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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창간호===== | =====전통 창간호===== | ||
====제 3절 전고학보, 학급신문 발간==== | ====제 3절 전고학보, 학급신문 발간==== | ||
매년 발행되는 교지 ‘북중’, ‘전고’ 및 문예지 ‘전통’ 외에 매월 발행되는 월간신문 ‘전고학보’(全高學報)와 | 매년 발행되는 교지 ‘북중’, ‘전고’ 및 문예지 ‘전통’ 외에 매월 발행되는 월간신문 ‘전고학보’(全高學報)와 | ||
학급단위로 발행되는 ‘학급신문’(學級新聞)도 있었다. 동시대 전국 어느 명문고와도 비교되지 않은 정도 | 학급단위로 발행되는 ‘학급신문’(學級新聞)도 있었다. 동시대 전국 어느 명문고와도 비교되지 않은 정도 | ||
로 높은 북중·전고의 창작열, 지적 능력, 기록 의지를 이 다양한 발행물로 실증할 수 있다. | 로 높은 북중·전고의 창작열, 지적 능력, 기록 의지를 이 다양한 발행물로 실증할 수 있다. | ||
2024년 8월 27일 (화) 01:44 기준 최신판
제 5장 교세와 교풍
제 1절 전주 북중학교
열정 넘친 동문 교사들
1953년 2월 15일 1백원을 1환으로 하는 제1차 화폐개혁 단행, 6월18일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 석방, 7월 27일 6·25한국전쟁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 등 국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제3대 유 청(柳 靑) 교장이 11월 27일 전주상고와 전주남중 교장으로 옮겨갔다. 이어 제4대 전주북중학교 교장으로 69세의 김영배(金永培) 교장이 취임했으며, 전주고등학교에는 48세의 배운석(裴雲石) 교장이 취임했다. 북중학교 교사의 연령은 김재권(金在權) 국어 교사의 58세를 제외하면 평균 30대로 김일옥(金一玉) 교감의 33세를 기준으로 30대가 15명, 20대가 18명이었으며 전체 교사 35명 가운데 전주 북중 출신이 15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젊은 스승들은 제자이자 후배인 북중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초대, 2대, 3대 교장
1919년 한국에 육고보(六高普)를 세운 일본은 학생들을 통해 침략의 앞잡이로 삼으려고 했으나 북중생들은 대한 남아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이럴수록 일본은 허울 좋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전주북공립중학교로 개칭하고 식민지정책을 노골화했다. 8·15 해방을 맞아 유청 선생과 김일옥 교감은 북중혼(魂)을 살리는 데 헌신적으로 몸 바쳤다. 초대교장이었던 김용환(金龍煥) 교장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목표 아래 사상통일을 강조했고 제2대 김가전 교장은 ‘자유, 박애, 지성, 노력’ 교훈 밑에 유청 선생의 보좌로 대 북중(大 北中)의 초석을 다졌다. 개교 30주년을 맞은 1949년 6월 16일, 그 동안 27개월간에 걸쳐 우전면에서 벽돌을 나르고 심지어는 송광사에까지 가서 목재를 날랐으며 전주천 자갈을 모조리 주워 나를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1백여 교사와 2천여 학생의 손으로 신교사(新校舍)가 낙성됐다. 벽돌 2층에 길이 120m의 교사는 23개나 되는 교실을 갖추었다.
그 해 12월 23일 김가전 교장이 전라북도 도지사로 영전하며 교감이던 유청 동문이 제4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유 교장은 오직 실력과 인화만을 내세우고 열성적으로 교육에 전념하다 이듬해 불의의 6·25를 맞았다. 본교 교사(校舍)는 7사단에 양도하고 사무 연락은 전주여중으로 정한 학생들은 대부분 학도병으로 출정했다. 공산군이 전주에서 퇴각하고 1950년 10월 초 다시 교사를 되찾은 전주북중은 다시 이듬해인 1951년 3월 국군 8사단 주둔으로 풍남국교와 남중학교에서 이동수업을 했다. 유청 교장은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출정했다가 산화한 꽃다운 학생들의 넋을 북중의 애국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1951년 9월 28일 충혼비를 제막했다. 1952년 11월7일 유청 교장은 자신보다 사랑했던 정든 모교를 떠나고 11월20일 제4대 김영배 교장이 취임했다.
제4대, 5대 교장과 김일옥 교감
부임 당시 고령 69세의 애국지사 제4대 김영배 교장이 김일옥 교감 보좌로 약 1년을 헌신한 뒤 1953년 9월 3일 고별식을 했다. 이어 그해 11월 24일 5대 정익성(鄭益成) 교장이 취임하여 인간교육으로 긍지를 심어주었다. 개교부터 5대 교장까지를 살펴볼 때 인간교육, 의리교육에 치중했으니 이는 광복 이후 혼란과 6·25 전후 사회적 요구에 본교가 그만큼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특히 김일옥 교감은 교장 다섯 분을 보좌하며 1943년 9월 30일부터 10년 9개월을 근속했다. 그는 광복과 6·25 한국전쟁을 지낸 전주북중 산 증인이었으며 그의 재직 기간 동안 본교는 전주북공립중학교에서 전북중학교로, 다시 전주북중학교로 세 번이나 교명이 바뀌었다.개교 당시 교장 1명, 일본인 교사 3명이 교직원으로 공회당 건물에서 50명씩 2개반으로 출범한 북중학교는 개교 34주년을 맞은 1953년 중·고 합쳐 교사 72명, 학생 3,000명의 명실공히 전국 최고 고등교육 기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전국제일 교사진-은사록(恩師錄)
교사면모와 에피소드
유재신(柳在新) 전(前) 전라북도 교육감은 1953년 당시 서울법대 출신 27세의 본교 영작문 영어 교사로 목소리와 체구가 작아 별명이 ‘촌색시’였다. 초임 첫 시간에 영어 단어 중 제일 짧은 단어와 긴 단어를 묻는 학생이 왜 없느냐고 부끄럼을 타면서 말하던 이 ‘촌색시’ 유 교사는 얼굴이 약간 얽고 호방했던 이윤오(李倫吾) 영어교사와는 대조적이었다. 또한 부임인사 때 영어 교사로 착각했던 미남 이광수(李光壽) 교사는 이미지와 달리 지리를 가르쳤는데 마침 재학생 중에 처남이 있는 관계로 수업 중 약간 떠들어도 못들은 척 넘어가면서 곧잘 여성편력 얘기로 인기를 모았다.
