는 민주화 정권으로서의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상향식 교육개혁을 지향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새교육공동체위원회를 구성하여 시민단체 대표 등 각계 인사를 참여시키고 이른바 상향식 교육개혁을 지향하겠다고 천명하였다.
평화적 정권교체와 민주화의 상징인 국민의 정부에게 최우선적으로 부여된 정책과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구제금융사태의 해결이었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 교육복지의 확대나 교육민주화보다는 구조조정 및 대학경쟁력 강화 사업에 치중하게 된 것도 IMF 구제금융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문민정부 시절 막연히 그려 보았던 세계화는 가혹한 현실이 되어 찾아왔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된 구조조정의 바람은 교직 사회에도 불어왔다. 교직의 안정성에 대한 사회의 비판을 부분 수용하여 교원 정년이 단축되고 성과급제도가 도입되었다. 전략분야 연구개발 지원이 강화되고 정보화 및 IT기술의 발전에 부응하기 위한 정보화 교육도 강화되었다. 나아가 산학협력을 강화하고 산업현장과 연계한 교육과정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국민의 정부의 정책 기조가 5·31 교육개혁안의 실천 및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에 치중한 측면이 있으나, 일부 교육 민주화 및 교육복지에 대한 관심이 기울여진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교원노조가 합법화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지방대 육성 문제 및 학벌 문제 해소를 위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국민의 정부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평생직업교육체제 구축, 학생 복지 확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 무상화, 학급당 인원수 감축, 교육여건 개선 사업 등 교육 복지 사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사태로 문민정부 시절 GDP 대비 5%를 가까스로 달성했던 교육 예산이 다시 줄어든 데다 강력한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에 밀려 이러한 조치들의 효과는 미미할 뿐이었다.
제5절 교육 민주화와 교육 복지에 대한 관심
사회적 비주류 출신인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정치 개혁과 사회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교육에 있어서도 교육 주체들의 권리 회복, 공교육 강화, 교육복지의 실현 등에 대한 주문과 기대가 높아졌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설정한 정책 방향도 이러한 사회적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인수위는 보고서를 통해 교육민주화, 교육의 공공성 강화, 공교육 내실화, 교육복지의 확대를 약속했다. 이는 교육기회의 분배 과정에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표방한 것으로 교육 정책의 일대 방향 전환을 시도한 셈이다.
인수위 보고서의 내용 중 주요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대학서열체제 완화: 학벌 문제 해소, 지방대 육성 등 교육의 실질적 문제에 대한 관심. 서울대 학부 정원의 단계적 축소 및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집중 육성, 대학의 영역별 특성화 강화, 수능 개혁 및 중등교육과정 졸업 자격고사의 도입, 지역 간 교육 격차 해소 및 지방대 육성.
- 교육혁신위원회의 출범: 대통령 직속 기구로 교육 관련 집단의 참여를 통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교육 개혁 모색.
- 교사회, 학생회, 학부모회의 법제화: 민주적 대학 지배 구조 등 교육민주화 청사진 제시.
그러나 이러한 방향전환의 시도는 정권 출범과 동시에 좌초되었다.
제2장 1990년대의 교육과정
다. 게다가 이러한 선택 과목은 단위 학교의 여건에 따라 학교가 지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학생의 과목선택권은 거의 인정되지 못했다.
내신 교과 성적 기록 방식은, 1980년대 초반에는 교과별 단위수와 성취도(수·우·미·양·가)만을 기록하였고, 1980년대 후반에는 학년 석차 등이 추가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에는 학년 및 교과별 석차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 시기의 학생 평가 방식은 초기엔 ‘절대평가’ 방식이었다가 나중엔 ‘상대평가’로 이행하여 간 것인데, 결국 기본적으로는 ‘석차’에 의한 ‘상대평가’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학교 현장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학생들이 동일 과목을 수강하도록 해서 학생들의 내신 성적 관리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상대평가제의 폐해는 ‘석차 9등급제(2005)’로 운영되는 현재의 학생평가 체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6차 교육과정이 시행될 때는 대입학력고사(1982~1993)가 도입·시행된 시기이다. 이 시기 대학입시에서는 대입학력고사 성적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정 운영에 있어서도 대입학력고사 과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1절 제6차 교육과정 개정과 대학 수능시험
제6차 교육과정에서도 학생의 개성, 능력, 진로를 고려하여 교육 내용과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교육과정 다양화를 강조하고 있다. 제4차, 제5차 교육과정에서 강조된 학생의 과정 선택이나 과목 선택에 학생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며, 학생의 진로와 관련된 모든 요인을 면밀히 분석, 검토하여 결정하도록 지도한다는 규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과정을 다양화할 수 없었다. 교사의 수급, 교실 환경, 제도 등의 문제로 교육과정을 다양화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의 적성과 특질에 맞는 대학 선발제도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과정 다양화는 이상일 뿐이었다.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은 ‘과정별 선택과목’뿐인데 이마저 ‘학교’가 선택하도록 하고 있고 선택과목도 학교의 교사 수급에 따라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학에서 요구하는 이수과정에 따라 학교의 선택과목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의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똑같고 학생의 과목 선택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제6차 교육과정의 특징은 ‘학생평가’에 있다. 지금의 수행평가는 이러한 학생평가 방법에서 근원을 두고 있다. 제6차 교육과정은 ‘절대평가제’를 채택하고, ‘서술형’ 평가 및 ‘관찰 평가’를 중시하였다. 과학 교과에서 과학실험이 강조되었으며 실험평가가 이루어졌다. 다른 교과에서도 주관식 평가를 일정 부분 하도록 명시하였으며 서술형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 채택된 학생평가 방식은 ‘5단계(수/우/미/양/가)’ 절대평가제였다. 이러한 절대평가제(1996~2004)는 ‘성적 부풀리기’라는 문제를 낳았다. 또 고등학교들 간에 차이가 있어서 똑같은 ‘수’이지만 실제 성적은 차이가 났다. 대학에서는 내신 성적을 대입전형에 반영함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다.
