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격랑 속에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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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미군정 하의 교육 ====
====1절 미군정 하의 교육 ====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 동안의 한반도 역사는 한국민의 자율적 의사에 반해 강대국 등 타율적인 국제관계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해방된 한국에 부과된 과제는 이 땅에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키우는 일이었다. 한국 교육도 이 같은 민족의 염원에 따라 이념과 정책을 세워야 했다. 이 염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산진영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바라는 이념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왕조의 유교적 전통사상에서 비롯된 한국 교육이 일본의 강제적인 군국주의 식민주의 교육을 벗어나면서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기도 했다.
이에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은 일제의 잔재를 하루빨리 털어버리고, 민주적 의식과 정신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교육의 각 분야를 대표할만한 한국 인사들을 선출해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일제의 교육 담당 조직이었던 학무국의 직원들을 한국인으로 재편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19일 편수 책임자 등이 취임하고, 10월 12일에는 학무국을 4과로 개편하는 등 작업을 진행했다. 학무국은 그 뒤 1946년 3월 29일 미군정 법령 제64호에 의해 문교부로 승격되었다.
미군정청은 남한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사상과 식민지 제도를 불식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여러 조치들을 취했다. 그중 교육정책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교육의 민주화라는 대명제 아래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하며 ① 교육 용어로 한국어 사용 ② 국정 교과서 편찬 위원회에서 ‘한글 첫 걸음’ 발행 ③ 초등 교원 재교육을 위해 사범학교에 초등교원 양성과를 만들고 중등 교원 양성을 위해 경기 사범대학, 대구 사범대학으로 개편 ④ 교육제도의 민주화 ⑤ 문맹 퇴치 ⑥ 학년 초를 9월 1일로 하고 2학기제 채택 등의 시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새로운 교육 이념 채택을 위해 조직한 것이 교육심의회였다. 1945년 11월 23일 각계 인사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중앙청에서 제1차 회의가 열린 이후, 1946년 3월 7일 열린 전체 회의를 마지막으로 끝맺음을 할 때까지 전체 회의 20회, 분과위원회 105회의 진지한 토의와 논의를 벌였다. 한국 교육의 방향과 구상을 수립하는 성과를 남긴 것이다.
교육심의회의 업적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제1분과에서 결의돼 전체 회의에서 채택된 새 한국의 교육을 이끌어갈 이념으로서의 ‘홍익인간’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이 반드시 민주주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아왔던 만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은 반드시 민족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에 기초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애국애족의 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함을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하자는 취지였다. 우리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이 홍익인간 이념은 교육법 제7조에 명문화됨으로써 우리나라 교육이념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제2분과에서 결의해 채택한 교육제도다. 종래의 이원제에서 일원제를 채택한 것이다. 즉, 각급 학교의 연한을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중학교 6년, 실업고등중학교 6년, 사범학교 3년, 대학 4년, 의과대학 6년, 그리고 의과대학을 제외한 일반 대학에 1년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두었다. 학기에 있어서는 3학기제를 폐지하고 2학기제로 함과 동시에 1학기를 9월에서 다음 해 2월로, 2학기를 3월에서 8월까지로 정하고 세 제도는 1946년 9월부터 실시하기로 했다. 이 학기제의 의의는 이원제를 배격하고 일원제를 채택했다는 점과 지위, 문벌, 빈부, 종족, 종교와 성별의 구애 없이 교육을 누구나 받게 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전까지 미군정 시대에 문교부가 취한 주요 교육정책으로는 ①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사업 및 보급 ② 민주 교육 이념 보급을 위한 교사 재교육 강습 ③ 복선형 학제를 6-3-3-4제의 단선형 학제로 개편 ④ 문맹 퇴치를 위한 성인교육 실시 ⑤ 교육자치제의 구상 ⑥ 의무 교육 실시 ⑦ 중등 교육 및 고등 교육의 확충 계획 수립 ⑧ 사범대학의 창설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시책이 ‘새 교육 운동’이었다. 문교부는 1946년 9월 남한의 교육자들을 모두 참여시킨 ‘신교육 연구회’를 만들었다. 여기서는 민주주의 교육을 위해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사상을 새로운 교육법으로 소개했다. 또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학생들을 홈룸이나 클럽활동 등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요컨대 미군정은 신생 한국 교육에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을 심는데 적극 나섰던 것이다.
====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새로운 교육개혁안으로 일제 강점기 설립된 여러 단과대학을 통폐합해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약칭 ‘국대안’(國大案)으로 불린 이 계획은 사회적으로 큰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 파동으로 번졌다.
국대안은 경성대 3개 학부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9개 관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해 종합대학을 설립하면 설비와 건물 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국가 재정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통합 대상 학교의 학생과 교직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수용능력이 감소될 뿐만 아니라 교수도 부족하고 경비 절감이 의문시 된다는 이유였다. 학생들은 1946년 9월 친일 교수 배격,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 총장으로 대체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국대안 반대 운동은 학원문제를 넘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으며 당시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좌우익 학생들마저 동맹휴학 유지와 중지로 맞서는 등 갈등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한국의 독립문제가 혼란만을 거듭하고 진전을 볼 수 없게 되자 1947년 미국은 한국문제를 U.N에 상정하였다. U.N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우리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총선거를 38선 이남 전역에 걸쳐서 실시하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세계에 선포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의 교육도 한민족의 염원에 따른 교육이념을 세워야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에게 부과된 것이 민주교육의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비단 우리뿐이 아닌 공산진영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기본이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전통사상의 틀에서 벗어난 우리 교육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은 민주주의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얻어낸 결론은 먼저 일본적인 것의 배격과 새로운 민족적 의식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민주주의 원리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교육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이었다. 이것이 곧 ‘새 교육’의 원리요 목표였다. 새 국가 건설은 낡아빠진 구 교육으로서는 불가능하였다. 새 국가는 새 교육으로서만이 수립될 수 있었고 그것이 ‘새 교육’ 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
====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미명하에 아시아 대륙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욕은 교육을 초토화시켰다. 일본군은 신성한 학원까지 점거한 채 오로지 전쟁에만 매달렸다. 이 망동에 전고(=전주북공립중학교)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본군 제23부대가 모교 교실과 운동장을 빼앗자 전고생들은 전주공업학교(全州工業學校)에서 수업 및 훈련, 작업으로 전전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의 감격도 잠시였다. 광복 한 달 후인 1945년 9월 중순, 오키나와로에서 상륙한 미군 제6사단 일부가 전주에 진주해 전주북공립중학교 교사에 주둔함에 따라 학생들은 또다시 교실을 빼앗겼고 학교는 병영 아닌 병영이 되고 말았다.
1945년 9월 하순, 미군들이 강당과 우천체조장 및 운동장에 콘센트 막사를 설치하고 교사(校舍)를 비워 주자 학생들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전주공립공업학교에서 셋방살이 공부를 하던 전주북공립중학교생들이 그립던 옛집으로 돌아와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주인을 찾은 학교는 희망과 생기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일본인 마지막 교장 가매야마(龜山)와 일본인 교원들이 모두 물러가고 유청(柳靑) 교사를 중심으로 뭉친 전고인들은 모교 재건과 개학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10월 10일, 전주북공립중학교 첫 한국인 교장으로 김용환(金龍煥) 교사가 취임했다. 그는 광복 전부터 재직하던 유청, 김일옥(金一玉), 백환기(白煥基) 교사 등과 함께 교원 확보에 전력, 김주현(金周賢), 채형석(蔡炯錫), 노봉준(魯鳳準), 이제형(李濟炯), 김근희(金根熙), 조광진(曺光珍), 이봉권(李烽權), 조상기(趙相紀), 유희진(劉熙珍), 최진기(崔辰基), 이운재(李雲宰), 정용식(鄭龍植), 김영창(金永昌), 김성근(金成根), 박수래(朴洙來), 이준석(李俊石), 이종근(李鍾根), 김종철(金鍾喆), 김영승(金永昇), 이연호(李然鎬), 도석균(都錫均), 서광희(徐洸熹), 정삼봉(鄭三奉) 교사를 기용했다. 이런 작업들이 결실을 맺어 개학의 틀이 급속도로 잡혀갔다.
청운의 뭉게구름 활짝 일 듯 고대하던 개학이 되고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이 물러난 우리 땅, 우리 교실에서 우리말을 배웠다. 일본어를 뜻하던 소위 ‘국어’ 시간이 진정한 국어 시간으로 본뜻을 되찾았다. 일본사 대신 떳떳이 한국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일제하에서 피맺힌 저항을 하다가 억울하게 모교를 떠났던 교우들이 복교하여 다시 한 교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연병장과 밭으로 변해 버렸던 운동장도 정지(整地)되어 본래의 운동장으로 환원되고 학교 내 신사당(神社堂=‘봉안당’)은 흔적 없이 부숴져 학생들 놀이터가 됐다. 교육 당국은 학교 현장에서 일어를 전폐하고 한국어만 쓰도록 했다.
1945년 12월, 교내 주둔 중이던 미군 중 제임스 호잇(James Hoyt) 중위가 자원하여 고학년 영어회화 강의를 맡았다. 호잇 중위는 사비를 털어 당시 전주북공립중학교생 몇몇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한국과 인연이 깊어 이후에도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정년 퇴임했다. 그는 퇴임 후인 1983년 2월 전 중앙대 총장을 역임한 임성희(任星熙) 동문(26회)과 함께 약 40년만에 전고를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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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신탁(信託)통치 둘러싼 혼란===  
===제2장 신탁(信託)통치 둘러싼 혼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3국 외상회의에서는 한반도에 주둔한 미·소 양국 간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한국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호하며 미·영·소·중 4개국이 최고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신탁통치란 UN(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특정국가가 특정 지역에 대해 실시하는 특수통치제도를 말한다. 통치국은 이 제도의 취지를 살려 평화 증진, 주민 보호, 인권 존중, 가치 또는 독립 원조 등을 하게 되어 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은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해 오던 한민족의 울분을 자극하였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은 신탁통치 결사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서울에서는 반탁 철시와 시위가 행해졌고 군정의 한국인 직원들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그러나 1946년 1월 2일 반탁 성명을 발표하였던 공산계열은 1월 3일 돌연 신탁통치 찬성으로 전환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민족진영은 신탁통치 발표에 맞추어 전국 반탁학생연맹을 만들었다.
==== 제1절 ‘민학’ 대 ‘학련’, 학생들간 격렬한 좌·우익 대립 ====
==== 제1절 ‘민학’ 대 ‘학련’, 학생들간 격렬한 좌·우익 대립 ====
미군정 기간 학교는 대혼란과 갈등의 회오리에 휘말려 들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익 지도부가 찬탁으로 태도를 느닷없이 바꾸자, 앞서 전국학련(全國學聯)에 가담했던 좌익 학생들은 별도로 전국민주학생통일연맹을 조직하여 학생들 사이에도 좌우익 간에 격렬한 투쟁이 불붙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정청이 분산된 재경(在京) 공립고등교육기관들을 국립서울종합대학교로 집합시켜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에 미국인을 임명한다는 약칭 ‘국대안’을 군정법령 제102호로서 발표했다. 이에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맹휴에 들어갔다. 좌익계열은 호기를 놓칠세라 학생들을 앞장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대안 반대의 시위는 식지 않고 열기를 더해갔다.
당시 학원 내에서 우익은 학우회로 칭하다가 보성전문 출신의 학생 거두 이철승(19회)이 1946년 7월 전국학생연합회(=‘학련’)를 창립하자 ‘학련’ 조직으로 재편됐다. 좌익은 처음 학생회라 했으나 전국민주학생통일연맹(=‘민학’)으로 정비하면서 전국 학교마다 ‘학련’과 ‘민학’으로 갈라섰다.
본교의 대표적 우익 학생은 북중의 김대호, 문윤희, 천복동(천건, 26회), 임방현(26회), 유도수(26회), 윤여헌 등이었다. 또 좌익의 대표 학생으로는 북중의 김성언, 오수원, 박헌규 등이 있었다. ‘학련’과 ‘민학’은 전북도 연맹 조직이 있었으나 전주 북중 학생 간부가 좌우를 막론하고 주도하고 있었다.
1946년 1월 4일 본교생 오수원(吳守元) 등 우익 학생들도 학우회(學友會, 후일 ‘학련’ 모체)를 중심으로 주동이 되어 교실을 박차고 가두 시위에 나섰다. 플래카드를 앞세운 전교생이 구(舊) 역전, 구 시청, 구 도청, 남문, 오목대를 누비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 아래 반탁 시위를 전개하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이 무렵엔 수업일수보다 맹휴일수(盟休日數)가 더 많았다. 언제 누가 퇴학을 당하고 복학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했던 사회상이었다. 동맹휴학이 일어나면 곧장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 기동대가 학교에 달려왔다. 주모자가 도망치면 형사들이 뒤꽁무니를 추적했다. 학원은 숨바꼭질장이 되어 공포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우익 학생들은 등교 권유, 좌익 학생들은 등교 거부를 종용했으며 그들 손엔 모두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우익 학생들은 낮에는 활동을 벌이되 밤에는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떠한 화(禍)를 입을지 몰랐다. 피비린내 나는 적색 테러 때문이었다. 밤만 되면 좌익 계열의 학생들이 교실과 거리의 전신주, 책상 속에까지 볼온문서를 집어 넣었다. 우익 학생들이 뒤쫓아 뜯어내고 깨끗이 청소를 하면 다시 좌익 학생의 비라가 나붙었다. 미처 풀기도 마르지 않은 벽보를 떼어 나가다보면 곧장 앞장서서 붙이고 있는 좌익 학생들과의 싸움이 시작되곤 하였다.
교내의 벽보에 붙여진 비라도 우익계의 비라는 금방 떼어도 아무 말썽이 없었으나, 좌익계 비라는 계속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호시탐탐 보복의 비수가 번쩍이고 있었다. 당시의 학생들은 이렇게 심한 사상적 갈등 속에서 그야말로 제대로 수업 받는 날보다 갖가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업을 못 받는 날이 더 많았다. 광복 직후부터 몇 해에 걸친 불우한 시기는 전고 100년사의 일부분이 아닌 민족 수난사였다.
==== 제2절 좌익, 동맹휴학 선동 ====
==== 제2절 좌익, 동맹휴학 선동 ====
1946년 12월 10일부터 북중학교 중간고사를 실시하기 위하여 12월 3일 고사 시간표가 발표되었는데 뜻밖에도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당시 북중 우익 학생의 맹장이던 오수원 동문을 남노당계(南勞黨系)에서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좌익으로 전환시켰고, 그를 중심으로 한 좌익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선동하였다. 오수원은 미남인데다 권투선수와 웅변가로 다른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1946년 1월 4일 전주 북중의 반탁 가두 시위 때만 해도 우익학생 대표로 앞장섰다. 하지만 1946년 12월 18일 전주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군정 반대 시민대회에서 그는 좌익 선동의 첨병이 되어 있었다.
여하튼 중간고사에 임박해 2교시 수업이 시작과 함께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좌익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강당에 집결하여 농성 시위를 시작했다. 교무실에서는 긴급 직원회의가 소집되어 수습 대책을 논의하던 중 김종철(金鍾喆), 김홍근(金洪根) 두 교사가 강당에 접근하여 북쪽 두 번째 창문의 유리를 깨고 강당에 들어서는데 성공, 단상에서 선동 지휘 중이던 오수원을 끌어내리고 학생들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오수원이 “학교 밖으로 나가라”고 외치며 하단했고,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가방을 챙겨들고 모두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당시 천건(千建, 전 해성고 교장) 등 우익계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들을 제지하고 있을 때, 기동 경찰을 태운 미군 스리코터 트럭 1대가 교내로 들어서면서 차에 타고 있던 경찰관들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학생들을 제지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다시 직원회의에서는 대책 협의가 있었고, 교직원을 시내 각 요소에 배치하여 배치된 장소에서 좌익 계열의 학생들로부터 등교 제지를 당하고 있던 학생들을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로 결정하고 교외 단속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1, 2학년 저학년생만 등교했을 뿐 고학년은 누구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나마 날이 갈수록 저학년생 등교 숫자도 감소되어 갔다. 학교 측은 할 수 없이 임시 휴교를 실시키로 결정하고 지방 학생들의 안전 귀향에 전력을 다하였다. 반면 좌익 학생들은 전주역과 각 자동차 정류장, 각 방면의 도로 요처에 버티고서 귀향 길에 오른 학생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결국 학생들은 학교에도 나올 수 없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부득이 학교에서는 대책을 숙의한 바, 당시 식량영단(食糧營團) 소속 화물차 1대와 본교 소유 일제 화물차 1대를 이용하여 12월 16일에는 김제 부안 방면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장경순(張坰淳, 전 농림장관·국회 부의장), 유성희(柳性熙), 이병선(李炳善), 김홍근(金洪根) 등 여러 교사들이 인솔하여 보호 귀향시켰고, 12월 17일에는 임실 남원 방면 학생들을 이운재(李雲宰), 정용식(鄭龍植), 김홍근 교사들이 담당하여 귀향시켰다. 12월 18일에는 학교 소유차 1대만으로 김홍근 교사가 단독으로 금산 방면 학생들을 귀향시켰다.
당시의 상황을 김홍근 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전주 출발 전에 자동차 수리 관계로 하오 4시 반이 넘어서야 출발하여 금산에 8시가 넘어 도착했다. 학생들을 안전하게 하차시키고 차를 돌려 운전기사 김진(金珍)씨와 늦은 밤을 재촉, 전주로 향하였다. 대둔산 고개를 넘어 운주 지서(支署) 앞에 도착하니 초소 경찰관이 정차를 명하면서 전주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여 여학생이 총에 맞아 죽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통행을 저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조바심과 근심 속에 운주면장(당시 전주고교 학부모)의 권유로 면장실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학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 사건을 간추려 보면, 좌익 분자들의 폭동의 와중에서 경찰관 구타로 전주여상생 1명이 희생을 당하고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광복 공간에서의 혼란과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급박했다.
=== 제3장 독립운동가 김가전 교장 ===
=== 제3장 독립운동가 김가전 교장 ===
==== 제1절 국민 개학(皆學), ‘모두에게 배움을 ====
==== 제1절 국민 개학(皆學), ‘모두에게 배움을 ====
1946년 1월 28일자로 김용환(金龍煥) 교장이 순창 공립농업학교로 전출되고, 같은 날 도석균(都錫均) 교사가 교장 사무를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946년 4월 15일, 기독교장로회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석운 김가전(石雲 金嘉全) 선생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김가전 교장은 전주 3·1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며 반일·비협조로 일관한 인물이다. 그의 친형인 경재 김인전(鏡齋 金仁全)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장을 지냈으며, 숙부 춘곡 김영배(春谷 金永培, 북중 4대 교장) 역시 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들 김해 김씨 약촌공파는 항일의 피가 흐르는 명문가로, 김가전 교장의 부임은 당시 교무주임 유청 등 전고 출신 교사들이 학교 부흥을 위해 모시고자 온 힘을 다한 결과였다.
김가전 교장의 인생 철학은 ‘박애’(博愛)였으며, 교육 철학은 ‘국민개학’(國民皆學)—‘국민 모두 배워야 한다’—이었다. 그는 일제 암흑기 동안 모국어를 빼앗기고 배움을 차단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품었다. 새 나라 새 시대에 맞춰 민주적이고 개방된 정책을 도입하여 신입생을 획기적으로 많이 모집하는 것으로부터 학교 재건을 시작했다.
부임 직후 김 교장은 새로운 교가(校歌)를 제정하였고, 2개월도 안 되는 6월 1일에는 학급을 증설하여 2학년과 3학년에 각 1학급씩 추가했다. 그 결과, 1946년 9월 전주고는 초유의 ‘신입생 1천명 모집’을 실현하여 ‘국민개학’을 실천하고 도민 모두의 배움터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이해 9월에 신입생을 받아 새 학년을 시작한 것은 미군정에 의해 미국식 학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학년 초가 기존의 4월에서 9월로 갑자기 변경된 것이다. 9월 신입생을 받기 위해 입학시험은 애초 7월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예기치 못한 콜레라 전염병 발생으로 인해 시험이 연기되었다. 전염병이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여행이 제한되면서, 전국의 학교는 입학시험을 보류한 채 임시 휴가에 들어갔고, 신제(新制) 학년이 시작되어야 할 9월에 뒤늦게 입학시험을 치르고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 제2절 ‘전북공립중학교’ 개칭, 혁신과 건설 ====
==== 제2절 ‘전북공립중학교’ 개칭, 혁신과 건설 ====
1946년 9월 1일, 전주북공립중학교는 미군정의 6년제 중학교령에 따라 전북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학제도 6년제로 개편되었다. 광복 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교육계 역시 일제의 4년제 중학교와 2년제 고등학교 체계가 미군정에 의해 6년제로 바뀌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김가전 교장은 뚜렷한 신념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고 문호를 개방하고 신입생을 대거 모집하며 교사를 증축하는 등 학교의 질과 양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특히, 김 교장은 1947년 9월 5일에 1학년 15학급(1,500명)을 인가받아 전교생 수가 급증하자 교실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 교장은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수업 2부제를 시행하고,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전주공립남중학교의 빈 교실에서 분리 수업을 실시하며, 다시 본교로 돌아와 우천체조장 칸을 막고 수업을 진행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결국 김 교장과 교사들은 전교생이 힘을 모아 직접 교사를 지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1949년 6월에 개교 30주년을 맞아 감격적인 낙성식을 치르며 학교를 새롭게 건설했다.
=====. 신입생 ‘1천명’ 모집 =====
=====. 신입생 ‘1천명’ 모집 =====
===== 2북중 새 교가·교훈 제정  =====
김가전 교장은 부임 직후 '자유, 박애, 지성, 노력'이라는 교훈을 제정하고, ‘대 북중(大 北中)’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교사를 대폭 보강하며, 당시 도내 중학교 교육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문호를 대폭 개방했다. 이러한 조치는 지역 학생들의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교육열과 애국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3 1947년 전북공립중학교 현황=====
 