체육 이중엽(李重曄) 교사와 수학 이중필(李重弼) 교사는 형제였는데 별명이 ‘합죽이’던 형 이중엽 교사는 체육 이외에도 교련을 담당, 무섭기가 호랑이였으나 뒤에서 학생들이 ‘합죽이, 합죽이’ 부르며 수근대면 필경 웃어 버리기 일쑤였다. 동생인 이중필 수학 교사는 학생들이 수업 도중 아무리 수군거리든 말든 종이에 적어온 수학문제를 칠판 가득히 써가면서 열강하기로 유명했는데 본교 재직 후 몇 해 안 돼 타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생물 담당 오정수(吳丁洙) 교사는 수업시간에 자칭 ‘배구 지도’란 벌을 주며 연습을 잘못 했다거나 수업시간에 기침만 해도 “이를 악물어라” 하고 주먹으로 난타한 사나운 선생으로 유명했다. ‘바이올린 약장수’란 별명을 가진 박평수(朴枰洙) 음악 교사는 실기 시험으로 음악 점수를 주다 바쁘면 한꺼번에 열 명씩 앞에 세워 놓고 가곡을 부르라고 했다. 음악책조차 없던 궁핍한 시절 그는 수업 중에도 혼자 작곡에 열중, 학생들의 무단결석으로 음악시간엔 빈 자리가 많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훈육주임을 겸한 영어 진종현(晋琮鉉) 교사에게 얻어 맞지 않고서 졸업했다면 그는 아마 북중 졸업생이 아니라고 할 만큼 진 교사는 무서웠다. 하지만 진 교사는 호랑이인 반면 아무리 낙제점수 이하가 되어도 평균적으로 60점 이상 후하게 줌으로써 학생들을 과락시키지 않은 후한 인간적 면모도 있었다. 영어의 또 다른 양종의(梁琮懿) 교사는 항상 깨끗한 더블 보턴 양복 차림으로 ‘외교관이 되지 않고 왜 영어 선생이 되었느냐’는 학생들 질문을 곧잘 받기도 했다.
6·25 직후 영어가 강조되던 사회분위기 탓인지 6명이나 되던 당시 본교 영어교사 중 김용관(金容寬) 교사는 행동이나 말솜씨가 꼭 미국인을 닮았기로 유명했다. 역사의 강희술(姜熙述) 교사는 꾸지람할 때면 말 한 마디 없이 칠판을 닦아 백묵가루 투성이인 칠판 닦개로 머리를 곧잘 때렸으나 학생들은 무서워 말 한 마디 못할 정도였다. 당시 서무과에 머리가 노란 소녀가 사환으로 있었다. 학생들 간 인기가 높아 수업료를 일부러 소녀에게 납부하겠다고 수차례 서무과 갔다가 그 소녀가 없어서 못 내고 결국 수업료 미납으로 시험을 보지 못한 학생이 있었을 정도라는 로맨틱한 일화도 있다.
통지표 세목 및 입학금 부담 가중
제 2절 전주고등학교
1954년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치욕을 남겼다. 연초부터 집권 자유당의 일방적인 계획으로 마침내 11월 29일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대한민국 헌정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은 3월 27일 ‘현행 한글 맞춤법을 3개월 내에 폐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는가 하면 사찰 정화를 유시함으로써 비구승과 대처승 간 불교분쟁이 일어나는 등 혼란기가 계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주고등학교는 ‘조국보위(祖國保衛)는 오직 교육’이라는 장학방침을 굳혔다. 교사들은 ‘교사 즉 교육’(敎師卽敎育)이라는 신조 아래 ‘교사 10훈’을 주창하고 실천을 결의했다. ‘항상 수도적(修道的) 정신을 가지라. 이것이 사도(師道)의 본령이다’고 시작하는 ‘교사10훈’은 말보다 실천으로, 교육에 대한 열성과 순정, 애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참교육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52년 10월 27일 취임한 제2대 배운석 교장은 이듬해에 문교부령에 의해 문·이(文·理)과 구별이 폐지된 교육상황에서 ‘첫째도 공부, 둘째도 공부, 셋째도 공부’를 강조했으며 교훈 ‘자강, 자율, 자립’을 제정했다.
본교의 전(前) 화학 담당 서정상(徐廷祥) 교사는 당시 전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겼음에도 개인적으로 경영하던 삼화약국의 이익을 교육에 재투자하겠다는 신념으로 6·25 이후 혼란기에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장학 혜택을 받은 학생 가운데 김춘영은 전고 개교 이래 평균 99.9라는 신화를 남겼다. 서정상 전(前) 교사의 장학제도 제정은 이 고장 장학사업의 효시였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 규율은 무척 엄격했다. 당시 북중과 전고의 2학년 이하를 강당에 모아 놓고 눈 감고 무릎 꿇은 상태에서 실눈만 떠도 목총으 로 세례를 가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 북중과 전고생이라는 긍지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같은 엄한 기강, 기율은 우수한 학업을 뒷받침 했지만 한편 전쟁 포연이 가시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군대문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멀리서 상급생이 나타나기만 해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하는 등 상하급생 간의 기율은 자못 긴장감이 감돌 정도였으며 만일 타 학교 학생이 본교생을 놀리기라도 하면 전교생이 우루루 달려들 정도로 애교심과 단합심이 하늘을 찔렀다
면학전통 계승, 학습규정 강화
1950년대 전주고등학교는 4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명문교답게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한동안 후관 건물을 사용하던 전북대학이 1954년 10월16일자로 이사를 가자 이곳을 도서실 화학실 물리실 운영위원회의실 등으로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으며 교육시설 등도 점차 확충되어 면학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도내 중학교 졸업생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어려운 입학시험의 관문을 뚫고 입학했기 때문에 전주고등학교 학생이라 하면 그 실력을 인정해 줬을 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이나 학부모들 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방과 후에도 전고생들은 스스로 예습, 복습을 하며 학력을 쌓아 나갔으며 특별활동이나 체육 문예부문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보였다.
1955년 문교부장학방침은
① 반공사상을 투철히 기르고 민주도의(民主道義) 생활을 확립시킴으로써 통일독립의 전통이 되게 한다 (정신교육)
② 과학기술을 진흥하여 생산을 증강함으로써 경제재건에 이바지한다 (생산교육)
③.건강교육을 철저히 하여 학도의 체위를 향상시킴으로써 국토방위의 간성(干城)이 된다 (건강교육)
등이었다. 전라북도 장학 방침은 ① 반공 민주 도의교육 ② 과학기술 생산교육 ③ 건강 위생 안전교육으로 반공을 위하고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고에서는 교육연구위원회를 발족하고 교과 학습규정도 아울러 제정했다. 당시의 경제, 사회 및 문화적 여러 현상에 기초를 둔 효율적인 실천교육의 향상을 위해 총무, 기획 분과위원회를 비롯하여 교조사(敎組師=학급담임), 학습지도, 생활지도, 특별활동, 환경위생, 교육평가 등 7개 분과위원회를 두었다.