한편, 1994학년부터 기존의 대입학력고사(1982~1993)는 폐지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되었다. 동시에 대학별 본고사가 부활되었지만, 국·공립대학교에서 본고사를 금지하는 5·31 개혁안의 조치에 의해 결과적으로는 사립대학교까지 본고사가 폐지되기에 이르고, 대학별 논술시험만 남게 된다. 이때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논술시험은 그간의 지식 중심의 주입식·암기식 교육을 극복하고 범교과적 고등사고능력을 신장시키고자 도입되었지만, 이에 상응하는 당시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체제는 개별 교과 지식 전달 중심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불일치는 결국 수능과 논술을 대비하는 사교육만 양산했다. 이 시기 대입제도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중심으로 학교 내신과 논술시험이 가미된 형태라 할 수 있는데, 내신 비중은 낮고 수능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수업은 수능 과목 위주로 운영되었다. 본교 학생들은 수능과 논술을 사교육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수능을 위한 수업으로 교육과정이 편성되었으며 수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과목의 수업은 소홀했다. 보충수업은 하루에 3시간씩 하고 자율학습은 11시까지 하였다. 상위권 학생과 논술 시험을 보는 학생들 위해 심화야간 학습을 실시하였다.
제2절 제7차 교육과정 개정
제7차 교육과정은 대한민국 교육부(교육과학기술부)가 발족한 이래 일곱 번째로 개정된 교육과정이다. 1997년 12월 30일에 교육부 고시 제1997-15호로 고시된 교육과정이다. 현재 초·중등학교에 적용되고 있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말한다. 제7차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10년간을 국민공통 기본교육기간으로 삼아 연계된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고등학교 2, 3학년(11, 12학년)은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여 10년간의 공통 교육기간과 2년간의 선택 교육기간을 설정하고 있다.
이 교육과정은 ‘학습자’ 중심, ‘학생’ 중심 교육과정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고2부터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 체제를 도입하고, 학생의 수준에 맞춘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할 것을 규정하면서, 이러한 ‘수준별 교육과정’으로써 구체적으로 ‘단계형, 심화·보충형, 과목선택형’ 교육과정의 편성·운영을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만 보면, 이는 우리 교육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규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제7차 교육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준별 교육과정’은 편성되지 않았고, 단지 ‘수준별 수업’ 형태로만 운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육과정을 수준별로 편성하는 것을 전제로 학생이 각자의 수준에 따라 수준별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반면에 수준별 수업은 수준별 교육과정 편성 없이 ‘동일한 과목’을 상·중·하 수준으로 나누어 ‘수업’을 듣도록 하고 ‘시험’은 같이 보도록 하는 방식이다.
언뜻 보면 양자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수준별 교육과정’은 기존 문·이과 분반식의 과정선택형 체제를 ‘과목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체제로 바꾸자는 것인 반면에, ‘수준별 수업’은 기존 교육과정 운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업만’ 수준별로 ‘세분화’하자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러한 수준별 수업에 대해서는 과목별로 편성된 또 다른 ‘우열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결국 제7차 교육과정의 수준별 교육과정은 실현되지 않았고, 문·이과 분반식의 ‘엄격한 과정’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그만큼 학생의 과목 선택의 폭은 협소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 단위제를 넘어선 ‘과목선택형’ 체제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운영하고자 했던 애초의 ‘지향’은 구현되지 못했다.
수능은 고교 2, 3학년 때 배우는 심화 선택 과목을 출제 범위로 하되 고교 1학년의 범위를 간접적 출제 범위에 포함함으로써 고등학교 전 과정이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사회 탐구 영역 국사 과목은 국민공통 기본교육 과정에서 배우나, 수능에 출제되는 예외적 과목이다. 사실 이는 역사 교육 강화와 관련된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제7차 교육과정 개정은 국민공통 기본교육 과정과 고등학교 선택 중심 교육과정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며, 교육 내용과 방법을 진로와 적성에 맞게 다양화 하고 교육 내용의 양과 수준을 적정화하여 심도 있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함을 방침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이 교육과정은 학교급별, 학년별로 다음과 같이 시행되었다.
△2000년 3월 1일: 초등학교 1, 2학년 △2001년 3월 1일: 초등학교 3, 4학년, 중학교 1학년 △2002년 3월 1일: 초등학교 5, 6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2003년 3월 1일: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3학년
제3장 교육정책 변화와 전주고의 대응
제1절 대학수학능력시험과 학교교육
1994학년도부터 대학입시에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대체되었다. 7차 교육과정의 실험평가를 거쳐 확정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시행 첫 해인 1994학년도에는 2회 실시되었고 그 이듬해부터는 연 1회 실시되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대학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추어 언어, 수리 탐구 I, 수리 탐구 II, 외국어(영어) 영역별로 통합교과적 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사고력 중심으로 평가하는 시험이다. 학력고사가 교과 학습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면, 이 시험은 교과에서 배운 내용을 통합하고 활용할 줄 아는 종합적 사고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이 시험은 단순한 암기식 문제보다는 사고력을, 원리의 이해 및 실생활에서의 적용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학교 교육에 대폭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다양한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고 교과 지식을 현실 생활과 관련짓는 활동, 독서 활동 등을 강조하였다. 신문, 잡지, 간행물 등을 활용한 NIE(신문활용교육·Newspaper in Education) 교육이 활성화되었고, 신문 읽기, 신문 스크랩, 기사를 활용한 토론 수업 등이 실시되었다. 교실에 신문, 잡지 등을 비치하고 수업 시간에 실생활과 관련된 수업을 하였으며, 독서 잡지, 과학 잡지 등을 구입해 교실에 비치하였다.
특별활동 부서에도 독서토론반, 논술반, 토론반, NIE반, 시사토론반, 역사토론반, 심화수학반 등과 같은 깊이 있고 다양한 활동을 위한 활동 부서가 만들어졌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 후 가장 활성화된 것이 독서 활동이다. 사고력 신장과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독서 교육을 강조하였다. 교과 활동으로서 독서 교육은 물론, 재량활동이나 특별 활동 시간에 도서관에서 독서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독서 교육을 위해 독서 환경의 조성, 독서 활동 조장을 위한 행사, 독서와 관련한 평가 등을 하였다. 학생들과 교사들이 원하는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구입했으며, 언제든지 쉽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전문 사서교사 체제를 유지하였다.