1946년 초, 김 교장은 신입생 1,000명 모집을 발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9월에는 1,400명이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렀다. 대량 모집된 신입생들의 기성회비는 교사 증축을 위한 중요한 재원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교육적 필요와 학교의 명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현명한 방안이었다. 김 교장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 학내외 성원들 속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 북중 새 교가·교훈 제정  =====
8·15 광복 이후 교육제도와 학습과정, 수업 내용 등이 바뀌었지만 학교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하루 빨리 지우는 게 급선무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학교 상징인 새로운 교가와 교훈의 제정이었다. 전주고보 교가는 개교 12년 후인 1931년 제4대 오타 노부유키(大田信之) 교장 때 처음 제정됐다. 이는 전주의 별명인 ‘녹색 공원 속 아담한 도시’(=‘녹도’)를 뜻하는 ‘녹도(綠都) 완산…’으로 시작된다.
 
◇강점기 첫 교가 (1931~1938)
 
全州高等普通學校 校歌(전주고등보통학교 교가)
 
綠の都完山の (푸른 도시 완산의) 馨る古城の岡の邊に (향기짙은 옛 성터 언덕 자락에) 文化の曉の鐘なりて (문화의 새벽종이 울렸으니) 春秋此處に幾く年か (흘러간 세월이 몇몇 해던가.) 學の窓のいつくしく (배움의 창, 소중도 해라.) 聳ゆるいらか光り有れ (높이 솟은 용마루여 빛나리로다.)
 
하지만 이 교가는 1938년 부임한 제6대 모리 히로미(森廣美) 교장에 의해 다시 제정된다. 교내에 봉안전(=일본왕 사진 안치소)을 준공하는 등 일제의 ‘내선일체’ 방침을 충실히 따른 모리 교장은 문학적이던 첫 교가 가사를 바꿔 일본색과 정치색을 여실히 노골화했다. ‘황국’(皇國), ‘흥아’(興亞) 등 단어로 황국사관, 대동아공영권 등을 표현하며 이를 위해 교훈인 ‘정진역행’과 ‘지성일관’의 생활태도를 강조했다.
 
◇강점기 두번째 교가 (1938~1945)
 
작사 쿠즈하라 시게루, 작곡 히로타 류우타로
 
1절 麒麟の峯に 日は昇り (기린봉에 태양은 떠오르고) 氣高き理想の輝きに (고귀한 이상의 광채로) 今 天地は蘇へる. (이제 천지가 소생하니) これぞ, 精進力行の (이것이야말로 정진역행(精進力行)하는) 大旌かざし, 皇國の (대장 깃발 꽃은 황군(皇軍),) 御民我等が, 新しき (우리 신민이 새로워지는) 使命に勇む久遠の念願 (사명에 용솟음 치는 영원한 염원.)
 
2절 全州川の靑流の (전주천 맑은 물에) 夜書絶えぬぞ 撓まぬぞ (밤에도 글이 끊이지 않으니) 我が永劫の啓示なる. (우리는 영겁의 계시.) いでや, 質實剛健の (자 이제, 실질강건하게) 不斷の步, 一すぢに (부단히 나아가세 이 한길로.) 至誠一貫, あまねくも (지성일관(至誠一貫) 널리널리)
 
작사자 쿠즈하라 시게루(葛原)는 1886년생, 히로시마 현 출신의 동요 시인이다. 작곡자 히로타 류우타로(弘田 龍太郎)는 1892년생 고치 현 출신의 일본 유명 작곡가이다. 그는 문부성 장학생으로 독일 베를린 음대에서 수학한 후 동경음대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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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새 교가
 
김가전 교장은 독립운동가답게 부임하자마자 새 모국어 교가를 제정했다. 작사자는 당시 영어 과목 담당 교사 김종철 박사였다. ‘기린의 높은 봉만(峰巒) 구름을 뚫고…’로 시작되는 이 교가는 전주의 해돋이 주봉이자 학교 동쪽에 자리해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기린봉’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사를 부감하는 노송대’는 당시 학교 뒤뜰에 아담한 정자와 연못이 정취를 더했고 또 기숙사를 오르내리는 언덕에는 노송과 참나무들이 우거져 운치가 있었는데 이를 인용한 것이다.
 