제정된 학습규정의 예를 들면 이렇다. 국어 현대문의 경우 한 수험자가 고사 채점결과 80점 만점에 70점을 얻었으면 이를 2배(2단위이므로)하여 140점이 되는데 여기서 그 학생이 평소 교과시간 중에 학습태도가 불량(여러 차례 질문에 대답을 못했거나 숙제를 태만했을 경우, 자주 행하는 소(小) 고사(考査) 성적이 불량할 때 등)하였음이 수 차 있어 불량점수가 12점(2단위에는 20점까지 적용)이 되면 140점에서 이를 감하여 128점이 된다. 거기 더해 수업 출석 성적 40점 만점(1단위 20점) 중 수업을 빠진 결과(缺課) 점수 16점(결과 1시간에 1점씩 감점. 즉 16번 결과한 경우)을 감한 24점(40-16=24)을 가산하면 152점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전까지는 결과(缺課)가 교과 성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교과시간의 학습태도와 아울러 수업참여 여부도 학과성적에 반영토록 한 것이다.조행(組行=학급생활 행실) 평가규정도 제정, 그동안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조행평가 방법을 시정,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입장에서 개개 학생의 조행상황을 평가토록 했는데 우는 90점 이상, 양은 70~89점, 가는 60~69점, 불가는 60점 이하로 했다. 이러한 학사 운영규정에 의해서 영재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전고 전통은 더욱 튼튼한 기반을 다져갔다.
개교기념식 풍경
1954년 6월16일 개교 35주년을 맞은 전고와 북중의 3천여 건아들은 이 고장명문으로서의 그 역사와 전통을 다시 한 번 다짐했 다. 개교 기념 전날 제1회 동창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고광만(高光萬) 학장과 제6회 동창인 대검찰청 이정우(李玎雨) 검사가 후 배를 위한 강연회를 가졌다. 개교 기념일인 16일 아침 9시, 교정에는 내빈 동창 학부형 교직원 학생 등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전고 김종철(金鍾喆) 교감의 개회 선언이 있었고 전고 사친회 이우식(李愚軾) 이사장의 축사, 제1회 동창인 김영배(金英培) 동창회장의 축사가 파란만장한 역사의 감동을 안겨줬다.
북중 정익성 교장과 전고 배운석 교장에게 감사장 증정이 있었고 지사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의 축사 후에 북중생 대표 이헌재(李憲宰), 전고생 대표 김원기(金元基)의 답사가 있었다. 만세 3창으로 정오에 일단 기념식을 마치고 뒤이어 강당에서 양교 교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동창들이 참석하여 임시 동창회를 1시까지 가졌다.
1시부터는 친목 도모를 위한 체육경기를 벌였는데 특히 개교 기념으로 본교가 주최한 초등학교 400m 계주경기 종목에서는 완주 봉동초등학교가 1위를 차지했고 단 하나의 여자 선수로 참가했던 풍남초등학교의 성초영 어린이가 개인상을 받았다. 부자 동창 일체경기, 동창생 경기, 학생 청백전, 사제 일체경기, 맹인 경주는 석양이 짙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잔치 규모에서 북중전고 개교기념식은 가히 도민 축제를 방불케 했다. 또한 전고·북중 개교 37주년 기념일인 1956년 6월16일엔 전고 3학년 최공엽이 ‘모교송’을 읊기도 했다
은사록(恩師錄)
전국제일 ‘학력’ 전고
전고 학생들은 ‘첫째도 공부요, 둘째도 공부, 셋째도 공부’라는 분위기 속에서 실력을 쌓아 나갔으므로 전국 어느 고등학교에 못지 않은 명문으로서의 전통을 과시할 수 있었다. 한 학교 학력 측정 수단으로 삼는 일반적 잣대인 서울대학교 등 일류 명문대 진학률에서 전고는 단연 전국 최상위권이었다. 특히 1954학년도에는 31회 졸업생 4백 4명 전원이 대학에 진학하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당시 대학 진학 상황은 △서울대학교 152명 △고려대학교 80명 △연세대학교 33명 △육군사관학교 35명 △해군사 관학교 29명 △공군사관학교 6명 △해양대학 10명이며 △다른 대학 59명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3년도에는 5월 2일부터 사흘간 서울에서 개최된 고등학교 3학년 이상의 학력을 가진 대학 졸업자들이 기초회화 등 영어 전반에 걸친 해외 유학시험을 실시하였는데 본교에서 이종국, 최낙재, 김정흠, 유재춘, 임희섭, 김영록, 백안기 등 7명이 응시, 전원 합격했다. 1955년엔 국가 고등고시 합격자 총 84명 중 본교 출신이 6명이어서 졸업 후에도 ‘학력 전고’를 과시했다
전국제일 ‘패기’ 전고
전고생들은 학력 뿐 아니라 패기, 정의감, 단합심에서도 전국 제일이었다. 전북일보(全北日報)는 1957년 전주 시내 고등학생과 ‘깡패’(=조직 폭력배) 간 ‘투구봉 싸움’ 사건을 그해 전북 10대 뉴스 중 하나로 꼽았다. 1957년 12월 전고의 서클 ‘죽순’을 비롯해 전주 사범, 신흥(新興), 농고(農高), 공고(工高) 등 6개교 학생들이 전고 뒷산에 모여 전주시내 고교 연합써클을 결성하고 당시 학생들을 못살게 굴던 전주시내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하기로 결의했다. 당시의 조직폭력배, 이른바 ‘깡패’들은 전국의 주먹 보스 이정재가 만든 화랑동지회 전북지회(지회장 이철용) 소속이었다.
이들이 세를 믿고 전주시내 상가, 극장 등에서 이른바 ‘세금 상납’을 받고 도내 남녀 고교생들을 괴롭히자 학생들은 크고 작은 충돌 끝에 마침내 젊은 혈기와 사회정화 차원에서 직접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 연합서클 회원들은 마침내 12월 19일 시내 중심가에서 깡패들과 조우했다. 이들은 소 집단끼리 시내 각처에서 일진 일퇴를 싸움을 거듭하다 완산 초등학교 인근 투구봉에서 깡패 70여 명과 학생 연합회원 200명간에 대규모 집단 결투가 벌어졌다. 산 위쪽 깡패와 아래쪽 학생간 밀고 밀리는 싸움이 한창일 때 급보에 접한 경찰과 학교에서 나와 제지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사태가 수습되긴 했다.