특히 우정학숙에 도서 거치대를 마련하고 도서를 기증받아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대출 절차를 두지 않고 자율적으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분실된 책은 언제든지 보충한다는 자세로 독서를 강조하였다. 독서 환경 조성과 독서 교육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전주고가 다른 학교에 비해 월등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절 대학별 고사·논술고사와 학교 교육의 실제
대학수학능력시험과 함께 나타난 대학입시제도의 변화는 국어, 수학, 영어를 중심으로 한 대학별 본고사의 부활과 논술고사의 등장이다. 대학별 본고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변별력을 보완한다는 취지에서 대학별로 실시되었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글을 읽어야 하고 내용과 관련된 문제에 서술형으로 답해야 하는 국어의 경우는 철학, 인문, 사회, 문학, 종교 등 깊은 사고와 독서 능력이 요구되는 시험이었다. 본고사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야간 수업을 하거나 휴일에 독서 토론과 쓰기 활동을 하면서 대비하였다. 특히 지도교사들은 수업 준비를 위해 관련 도서를 구해 읽고, 관련된 많은 내용을 준비해야만 했다.
수학의 경우는 대학수학능력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심화된 수업을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수학은 난이도를 높이는 수업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방법이나 목표가 정해진 반면, 국어는 광범위한 시험 범위 때문에 준비가 어려웠다. 영어는 내용과 구문에서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 이 시기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보다 교사들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본고사 대비 사교육 시장이 있었지만, 본교 학생들은 학교를 믿고 학교의 교육 방침대로 공부하여 많은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본고사가 사교육을 조장하고 학교 교육에 지장을 가져오자 1995년에 발표된 교육개혁안에 따라 국·수·영 중심의 대학별 본고사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논술고사는 계속 실시되었다. 논술고사는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 능력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가를 평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논술교육은 단순한 쓰기 교육이 아니라 독서 활동이 수반된 논리적이고 통합적인 사고 활동이다. 과제를 제시하고 자료를 조사하여 논술하도록 하며, 교사가 첨삭한 후 토론하는 수업을 전개하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과학, 윤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슈가 되는 문제나 현실 상황과 관련된 문제를 제시하고,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었다. 타교에서는 논술 지도를 외부 강사에게 맡기기도 했지만, 전주고에서는 재직 교사가 직접 논술 지도를 했다.
제3절 학교생활기록부와 대학입시 준비
교과성적에 의한 한 줄 세우기라는 비난과 내신 부풀리기로 인한 불신으로 고등학교 내신 성적 산출 방식은 1997학년도부터 변화가 있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대학이 자율적으로 반영하도록 하여, 내신 성적 산출 방식이 보다 포괄적으로 개편되었다.
1996학년도부터 기존의 생활기록부가 종합생활기록부로 바뀌었고, 1996학년도 2학기부터 다시 학교생활기록부로 변경되었다. 종래의 생활기록부는 교육과정의 모든 영역을 계량화하고 총점에 의한 서열화를 중시함으로써 전인적 성장을 방해하고 지나친 경쟁심을 유발하며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초래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점 석차에 의한 고교 내신 15등급제를 폐지하고 학교생활기록부를 도입하였다.
학교생활기록부는 15등급의 내신 등급 대신 각 교과별 계열 석차와 평어를 기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반영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이 매우 중요해졌으며, 학생의 교과 활동, 특별 활동, 봉사 활동, 단체 활동 등 학교생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또한, 전체 석차 기록란이 없어지고 교과별 석차가 기록되는 형태로, 학교생활기록부는 상급학교 입학의 중요한 전형 자료로 사용되었다. 행동 발달 상황란과 특별 활동 상황의 ‘가나다’ 척도를 없애고 서술적으로만 학생의 발달 상황을 기재하도록 하며, 학생의 자격증 취득 상황란이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총점과 석차가 아닌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소질과 적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 교육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학교는 학생들의 활동을 수시로 기록하고, 학생의 적성과 활동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다. 행사 시에도 학생들의 활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학교 외 가정이나 교외, 교우 관계 등에서 특이점을 파악하여 기록하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종래의 생활기록부는 객관적인 성적 자료를 기록하면 되었지만, 학교생활기록부 체제에서는 학생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면담을 통해 사고와 인성을 파악하여 활동과 관련지어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학년말에 한꺼번에 기록하는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
제4절 교사선택제 및 심화 보충수업
1990년대는 5차 및 6차 교육과정의 시기이지만 5·31교육개혁 조치와 함께 수요자 중심 교육 바람이 불어 2002년부터 시작될 7차 교육개혁의 내용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7차 교육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준별 심화 보충학습 및 교사 선택제가 1996년부터 교단에 도입되어 학교 현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수준별 및 과목 선택제에 따른 충분한 고려와 교원 수급 등의 교육 현장에 대한 고려 없이 일률적으로 도입된 이 제도는 학생 입장에서 원하는 교사에게서 자기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는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수준별 교육과정이 제시되었지만 교사 수급, 교실 확보, 학생의 과목 선택과 수준 선택에 따른 성적 산출 방법, 평가 방법, 대학 입시에서 내신 성적의 반영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준별 심화 보충학습 및 교사 선택제는 이상일 뿐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다.
실제로 교육부의 7차 교육과정 시범학교로서 본교는 수준별, 교과목별 수업을 위해 새로운 교사를 신축했다.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구조의 교실이 설계되었다. 그러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제도는 상중하 수준별 이동수업이라는 형태로 변형, 실시되었다. 교과목 석차를 반영하는 내신 성적을 산출해야 하는 입장에서 수준별 수업에 따른 평가는 학생들에게 불리하였으며 교사들에게도 불편함만 주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1999학년도부터 아직 6차 교육과정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7차 교육과정을 적용하였다.