작곡은 당시 전주 서문밖 교회 장로이던 김홍전 박사가 맡았다. 신학·철학·음악 등 박사학위를 세 개나 가진 수재인 그는 김가전 교장 숙부인 춘곡 김영배(春谷 金永培, 전주 북중학교 4대 교장)의 맏아들로서 김 교장과 사촌간이었다. 김가전 교장이 작곡가인 사촌 동생에게 부탁해 교가를 작곡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주북중학교 교가 (1946~1972) 작사 김종철, 작곡 김홍전
 
1절 기린의 높은 봉만 구름을 뚫고 전주천 맑은 물결 구비 나린 곳 역사를 부감하는 노송대 위에 엄연히 솟아 있는 위용의 학사 성스럽다 그 이름 전주북중학 빛나도다 그 이름 전주 북중학.
 
2절 불타는 애국심을 가슴에 품고 청운의 뜻도 높은 천여 학도가 성스러운 배움의 길을 찾아서 조석편달 불변한 청신의 학사 생기에 넘치도다 전주북중학 빛나도다 그 이름 전주북중학.
 
3절 망망천리 아득한 호남평야의 만경에도 넘치는 이상의 거화 울려라 높이어라 하늘에까지 밝혀라 비추어라 대한의 앞길 영원히 빛내어라 전주 북중학 빛나도다 그 이름 전주북중학.
 
김가전 교장은 강점기 교훈인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도 즉각 폐기하고 새 교훈으로 ‘자유, 박애, 지성, 노력’을 제정했다. 이는 1959년까지 북중에서 사용되다 배운석 교장이 전고와 북중 교장(9대)을 겸임한 1960년부터 ‘자강, 자율, 자립’으로 변경됐다.
 
교지 <북중> 창간호(1952)부터 제8호(1960)까지는 ‘봉만’(峯巒)으로, 제10호(1963)·12호(1967)·14호(1969)에는 ‘봉란’으로 표기됐으며 제13호(1968)에는 엉뚱하게 ‘봉람’으로 인쇄돼있다. 또한 1949년 제26회 졸업앨범의 육필(肉筆) 교가 ‘봉산’으로 적혀있기도 하다. ‘봉람’은 명백한 교정 잘못이나 ‘봉산’(峯山), ‘봉만’, ‘봉란’(鳳鸞)은 모두 한자어가 있으므로 비정(批正)이 필요하다. 현재 대부분 동문들은 ‘봉만’이 맞다는 데 동의하고 있지만 교가 제정 직후 첫 공식 인쇄물인 제26회 앨범(1949)의 ‘봉산’ 표기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기린의 높은 봉산’으로 표기된 광복 후 전주북중 교가 육필 가사. 26회 졸업앨범에 실렸다. 1949.5.
 