이로 인해 깡패측은 27명, 학생들은 1개교에 1명 씩 4개교 4명98)이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 전주 시내 전역을 옮겨 다니며 하루 종일 집단 난투극을 벌인 이 사건은 전북일보 뿐 아니라 중앙지에서도 연일 톱기사로 다뤘다.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은 ‘학생 어깨 대 일반 깡패 백주에 대혈전’으로 기사화했다. 조직폭력배들은 투구봉 정상에 진을 치고 아래서 올라오는 학생들을 총과 일본도로 공격했다. 학생측 리더 중 한 명이던 신흥고 출신 장두원 씨는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 “그때 모임이 신흥학교에 ‘피라밋’, 전고에 ‘죽순’, 농고에 ‘백마’, 전주사범에 ‘백운클럽’, 한 학교에 30명씩 쯤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모두 유단자로 운동도 잘하고 우등생이고 운영위원도 허고 운영위원장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때 (투구봉에) 한 200명쯤 갔어요. … (깡패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이리저리 찌르고 총을 막 위에서 쏘아 자치지, 우리는 찔리고 터지고 베이고 부상자만 늘어나는 거여. 그렇게 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공포를 쏘면서 올라왔어요. 그렇게 전쟁이 끝났어요. … 이 싸움에 화랑동지회의 하부조직 중 가장 큰 전주고등학교의 ‘피아골’은 같은 학생끼리 싸울 수 없다 해서 가담하지 않았어요.” “
이 사건은 이듬해 4월초 구속된 학생들이 풀려나면서 매듭지어졌다. 몇몇 학교에서는 이들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았으나 전고 배운석 교장은 이 사건에 관련된 본교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주었다. 이들에 대한 본교 처벌은 무기정학 중징계였지만 이 역시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배운석 교장은 이로 인해 제자를 아끼는 참다운 스승으로 전고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 ‘투구봉 싸움’ 사건에 가장 많이 개입된 횟수는 당시 2학년이던 전고 제35회이다. 전고 뭇 동기회들 중 유별난 단합력을 과시한 이들은 졸업 후 서울 종로 2가에 노송대(老松臺)라는 기원(棋院)을 차리고 재경 35회 연락실 겸 재경 전체동창회 연락장소로 제공했다. 35회는 김종수(金鍾洙), 백화기(白和基), 신교준(申敎濬), 유태전(劉泰銓) 동기가 중심이 되어 모교 야구후원회 탄생에 가교역할과 함께 든든한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투구봉’에서 학생 군단의 열혈 주역이던 황병무 동문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도미 유학 후 국방대학원 교수로 평생 봉직했다. 35회 이승완 동문 역시 중년 이후 태권도 후학 양성에 전념, 태권도 협회 부총재 및 한국태권도신문사 회장 등 한국 태권도계 대부로 지냈다.
우수학생 명단(1953~1957)
학도호국단
체육명문 북중·전주고
광복 이전 항일 동맹휴학과 6·25때 학도병 출병 등 말보다 실천, 행동을 중시한 북중, 전고 전통은 광복 이후 혈기왕성한 각종 체육 분야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광복 후 4~5년간 북중이 전북 체육을 석권하고 전국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교장실에 우승기와 우승컵이 빼곡이 들어차자 당시 김가전 교장은 “교장실이 좁다”며 즐거운 엄살을 할 정도였다. 광복 후 1950년대말까지 북중, 전고가 각 체육대회서 거둔 성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농구부
전고 체육부 중 가장 활발하던 농구부는 출전 대회마다 전교생 응원을 받았다. 농구부는 ‘인간은 볼’ 이라고 수업시간에 곧잘 가르친 김용근(金容根) 역사 교사102) 지도 아래 합숙훈련까지 강행하며 여러 차례 우승해 전고 명예를 드높였다.
- 유도부
유도부 역시 전국적 강팀 진용을 구축하고 있었다. 1955년 9월 해방10주년 기념 전북종합체육대회에 출전한 전주고는 1회전에서 신흥고를, 2회전에서는 전주농고를 누르고 우승했다. 이어 전고는 같은 해 전국체육대회 1회전에서 우승후보인 서울 보성고를 3대 2로 격파, 파란을 일으킨 후 2회전에서 목포고교에 석패했다. 창단 불과 1년만에 처음 출전한 전국체육대회에서 전(前) 대회 2년 연속 우승팀인 보성고를 패퇴시킨 것은 만천하에 전고 유도부를 과시한 쾌거였다. △유도부 명단 대장 3학년 최한철, 부장 2학년 원병희(元丙喜), 중장 2학년 이동찬·강래성(姜來聲), 선봉 2학년 정지헌(鄭知憲), 후보 2학년 장신학
- 무술반(武術班)
무술반은 1955년 전국학생무술대회에서 우승했다. 2학년 강래성(姜來聲)은 이 대회서 ‘초 고교급’으로 무술계 인사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무술부는 3학년 최창식(崔昌植), 2학년 강래성(姜來聲), 원병희(元丙喜), 이동찬(李東贊), 장신학(張信鶴) 등이었다.
- 정구부 (庭球部)
정구부는 1955년 2학년 박희열(朴凞烈)과 1학년 유영희 조가 전국체육대회 전북대표로 출전, 1회전에서 3대0 승리 후 2회전에서 강팀인 서울팀을 3대2로 꺾고 3회전 준결승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경북을 3대2로 이겼으나 4회전 결승에서 석패해 준우승했다.
- 권투부
권투부 2학년 김인곤은 1955년 서울운동장 특설 링에서 개최된 전국체육대회 페더급에 출전, 예선 부전승 후 준준결승에서 경남 대표 문종무(文鍾武)를 강한 펀치로 KO 시켰으나 준결승에서 충남 대표 김선필에게 석패해 3위 했다.
- 야구부
26회, 27회 선수들의 활약으로 전국최강이던 광복 직후 전고 야구부는 6·25 전쟁으로 단절돼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1950년대 초 30회 박종석 동문을 중심으로 야구부가 재건돼 32회 장세권, 37회 김만두, 형성우 동문까지 맥이 이어졌으나 1960년대 초 다시 해체된다. 이같은 우여 곡절 속에서도 1950년대 전고야구는 후일 김만두 동문이 전고 야구부 감독을 맡아 황금사자기 우승(1985년) 등 전성기를 구가하도록 하는 저력이 된다
육상스타 한석동, 서영주
광복 후 첫 올림픽 출전인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마라톤 국가대표 홍종오(洪鍾五·24회)를 배출하는 등 북중·전고는 1950년대까지 전국 유수의 육상 명문이었다. 1950년대엔 본교 한석동, 서영주가 각각 마라톤과 육상에서 전국의 각광을 받았다. 서영주(30회) 동문1958년 제3회 토쿄 아시안게임 멀리뛰기에서 7m 53cm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한 서영주(徐永珠) 동문은 재학시절부터 단거리와 멀리뛰기, 높이뛰기를 석권한 육상 만능선수였다. 그는 1956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올림픽과 1960년 이탈리아 로마 올림픽에 국가대표 출전했고 동시대 국제군인육상대회 우승을 휩쓰는 등 한국 육상계의 간판이었다.
서영주 동문은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 남자 일반 200m에서 22초 03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1957년 제38회 전국체육대회 같은 종목에서 역시 22초 01로 우승했다. 서 동문은 주종목인 넓이뛰기(당시 명칭 ‘너비뛰기’)에선 단연 최강이었다. 1955년 36회부터 1959년 40회까지 전국체육대회를 5연패 했으며 한 해 걸러 1961년 제42회부터 1963년 제44회까지 또 전국체육대회 3년 연속 우승의 위업을 세웠다. 서 동문의 전국체육대회 최고기록은 7m 30cm(제42회)였다.