제5절 고입 입시제도 변화와 학교의 대응
20년 동안 시행되어 오던 고등학교 입시제도가 1996학년도부터 학생의 선택권이 보장된 안으로 일부 개선되었다. 고입 선발고사에 합격한 학생들을 임의적으로 추첨 배정하던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 선발 방식이 1996학년도부터는 신입생들이 부분적으로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로 바뀐 것이다.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1지망에서 3지망까지 선택을 하고 이중에서 추첨 배정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실시 첫 해 많은 학생들이 전주고에 지원하여 1지망에서 미달한 학교들이 나왔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성적 우수자를 유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경쟁률이 높아 배정될 가능성이 낮음에도 성적 우수자들이 본교를 지망함으로써 우수한 신입생들이 본교에 배정되었다. 1979년부터 고교 평준화 제도가 시행되어 학력의 격차가 심하고 다양한 학생들이 한 교실에 있어 수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학력 차는 벌어져 학생과 교사가 힘들었다. 교사들은 학습 수준을 맞추기가 어렵고 학생들은 수준이 낮거나 지나치게 높거나 하여 어려웠던 시기였다.
1996학년도부터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학교 선택권을 부여한 선지원 연합고사 후 추첨 배정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주지하다시피 제1지망에 자신이 가장 원하는 학교를 희망 선택하여 추첨되지 않으면 제2지망까지 선택할 수 있으므로 그 이전의 완전한 평준화 시대보다는 그래도 전주고를 선호하는 우수 학생을 유치하기에 비교적 융통성이 있게 된 진일보한 제도였다.
1996학년도부터는 전주고에서도 본교에 근무하는 재직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전 교직원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 우수 학생을 전주고에 1지망토록 하는 유치 활동이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전주시 내 중학교와 타 시군 중학교를 대상으로 유치 홍보 담당 교사를 정하여 5, 6월부터 우수 학생 명단을 입수하여 연중 이 학생들과 전화 상담, 학부모 방문 면담, 학교 방문 등을 통하여 개별 접촉을 꾀하여 전주고가 가진 교육 여건의 장점을 적극 홍보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각 영역별(예·체능 및 문예, 과학, 수학, 영어, 컴퓨터 등)로 재능이 뛰어난 특기자가 전주고에 지원하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야간에 가정이나 학원을 방문하여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했으나, 우수한 일반 학생들은 경쟁률이 낮은 학교로 지원하여 우수한 학생을 많이 유치하지 못했다.
제6절 제7차 교육과정에 맞춘 교사 신축
1969년 화재 후 지은 본관 교사는 균열이 가는 등 노후화되었다. 1998년 6월 12일 ‘2000년도 36학급 규모의 교사 신축을 위한 특별교부금’을 신청하여 그해 12월 31일 특별교부금 교부 통지를 받았다. 이어 본관 신축을 위한 절차가 신속히 진행되었다.
5·31 교육개혁안에 따른 7차 교육과정 시행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7차 교육과정 시범학교 3개교 중 하나로 본교가 선정되어 1999년 교육과정 운영 시범학교로 지정 운영되었다. 7차 교육과정은 선택 중심의 수준별 교육과정이었다. 이동 수업, 교과 선택제, 열린 교육 등을 고려한 교사 신축 대상으로 본교도 선정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69년 화재 이후 지어진 본관 건물을 철거하고 교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본관 건물과 분수대, 정원, 구도서관 터에 ‘전주고 본관 개축 계획(안)’이 1999년 3월 31일 확정되었다. 본관 개축 기본 계획 연구 용역자가 3개월 후인 6월 21일 선정되고 기본 계획 연구 자문회의, 기본 계획 연구 결과 설명회 등을 거쳐 제7차 교육과정인 교과별, 수준별, 이동 수업에 대응할 수 있는 안을 결정하고 1999년 말에 계약을 완료하고 2000년 3월에 착공하여 현재 교사 앞 동을 건축하였다.
학생이 자신이 좋아하는 교과와 수준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하고 한 교실에서도 수준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소 토론실 등 다양한 교실이 있는 건물이다. 교실의 크기가 다르고 학생들의 이동을 위하여 복도가 설계되고 휴게 공간이 많은 건물로 과거의 건물 구조와는 판이하게 다른 건물이다.
제7절 동의교사제 운영
문민정부 5·31 교육개혁 조치에 따라 단위 학교의 자율적 운영이 강조되었다. 교원 인사 제도에서는 교장 초빙제, 교사 초빙제, 동의내신제 등을 통하여 교원 인사에서 학교장의 의사를 반영하도록 하였다. 초빙제는 연구학교나 시범학교에 적용되는 제도로, 학교나 학교장의 자율적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교는 동의내신제를 통해 국어, 영어, 수학 교과 교사를 3명까지 학교장이 선정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4명까지 확대되고 교과 협의회와 학교 운영 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되었지만, 제도 초기에는 학교장이 본교에 전입하고자 하는 교사를 선발하여 교육청에 요청하면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으면 전보하였다. 이 제도는 학교의 특수성이나 교과 운영, 입시 교육을 위해 필요한 유능한 교사를 선발할 수 있는 제도로서 확대 유지되고 있는 제도이다.
제4장 1990년대 전주고 교육방향과 성과
제1절 전주고 교육이 기대하는 인간상
본교는 미래사회를 주도할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기본 방향을 중심으로 세 가지의 경영 방침을 결정했다.
첫째, 긍정적 자아의식이 투철하고 인성이 바른 전고인 육성.
둘째, 과학적인 탐구 정신을 습득하여 미래 지향적인 진로를 선택하는 창조인 육성.
셋째, 쾌적한 학습 환경 조성과 최신 설비를 갖춘 교육시설 확충.
그리고 본교에서는 인성 교육의 내실, 창의성 교육의 충실, 미래 대비 교육의 강화, 교직의 전문성 제고, 교육 여건의 선진화 등의 5개의 중점 시책을 펴기로 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다루어질 때 달성하고자 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위의 중점 시책을 실현하기 위해 역점 사업을 선정했다. 21세기를 대비한 진로 지도, 바른 품성의 인성 교육, 체육 지정 종목(야구, 농구, 유도) 육성, 도서관 활용 극대화, 학교 전통 계승 발전 등의 학교 특색 사업을 설정하고 사업 달성을 위해 노력했다.