전주북중학교 교가는 1951년 9월 중·고교 분리 이후에도 북중에서 계속 사용했으나 정부의 ‘중학교 평준화’ 조치에 의해 1972년 북중이 폐교됨에 따라 학교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4장 북종 교사 신축과 김가전 교장 타계===
===제4장 북종 교사 신축과 김가전 교장 타계===
==== 제1절 학생들 자재 운반, ‘내 손으로 학교를 ====
==== 제1절 학생들 자재 운반, ‘내 손으로 학교를 ====
김가전 교장이 ‘우리 손으로 새 집을 짓자’고 호소함에 따라 1947년 3월 전교생이 완주군 우전면(현 전주시 효자동)까지 가서 교사 신축 자재인 벽돌을 운반해 왔다. 이를 시작으로 마침내 꿈에 그리던 새 교사 건축이 첫발을 내디뎠으며 이어 6개월 후인 1947년 9월 2일 신축 기공식을 거행, 대망의 교사 건설이 본 궤도에 올랐다.
김가전 교장 불굴의 신념과 동창들의 전폭적 지원, 지역 주민 호응이 사업에 속도를 더했다. 교사와 2천여 학생들은 합심 단결해 공사에 온 힘을 다했다. 기공식을 올리고 토목공사가 본격 착수되었는데 난관에 봉착하였다. 기초공사를 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다보니 새 교사 예정장소가 애초 하천 매립지에다 전답의 수렁이던 곳이여서 생수가 솟아나고 지반이 약해져 무너져 내리는 등 토목공사가 지지부진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측은 9척 짜리 원목을 1천 본(本)이나 공사장에 때려 박아 기초 콘크리트 시공을 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 공법이며 난공사(難工事)를 했다. 건축에 쓰인 붉은 벽돌은 전주시 진북동에 위치한 옛 전주형무소(全州刑務所=교도소) 재소자들이 구워낸 것으로서 전교생들이 이를 학교에서 걸어 2030분 거리(편도 1.5km)인 전주형무소까지 가서 손수 들고 모교까지 운반했다. 기공식 6개월 전인 1947년 3월부터 벽돌을 나른 것을 시작으로 그해 5월3일, 9월8일, 1948년 5월7일, 7월19일, 9월3일(51,404장), 11월12일(1학년생, 10,280장), 12월6일(10,123매) 등 수십 차례에 걸쳐 한 번에 1만5만여 장씩을 직접 학생들 손으로 끙끙대며 일일이 들고 날라 건물을 지어 올렸다.
또한 1948년엔 3학년생들 전원이 4월13일부터 13일간 목재운반 작업을 했다. 그들은 왕복 왕복 60리가 넘는 완주군 송광사 인근 수원 농대(=현 서울대 농대) 연습림까지 가 목재를 실어 날랐다. 같은 기간 4월14일 1, 2학년생들은 자갈을 운반했다. 이들이 학교로 운반해 운동장에 보관중인 자재나 골재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당시 자칫 도난 우려도 컸다. 이에 대비해 학생들은 자진해서 야간 경비조를 편성, 돌아가며 지키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공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당시로서 워낙 대규모 공사인데다 학생 등 비전문가가 의욕만으로 도전한 것이어서 일부 외부인사들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비아냥대고 공공연한 조롱과 야유를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교직원과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합심해 ‘이왕 시작한 일 반드시 완결짓자’는 각오로 뭉쳤다. 동창 선배들의 격려와 노송동 지역주민들의 후원 뿐 아니라 공사에 동원된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의 노력 덕에 공사는 궤도에 올랐고 예상 외로 빠르게 진척됐다.
당시 콘크리트용 모래와 자갈은 건물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 순도 좋기로 이름난 전남 곡성군(谷城郡) 압록(섬진강 상류)에서 채취된 것을 사용했다. 이를 운반하기 위해 전교생이 압록까지 가 개미처럼 뭉쳐 끙끙대며 열차에 실어 나르는 등 전고인의 애교심은 난관에 처해 더욱 빛을 발했다.
==== 제2절 개교30주년 맞춰 신축 ‘독립기념관’ 낙성 ====
==== 제2절 개교30주년 맞춰 신축 ‘독립기념관’ 낙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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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3일 주춧돌을 새기는 정초식(定礎式)을 가졌고 1949년 6월 16일 개교30주년 기념식과 함께 마침내 대망의 신축 교사(校舍) 낙성식이 거행됐다. 전고인의 힘과 땀으로 1947년 9월2일 기공식을 가진 지 21개월여 만에 대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전국 어느 중·고등학교보다 훌륭한 대규모 교사(校舍)를 국가 보조금 한 푼 없이, 지역 인사와 학부형 성금 및 학생들의 노역으로 마무리 했다는 점에서 이 새 교사는 지역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전고인의 자부심을 한껏 드높였다.
새 본관 건축 규모는 적연와(=붉은 벽돌) 2층에 건평 680평을 자랑했다. 공사비도 6,120만원, 당시로서는 거액이 투입됐다. 교사 길이가 120미터, 교실 수는 23개에 달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의 피와 땀의 결정인 교사가 완성되자 뿔뿔이 흩어져 수업하던 학생들이 모두 노송동 본교로 집결했다. 제 손으로, 제 기술로, 국산 자재로 완성한 교실에서 제 말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전고인들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전고인들은 신축된 교사를 ‘독립기념관’이라 불렀다. 교사 정면 제일 높은 곳 정사각형 화강암 석판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 휘호로 ‘독립기념’(獨立記念) 넉 자를 새겼기 때문이다.
우천체조장과 물리화학실, 생물실 및 학교 밖 전주공립남중학교 빈 교실 등 곳곳에 흩어져 공부하던 전북공립중학생들이 노송동 교사 한 곳에 모였다. 1, 2, 3학년 저학년은 신축 교사에, 4, 5, 6학년 고학년은 옛 교사에 각각 자리잡아 그간 비좁았던 아쉬움을 일거에 해소했다.
==== 제3절 김가전 교장 도지사 영전과 순직 ====
==== 제3절 김가전 교장 도지사 영전과 순직 ====
신축 교사를 낙성한 6개월 후인 1948년 12월 23일 전고는 경사(慶事)를 맞았다. 김가전 교장이 일약 전북 도지사로 발령 받아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다. 김 교장이 부임한 지 2년 10개월 만이었다. 현역 교장의 도지사 발령은 고매한 인품과 빼어난 리더십으로 학교를 발전시킨 김가전 교장의 공이 안팎으로 인정받은 쾌거였다.
김 교장은 사령을 받고도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몸은 비록 도청사에 있겠으나, 마음은 늘 전고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고별사를 남기고 전북 도지사로 취임했다. 전고 재학생 모두 어깨가 으쓱해진 가운데 김 교장 후임으로 그간 줄곧 김 교장을 보좌했던 유청(柳靑) 교감이 임명됐다. 당시 유 교장의 나이 불과 31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영전의 기쁨도 잠시, 전북 도지사로 자리를 옮긴 김가전 전 교장은 6·25 전쟁의 사회 혼란과 도세의 빈곤 해결에 밤낮 없이 노력하다가 끝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51년 10월 5일 군산 출장 중 순직해 전라북도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특히 김 교장이 애지중지하던 전주고·북중인들의 비애는 컸다. 당시 전고 교사던 박노선(16회) 동문은 10월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교무실에 날아든 그 충격과 슬픔의 순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용문|우리 기억에 생생한 10월 6일, 이 날은 토요일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가을 아침이었다. 월요일이 어제 같 은데 벌써 토요일인가 생각하며 집을 나와 학교로 왔다. 교무실에 들어와 선생님들과 아침인사를 교환하자 니까 S선생님이 슬픔에 젖은 얼굴로 “지사님 별세하신 지 아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무심코 “지사님이라 니요?” 하고 물었다. S선생님, “김가전 지사님 말이요”. “예? 참말입니까? 참말?”. 둘은 말이 없었다. 청천벽력 도 분수가 있지, 이 웬 말이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은 듣고 놀라고 한숨, 교무실은 애도일색 한숨의 연속 이었다. “허망하다”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들릴 따름이었다.
지사님이 본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었을 때 봉직하신 선생님들은 누구나 다 선생님의 인격에 감화되고 심복하였을뿐더러 사람의 밟을 길을 가르쳐주시 는 스승님으로 우러러보며 친부모와 같은 애정을 느끼었으나 더욱히 친근히 하실 기회를 많이 가지셔셔 그러한 느낌이 크신 현 교장(=유 청 동문) 선생님께서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막혀 몇 번인지 말이 중단 되었다.
“지사님은 작일(昨日) 임실, 남원의 피난민 수용 상황을 시찰하시고 그 길로 차를 몰아 군산에 가셔서 전재민(戰災民)과 피난민에 위문품을 나눠주시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도 하시고 쉬시며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뇌일혈로 오후 8시 45분에 60세를 일기로 별세하시었습니다. 지난 10월 3일 본교 사열식 때는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고지(高地)까지 가시어 최후의 전투교련까지 보시고 근래는 식욕도 왕성해지고 몸도 회복되어간다고 말씀하시기에 안심되었드니 작일로 불귀의 객이 되시여 그 자비로운 얼굴, 인자하신 말씀 들을 바 없 게 되었습니다.”
한 없이 쏟아져 나오려는 통곡을 억제하며 억제하며 반듯이 말씀을 끝마치시었다. 2천여 학생을 강당 에 모아놓고 “너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참다운 사람, 착한 사람이 되어라” 하시 며 진정에서 우러나는 애국의 열정을 호소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며 더욱 더욱 뚜렷하게 크로스업 된다. 선생님의 혼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이시기에 감동이 얼마나 컸던가. 세상에 애국자는 많되 선생님같은 전(全) 생명이 애국애족으로 뭉치신 분은 아직 내눈에는 띄지 아니 했다. 선생님의 존재는 교육 의 험한 대해(大海)를 공포에 떨며 돗대질 쳐 나가는 가냘픈 젊은 교사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으며 생명수(生命水)였든가! 교육계의 지보(至寶), 민족의 자랑인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길이 없이 됐으니 오호, 슬프고 슬프다.}}
김가전 교장의 갑작스런 비보에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졸업생 및 학생들은 앞다퉈 스승의 묘 다듬고 상여라도 매겠다고 나섰다. 함께 근무했던 교직원들 역시 밤 새워 빈소를 지켰다. 제자를 사랑하고 학교 발전에 불철주야 노력한 김 교장의 열정적인 교육열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지사 재임 시에도 전주고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인의 후일담들이 이어졌다. 김가전 교장 영결식은 전북 도민장으로 10월 11일 거행됐으며 그가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하던 전북공립중학교 교정에서 출발했다. 김 교장 주도로 불과 이태전 완성된 새 교사 ‘독립기념관’이 그의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많은 도민과 제자들이 운구 뒤를 따랐으며 전주시내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조기를 내걸었다.
김 교장은 타계 후에도 오랫동안 전고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 교장 타계 45주(周) 기일인 1995년 10월 5일, 그와 함께 전주고에서 봉직했던 교직원 모임인 송운회(松雲會)가 주축이 된 ‘김가전 교장 숭모비 제막식’이 전주고 교정에서 열렸다. 송운회 회원들은 스승 타계 후 매년 기일이 되면 전주 삼천동에 영면한 김 교장 묘소와 학교 교내 추모비를 직접 찾아 참배했다. 학교에 세워진 숭모비에는 전면에 김 교장과 함께 교사로 재직했던 장경순(張坰淳) 전 국회부의장 글씨로 ‘석운 김가전 선생 숭모비’(石雲 金嘉全 先生 崇慕碑)라는 비명이, 뒷면에는 그가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다음은 숭모비 뒷면 비문 내용이다.
{{인용문|가락국 수로왕(駕洛國 首露王)의 후예이시요 상해 임시정부 지도자이셨던 김인전(金仁全) 목사의 영제 로 일제의 혹심한 감시와 핍박에도 불구 신사참배(神社參拜)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의 강요를 단호히 물리 치고 서원 고개 너머로 볕바른 언덕의 삼간초목에 한운야학(閒雲野鶴)을 벗 삼아 은거하셨던 우국지사 석 운 김가전 목사님!
8·15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각종 정당 사회단체의 영입과 초빙을 외면한 채 주경야독으로 고고 한 생활을 지키시던 1946년, 호남의 명문 전주고등학교의 교장 궐위에 즈음하여 다수 동문 학부형과 교직 원 일동이 삼방(三訪)의 예로써 간청함을 고사치 못하여 마침내 ‘건국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는 신념으로 용약출려(勇躍出廬) 하신 전고 제2대 교장 김가전 선생!
취임 당년 배움에 굶주린 학생들과 가르침에 목마른 부형들의 원과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15학급 신입 생 천여 명을 감연히 모집, 부족한 교실을 한 푼의 국가보조금 없이 학부형의 성금과 학생, 교사의 노역으 로 단시일에 건립하여 전고 웅비의 기틀을 다지신 육영의 거성 김가전 선생!
6년제의 3000학도와 100여 명의 교직원을 가족처럼 애고(愛顧)하며 자유, 정의, 박애의 정신을 고취 실천하고 청렴, 결백, 무사, 공정의 모범을 드리우신 희세(稀世)의 사표(師表) 김가전 선생!
인후(仁厚), 관용의 덕행과 탁월한 영도력으로 중외(中外)의 신망을 받아 도백(道伯)의 사령을 받고도 누차 사양하시다가 ‘몸은 비록 도청사에 있겠으나, 마음은 늘 전고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고별사를 남기고 전북 지사에 취임, 6·25 한국전쟁 직후의 도정 혼란의 광정(匡正)과 도세 빈곤의 해결에 주야진췌(晝夜盡悴) 하시다가 끝내 과로로 순직하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지방 장관 김가전 선생!
선생 재임 시 전고에 봉직하셨던 교직원 35인이 송운회라는 친목회로 뭉쳐 매년 선생 기일에 묘소에 참배하고 전고의 약진을 기망(祈望)하여 오는 터에 오늘 선생 45주기일을 맞게 되어 회원의 미성(微誠)으로 노송대에 흠모의 비를 세워 불멸의 유덕을 높이 기리는 뜻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1995년 10월 5일
건립 송운회, 찬문(贊文) 유청, 제서(題書) 장경순}}
숭모비 제막 당시 전주고 교장이던 공귀섭 동문(29회)은 다음과 같이 추모사를 했다.
{{인용문|오늘 석운 김가전 선생님의 45주기를 맞이하여, 그 당시 재학생이었던 제가 본교 제17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석운 교장 선생님을 추모하게 되니, 그 감회가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김가전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생전에 고고하셨던 모습이 눈앞에 어리고, 애국 충정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저는 지금도 교장 선생님의 유훈을 잊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교장 선생님께서는 상해 임시정부의 지도자이셨던 김인전 목사님의 아우로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의 강요 등도 거부하셨던 우국지사이셨다고 합니다. 1946년 교직원과 동문, 그리고 학부모들이 전주고등학교를 호남 인재의 산실로 만들고자, 석운 김가전 선생님을 전주고 제2대 교장 선생님으로 모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신생독립국가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는 믿음과 ‘인재 양성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신념 하에서, 타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지도로 훌륭한 동량재를 길러낸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평소에 ‘천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의 봉황이 나온다’는 교육관을 지니고, 학급 수를 15학급으로 대폭 증설하여 신입생 천여 명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을 수용할 교실이 부족하여, 1947년에 독립 기념으로서 신축건물 30여 교실분을 준공하였습 니다. 이 건물은 국가의 보조금이 전혀 없이 지역사회 인사와 학부모의 성금, 그리고 학생과 교사의 노역으 로 건축되었으나 1969년 본교 대화재로 인하여 그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같이 전주고 발전의 기틀을 세우신 분이 바로 김가전 교장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소 ‘자유, 박애, 지성, 노력’의 교육 방침으로 일관하였으며, 교직원에게는 귀감이 되었고, 재학생에게는 사도의 표상이셨습니다. 1949년 전라북도 도지사로 부임하신 후에도 전주고의 발전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사랑으로 훈도하시고, 교사를 자애로 이끌었기에, 수많은 제자들이 국가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의 교육자적 양심과 고결하신 인격이 더욱 더 가슴에 사무쳐 옵니다. 광복 후 격변기 속에서도 전주고를 호남 최고의 명문고로 기반을 닦으신 김가전 교장 선생님! 이제 우리 노송인은 선생님의 높고 큰 유덕에 머리 숙여 감사하며 길이길이 추모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고명하신 가르침을 노송인 모두의 가슴에 새기어, 전주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교장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애국애족의 교육자이셨던 선생님! 부디 영면하옵소서, 그리고 유족에게도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빌며 추모사에 가름합니다.
1995년 10월 5일
전주고등학교장 공귀섭}}
==== 제4절 김가전 교장의 가계(家系) ====
==== 제4절 김가전 교장의 가계(家系) ====
김가전 교장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인 경재 김인전(鏡齋 金仁全, 1876~1923)의 친동생이다. 김해 김씨 약촌공파인 김 교장 집안은 충남 서천군에서 세거하다가 1900년대 초 전주에 정착했다. 경재 김인전은 1914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서문밖교회(현재 서문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전도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던 그는 1919년 전주 군산 일대의 3·1 만세 운동 배후로 일경의 지목을 받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현재 국회의장) 등을 지내며 해외 독립 운동을 하다가 순국했다.
1892년 2월 28일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김가전 교장 역시 평양 신학교를 나와 형 경재 김인전과 함께 목회자이자 교육자로 일제에 맞섰다. 이들 형제는 전북 도내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해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또한 북중학교 제4대(1952.11. ~ 1953.11.) 춘곡 김영배(春谷 金永培) 교장은 김인전·가전 형제의 숙부였다. 김영배 교장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학교였던 한영학교(서천) 교장과 군산 멜본딘 여학교 교감을 지냈으며 3·1 만세운동으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북중 교가인 ‘기린의 높은 봉만 …’을 작곡한 김홍전 박사는 김영배 교장의 맏아들로서 김가전 교장과 사촌간이다.
김가전 교장은 한국 민화의 아름다움을 연구한 미술사가이자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김철순(金哲淳·27회) 동문을 아들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지낸 박노경 교수를 며느리로 두었다. 김 교장 일가는 일제의 갖은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와 창씨 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은 채 교육사업과 기독교 목회일에 전념했다.
1951년 전고 교정에 건립된 충혼비 비문은 전임 김가전 교장 및 유청 당시 교장 집안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책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어 장렬히 스러진 전고 출신 학도병과 교직원들을 기리기 위해 당시 유청 교장은 충혼비 건립을 서둘렀다. 충혼비는 1951년 9월 28일 9·28수복 1주년을 맞아 제막됐다. 정면에는 이승만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고 새겨졌고, 후면에는 당시 국회의장이던 해공 신익희의 친필 ‘투필종융 충렬천고’(投筆從戎 忠烈千古)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당시 두 거물 정치지도자의 글을 한 충혼비에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각각 여당과 야당 지도자로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원활치 않던 사이였다. 이 대목에서 김가전 교장의 형인 고(故) 김인전의 유덕(遺德)이 힘을 발휘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의장은 평소 김인전 의정원장을 존경해 마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어렵지 않게 충혼탑에 글을 받을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또한 유청 교장의 부친 유직양(柳直養) 공이 당시 한국민주당 전북도와 전주시 지부장을 겸하고 있어 두 지도자가 전주에 들를 때면 빠짐없이 유교장의 집을 방문하거나 묵어갔다. 그 같은 인연으로 유 교장이 직접 부탁한 충혼비 글을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의장 모두 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전국 어느 충혼탑에도 두 지도자는 물론 한 사람의 글도 새겨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전주고 충혼비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 제5절 ‘미래주의자’ 김가전을 돌아보며 ====
==== 제5절 ‘미래주의자’ 김가전을 돌아보며 ====
===제5장 정부수립과 교육 ===
===제5장 정부수립과 교육 ===