또한 1958년 제39회 전국체육대회 높이뛰기 남자일반부에서도 1m 79cm로 우승했다. 이로써 그는 제36회, 38회, 3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육상 2관왕으로 모교 명예를 빛냈다. 공군에 입대한 서 동문은 1955년 그리스 아테네 국제군인육상경기대회 멀리뛰기에서 6m 73cm으로 우승했고 이듬해인 1956년 베를린 국제군인육상 경기대회 멀리뛰기에서 역시 7m 17cm의 대회 신기록으로 2위를 차지했다. 서 동문은 1955년 대한체육회 우수선수로 선발됐고 1958년에는 최우수선수로 선발돼 표창을 받았다. 본교는 1958년 서 동문이 아시안게임 제패후 귀국하자 즉시 환영대회를 갖고 영광을 함께 했다. 당시 재학생들은 모교 운동장에서 연습하던 서영주 동문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별명은 ‘날으는 인간새’였다.
홍종오 동문 이후 유망주 발굴에 목말라 하던 북중에서는 1953년 당시 3학년인 몇몇 극성 학생들 주한석동 동문서영주 동문
동으로 도내 최고 준족(駿足)이던 마라톤 선수 한석동(韓錫同) 편입운동을 펼쳤다. 부안중학에 다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퇴한 한석동은 가장 나이어린 동급생보다 5~6세나 연상이었으나 학생들은 모교 명예를 위해 이를 상관치 않고 기금을 모아 한석동의 북중 3학년 편입 운동(이른바 ‘보결’)을 추진했다. 막후 교섭이 잘 돼 어렵게만 여겼던 학교 당국 허락이 떨어졌다. 단, 조건이 있었다. 당시 눈앞에 닥친 도내 역전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해야 편입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허락이 떨어진 날부터 학생들은 단백질 보충 차 한석동에게 비싼 쇠고기 대신 개구리를 수렵해 먹이며 맹훈련을 도왔다. 정성이 가상했는지 한석동은 다행히 대회서 당당 1위, 북중 3학년에 편입에 성공했다. 당시 중학 3년의 평균 연령이 14세였는데 한석동은 이미 20세였다. 게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자금은 그만 두고라도 우선 하숙이 문제였다. 이에 편입운동을 주도한 몇몇 친구들이 돌아가며 자기 집에서 숙식을 시킨 끝에 한석동은 전주고등학교까지 체육 특기자로 입학하게 되었다.
한석동은 이후 전고 졸업반이 되었으나 갓 결혼을 한데다 가정형편 상 대학 진학은 생각도 못할 처지였기에 전고는 그를 유급을 시키고 학교 뒤 기숙사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도록 배려했다. 한석동 동문은 1956년 제2회 전북 단축 마라톤대회 16km 종목에서 1시간 02분 34으로 신기록 우승하는 등 재학 중 여러 차례 전라북도 마라톤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본교 명예를 빛냈다.당시 전주 북중과 전고를 다니던 동문들은 아직도 매일 아침 등·하교 때마다 혼자 묵묵히 마라톤 연습에 열중하던 한석동 동문을 기억하고 있다
특별활동
- 문예부(文藝部)
1950년대 북중, 전고를 다닌 학생치고 시, 수필 , 소설 한 편 써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시 도내 한 신문사 노변담화(爐邊談話)에서 ‘전주 고등학교에는 시인이 300명이나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대의 걸출한 시인·평론가인 서정주, 신석정, 김해강, 신근, 하희주, 박희연 교사 영향이 컸음은 두말 할 나위 없거니와 6·25 민족상잔을 달래기에 문학예술이 아니고서는 청소년들의 아픈 상처를 위로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고 출신 고원(高遠), 이철균, 김해성 등이 1950년대 시단에서 젊은 시인으로 활약했으며 1956년엔 전고 재학생인 이영식이 성인 문학도를 제치고 한국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당선(시 부문) 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가 줄탁동시(啐啄同時) 절창으로 가꾼 전고 문예반의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특히 김해성(金海星)은 학창시절부터 시명(詩名)이 높았다. 학과 공부는 제쳐놓고 시에 집중한 전후파 시인 행적을 닮은 김해성(본명 김희철)을 중심으로 문예활동이 활발했다. 김해성은 1952년 가을 고교 1학년으로서 처녀시집 ‘해몽’(海夢) 을 활판인쇄로 펴낸 데 이어 동인지 ‘풍토’(風土) 제1호, 제2호(1953, 54년) 발행을 주관했다. 이밖에 또 다른 모임 ‘옹달샘’과 ‘청색지대’(靑色地帶)도 있었다. 이들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동인지 발간 등 관계를 지속됐다. ‘풍토’(風土) 동인은 3학년 김해성, 서병룡(徐炳龍), 김려수(金麗水), 이복술(李福術), 2학년 황병룡(黃炳龍), 신찬균(申瓚均), 김창령, 1학년 장성원(張誠源) 등이었다. ‘옹달샘’ 동인은 전고 1학년 송영상(宋榮相)을 주축으로 북중 3학년 이원재(李沅宰) 등으로 연령이 낮았다. ‘청색지대’(靑色地帶) 동인은 김평기(金坪琪), 장성원(張誠源), 배병윤(裴炳潤), 최공엽(崔公燁), 이영식(李榮植), 송영상(宋榮相), 정종문(鄭鍾文), 김종식(金宗殖), 오병록(吳炳綠), 안춘근, 박형철, 박영수(朴英秀), 이원재, 박천문 등이었다. 이 무렵 교사 신석정(辛夕汀)은 제3시집 ‘빙하’(氷河)를 출판했다. 마침 3학년 송영상도 비슷한 시기에 제1시집 ‘방향’(方向)을 펴내 전주 시내 제일제과점에서 정종문(鄭鍾文), 오병록(吳炳綠) 등의 주선으로 출판기념회를 가지기도 했다.
1954년엔 동인지 발행이 풍성했다. △3H 그룹이 동인 문예지 ‘3H’를 프린트 발행했다. 동인은 최락재, 신규환, 유강희, 강명, 김석만, 강병열, 이강안, 이규승, 전용민, 최광림(이상 3학년)이었다. △‘한얼’ 모임이 문예동인지 ‘성지’(星志)를 프린트 발행했다. 동인은 이종규, 최남식, 진규원, 지기문, 고병언(이상 3학년)이다.
1956년엔 3학년 이영식(李榮植)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3학년 김평기도 학원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3학년 송영상 역시 청년예술파 주최 제1회 종합예술제에서 시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이밖에 전쟁 상흔에도 굴하지 않던 1950년대 전주고 문예부 10년간 주요 활동을 정리하면 이렇다.
- 미술부
전고 미술부는 전후 선전예술 일종인 포스타 현상모집 등 실용미술뿐 아니라 순수미술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미술반 지도교사는 이경훈, 이준성, 나상목 선생이었으며 특히 1950년대 후반 근무한 나상목교사는 한국화의 거목이었다. 한국화 재원으로 촉망받던 정창모가 1951년 6학년 재학중 북한 인민의용군에 합세, 월북한 것이 아쉬웠다. 미술반 주요 활동은 이렇다.