◇ 전고 교육이 설정한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
- 1991~94 학년도: 덕성과 능력 있는 애국적 자율인
- 1995 학년도: 자립적이고 창조적인 도덕적 자강 세계인
- 1996~98 학년도: 지성과 덕성을 갖춘 건강한 창조적 자율인
- 1999 학년도: 자기주도적 학습 태도를 형성하며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전고인
제2절 전주고 교육의 노력 중점 및 특색활동
한국의 교육은 그간 교육 기회의 확대에 따른 양적 성장에 치중해 왔으나, 이제 국제 경쟁 시대를 맞이하여 질적 향상을 추구해야 할 시점에 있었다. 이에 따라 전주고에서는 제반 교육 활동을 ‘학생을 위한, 학생 중심의’ 교육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노력 중점을 설정하였다.
1990년대는 교육과정 운영의 정상화를 기하는 측면에서 실천 가능한 내용이 주로 설정되었다. 특히, 전주고등학교는 미래 사회를 주도할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하여 다음과 같은 노력 중점 실천 목표를 설정하여 실시하였다.
1991학년도 노력 중점
면학풍토 정착 ① 교수학습 방법의 개선 ② 도서관 운영의 활성화 쾌적한 학습 환경 조성 ① 안정감 있는 실내 관리 ② 과학실 운영과 실험 기구 정비 ③ 화단 조성: 전 교정의 공원화 1992~94학년도 노력 중점
학생과 함께하는 노송원(老松苑) ① 즐거운 학교 분위기 조성 ② 사제동행하는 학습 ③ 부단한 연수를 통한 스승상 정립 ④ 자기 수업 모형 개발 ⑤ 도서관 운영 활성화 1995~98학년도 노력 중점
책과 더불어 생활하는 즐거운 학교 완성 ① 부단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상 정립 ②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면학풍토 정착 1999학년도 노력 중점(요지) ① 학생 선택 선도제 운영 ② 긍정적 자아 개념 형성 ③ 양심 형성하기 ④ 이웃사랑 봉사활동 ⑤ 토론 능력 키우기 ⑥ 기본 생활 습관 다지기 ⑦ 학교 사랑 실천의 날 ⑧ 노송대 모의 재판 ⑨ 집단 따돌림이 없는 학교 ⑩ 노송 어울마당(전고혼 찾기) ⑪ 존경 받는 스승상 정립
1999학년도 학교 특색 활동 ① 새 전고문화 시범 학급제 운영; 시범 운영 결과 발표회(2000. 2. 16) ② 열린 도서관 운영: 독서 환경 조성, 학생 의무 독서제 시행, 독서 행사 다양화 ③ 테마식 현장 체험 학습 - 역사 기행, 문화 탐방, 자연 탐구, 진로 탐색
제3절 ‘새천년 전주고 비전’ 제시
1999학년도에 새천년을 준비하는 시대적인 흐름에 맞춰 전주고등학교는 21세기 교육이 지향할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미래형 본관 신축
준공예정일: 2000.5.20. 예산: 41억 8천만원 구조: 4층 슬라브 교과연구실 12실, 보통교실 18실, 회의실 3실, 특별교실 13실, 보건위생실 3실, 승강장 3개소 학생의 교과 선택 확대
교양과목: 생활경제, 철학, 심리학, 환경과학, 종교, 교육학 제2외국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에스파니아어 새 전고문화 확산
복수담임제 정착 컴퓨터교육 강화 특기·적성 교육 강화 외국어 교육 강화 집중이수제 확대 실시 학생선택선도제 정착 전통예술교실 운영 cyber 토론방 운영 순회교사, 겸임교사제 활용 모둠 영역 확대 수행평가 정착 전고혼 발현(애국애족 정신 이어받기)
교표(솔방울)의 상징성 알기: 지조와 절개 1924.4 항일 동맹휴업 1929.5 조선역사교육 요구 동맹휴업 1930.2 항일 가두시위 1946.1 반탁 가두시위 주도 1950.7 6·25동란 학도병 지원 1953.7 휴전 반대 궐기대회 1969.7 3선 개헌 반대 무기 휴교
제4절 인성교육 강화
교육개혁이 논의되면서 그 주된 교육의 흐름은 인성교육이었다. 인성교육 문제가 된 것은 그간 대한민국 교육에서 사람다운 품성을 기르는 교육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학교교육이 대학 입시 위주 교육으로 일관되어 참다운 지식이 아닌 대학 입시용 지식이 되어 인간으로서 필요한 예의, 도덕, 품성, 책임,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 소홀히 해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같은 교육을 더 이상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와 반성이 교육개혁 논의점으로 제기된 것이다.
위와 같은 교육적 흐름에 발맞추어 본교에서는 인성교육의 구현목표를 ‘21세기를 주도하는 도덕적이고 창의적인 전북인 양성’으로 정하고 주 2시간을 인성교육시간으로 배정한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집중적으로 실천하였다.
긍정적 자아개념 형성 격월제로 자기조절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집단상담을 실시하였고 매주 월요일 아침에 방송부와 윤리부가 합동으로 명상의 시간을 운영했다. 아울러 격주로 올바른 가치판단 교육을 위한 훈화자료를 학교 윤리부에서 제작하여 학급담임 중심으로 지도하였다.
민주시민의식 강화 먼저 행하기 운동이 학생부 주관으로 실시되었고 1인 1역할 봉사활동이 환경부·학생부 협력으로 이뤄졌으며 사회과 정규교과시간에는 열린 교육 일환으로 토론학습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경로효친교육 효행학생 수범사례를 매년 2회에 걸쳐 발굴하였으며 우리가족 인성교육 사례발표, 효행 편지 쓰기 등 학교와 가정이 연계되는 효경(孝敬) 교육이 이뤄졌다. 한편 학생 스스로 노인정과 자매결연을 맺어 매 분기 1회씩 방문하여 청소, 위로, 경연 등 자율봉사활동을 활성화해 주위 관심을 끌었다. 또한 도서관이 활성화되어 효경 관련 서적 읽기, 위인전 및 고전 읽기 등 독서 지도가 시행되었다. 대입 논술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전주고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지도가 비중 있게 취급되기도 했다.