한국의 독립 문제가 난항만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1947년 미국은 이 문제를 UN(국제연합)에 제출하였다. 이에 UN은 한국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즉시 실현케 한다는 전제 아래 UN 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하고, 그 감시 아래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 비례에 따른 보통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 공산당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위원단이 기대한 북한에서의 활동은 결국 불가능하게 되었다. UN은 마침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UN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우리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 방식의 총선거를 38선 이남 전역에서 실시하였다. 여기서 선출된 대표들로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7월 17일에는 역사적인 새 헌법을 제정 공포한 다음,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부를 조직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되었다
==== 제1절 새 교육법 제정 공포====  
==== 제1절 새 교육법 제정 공포====  
정부 수립과 함께 교육 정책도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우선, 1949년 12월 31일 새 교육법이 공포됐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은 교육법 제정에 착수하여, ‘민주주의 민족교육, 민주적 민족교육’을 이념으로 교육활동의 기본이 되는 교육법 제정에 나섰다. 관련 법들은 국회와 위원회 등의 심의를 거쳐 법률 제86호로 확정됐다.
이 법은 광복 이후 종래의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불식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채택하였으며, 문교정책의 기본 노선을 교육의 민주화에 두었다. 문교부는 구체적으로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문맹 퇴치 등 기초 교육에 충실하기로 하여 이를 1950년 6월 1일 공고했다.
또한 교육 자치도 제도적으로는 확립됐다. 교육법에 관련 규정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교육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할 지방의회가 성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 자치제는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후 1952년 5월에 이르러서야 구와 시 단위 교육위원회가 발족했다.
안 장관은 건국 초기의 많은 시책을 수행했으며, 특히 민주주의 민족교육을 강력히 주장하고 국 민 사상을 귀일시켜 반공 정신을 확립하기 위하여 일민주의 사상(一民主義 思想) 보급에 시정(施政)의 중점을 두었다.
전북의 교육도 서서히 정비돼 갔다. 미군정 시절인 1947년 1월, 도내 교육자들을 위한 교육강습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설명과 학생 지도 방안 등이 시달됐다. 또한 도청 학무국장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행정기구도 만들어졌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육법의 제정 공포와 함께 교육 자치제를 추진했다. 비록 한국전쟁으로 인해 실시 시기는 1952년으로 늦춰지기는 했지만, 군 단위에는 교육구를, 시 단위에는 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각각 책임자로 교육감을 두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집권적 교육 행정이 지방 분권적으로 변하게 됐다. 교육 자치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민주화였다고 할 수 있다
==== 제2절 학도호국단 창설 ====
==== 제2절 학도호국단 창설 ====
한국 전쟁 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학원의 사상적 안정과 반공 체제의 확립은 시급한 과제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와 민족의 재생 운동은 항상 비판적인 젊은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일제의 압박과 미·소 강대국의 갈등 속에서 민족의식이 흐려지고, 국민들의 사상은 좌우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흐려진 의식과 사상을 바로잡아 민족의 통일과 재생을 이루기 위해서는 젊은 학생들의 자유정신에 기반한 민주 교육이 필수적이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내부의 힘으로 학원 내의 공산 분자들의 파괴 행동을 막아내고 진리 탐구에 전념하기 위해, 씩씩하고 협동하며 조직적이고 자치적인 기풍을 기르기 위해 매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율적이며 자치적인 새로운 학생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문교부는 1948년 12월, 단체 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며, 학원 내의 불순 세력의 책동을 분쇄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설치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의 유기적인 조직으로서 사상 통합과 단체적 훈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직은 중앙학도호국단 산하에 시도 및 각 대학 학도호국단이 설립되었고,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교사 및 학생들이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전북에서는 1949년 3월, 각급 학교별로 조직을 완료하고 중앙에 맞춰 훈련을 진행했다. 1949년 4월에는 서울 운동장에서 수만 명의 전국 남녀 학도호국단 대원이 모여 중앙학도호국단이 결성되었다.
문교부는 조직의 사전 준비로 1948년 12월부터 전국 각 중등학교의 학생 간부 2,400여 명을 선발하여 서울 을지로 5가에 있는 사대부고 자리에 중앙학도호국단 간부 훈련소를 설치하고, 그들을 입소시켜 2주간의 단기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 중에는 비상 소집 훈련이 진행되었고, 야간 훈련 도중 학생 대원이 유리 창문을 박차고 연병장으로 도주하는 등의 에피소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지리산 주변 학교에서는 공비들이 출몰하여, 대한민국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분열과 국토 분단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학생들에게 직접 체감되기도 했다.
학생 간부 훈련이 끝난 후, 각급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려 했으나, 이를 지도할 교관이 부족했다. 당시 국군에서도 장교가 부족하여, 학교에 군 장교를 배속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교부는 체육 교사 387명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켜 군사에 관한 지식과 훈련을 받게 한 뒤, 육군 소위로 임관시켜 해당 학교에 배속하였다.
안호상 문교부장관의 발의로 조직된 학도호국단은 승공 이념(勝共理念)을 북돋기 위한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매일 시가 행진과 도주 훈련을 시키며, 학원 내에 잠입하려는 좌익 세력을 분쇄하고 철저한 애국 애족 및 정신 무장을 강조하였다
===제6장 에너지 넘친 북중 체육과 예술 ===
===제6장 에너지 넘친 북중 체육과 예술 ===
한국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각종 스포츠 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축구의 경우 국기(國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야구는 국내최강이었다. 전고 축구의 스승인 김용식, 야구 감독 김영조 등이 모두 당대 아시아 최고의 스타였다는 점에서 전고인들은 행운과 자부심을 느꼈다.
문예부문에서는 전고(=전북공립중학교, 약칭 ‘전북중’) 연극이 태평양 전쟁으로 황폐화된 전북의 성인 연극을 이끌다시피 했으며 전고 문예지 ‘죽순’이 광복후부터 1949년말까지 11호나 발행됐다.
=====1. 축구부  =====
=====1. 축구부  =====
제 강점기 ‘한국 축구의 아버지’인 김용식(1910~1985)에게 훈련받아 1936년 10월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준우승하는 등 축구명가로 성장하던 전고 축구는 일제말 단절기를 거쳐 다시 도약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전주고에서 열린 남선 전국축구대회 및 같은 달 공주 전국축구대회, 10월 전국체육대회 우승 등 광복 직후 고교 축구무대를 휩쓸었다. 또한 1947년 수원농림(현 서울대 농대) 주최 전국 중등학교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광복공간을 축구 전성기로 수놓았다.
당시 주축 선수로는 24회 강동구 동문을 비롯해 26회 유도수·김종근, 27회 유평수·온영돈·곽규섭, 28회 노정수 동문 등으로 이들의 눈부신 활약은 전고 축구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평수 동문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중 선수들이 군산 해양대학에서 열린 전국 축구대회에 군산 해양대학 선수로 위장등록해 출전했는데 결승까지 올라 당시 국가대표가 5명이나 포진한 연세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 파란을 일으켰다. 후일 국가대표까지 지낸 유평수 동문은 기량이 출중해 대학 진학 당시 여러 대학에서 눈독을 들였으나 스카웃 전쟁 끝에 동국대에 납치당해 동국대 선수가 됐다.
이후 전고 축구는 전국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 했지만 명맥은 유지해 1960년대 들어 41회 동문인 최길수, 김경중 선수와 북중 40회 동문인 배기면 선수가 국가대표로 발탁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축구열기는 대단했다. 전통 있는 학교 간 축구 시합은 과열되기 일쑤였다. 1947년 5월 한 도내 대회가 그 예이다. 결승전에서 본교와 이리공립공업학교(裡里公立工業學校)가 맞붙게 되자 김가전 교장의 인솔 하에 임시 열차(지붕 있는 화차) 14량을 대절하여 전고 전교생 2,000여 명이 응원전에 참가하였다.
운동경기 못지않게 응원전도 대단하였다. 홈팀인 ‘이공’(裡工)의 사기도 충천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만 하여도 인문숭상(人文崇尙)의 사회적 조류에 실업고의 소외감이 팽배하고 있던 시대였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안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 도중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리공고 선수 하나가 전고 선수를 경기 도중 구타하기 시작하자 양교 선수와 응원단 학생이 뒤범벅이 되어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기동경찰이 동원되고 총성까지 울리어 소동은 제지되었으나 경기는 중단되고 다시 소동이 이리 시내에 파급되어 곳곳에서 양교생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역시 전고 학생은 전통적으로 정규학과 시간에 배워온 유도 실력을 발휘하여 타지에서의 열세를 극복하기도 하였다. 전고 일부 인솔 교사들은 하급생들을 소집 인솔하여 대절했던 임시열차 편으로 전주에 돌아왔으나 이리 방면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당장 이튿날부터 등교에 곤란을 겪었다. 이공(裡工)의 텃밭인 이리에서 전고생들 수난이 며칠 간 이어졌다. 다행히 각 유관기관 또는 이리에서 근무하는 전고 선배들과 지역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학교 당국, 학부형 간 대화가 이뤄졌고 시일이 흐름에 따라 사태도 무마돼 큰 충돌 없이 이리 지역 모든 학생이 전주로 등교할 수 있었다.
=====2. 야구부  =====
=====2. 야구부  =====
전고 야구부는 전주북(北)공립중학교 시절인 1930년대 유철수(2회) 동문을 주축으로 창단돼 윤기병, 유태백산, 차재영, 허영목 동문까지 명맥을 유지해오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팀이 해체됐다.
그러나 종전 후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야구 거성 김영조 감독의 지도 아래 재창단된 전고(=전북공립중학교) 야구부는 그간 공백기 설움을 씻으려는 듯 단숨에 전국 최강으로 도약했다. 26회 이용재, 조병식, 정승균, 전문수, 이창, 27회 양남식, 이문수 동문들이 주전으로 활약한 당시 야구부는 전국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전국 최강(1949년까지)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에는 “교장실이 비좁다”(김가전 교장) 할 만큼 우승기를 가져왔으나 뜻하지 않은 6·25 전쟁으로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이들 26, 27회 동문 선수들은 대부분 연세대에 진학해 대학야구 최강을 구성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전고 야구는 이후 1950년대 30회 박종석 동문을 비롯해 32회 장세권, 37회 김만두, 형성우 동문으로 맥이 이어지다 재해체(1962), 거교적인 재창단(1977)을 거쳐 마침내 황금사자기 우승(1985)의 정점까지 치닫게 된다.
=====3. 광복 후 ‘전북중’ 주요 스포츠 대회 전적 =====  
=====3. 광복 후 ‘전북중’ 주요 스포츠 대회 전적 =====  
◇ 전주군산역전경기대회(1947): 1위 이리농림(2시간 58분 40초), 2위 이리공업, 3위 고창중학 / 8위 전북중(3시간 8분 20초). ※ 도내 총 18개 팀 참가.
◇ 전주군산역전경기대회(1949): 1위 남원농업(2시간 51분 30초), 2위 전주공업, 3위 군산사범 / 6위 전북중(2시간 55분 25초). ※ 도내 총 23개 팀 참가.
◇ 중등축구선수권 대회(1949): 우승 전북중. 결승에서 정읍농림에 3대 0 승리.
◇ 전북중, 전국체육대회 전북예선전 우승 종목:
1947년: 야구, 정구 우승
1948년: 농구, 정구, 송구(핸드볼) 우승
1949년: 축구, 정구, 배구, 송구 우승
◇ 전북중, 1949년 전국체육대회 전북예선 전적 및 기록(육상):
100m: 1위 정해승(11초 9)
400m: 2위 최성삼(57초 1)
800m: 2위 김영환(2분 95초), 3위 최성삼
1,500m: 1위 김영환(4분 21초 6)
서전경주(瑞典競走): 3위 전북중(2분 18초 2)
넓이뛰기(走廣跳): 3위 이광수(5m 71㎝)
높이뛰기(走高跳): 1위 이광수(1m 50㎝), 2위 이강진(1m 50㎝)
세단뛰기: 2위 정해승(11m 60㎝)
◇ 전북중, 1949년 전국체육대회 전북예선 우승 종목(구기):
축구 우승, 대(對) 전주농림 3대 0
정구 우승
배구 우승, 대 전주사범 2대 1
송구 우승, 대 남성중 5대 1.
=====4. 올림피언’ 홍종오 =====
=====4. 올림피언’ 홍종오 =====
제14회 런던올림픽(1948)과 제15회 헬싱키올림픽(1952) 마라톤 국가대표로 출전한 홍종오 동문(24회)은 전주북공립중학교 재학 시절 3천m, 5천m 선수로 전국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16일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 남녀 중등학교 육상경기대회에서 홍 동문은 1500m와 5000m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염무룡 동문 역시 같은 대회에서 높이뛰기 3위, 3단 뛰기 4위의 호성적을 냈다.
졸업 후 고려대에 진학한 홍 동문은 21살의 나이로 마라톤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서윤복, 함기용, 최윤칠 등과 함께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어서 홍 동문은 조선올림픽위원회 명의의 선수증을 가지고 출발했다. 조선올림픽위원회 정환범 위원장이 발행(1948년 5월 31일자)한 선수증에는 "조선대표로 결정함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여 스포츠맨십을 충분히 발휘하는 동시에 정정당당히 분투하여 우리 민족혼을 만국에 발휘하기를 기대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홍 동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교통편이 미비해 국가대표 선수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요코하마로, 다시 선박편으로 상해를 거쳐 일단 홍콩까지 가는 데만 1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홍콩에서 비행기(쌍발기)를 탔으나 이 역시 여의치 않아 방콕, 캘커타, 아프리카, 카이로, 로마, 암스테르담 등지를 경유해 런던까지 가는 데 10여일이 소요되어 서울 출발 20여일 만에 현지 도착함으로써 선수들은 컨디션 최악의 상태로 마라톤 출발점에 서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마라톤 대회 전날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막상 대회 당일에는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로 선수들을 괴롭혔다. 손기정(1936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이후 기대를 모았던 한국의 마라토너들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으나, 노송대 출신 홍종오 동문은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 대회에서 최윤칠은 27km 지점까지 1위로 달리다 중도 기권했고, 홍종오는 25위, 서윤복은 27위를 기록했다.
홍 동문은 1949년 전국체육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했으며,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도 마라톤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5. 연극반 =====
=====5. 연극반 =====
전주북공립중학교(전고)의 연극반은 전북을 대표할 정도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으며, 당시 전고 국어교사였던 백양촌 신근, 하희주 교사들은 직접 각색하거나 창작한 희곡을 통해 학생 연극과 전북 초창기 순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고 연극반은 1947년 9월에 '큰 별'을 상연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에는 '첫 닭이 울기 전에', 10월에는 '안중근 사기', 12월에는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 등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교도소 위안 공연과 국군 위문 공연 등 폭넓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그들의 연극이 단순한 학생 활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도모했다.
특히 1949년 개교 30주년 기념 예술제의 일환으로 전주 시내 백도 극장에서 공연된 '첫 닭이 울기 전에'는 농촌 마을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시민들이 좌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처럼 전북공립중학교 뿐만 아니라 이리 농림, 전주 사범 등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 연극이 활발하게 발표되며, 성인 연극에도 자극을 주고 있었다.
전북연감은 광복 후 학생 연극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긴 세월을 두고 왜정에 억눌렸던 우리 민족 연극은 8·15 해방을 맞이함과 더불어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으나 아직 이렇다 할 진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일보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반면 각 중등학교 연극부는 점차 씩씩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북중(전고) 연극부에서는 1948년 10월 창작극 '안중근 사기'와 12월 창작극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를 통해 진지한 연구 태도를 보였으며, '첫 닭이 울기 전에'를 통해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학생 연극 활동은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순수 향토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성인 연극에 그 역할을 넘기고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6. 문예부=====
=====6. 문예부=====
전주북공립중학교(전고)의 연극반은 전북을 대표할 정도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으며, 당시 전고 국어교사였던 백양촌 신근, 하희주 교사들은 직접 각색하거나 창작한 희곡을 통해 학생 연극과 전북 초창기 순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고 연극반은 1947년 9월에 '큰 별'을 상연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에는 '첫 닭이 울기 전에', 10월에는 '안중근 사기', 12월에는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 등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교도소 위안 공연과 국군 위문 공연 등 폭넓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그들의 연극이 단순한 학생 활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도모했다.
특히 1949년 개교 30주년 기념 예술제의 일환으로 전주 시내 백도 극장에서 공연된 '첫 닭이 울기 전에'는 농촌 마을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시민들이 좌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처럼 전북공립중학교 뿐만 아니라 이리 농림, 전주 사범 등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 연극이 활발하게 발표되며, 성인 연극에도 자극을 주고 있었다.
전북연감은 광복 후 학생 연극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긴 세월을 두고 왜정에 억눌렸던 우리 민족 연극은 8·15 해방을 맞이함과 더불어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으나 아직 이렇다 할 진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일보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반면 각 중등학교 연극부는 점차 씩씩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북중(전고) 연극부에서는 1948년 10월 창작극 '안중근 사기'와 12월 창작극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를 통해 진지한 연구 태도를 보였으며, '첫 닭이 울기 전에'를 통해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학생 연극 활동은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순수 향토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성인 연극에 그 역할을 넘기고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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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공립중학교 학생이 신축된 독립기년관을 뒤로 한 채 새마냥 시원스레 바 위로 날아오르고 있다(1948)