- 웅변부
혈기와 사자후의 시대인 일제 이후 한국전쟁기까지 전고는 전국 손꼽히는 웅변 명문고였다. 1950년대 전고 웅변부는 전철, 황옥헌, 신석정, 이현중 교사, 백동현 강사의 지도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1955년 2학년인 최규장(崔圭莊) 동문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주최 전국남녀중고교웅변대회에서 전국 40여명의 고교연사를 단연 압도하며 우승,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는 8·15 10주년 기념 도내 남녀중고교 웅변대회에서도 우승,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으며 동기인 2학년 김경준 역시 제2회 전국 남녀중고교생 웅변대회 예선 1등, 본선 2등으로 농림부장관상과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북중학교 시절부터 여러차례 웅변대회를 휩쓸던 이헌재(李憲在) 동문은 전고 진학후에도 1학년생으로서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주최 제4회 전국 남녀중고생웅변대회 우승, 전북상대 주최 학생의 날 기념 제2회 호남중고교 남녀웅변 대회 2등, 8·15 기념 웅변대회 특상을 받는 등 ‘웅변학생’으로 모교 명예를 높였다.
1955년 웅변부는 부장 3학년 임성환(林成煥), 총무 2학년 최규장 동문이었다. 총무 최규장은 서울에서 열린 건국정신앙양 전국웅변대회에서 우승했으며, 2학년 임병찬(林秉燦) 역시 군산에서 열린 3·1절 기념웅변대회에서 우승했다.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신새벽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배달하며 학자금을 벌던 임병찬은 6개월간 육성회비와 수업료를 내지 못해 담임교사에 의해 시험장에서 쫓겨나던 일을 교내웅변대회를 통해 호소했다. 이에 감명 받은 배운석 교장은 임병찬 학생에게 학비를 면제하는 특전을 주기도 했다. 다음은 1950년대 웅변부 활동이다.
- 음악부
1950년대 전주 시내 고교 밴드부, 음악부 강자는 단연 전주공고였다. 이에 비해 전고는 1950년대 중반까지 북, 심발즈 등 타악기와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등 상대적으로 빈약한 악기로 음악부 구색을 갖추고 있었으나 강양희 교사 지도 아래 1956년 교육주보사 주최 남녀 음악콩쿨대회에서 2학년 유동옥, 김일곤, 김형관, 인주희(印柱喜)가 중창부 1위, 독창부에서는 김일곤이 2위 하는 등 괄목상대 발전했다. 이어 1957년 김영무 교사 지도 아래 새 악기를 추가 구입하고 연습에 박차를 가해 전북대학교 개교 5주년 기념 음악 콩쿨대회에 처녀 출전, 단박에 2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국내 정상급 바이올린, 비올라 연주자인 박평수교사가 부임, 관현악단을 조직해 전북 학도호국단 주최 음악콩쿨대회에서 우승하는 개가를 올렸다.
- 과학부
전고 과학부는 6·25 혼란 와중에서 화학준비실과 물리준비실, 생물준비실에 가득 찼던 화학약품, 기구, 물리실험 도구, 현미경, 심지어 골격 표본까지 도난 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이기배, 김종주, 황혁구 교사의 꾸준한 노력으로 과학실이 다시 면모를 갖추게 돼 과학부는 일약 활성화됐다. 전고는 1959년 초 전라북도 지정 과학기술연구 학교로 결정돼 동년 7월15일 과학기술 연구발표회를 가졌다. 이어 교육전시회 과학전람회에 과학부가 주축 돼 20여점의 작품을 출품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학생 활동(1955, 56년)
전주 시내 청소 봉사활동 3학년 최공엽(崔公燁), 심창섭(沈昌燮), 유동옥(柳東玉), 원두만(元斗萬), 장경일(張京一), 박영욱(朴泳旭), 최광태(崔光泰) 등은 1956년 9월부터 3개월간 아침 4시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자발적으로 풍남문에서 도청 앞 전주 역전에 이르는 도로를 청소했다. 3학년 신창근, 한상진, 유인호, 배병윤, 김원태 등 역시 도청 앞에서 역전까지 청소한 것이 통행인들 제보로 알려져 전북일보(全北日報) 고십 난에 게재되기도 했다.
△기탁 및 기증 3학년 원병희(元丙喜), 임봉상(林奉相), 손건양, 손규용 등은 전북일보를 찾아가 반소(反蘇)투쟁에 궐기하고 있는 헝가리의 피난민 구제의연금 3천환을 기탁했다. 또 3학년 임은순(林垠淳), 이강일(李康一), 강성의, 박용규, 이길성(李吉成), 오석근(吳錫根), 박진웅(朴鎭雄) 등은 전주 직업소년원을 찾아가 노트를 기증했다. 이 선행학생들은 모두 기율부원들로서 당시 모범이 되었다.△각 대회 우승과 수상 △미국공보원(U·S·I·S)과 문교부가 공동 주최한 영문논문 ‘한국을 자급자족케 하는 방법’ 모집 전북예선에서 3학년 박경열(朴景烈)이 1등으로 부상 1만환, 정교관이 2등으로 부상 5천환을 각각 받았다.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식에서 전고 홍기표(洪基杓) 교사가 공로상, 3학년 정우진(鄭佑鎭)이 선행상을 각각 받았다.△‘고시 전고’, ‘장학 전고’ 1955년 대한민국 고등고시 합격자 총 84명 중 전고 출신이 6명이었다. △행정과 홍두표, 고봉길(이상 30회 졸업자) △사법과 이석조, 차상근(이상 29회) △외교과 채의석(30회) △판검사 특임고시 김동정(30회) 등이다. 같은 해 3학년 한상태(韓相台)가 광주 조선대학교 장학생 모집에서 5백명 중 1위(600점 만점에 496점)로 합격했다.
전년도 본교 졸업생으로 조선대 장학생으로 재학중인 이남룡(李南龍)은 장학생중에서도 1위를 차지, ‘장학 전고’ 전통을 과시했다.△FRIDAY CLUB 조직 3학년 정종문(鄭鍾文), 신정용(申禎容), 김인식(金寅植), 박영수(朴英秀), 이익성(李益成), 유제신(柳劑信) 등은 전주여고의 김연식(金姸植), 김옥선(金玉善) 여학생과 함께 미국인인 예수병원장 부인에게 다니며 영어를 익히다가 회화 서클인 FRIDAY CLUB을 조직했다. 이들은 1956년 7월 20일, 동인지 ‘THE FRIDAY’(4×6판, 60페이지)를 창간하는 등 활발한 써클 활동을 계속했다. △각 클럽 회장 및 별명 전고 웅비하이Y클럽 회장인 2학년 이규종(李奎鍾)은 전주기독학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학년 1반을 중심으로 전고 4H클럽도 발족, 회장 이희권, 부회장 손홍만, 총무 김영표, 보도원 김상철 등이 피선됐다.당시 3학년 학생 평판을 보면 임명균(任明均)은 ‘때리는 어깨 맞는 어깨’라는 별명이 있었고 전교에서 제일 키 작은 송용상(宋龍相), 권투왕 추병권(秋炳權), 기율부장은 못 되었어도 기율부장으로 통한 유창열(柳昌烈) 등도 별명으로 유명했다. 이들 뿐 아니라 대부분 학생들에게 별명이 있어서 이름보다 별명이 더 잘 통용됐다.