예절 교육 강화 교사의 학생 이름 알기, 제자 장점 찾기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와 수행평가로 바뀌면서 전주고에서는 실습 위주 교육, 예절 교육이 강화되었다. 이 같은 기본생활습관 지도를 열심히 한 결과 1996, 97, 98년 도교육청 장학지도에서 인성교육 우수학교로 평가되었다.
제5절 도서관 이용수업 활성화
1964년에 개관한 도서관은 연건평 320여 평의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 3층 건물이었다. 개관 초기 이곳에서 전국 도서관대회가 개최될 만큼 크고 유명한 도서관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청동으로 된 반딧불로 상징되는 이 도서관에서 꿈을 가꾸었다. 학과의 단편적 지식을 암기하는 학습으로 대학입시가 변질된 후 자기주도적이고 탐구적인 학습보다는 단편적 지식 습득이 중요시되자 도서관 이용이 뜸하고 도서들은 오랜 세월 동안 먼지만 쌓이게 되었다. 도서 구입비 지원도 중단되고 묵은 책들만 보관하는 창고가 되어 버린 도서관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이따금씩 도서관을 찾던 학생들마저 하나, 둘 발길을 끊어버려 더 이상 도서관의 기능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94년부터 시행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자기주도적인 탐구학습을 유도하는 대학입시제도였다. 단편적인 지식 암기의 학습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다양한 독서와 사고가 없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었고 독서가 없이는 대학별 고사와 논술 시험에 대비할 수 없었다. 독서활동과 논술이 강조되는 학습 열풍에 도서관 활용을 통하여 많은 책을 읽도록 교육 방침을 정하였다.
1994년부터 전라북도교육청이 도서관 살리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연간 800만원 정도의 도서비를 지원하였고, 1998년부터 본교도 도서관 활성화 운동과 독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하루 약 40명씩 나흘 동안 매일 3시간 이상 대청소를 하고 서가를 운반하고 도서 분류 작업을 하였다. 도서관 활성화를 위하여 도서관 전산화를 하였다. 심재욱 교사가 전산화 작업을 하였는데 2년여 걸리는 작업과정을 단 두 달 만에 마무리지었다.
동창회에서 도서관 환경 정비에 850만원을 지원하여 커튼, 물품보관함, 복사기, 바닥 장식재 등의 시설을 정비하였다. 황기연 교장은 독서교육을 위해 도서관 정비와 도서관 활용 수업에 힘을 쏟았다. 특히 모교 책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기숙사에 독서 환경을 조성하였다.
1999년 3월 도서관은 임산(독서지도 담당) 교사와 심재욱(도서관운영 담당) 교사 및 1964년 이래 모교에서 근무한 전준섭 사서교사가 독서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서실 한 곳, 자료실 두 곳, 독서실 세 곳, 야외휴게소 한 곳, 열람석 한 곳 갖추고 있으며 2만 4,000여 권의 도서가 있었다. 도서관 1층에 있는 독서감상실, 독서열람실, 독서토론실은 24시간 개방되어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하였으며 독서토론실은 동아리 학생들의 모임 및 토론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도서관 2층에 있는 자료열람실은 평일은 물론 토요일 오후, 일요일, 방학 중에도 열람과 대출을 받을 수 있으며 본교 학생들 뿐만 아니라 독서를 원하는 학부형,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 지역주민에게도 완전 개방되었다. 114석의 열람석이 있고 냉난방시설도 완비되어 있으며, 비수익으로 운영되는 최고급 복사기가 마련되어 있어 원하는 자료를 개인이 자유롭게 복사할 수 있었다. 도서 배열은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문학, 논술, 컴퓨터, 고전, 수학능력, 취미, 오락, 종교, 철학, 역사 등으로 코너화되어 있으며 간행물 코너, 신문 코너, 사전류 코너 등으로 특성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도서관이 제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재직 교사들의 관심과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 현관 입구에는 게시판이 두 군데 설치되어 있었는데 독서 정보와 교사들의 ‘추천 도서’를 제시하였다. 또한 게시판 위에는 ‘세상을 본다, 세계로 간다’라는 양음각 현판이 걸려 있어 미래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이 현판은 교사들의 뜻에 따라 1998년 5월에 제작된 것이다.