2024년 8월 26일 (월) 20:08 기준 최신판

1장 시대적 상황, 환희와 실망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한민족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1910 년 8월 29일 나라를 잃은 뒤 정확히 34년 11개월 보름만의 일이었다. 혹독한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 나 암흑기는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 새 광명이 온 세상을 비췄다. 작가 홍명희는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 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이제 한국인은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자주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해야 하는 과업을 안게 됐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곧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현대적인 시민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가장 앞서야 할 전제였다. 그러나 가슴 벅찬 환희가 채 식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한반도를 덮쳤다. 민족의 해방은 한국인 자력으로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어서 주도권을 쥘 수가 없었다. 주도 세력의 부재로 한반도가 혼란에 빠진 사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이 땅을 남북으로 자르고 말았다.

8·15와 함께 이 땅에 먼저 진주한 소련군은 재빨리 38선 이북에 군정(軍政)을 시행하고 뒤이어 미국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9월 9일 서울에서 재한(在韓) 일군(日軍)의 정식백범 김구 전주방문. 1949.우남 이승만 전주방문. 전주 YMCA 임원들과 기념촬영했다.1949.4.21.제 4 편 광복의 격랑 속에서 149항복을 받고 군정을 실시했다.

뒤이어 1945년 12월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국에 최고 5개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 민족의 통일소망을 또 한 번 짓밟고 말았다. 외세의 지배에서 뼈저린 체험을 해온 한민족에게 또 다시 을사늑약의 재판(再版)이라고 할 수 있는 신 탁통치 결정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이에 전 민족진영은 결연히 이를 결사반대하고 전국적 인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다 함께 반탁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밤사이 소련의 지령(指令)에 좇아 찬탁으 로 전환하여 찬탁시위를 벌였다. 공산당의 속셈이 만 천하에 폭로됨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분단의 분수 령을 이룬 반탁·찬탁 대립은 민족적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1945년 9월8일 남한을 접수한 미군은 9월9일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아 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정 실시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전국 각지의 자치기구 들을 강제로 해산하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했다. 특히 미군정은 남한의 공산당 세력 을 철저히 분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남한은 좌우익으로 갈려 서로를 맹렬히 공격하는 등 큰 혼돈 속 으로 빠지고 말았다

1절 미군정 하의 교육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 동안의 한반도 역사는 한국민의 자율적 의사에 반해 강대국 등 타율적인 국제관계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해방된 한국에 부과된 과제는 이 땅에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키우는 일이었다. 한국 교육도 이 같은 민족의 염원에 따라 이념과 정책을 세워야 했다. 이 염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산진영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바라는 이념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왕조의 유교적 전통사상에서 비롯된 한국 교육이 일본의 강제적인 군국주의 식민주의 교육을 벗어나면서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기도 했다.

이에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은 일제의 잔재를 하루빨리 털어버리고, 민주적 의식과 정신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교육의 각 분야를 대표할만한 한국 인사들을 선출해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일제의 교육 담당 조직이었던 학무국의 직원들을 한국인으로 재편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19일 편수 책임자 등이 취임하고, 10월 12일에는 학무국을 4과로 개편하는 등 작업을 진행했다. 학무국은 그 뒤 1946년 3월 29일 미군정 법령 제64호에 의해 문교부로 승격되었다.

미군정청은 남한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사상과 식민지 제도를 불식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여러 조치들을 취했다. 그중 교육정책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교육의 민주화라는 대명제 아래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하며 ① 교육 용어로 한국어 사용 ② 국정 교과서 편찬 위원회에서 ‘한글 첫 걸음’ 발행 ③ 초등 교원 재교육을 위해 사범학교에 초등교원 양성과를 만들고 중등 교원 양성을 위해 경기 사범대학, 대구 사범대학으로 개편 ④ 교육제도의 민주화 ⑤ 문맹 퇴치 ⑥ 학년 초를 9월 1일로 하고 2학기제 채택 등의 시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새로운 교육 이념 채택을 위해 조직한 것이 교육심의회였다. 1945년 11월 23일 각계 인사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중앙청에서 제1차 회의가 열린 이후, 1946년 3월 7일 열린 전체 회의를 마지막으로 끝맺음을 할 때까지 전체 회의 20회, 분과위원회 105회의 진지한 토의와 논의를 벌였다. 한국 교육의 방향과 구상을 수립하는 성과를 남긴 것이다.

교육심의회의 업적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제1분과에서 결의돼 전체 회의에서 채택된 새 한국의 교육을 이끌어갈 이념으로서의 ‘홍익인간’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이 반드시 민주주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아왔던 만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은 반드시 민족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에 기초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애국애족의 정신이 투철한 민주국가의 공민을 양성함을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하자는 취지였다. 우리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이 홍익인간 이념은 교육법 제7조에 명문화됨으로써 우리나라 교육이념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제2분과에서 결의해 채택한 교육제도다. 종래의 이원제에서 일원제를 채택한 것이다. 즉, 각급 학교의 연한을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중학교 6년, 실업고등중학교 6년, 사범학교 3년, 대학 4년, 의과대학 6년, 그리고 의과대학을 제외한 일반 대학에 1년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두었다. 학기에 있어서는 3학기제를 폐지하고 2학기제로 함과 동시에 1학기를 9월에서 다음 해 2월로, 2학기를 3월에서 8월까지로 정하고 세 제도는 1946년 9월부터 실시하기로 했다. 이 학기제의 의의는 이원제를 배격하고 일원제를 채택했다는 점과 지위, 문벌, 빈부, 종족, 종교와 성별의 구애 없이 교육을 누구나 받게 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전까지 미군정 시대에 문교부가 취한 주요 교육정책으로는 ①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사업 및 보급 ② 민주 교육 이념 보급을 위한 교사 재교육 강습 ③ 복선형 학제를 6-3-3-4제의 단선형 학제로 개편 ④ 문맹 퇴치를 위한 성인교육 실시 ⑤ 교육자치제의 구상 ⑥ 의무 교육 실시 ⑦ 중등 교육 및 고등 교육의 확충 계획 수립 ⑧ 사범대학의 창설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시책이 ‘새 교육 운동’이었다. 문교부는 1946년 9월 남한의 교육자들을 모두 참여시킨 ‘신교육 연구회’를 만들었다. 여기서는 민주주의 교육을 위해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사상을 새로운 교육법으로 소개했다. 또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학생들을 홈룸이나 클럽활동 등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요컨대 미군정은 신생 한국 교육에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을 심는데 적극 나섰던 것이다.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새로운 교육개혁안으로 일제 강점기 설립된 여러 단과대학을 통폐합해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약칭 ‘국대안’(國大案)으로 불린 이 계획은 사회적으로 큰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 파동으로 번졌다.

국대안은 경성대 3개 학부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9개 관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해 종합대학을 설립하면 설비와 건물 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국가 재정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통합 대상 학교의 학생과 교직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수용능력이 감소될 뿐만 아니라 교수도 부족하고 경비 절감이 의문시 된다는 이유였다. 학생들은 1946년 9월 친일 교수 배격,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 총장으로 대체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국대안 반대 운동은 학원문제를 넘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으며 당시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좌우익 학생들마저 동맹휴학 유지와 중지로 맞서는 등 갈등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한국의 독립문제가 혼란만을 거듭하고 진전을 볼 수 없게 되자 1947년 미국은 한국문제를 U.N에 상정하였다. U.N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우리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총선거를 38선 이남 전역에 걸쳐서 실시하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세계에 선포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의 교육도 한민족의 염원에 따른 교육이념을 세워야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에게 부과된 것이 민주교육의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비단 우리뿐이 아닌 공산진영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기본이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전통사상의 틀에서 벗어난 우리 교육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은 민주주의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얻어낸 결론은 먼저 일본적인 것의 배격과 새로운 민족적 의식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민주주의 원리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교육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이었다. 이것이 곧 ‘새 교육’의 원리요 목표였다. 새 국가 건설은 낡아빠진 구 교육으로서는 불가능하였다. 새 국가는 새 교육으로서만이 수립될 수 있었고 그것이 ‘새 교육’ 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미명하에 아시아 대륙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욕은 교육을 초토화시켰다. 일본군은 신성한 학원까지 점거한 채 오로지 전쟁에만 매달렸다. 이 망동에 전고(=전주북공립중학교)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본군 제23부대가 모교 교실과 운동장을 빼앗자 전고생들은 전주공업학교(全州工業學校)에서 수업 및 훈련, 작업으로 전전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의 감격도 잠시였다. 광복 한 달 후인 1945년 9월 중순, 오키나와로에서 상륙한 미군 제6사단 일부가 전주에 진주해 전주북공립중학교 교사에 주둔함에 따라 학생들은 또다시 교실을 빼앗겼고 학교는 병영 아닌 병영이 되고 말았다.

1945년 9월 하순, 미군들이 강당과 우천체조장 및 운동장에 콘센트 막사를 설치하고 교사(校舍)를 비워 주자 학생들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전주공립공업학교에서 셋방살이 공부를 하던 전주북공립중학교생들이 그립던 옛집으로 돌아와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주인을 찾은 학교는 희망과 생기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일본인 마지막 교장 가매야마(龜山)와 일본인 교원들이 모두 물러가고 유청(柳靑) 교사를 중심으로 뭉친 전고인들은 모교 재건과 개학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10월 10일, 전주북공립중학교 첫 한국인 교장으로 김용환(金龍煥) 교사가 취임했다. 그는 광복 전부터 재직하던 유청, 김일옥(金一玉), 백환기(白煥基) 교사 등과 함께 교원 확보에 전력, 김주현(金周賢), 채형석(蔡炯錫), 노봉준(魯鳳準), 이제형(李濟炯), 김근희(金根熙), 조광진(曺光珍), 이봉권(李烽權), 조상기(趙相紀), 유희진(劉熙珍), 최진기(崔辰基), 이운재(李雲宰), 정용식(鄭龍植), 김영창(金永昌), 김성근(金成根), 박수래(朴洙來), 이준석(李俊石), 이종근(李鍾根), 김종철(金鍾喆), 김영승(金永昇), 이연호(李然鎬), 도석균(都錫均), 서광희(徐洸熹), 정삼봉(鄭三奉) 교사를 기용했다. 이런 작업들이 결실을 맺어 개학의 틀이 급속도로 잡혀갔다.

청운의 뭉게구름 활짝 일 듯 고대하던 개학이 되고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이 물러난 우리 땅, 우리 교실에서 우리말을 배웠다. 일본어를 뜻하던 소위 ‘국어’ 시간이 진정한 국어 시간으로 본뜻을 되찾았다. 일본사 대신 떳떳이 한국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일제하에서 피맺힌 저항을 하다가 억울하게 모교를 떠났던 교우들이 복교하여 다시 한 교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연병장과 밭으로 변해 버렸던 운동장도 정지(整地)되어 본래의 운동장으로 환원되고 학교 내 신사당(神社堂=‘봉안당’)은 흔적 없이 부숴져 학생들 놀이터가 됐다. 교육 당국은 학교 현장에서 일어를 전폐하고 한국어만 쓰도록 했다.