제 3장 북중 전고와 전북 연극의 맥
제 1절 1950년대 전북 연극
광복 후 1950년대까지 열악한 문화상황 중에서도 순수 연극은 한층 어려웠다. 간헐적 공연으로 명맥이 이어지긴 했으나 경비, 사회적 인식, 창극을 선호하는 관객취향 등으로 인해 전북을 비롯한 지방 연극계는 아사 직전이었다. 1953년 전고 주최 연극 ‘각간선생’(角干先生)에 출연했던 원로 이해상 동문(李海相·32회·전 장수군수)은 이렇게 회고한다
“ “6·25 전쟁이 막바지인 이때 순수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기엔 성인연극이건, 학생연극이건 참 힘든 시기였다. 첫째, 순수극은 무대 장치, 소도구, 의상, 분장 출연진의 연습비 등 감당키 어려운 비용이 들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연극을 기획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오늘날엔 배우 출연료 비중이 더 크지만), 둘째 배우를 예술인이 아니라 광대(딴따라)로 천시하는 때라 출연진의 확보 특히 여배우 물색이 매우 어려웠고, 셋째 관객이 없어 극단 유지가 힘들었다. 전쟁 중 상처받은 국민들은 순수극보다는 상업적이고 감성적인 신파조의 눈물을 자극하는 창극(唱劇), 악극(樂劇) 쪽에 더 흥미를 느껴 ‘호화선’(豪華船), ‘OK’, ‘백조’(白鳥) 등 악극단과 임춘앵(林春鶯) 등 창극, 국극(國劇)에 관객이 몰렸다.” “
이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북중, 전고는 광복 이후부터 1954년까지 일곱 차례 본격 무대를 시민들에게 선보임으로써 학생과 교사들의 힘만으로 전북 순수연극의 맥을 이었다. 특히 순수극 뿐 아니라 문화 예술 전반이 침몰했던 6·25 와중에서도 본교는 순수극을 자체 기획, 공연함으로써 빈사에 빠진 전북예술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북중, 전고 연극반 활동 이후 1960년대 전북대의 몇 차례 공연으로 전북 학생연극은 사라졌다. 이후엔 ‘전북 연극의 산파’ 극작가 박동화(朴東和·본명 박덕상, 1911~1978)이 향토 연극을 일으켜 세웠고 1970년대 TV 보급으로 인한 방송극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제 2절 광복 후 북중 전고 연극반
전북의 지방 순수연극은 해방 직후 혼란기 속에서부터 꿈틀거렸다. 1947년 북중(=전북공립중학교, 6년제) 교사인 백양촌 신근(白楊村 辛勤) 각색·서정조 연출의 ‘곰’(안톤 체홉 원작)이, 박노아 원작·김구진 연출의 ‘돌아온 사람들’이 각각 공연됐다. 북중 연극부는 연극 ‘큰 별’을 9월25일 전주에서, 10월말엔 군산과 이리에서 각각 공연했다.1949년엔 연극서클 ‘극예술의 집’이 결성돼 ‘선혈’(鮮血·유 춘 作), ‘동승’(童僧), ‘바람과 같이’(이상, 함세덕 作), ‘모란이 필 때’, ‘귀촉도’(歸蜀道), ‘무의도(舞衣島) 기행’(이상, 신근 作) 등 작품 공연으로 전북 순수극에 아연 활기를 제공했다. 특기사항은 이 모든 공연에 북중 국어교사인 신근이 직접 간여하고있다는 점이다.
신근, 하희주(河喜珠) 등 북중 국어교사들은 직접 각색 또는 창작한 희곡으로 학생연극 뿐아니라 초 창기 전북 순수극의 성인무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6·25 전쟁과 함께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춘 순수극에서 성인 대신 주역으로 나선 것이 학생극, 특히 북중, 전고 연극반의 활약이었다.
특히 1947년 9월25일 ‘큰 별’을 상연하고 그해 11월22일 교도소에서 위 안공연113)을 하는 등 일찍부터 활발한 활동을 한 북중 연극부는 전쟁 한 해전인 1949년 여름 임선(林善) 작 ‘첫 닭이 울기 전에’를 시작으로 6월21일 국군위문공연, 10월 ‘안중근 사기(史記)’, 12월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를 공연하는 등 반 년 만에 작품 세 개를 올려 열정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중 1949년 개교 30주년 기념 예술제 일환으로 팔달로 시내 백도극장(현 팔달로 전북예술회관 맞은편)에서 이틀간 공연된 ‘첫 닭이 울기 전에’(사진)는 농촌 한 마을의 항일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김가전 교장 등 북중 관계자와 전주 시민들이 좌석을 꽉 메우는 성황을 기록했다. 28회 졸업 동기인 최영정, 임명환 동문 등이 출연했으며 하반영(河畔影) 화백이 무대미술을 맡았다.
6·25 전쟁 발발 후 1년여 공백기를 거쳐 아직 포연이 가시지 않고 전시연합대학이 본교에 개설되는 등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전고 연극부는 하희주 교사의 인솔 아래 무대 전면에 나선다. 1951년 9·28 수복과 본교 복교 등 어느 정도 후방 상황이 안정되자 연극부는 불과 반년도 안 되는 새 ‘율리화’(栗里花·하희주 작, 유 춘 연출), ‘성두화’(城頭花) 등 두 차례 공연을 펼친다. 이중 ‘성두화’는 1951년 11월9일 전고예술제의 하이라이트로 공연됐다. 이후 1953년 5월 하희주 작 ‘각간선생’을 끝으로 북중, 전고 연극부는 광복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불모지 향토연극의 명맥을 이으며 아쉽게 사라진다. 이와 함께 전북의 학생연극도 종언을 고한다.