1998년 도서관의 하드웨어가 마련된 해였다면 1999년 이후는 소프트웨어를 꽃피우는 해가 되었다. 쉼 없이 도서관을 이용하고 독서에 열중하는 전고 학생들은 독서토론회며 독후감 발표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전고 도서관 일간지의 화제 전고 도서관은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조선일보는 1998년 10월 28일자에 ‘자녀와 함께 독서 하세요. 전주고 지역주민에 도서관 개방, 장서 2만 3,000권 신문잡지도 갖춰, 주민 주민등록증만으로 한 달간 대출 가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다음은 기사 내용. 틀:오류로 이미지 삽입 불가 나주엥 넣기
제6절 특별활동의 다양화
제5장 1990년대 전주고의 특색활동
제1절 단학 수련과 줄넘기 운동
1998년에는 단학 수련과 줄넘기 운동이 시행되었다. 학생들의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위해 학교 교육과정 외의 특별활동으로 전고만의 특색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단학 수련은 1, 2학년이 격주로 토요일 4교시에 대강당에서 외래 강사(단학선원)의 지도로 행해졌으며, 학생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학생들은 차분하고 진지한 태도로 수련에 임했으며, 이 수련이 학습에 지친 몸과 정신을 맑게 하고 집중력을 높여 궁극적으로 학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단학 수련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인 체조: 동작과 호흡을 일치시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기혈 순환을 촉진시켜 자연치유력을 극대화한다. 단학 행공: 여러 자세를 취하면서 단전호흡으로 기운을 축적시키고 전신으로 기운을 순환시켜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른다. 뇌 호흡: 뇌에 기운을 원활히 흐르게 하여 충분한 혈액과 산소를 공급, 뇌의 건강을 유지하고 기능을 최상으로 발휘하도록 한다. 줄넘기 운동은 매주 목요일 7교시에 1학년, 화요일 7교시에 2학년이 체육교사의 지도로 운동장에서 학년별로 실시되었으며, 체육대회 때는 줄넘기 또한 정식 종목으로 도입되어 열띤 경연이 벌어졌다. 줄넘기의 생활화는 1999년도에도 지속되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줄넘기 생활화 운동 전개: 체육시간에 줄넘기 운동 지도, 여가 시간을 활용한 줄넘기 운동 확산, 가족 및 이웃과 함께 하는 줄넘기 재미있는 줄넘기 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 1인, 2인, 긴줄넘기, 음악줄넘기 프로그램 보급(4월), 줄넘기 영상자료 제작 및 보급(5월) 특별활동에 줄넘기 부서 개설 학급별 줄넘기 경연대회 실시(5월) 시범학급 운영(1학년 1반)
제2절 선배동문 초청 ‘명사 특강’
수요일과 금요일의 특별 활동 시간에는 명사 초청 특강이 실시되었다. 명사 초청 특강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강사의 전문 분야, 학생들의 관심 분야, 학교 활동 상황 등을 고려하여 체계적으로 주제를 선정하고 계획을 세워 실시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동기를 부여해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정신 무장을 새롭게 하는 행사였다. 강연을 듣고 감상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주고 선배 동문들의 특별 초청 강연이 많았으며, 김원섭 전 경원대 총장, 장명수 전 전북대 총장, 최명재 파스퇴르 회장, 심재철 전 과기처 장관, 엄환석, 진념 동문 등 여러 동문들이 강연을 하여 후배들을 격려하고 전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재학생 후배들은 선배들의 식견과 학식을 직접 대하며 애정어린 조언을 듣고 평생 잊지 못할 감명과 추억을 남겼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러한 활동은 전주고등학교의 특색 사업으로서 200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학생들은 강사 선배의 삶과 이력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활력을 찾기도 하였다. 교사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런 행사를 더 많이 실시해야 한다고 찬동하였다
제6장 1990년 정보화 교육의 시작
제7장 1990년대 진학지도
1979학년도 고교 평준화 이후 대학입시에서 과거 전주고와는 현격히 다른 결과를 냈다. 학교와 동창회, 교직원들은 수 십 년간 쌓아온 전주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옛 전고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으니, 대학입시에서 4년 연속 ‘도내 제1’의 입시결과를 내었다. 이러한 성과는 1990년대 전고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값진 성과라 할 것이다.
전주고가 이렇게 한 동안의 부진을 말끔히 씻고 괄목할 만한 진학실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진학지도 및 교수 학습 개선에 있었다.
제1절 진학지도 핵심사항
밀도 높은 수업 전개
1990년대는 평준화 이후 다양한 학습 능력을 지닌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거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시기였다. 개학날부터 전 학년 보충수업 및 야간 자율 학습을 실시하며 학생과 교직원 모두 새로운 각오로 학기를 시작하였다. 학생들에게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여 전고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도록 하였다. 학부모들은 호남의 명문 전고에 자신의 아들이 입학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전고인으로서의 긍지를 느꼈다. 학교는 교과별 시범·연구 수업을 자주 실시하고, 수업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자기 장학을 진행하였다. 또한, 명문고답게 가장 효과적인 교수·학습 방법을 연구하고, 심도 있는 수업을 전개하여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실력 향상에 노력하였다.
심화학습, 특별 보충수업, 자율학습 실시와 심화 운영
평준화 이후 대학 입시 결과를 분석하여 대책을 마련하는 데 분주하였다. 우선 수업의 질을 높이고 학습량을 늘리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전 학년 전체 학생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2시간의 심화학습을 3시간으로 늘리고, 토요일 아침에 1시간을 추가하여 주간 총 16시간의 보충수업을 실시하였다. 결과적으로 수업이 아침 07시 40분에 시작되어 오후 6시 30분에 끝났고, 오후 7시 20분부터는 1, 2학년은 저녁 10시까지, 3학년은 자정까지 야간 학습을 실시하여 실력 향상에 큰 효과를 보았다. 특히 상위 100등까지 학생들은 저녁 7시부터 8시 50분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국어, 영어, 수학 과목에 대한 특별 보충수업을 받았다. 이를 통해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공교육 기관에서 해결하였으며, 학부모와 학생, 지역사회는 큰 관심과 호응을 보였다. 또한, 심화반을 편성 운영하여 학습 수준이 동일한 집단끼리 공동의 학습 목표를 갖도록 하였으며, 이를 위해 전담 교사제를 운영하였다. 1996년부터는 교과 수준별 이동 수업이 다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다. 1, 2학년 학생들은 3개 학급을 하나로 묶어 상·중·하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 방법은 학생들의 집중력 저하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1998년부터 보완 및 변형되어 확대되었다. 교육부의 ‘새 학교문화 창조’ 교육 개혁에 따라, 이전의 ‘보충수업’이 ‘심화학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수요자 중심의 수준별 이동 수업이 실시되었다. 이는 교수·학습 방법 개선을 통해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로, 정착과 발전을 위해 교사들의 노력과 교육 여건 마련이 필요했다.