1945년 12월, 교내 주둔 중이던 미군 중 제임스 호잇(James Hoyt) 중위가 자원하여 고학년 영어회화 강의를 맡았다. 호잇 중위는 사비를 털어 당시 전주북공립중학교생 몇몇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한국과 인연이 깊어 이후에도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정년 퇴임했다. 그는 퇴임 후인 1983년 2월 전 중앙대 총장을 역임한 임성희(任星熙) 동문(26회)과 함께 약 40년만에 전고를 방문하기도 했다.

제2장 신탁(信託)통치 둘러싼 혼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3국 외상회의에서는 한반도에 주둔한 미·소 양국 간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한국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호하며 미·영·소·중 4개국이 최고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신탁통치란 UN(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특정국가가 특정 지역에 대해 실시하는 특수통치제도를 말한다. 통치국은 이 제도의 취지를 살려 평화 증진, 주민 보호, 인권 존중, 가치 또는 독립 원조 등을 하게 되어 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은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해 오던 한민족의 울분을 자극하였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은 신탁통치 결사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서울에서는 반탁 철시와 시위가 행해졌고 군정의 한국인 직원들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그러나 1946년 1월 2일 반탁 성명을 발표하였던 공산계열은 1월 3일 돌연 신탁통치 찬성으로 전환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민족진영은 신탁통치 발표에 맞추어 전국 반탁학생연맹을 만들었다.

제1절 ‘민학’ 대 ‘학련’, 학생들간 격렬한 좌·우익 대립

미군정 기간 학교는 대혼란과 갈등의 회오리에 휘말려 들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익 지도부가 찬탁으로 태도를 느닷없이 바꾸자, 앞서 전국학련(全國學聯)에 가담했던 좌익 학생들은 별도로 전국민주학생통일연맹을 조직하여 학생들 사이에도 좌우익 간에 격렬한 투쟁이 불붙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정청이 분산된 재경(在京) 공립고등교육기관들을 국립서울종합대학교로 집합시켜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에 미국인을 임명한다는 약칭 ‘국대안’을 군정법령 제102호로서 발표했다. 이에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맹휴에 들어갔다. 좌익계열은 호기를 놓칠세라 학생들을 앞장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대안 반대의 시위는 식지 않고 열기를 더해갔다.

당시 학원 내에서 우익은 학우회로 칭하다가 보성전문 출신의 학생 거두 이철승(19회)이 1946년 7월 전국학생연합회(=‘학련’)를 창립하자 ‘학련’ 조직으로 재편됐다. 좌익은 처음 학생회라 했으나 전국민주학생통일연맹(=‘민학’)으로 정비하면서 전국 학교마다 ‘학련’과 ‘민학’으로 갈라섰다.

본교의 대표적 우익 학생은 북중의 김대호, 문윤희, 천복동(천건, 26회), 임방현(26회), 유도수(26회), 윤여헌 등이었다. 또 좌익의 대표 학생으로는 북중의 김성언, 오수원, 박헌규 등이 있었다. ‘학련’과 ‘민학’은 전북도 연맹 조직이 있었으나 전주 북중 학생 간부가 좌우를 막론하고 주도하고 있었다.

1946년 1월 4일 본교생 오수원(吳守元) 등 우익 학생들도 학우회(學友會, 후일 ‘학련’ 모체)를 중심으로 주동이 되어 교실을 박차고 가두 시위에 나섰다. 플래카드를 앞세운 전교생이 구(舊) 역전, 구 시청, 구 도청, 남문, 오목대를 누비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 아래 반탁 시위를 전개하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이 무렵엔 수업일수보다 맹휴일수(盟休日數)가 더 많았다. 언제 누가 퇴학을 당하고 복학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했던 사회상이었다. 동맹휴학이 일어나면 곧장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 기동대가 학교에 달려왔다. 주모자가 도망치면 형사들이 뒤꽁무니를 추적했다. 학원은 숨바꼭질장이 되어 공포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우익 학생들은 등교 권유, 좌익 학생들은 등교 거부를 종용했으며 그들 손엔 모두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우익 학생들은 낮에는 활동을 벌이되 밤에는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떠한 화(禍)를 입을지 몰랐다. 피비린내 나는 적색 테러 때문이었다. 밤만 되면 좌익 계열의 학생들이 교실과 거리의 전신주, 책상 속에까지 볼온문서를 집어 넣었다. 우익 학생들이 뒤쫓아 뜯어내고 깨끗이 청소를 하면 다시 좌익 학생의 비라가 나붙었다. 미처 풀기도 마르지 않은 벽보를 떼어 나가다보면 곧장 앞장서서 붙이고 있는 좌익 학생들과의 싸움이 시작되곤 하였다.

교내의 벽보에 붙여진 비라도 우익계의 비라는 금방 떼어도 아무 말썽이 없었으나, 좌익계 비라는 계속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호시탐탐 보복의 비수가 번쩍이고 있었다. 당시의 학생들은 이렇게 심한 사상적 갈등 속에서 그야말로 제대로 수업 받는 날보다 갖가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업을 못 받는 날이 더 많았다. 광복 직후부터 몇 해에 걸친 불우한 시기는 전고 100년사의 일부분이 아닌 민족 수난사였다.

제2절 좌익, 동맹휴학 선동

1946년 12월 10일부터 북중학교 중간고사를 실시하기 위하여 12월 3일 고사 시간표가 발표되었는데 뜻밖에도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당시 북중 우익 학생의 맹장이던 오수원 동문을 남노당계(南勞黨系)에서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좌익으로 전환시켰고, 그를 중심으로 한 좌익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선동하였다. 오수원은 미남인데다 권투선수와 웅변가로 다른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1946년 1월 4일 전주 북중의 반탁 가두 시위 때만 해도 우익학생 대표로 앞장섰다. 하지만 1946년 12월 18일 전주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군정 반대 시민대회에서 그는 좌익 선동의 첨병이 되어 있었다.

여하튼 중간고사에 임박해 2교시 수업이 시작과 함께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좌익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강당에 집결하여 농성 시위를 시작했다. 교무실에서는 긴급 직원회의가 소집되어 수습 대책을 논의하던 중 김종철(金鍾喆), 김홍근(金洪根) 두 교사가 강당에 접근하여 북쪽 두 번째 창문의 유리를 깨고 강당에 들어서는데 성공, 단상에서 선동 지휘 중이던 오수원을 끌어내리고 학생들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오수원이 “학교 밖으로 나가라”고 외치며 하단했고,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가방을 챙겨들고 모두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당시 천건(千建, 전 해성고 교장) 등 우익계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들을 제지하고 있을 때, 기동 경찰을 태운 미군 스리코터 트럭 1대가 교내로 들어서면서 차에 타고 있던 경찰관들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학생들을 제지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다시 직원회의에서는 대책 협의가 있었고, 교직원을 시내 각 요소에 배치하여 배치된 장소에서 좌익 계열의 학생들로부터 등교 제지를 당하고 있던 학생들을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로 결정하고 교외 단속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1, 2학년 저학년생만 등교했을 뿐 고학년은 누구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나마 날이 갈수록 저학년생 등교 숫자도 감소되어 갔다. 학교 측은 할 수 없이 임시 휴교를 실시키로 결정하고 지방 학생들의 안전 귀향에 전력을 다하였다. 반면 좌익 학생들은 전주역과 각 자동차 정류장, 각 방면의 도로 요처에 버티고서 귀향 길에 오른 학생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결국 학생들은 학교에도 나올 수 없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부득이 학교에서는 대책을 숙의한 바, 당시 식량영단(食糧營團) 소속 화물차 1대와 본교 소유 일제 화물차 1대를 이용하여 12월 16일에는 김제 부안 방면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장경순(張坰淳, 전 농림장관·국회 부의장), 유성희(柳性熙), 이병선(李炳善), 김홍근(金洪根) 등 여러 교사들이 인솔하여 보호 귀향시켰고, 12월 17일에는 임실 남원 방면 학생들을 이운재(李雲宰), 정용식(鄭龍植), 김홍근 교사들이 담당하여 귀향시켰다. 12월 18일에는 학교 소유차 1대만으로 김홍근 교사가 단독으로 금산 방면 학생들을 귀향시켰다.

당시의 상황을 김홍근 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전주 출발 전에 자동차 수리 관계로 하오 4시 반이 넘어서야 출발하여 금산에 8시가 넘어 도착했다. 학생들을 안전하게 하차시키고 차를 돌려 운전기사 김진(金珍)씨와 늦은 밤을 재촉, 전주로 향하였다. 대둔산 고개를 넘어 운주 지서(支署) 앞에 도착하니 초소 경찰관이 정차를 명하면서 전주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여 여학생이 총에 맞아 죽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통행을 저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조바심과 근심 속에 운주면장(당시 전주고교 학부모)의 권유로 면장실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학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 사건을 간추려 보면, 좌익 분자들의 폭동의 와중에서 경찰관 구타로 전주여상생 1명이 희생을 당하고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광복 공간에서의 혼란과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급박했다.

제3장 독립운동가 김가전 교장

제1절 국민 개학(皆學), ‘모두에게 배움을

1946년 1월 28일자로 김용환(金龍煥) 교장이 순창 공립농업학교로 전출되고, 같은 날 도석균(都錫均) 교사가 교장 사무를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946년 4월 15일, 기독교장로회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석운 김가전(石雲 金嘉全) 선생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김가전 교장은 전주 3·1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며 반일·비협조로 일관한 인물이다. 그의 친형인 경재 김인전(鏡齋 金仁全)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장을 지냈으며, 숙부 춘곡 김영배(春谷 金永培, 북중 4대 교장) 역시 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들 김해 김씨 약촌공파는 항일의 피가 흐르는 명문가로, 김가전 교장의 부임은 당시 교무주임 유청 등 전고 출신 교사들이 학교 부흥을 위해 모시고자 온 힘을 다한 결과였다.

김가전 교장의 인생 철학은 ‘박애’(博愛)였으며, 교육 철학은 ‘국민개학’(國民皆學)—‘국민 모두 배워야 한다’—이었다. 그는 일제 암흑기 동안 모국어를 빼앗기고 배움을 차단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품었다. 새 나라 새 시대에 맞춰 민주적이고 개방된 정책을 도입하여 신입생을 획기적으로 많이 모집하는 것으로부터 학교 재건을 시작했다.

부임 직후 김 교장은 새로운 교가(校歌)를 제정하였고, 2개월도 안 되는 6월 1일에는 학급을 증설하여 2학년과 3학년에 각 1학급씩 추가했다. 그 결과, 1946년 9월 전주고는 초유의 ‘신입생 1천명 모집’을 실현하여 ‘국민개학’을 실천하고 도민 모두의 배움터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이해 9월에 신입생을 받아 새 학년을 시작한 것은 미군정에 의해 미국식 학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학년 초가 기존의 4월에서 9월로 갑자기 변경된 것이다. 9월 신입생을 받기 위해 입학시험은 애초 7월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예기치 못한 콜레라 전염병 발생으로 인해 시험이 연기되었다. 전염병이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여행이 제한되면서, 전국의 학교는 입학시험을 보류한 채 임시 휴가에 들어갔고, 신제(新制) 학년이 시작되어야 할 9월에 뒤늦게 입학시험을 치르고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제2절 ‘전북공립중학교’ 개칭, 혁신과 건설

1946년 9월 1일, 전주북공립중학교는 미군정의 6년제 중학교령에 따라 전북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학제도 6년제로 개편되었다. 광복 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교육계 역시 일제의 4년제 중학교와 2년제 고등학교 체계가 미군정에 의해 6년제로 바뀌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김가전 교장은 뚜렷한 신념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고 문호를 개방하고 신입생을 대거 모집하며 교사를 증축하는 등 학교의 질과 양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특히, 김 교장은 1947년 9월 5일에 1학년 15학급(1,500명)을 인가받아 전교생 수가 급증하자 교실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 교장은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수업 2부제를 시행하고,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전주공립남중학교의 빈 교실에서 분리 수업을 실시하며, 다시 본교로 돌아와 우천체조장 칸을 막고 수업을 진행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결국 김 교장과 교사들은 전교생이 힘을 모아 직접 교사를 지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1949년 6월에 개교 30주년을 맞아 감격적인 낙성식을 치르며 학교를 새롭게 건설했다.