제 3절 연극 '각간선생'
연극 ‘각간선생’은 전고 연극의 대미이자 최고봉이었다. 1953년 5월 ‘각간선생’ 공연상황을 교지는 이렇게 전한다. “8·15 이후 공연을 갖고 우수한 연극인을 사회에 배출하여 그 전통을 자랑하는 본교 연극반은 금년 5월5일부터 3일간 전주도립극장에서 사극 ‘각간선생’(角干先生·4막8장)을 공연하여 대호평을 받았다. 당시 하희주(河喜珠) 선생이 손수 쓰신 희곡을 가지고 총지휘하시면서 선배 고동석, 김환득 씨 등의 협조 아래 줄곧 1개월여를 맹연습하였으며 공연 전후에는 교직원 이하 재교생(在校生) 및 동창들의 절대한 협 찬이 있었고 공연의 고평(高評)을 백양촌(白楊村) 선생이 전북일보에 집필하시여 사회의 관심을 끌은 바 있었다. ‘각간선생’의 출연자는 아래와 같다. 조년구, 박재권, 황의신, 김도현, 김해상, 신봉하, 유우옥, 오필환, 노기선, 김온섭, 심윤재, 김수태, 진귀환, 정○규, 김종확”‘각간선생’은 통일신라 주역 김유신 장군을 주연으로 하는 연극으로서 본교 하희주 교사와 학생 뿐아니라 당시 이미 중견이던 전북 화단의 거두 하반영(1922~2015), 한국춤의 대가 최선(호남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1935~) 등 동시대 전북 예술역량이 거 의 총동원돼 이룬 최상급 무대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여성역으로 출연했던 이해상 동문은 제작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 “전고 2학년으로 진급한 1953년 이른 봄 어느날, 하희주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교무실로 불려갔다. 등사판으로 프린트한 엉성한 대본 한 권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연극부에 들어가 잠시나마 연극배우가 됐다.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김유신 장군의 일대기에서 나는 그의 둘째 누이동생 문희(文姬, 후일 태종무열왕비)에 캐스팅 되었다.
김춘추 공(후일 태종무열왕)과의 로맨스를 엮어내는 매우 어렵고 난처한 역(여자 역할)이었다. … 쌀 한 말 씩을 걷어 합숙연습에 들어갔다. 강당, 우천체육관(현재 식당 위치) 등에서, 때로는 야외 중바위(현재 승암산), 덕진 등지에서 대사 연습을 했고 무대 연습은 도립극장 무대에서 야간 공연이 끝난 뒤 통금 전까지 이루어졌다. 5월중순 사흘간 주야 3회 공연으로 도립극장에서 하희주 작, 연출로 ‘각간선생’의 막이 올랐다. 무대미술은 하반영(河畔影, 원로화가·연극인) 선생이 해주셨고 우리 또래의 최선(崔善, 한국무용가)이 분장, 소도구를 챙겨 주었다. 우리 화장품이 없어서 미제, 일제 화장품을 이것 저것 구하여 만들어 썼다.
한번 화장하면 지우지 않고 수건을 둘러 쓰고 극장 바로 앞 빨간 벽돌담 안의 배우들 합숙소를 들락날락하면서 버텼다. 그해 여름 화장독이 생겨 일제 ‘미노화겐(Minofagen) C’라는 피하주사를 오래 맞았다. 이 시기에 성인 순수연극은 자취를 감추었고 창극, 악극이 일시 흥행에 성공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피폐한 때라 숙식비를 내지 못하여 극단이 숙소에서 야반도주하거나, 세트와 배우를 인질로 잡히고 달아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기억에 남는 합숙소의 배우는 우리보다 세 살 정도 위인 지화자(池花子·악극 예명, 후일 스타배우 도금봉 씨)가 있었는데 그는 막 쌍둥이를 출산하여 ‘쌍둥이 엄마’라고 불렀다.“
북중, 전고 연극사에서 하희주 교사와 김신택 동문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희주(河喜珠, 1926~2004) 교사는 동국대학교에서 양주동 박사에게 수학했으며 국어과 고문(古文) 교사로 학생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시인이며 전고 선배(22회)이기도 한 하(河)교사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모교인 북중, 전고의 연극을 일곱 차례나 기획, 원작, 연출하며 혼신의 힘을 다 했다.김신택(金新澤·29회) 동문은 1949년 ‘안중근 사기’에서 안중근 의사 아들역을 시작으로 북중, 전고 여섯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각간선생’에서는 전북대 2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연인 김유신 역을 맡아 열연했다. 북중, 전고는 인문계 학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내 엘리트 집단답게 광복 공간부터 1950년대 초반 전시상황까지 빈약했던 전북 문화예술계를 젊은 활력으로 풍성히 하는 역할을 했다 .===제 7장 교지발행, 문학창작 활동===
제 1절 문예지 전통 창간, 전국제일 전주고 문예반
1. ‘傳統’(전통) 창간호
1950년대는 전고 문예 르네상스의 시대였다. 전쟁 포연과 폐허 속에서도 전고인의 예술혼은 불타올랐다. 그 첫 장을 연 것이 전고 문예지 ‘傳統’(전통)의 창간이다. 광복 후 전북중학교 시절엔 문예지 ‘竹筍’(죽순)이 있었다. 1949년 8월 제11호가 나왔을 정도로 “무럭무럭 자라서 커다란 왕대가 되고 대밭이 되어 제법 보기도 좋고 쓸모도 있게 되어가던 ‘죽순’(竹筍)”은, 그러나 6·25 전쟁으로 “모진 바람에 짓밟혀 죽순도 왕대도 순국지사의 뒤를 좇아 자취를 감추고”(유청 교장 창간사) 말았다. 아직 포연이 짙었음에도 부랴부랴 창간(1951년 12월 23일)된 문예지 ‘전통’(왼쪽)은 이같은 아쉬움과 전쟁 통에 뒤돌아볼 겨를 없던 전고인들의 문학적 갈증을 한꺼번에 풀어줬다. 크기 4·6판(14.5×20.5㎝), 분량 50쪽의 소책자지만 당시 문단 중견이던 전고 교사 서정주, 이철균, 하희주 등이 제자들과 나란히 작품을 싣고 있어 수준 면에선 일개 고교를 넘어선 전쟁기의 문학적 성과에 견줄 만 했다.유청 교장은 창간사를 통해 “과거 빛나는 가지가지의 전통을 계승하여 미래에 좀 나은 새로운 전통을 남길 수 있는 선물을 이루자 함”이라고 했다. 이 책은 특히 창간 두 달여 전인 10월 5일 임무 도중 순직한 전(前) 교장 김가전 도지사를 기려 속 표지에 “평생을 애국과 교육에 바치고 가신 고(故) 김가전 선생의 영전(靈前)에 삼가 이 작은 책자를 올리나이다”(오른쪽)라고 적었다. 서정주는 시 ‘쭉나무’를, 이철균은 시 ‘우관도’(牛觀圖)를 각각 실었다.
전통 창간호
제 3절 전고학보, 학급신문 발간
매년 발행되는 교지 ‘북중’, ‘전고’ 및 문예지 ‘전통’ 외에 매월 발행되는 월간신문 ‘전고학보’(全高學報)와 학급단위로 발행되는 ‘학급신문’(學級新聞)도 있었다. 동시대 전국 어느 명문고와도 비교되지 않은 정도 로 높은 북중·전고의 창작열, 지적 능력, 기록 의지를 이 다양한 발행물로 실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