‘우정학숙’ 개관, 독서 및 학습지도
1990년대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위한 효율적인 지도와 체계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기숙사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신입생 모집 시 약속했던 기숙사 건립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90년부터 노송대 신관 뒤에 있던 야구부 합숙소를 3학년 학생 전용 기숙사로 활용하였으나, 협소하고 시설이 열악하여 부족하였다. 1995년 1월, 총동창회에서 ‘전주고 장학숙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숙사 건립 기금을 모금하였다. 1995년 말, (주)부영건설이 기숙사 기증 의사를 밝혀 계획이 급진전되었고, 1996년 2월 27일 기숙사 ‘우정학숙’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기공식에는 여러 기관장과 동문, 재학생 등 2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우정학숙은 (주)부영에서 8억여 원을 투입하여 연건평 404평, 지상 4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 기증하였다. 준공식은 1996년 6월 16일 본관 후정에서 열렸으며, 기숙사는 식당, 취사장, 사감실, 4인 1실의 기숙실과 세면장, 샤워장, 탈의실 등을 갖춘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우정학숙에는 3학년 60여 명과 1, 2학년 80여 명 등 총 140명의 학생들이 생활하며 학습과 독서에 열중하였고, 1999년 기숙사를 통한 학습 및 독서 지도가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 입시에서 전북 최다 합격자를 낸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기숙사 운영은 타 시도 명문고의 기숙사 운영을 벤치마킹하여 실정에 맞게 운영되었으며, 이를 본교의 기숙사 운영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학교도 있었다
제2절 서울대 입시 전주시내 4년 연속 최고 성적 달성
공귀섭 교장(29회)은 1994년 3월 1일 본교에 부임하면서 실력 향상이 지역 및 모교 발전에 최선의 길임을 강조하였다. 부임 첫해에는 학교 시설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여, 화장실 개선, 특별실 개축, 전 교실에 VTR 및 O.H.P 설치 등을 완료하였다.
교직원과 학부모들의 헌신적인 노력 및 협조 덕분에 1994년부터는 3학년 학생들에게 방과후 우수 학생에 대한 특별 보충 수업 대신 심화반을 구성하여 상위 학생들의 수월성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밤 12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확대하여 학생들이 쉴 틈 없이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게 했다. 학습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모교 출신 저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교직원들에 대한 특별 대우도 이루어졌다. 3학년 담임 및 교과 담당 교사를 적정 배치하고, 동창회 지원으로 특별 수당 및 해외 연수 등의 혜택을 제공하여 교직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교사들은 오직 학생 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추석날에도 학업에 열중하게 하여 ‘전고는 쉬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에 학생들은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자부심을 느끼며 실력 향상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1996학년도 대학 입시에서는 서울대 18명 및 전북대 176명이 합격하여 16년 만에 전주 시내 1위를 기록하였다. 당시 대학 입시에서는 복수 지원으로 서울대에 합격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이 성과는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 예년 같으면 두 배의 합격자를 낼 수 있었던 해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학교와 모교 동문들은 큰 기쁨을 느꼈으며, 전고가 예전의 명문이라는 자부심을 완전히 되찾은 분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전고 교감이던 오근량(40회) 동문은 이러한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화려할 때 우리 모교의 역사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평준화 되었습니다. 81년 졸업생(58회)들이 최고의 입시 성적을 내고 급전직하 되었던 대학입시 현황은 전주시내 2위에 그쳤던 애석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이번에는 해냈습니다. 전주시내 1위를 되찾았습니다. 실로 16년만의 일입니다. 숫자적으로는 적으나 입시제도에서 복수지원제가 없었다면 훨씬 더 큰 성과가 있었으리라 믿습니다만, 서울대 합격자 수에서 보면 시내 2위 고교보다도 배가 넘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경향성이 있다고들 합니다. 평준화 이후 “전고도 별 것 아니고만”하는 따가운 이목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하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씨앗이 커가고 있습니다.
입시성적의 저조가 평준화 때문이라는 이유로 위로 삼던 세월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전주 시내 20개 인문고등학교 중에서 서울대, 고대, 연대, 수도권 지역 대학, 전북대 등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시킨 것은 모교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는 모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동문 여러분의 덕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교 선생님들의 숨은 노고도 있다고 믿어 지난 2월에 3학년 담임교사들에게 교장 선생님께서 앞장서 39회 이후 동문들의 도움을 받아 개교 이래 처음으로 해외 연수를 시켜주어 교사들의 사기를 드높혀 주었고, 총동창회에서 수고하여 서울대 합격자 전원과 고대, 연대, 전북대 등 합격자 중 25명을 선발하여 2,500여 만원의 장학금도 지급하여 재학생들의 사기도 높아가고 있습니다.
“ “이제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승세가 2~3년만 지속될 수 있다면 새로운 이미지로 대 전고를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여러 동문들께서 조금만 더 마음을 모아 밀어 주신다면 더 큰 열매가 맺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모교에 재직하시는 선생님들이 열심히 살아갈 각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그 징표는 연중 어느 때라도 동문들께서 모교 옆에 지나시면 밤 12시 이전에 모교의 교사에 불이 꺼지지 않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지켜보아 주심이 모교에는 힘이 되고 재학생들에게는 활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동문으로서, 모교 교감으로서 감히 고백성사하듯 드리는 말씀으로 애교심으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밀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이와 같이 1996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서울대에 18명이 합격하고, 97학년도에도 서울대 23명이 합격하여 다시 한번 전국에 전고의 명예를 빛냈다. 98년도 대학입시에서도 18명이 서울대에 합격하여 전주시내에서 영광은 또 한 번 전고의 것이었다. 평준화 이전 전국 4연패의 규모와는 다르지만, 평준화된 상태에서 다시 전고를 호남의 명문으로 우뚝 세우고 가장 열심히 하고 공부 잘하는 학교의 이미지를 다시 심게 되었다.
1998년 부임한 모교 출신(35회) 황기연 교장은 “지(智), 정(情), 의(意)를 겸비한 실력향상”의 목표를 내걸고, ‘Plus One Project(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예전보다 더욱 노력하였다. 이 결과로 1999년도 대학입시에서도 서울대 20명, 전북대 217명이 합격하여 전라북도에서 단연 1위(서울대 입시 결과 상산고 11명, 남성고 12명 합격)를 하여 서울대 최다 합격자를 배출하여 명문 전고의 명성을 전국에 날리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입시 성적을 거두자 후원이 이어졌다. 매년 동창회에서 서울대 합격 동문 전원에게 100여 만 원씩 장학금을 주었고, 기념비 건립, 담임교사 연수 및 학습 환경 개선 사업 등에 파격적인 지원이 있었다. 또한 2000년도에도 전고는 서울대 및 전북대 입시에서 전북 최고 성적을 거뒀다.
전 교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학생들의 열의, 동문들의 격려와 지원, 학부모의 열의가 종합된 것으로 4만여 동문의 자랑이요, 전북의 자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