. 신입생 ‘1천명’ 모집

김가전 교장은 부임 직후 '자유, 박애, 지성, 노력'이라는 교훈을 제정하고, ‘대 북중(大 北中)’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교사를 대폭 보강하며, 당시 도내 중학교 교육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문호를 대폭 개방했다. 이러한 조치는 지역 학생들의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교육열과 애국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1946년 초, 김 교장은 신입생 1,000명 모집을 발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9월에는 1,400명이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렀다. 대량 모집된 신입생들의 기성회비는 교사 증축을 위한 중요한 재원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교육적 필요와 학교의 명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현명한 방안이었다. 김 교장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 학내외 성원들 속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북중 새 교가·교훈 제정

8·15 광복 이후 교육제도와 학습과정, 수업 내용 등이 바뀌었지만 학교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하루 빨리 지우는 게 급선무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학교 상징인 새로운 교가와 교훈의 제정이었다. 전주고보 교가는 개교 12년 후인 1931년 제4대 오타 노부유키(大田信之) 교장 때 처음 제정됐다. 이는 전주의 별명인 ‘녹색 공원 속 아담한 도시’(=‘녹도’)를 뜻하는 ‘녹도(綠都) 완산…’으로 시작된다.

◇강점기 첫 교가 (1931~1938)

全州高等普通學校 校歌(전주고등보통학교 교가)

綠の都完山の (푸른 도시 완산의) 馨る古城の岡の邊に (향기짙은 옛 성터 언덕 자락에) 文化の曉の鐘なりて (문화의 새벽종이 울렸으니) 春秋此處に幾く年か (흘러간 세월이 몇몇 해던가.) 學の窓のいつくしく (배움의 창, 소중도 해라.) 聳ゆるいらか光り有れ (높이 솟은 용마루여 빛나리로다.)

하지만 이 교가는 1938년 부임한 제6대 모리 히로미(森廣美) 교장에 의해 다시 제정된다. 교내에 봉안전(=일본왕 사진 안치소)을 준공하는 등 일제의 ‘내선일체’ 방침을 충실히 따른 모리 교장은 문학적이던 첫 교가 가사를 바꿔 일본색과 정치색을 여실히 노골화했다. ‘황국’(皇國), ‘흥아’(興亞) 등 단어로 황국사관, 대동아공영권 등을 표현하며 이를 위해 교훈인 ‘정진역행’과 ‘지성일관’의 생활태도를 강조했다.

◇강점기 두번째 교가 (1938~1945)

작사 쿠즈하라 시게루, 작곡 히로타 류우타로

1절 麒麟の峯に 日は昇り (기린봉에 태양은 떠오르고) 氣高き理想の輝きに (고귀한 이상의 광채로) 今 天地は蘇へる. (이제 천지가 소생하니) これぞ, 精進力行の (이것이야말로 정진역행(精進力行)하는) 大旌かざし, 皇國の (대장 깃발 꽃은 황군(皇軍),) 御民我等が, 新しき (우리 신민이 새로워지는) 使命に勇む久遠の念願 (사명에 용솟음 치는 영원한 염원.)

2절 全州川の靑流の (전주천 맑은 물에) 夜書絶えぬぞ 撓まぬぞ (밤에도 글이 끊이지 않으니) 我が永劫の啓示なる. (우리는 영겁의 계시.) いでや, 質實剛健の (자 이제, 실질강건하게) 不斷の步, 一すぢに (부단히 나아가세 이 한길로.) 至誠一貫, あまねくも (지성일관(至誠一貫) 널리널리)

작사자 쿠즈하라 시게루(葛原)는 1886년생, 히로시마 현 출신의 동요 시인이다. 작곡자 히로타 류우타로(弘田 龍太郎)는 1892년생 고치 현 출신의 일본 유명 작곡가이다. 그는 문부성 장학생으로 독일 베를린 음대에서 수학한 후 동경음대 교수를 지냈다. . ◇광복 후 새 교가

김가전 교장은 독립운동가답게 부임하자마자 새 모국어 교가를 제정했다. 작사자는 당시 영어 과목 담당 교사 김종철 박사였다. ‘기린의 높은 봉만(峰巒) 구름을 뚫고…’로 시작되는 이 교가는 전주의 해돋이 주봉이자 학교 동쪽에 자리해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기린봉’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사를 부감하는 노송대’는 당시 학교 뒤뜰에 아담한 정자와 연못이 정취를 더했고 또 기숙사를 오르내리는 언덕에는 노송과 참나무들이 우거져 운치가 있었는데 이를 인용한 것이다.

작곡은 당시 전주 서문밖 교회 장로이던 김홍전 박사가 맡았다. 신학·철학·음악 등 박사학위를 세 개나 가진 수재인 그는 김가전 교장 숙부인 춘곡 김영배(春谷 金永培, 전주 북중학교 4대 교장)의 맏아들로서 김 교장과 사촌간이었다. 김가전 교장이 작곡가인 사촌 동생에게 부탁해 교가를 작곡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주북중학교 교가 (1946~1972) 작사 김종철, 작곡 김홍전

1절 기린의 높은 봉만 구름을 뚫고 전주천 맑은 물결 구비 나린 곳 역사를 부감하는 노송대 위에 엄연히 솟아 있는 위용의 학사 성스럽다 그 이름 전주북중학 빛나도다 그 이름 전주 북중학.

2절 불타는 애국심을 가슴에 품고 청운의 뜻도 높은 천여 학도가 성스러운 배움의 길을 찾아서 조석편달 불변한 청신의 학사 생기에 넘치도다 전주북중학 빛나도다 그 이름 전주북중학.

3절 망망천리 아득한 호남평야의 만경에도 넘치는 이상의 거화 울려라 높이어라 하늘에까지 밝혀라 비추어라 대한의 앞길 영원히 빛내어라 전주 북중학 빛나도다 그 이름 전주북중학.

김가전 교장은 강점기 교훈인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도 즉각 폐기하고 새 교훈으로 ‘자유, 박애, 지성, 노력’을 제정했다. 이는 1959년까지 북중에서 사용되다 배운석 교장이 전고와 북중 교장(9대)을 겸임한 1960년부터 ‘자강, 자율, 자립’으로 변경됐다.

교지 <북중> 창간호(1952)부터 제8호(1960)까지는 ‘봉만’(峯巒)으로, 제10호(1963)·12호(1967)·14호(1969)에는 ‘봉란’으로 표기됐으며 제13호(1968)에는 엉뚱하게 ‘봉람’으로 인쇄돼있다. 또한 1949년 제26회 졸업앨범의 육필(肉筆) 교가 ‘봉산’으로 적혀있기도 하다. ‘봉람’은 명백한 교정 잘못이나 ‘봉산’(峯山), ‘봉만’, ‘봉란’(鳳鸞)은 모두 한자어가 있으므로 비정(批正)이 필요하다. 현재 대부분 동문들은 ‘봉만’이 맞다는 데 동의하고 있지만 교가 제정 직후 첫 공식 인쇄물인 제26회 앨범(1949)의 ‘봉산’ 표기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기린의 높은 봉산’으로 표기된 광복 후 전주북중 교가 육필 가사. 26회 졸업앨범에 실렸다. 1949.5.

전주북중학교 교가는 1951년 9월 중·고교 분리 이후에도 북중에서 계속 사용했으나 정부의 ‘중학교 평준화’ 조치에 의해 1972년 북중이 폐교됨에 따라 학교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4장 북종 교사 신축과 김가전 교장 타계

제1절 학생들 자재 운반, ‘내 손으로 학교를

김가전 교장이 ‘우리 손으로 새 집을 짓자’고 호소함에 따라 1947년 3월 전교생이 완주군 우전면(현 전주시 효자동)까지 가서 교사 신축 자재인 벽돌을 운반해 왔다. 이를 시작으로 마침내 꿈에 그리던 새 교사 건축이 첫발을 내디뎠으며 이어 6개월 후인 1947년 9월 2일 신축 기공식을 거행, 대망의 교사 건설이 본 궤도에 올랐다.

김가전 교장 불굴의 신념과 동창들의 전폭적 지원, 지역 주민 호응이 사업에 속도를 더했다. 교사와 2천여 학생들은 합심 단결해 공사에 온 힘을 다했다. 기공식을 올리고 토목공사가 본격 착수되었는데 난관에 봉착하였다. 기초공사를 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다보니 새 교사 예정장소가 애초 하천 매립지에다 전답의 수렁이던 곳이여서 생수가 솟아나고 지반이 약해져 무너져 내리는 등 토목공사가 지지부진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측은 9척 짜리 원목을 1천 본(本)이나 공사장에 때려 박아 기초 콘크리트 시공을 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 공법이며 난공사(難工事)를 했다. 건축에 쓰인 붉은 벽돌은 전주시 진북동에 위치한 옛 전주형무소(全州刑務所=교도소) 재소자들이 구워낸 것으로서 전교생들이 이를 학교에서 걸어 2030분 거리(편도 1.5km)인 전주형무소까지 가서 손수 들고 모교까지 운반했다. 기공식 6개월 전인 1947년 3월부터 벽돌을 나른 것을 시작으로 그해 5월3일, 9월8일, 1948년 5월7일, 7월19일, 9월3일(51,404장), 11월12일(1학년생, 10,280장), 12월6일(10,123매) 등 수십 차례에 걸쳐 한 번에 1만5만여 장씩을 직접 학생들 손으로 끙끙대며 일일이 들고 날라 건물을 지어 올렸다.

또한 1948년엔 3학년생들 전원이 4월13일부터 13일간 목재운반 작업을 했다. 그들은 왕복 왕복 60리가 넘는 완주군 송광사 인근 수원 농대(=현 서울대 농대) 연습림까지 가 목재를 실어 날랐다. 같은 기간 4월14일 1, 2학년생들은 자갈을 운반했다. 이들이 학교로 운반해 운동장에 보관중인 자재나 골재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당시 자칫 도난 우려도 컸다. 이에 대비해 학생들은 자진해서 야간 경비조를 편성, 돌아가며 지키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공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당시로서 워낙 대규모 공사인데다 학생 등 비전문가가 의욕만으로 도전한 것이어서 일부 외부인사들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비아냥대고 공공연한 조롱과 야유를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교직원과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합심해 ‘이왕 시작한 일 반드시 완결짓자’는 각오로 뭉쳤다. 동창 선배들의 격려와 노송동 지역주민들의 후원 뿐 아니라 공사에 동원된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의 노력 덕에 공사는 궤도에 올랐고 예상 외로 빠르게 진척됐다.

당시 콘크리트용 모래와 자갈은 건물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 순도 좋기로 이름난 전남 곡성군(谷城郡) 압록(섬진강 상류)에서 채취된 것을 사용했다. 이를 운반하기 위해 전교생이 압록까지 가 개미처럼 뭉쳐 끙끙대며 열차에 실어 나르는 등 전고인의 애교심은 난관에 처해 더욱 빛을 발했다.

제2절 개교30주년 맞춰 신축 ‘독립기념관’ 낙성

1948년 6월 3일 주춧돌을 새기는 정초식(定礎式)을 가졌고 1949년 6월 16일 개교30주년 기념식과 함께 마침내 대망의 신축 교사(校舍) 낙성식이 거행됐다. 전고인의 힘과 땀으로 1947년 9월2일 기공식을 가진 지 21개월여 만에 대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전국 어느 중·고등학교보다 훌륭한 대규모 교사(校舍)를 국가 보조금 한 푼 없이, 지역 인사와 학부형 성금 및 학생들의 노역으로 마무리 했다는 점에서 이 새 교사는 지역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전고인의 자부심을 한껏 드높였다.

새 본관 건축 규모는 적연와(=붉은 벽돌) 2층에 건평 680평을 자랑했다. 공사비도 6,120만원, 당시로서는 거액이 투입됐다. 교사 길이가 120미터, 교실 수는 23개에 달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의 피와 땀의 결정인 교사가 완성되자 뿔뿔이 흩어져 수업하던 학생들이 모두 노송동 본교로 집결했다. 제 손으로, 제 기술로, 국산 자재로 완성한 교실에서 제 말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전고인들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전고인들은 신축된 교사를 ‘독립기념관’이라 불렀다. 교사 정면 제일 높은 곳 정사각형 화강암 석판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 휘호로 ‘독립기념’(獨立記念) 넉 자를 새겼기 때문이다.

우천체조장과 물리화학실, 생물실 및 학교 밖 전주공립남중학교 빈 교실 등 곳곳에 흩어져 공부하던 전북공립중학생들이 노송동 교사 한 곳에 모였다. 1, 2, 3학년 저학년은 신축 교사에, 4, 5, 6학년 고학년은 옛 교사에 각각 자리잡아 그간 비좁았던 아쉬움을 일거에 해소했다.

제3절 김가전 교장 도지사 영전과 순직

신축 교사를 낙성한 6개월 후인 1948년 12월 23일 전고는 경사(慶事)를 맞았다. 김가전 교장이 일약 전북 도지사로 발령 받아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다. 김 교장이 부임한 지 2년 10개월 만이었다. 현역 교장의 도지사 발령은 고매한 인품과 빼어난 리더십으로 학교를 발전시킨 김가전 교장의 공이 안팎으로 인정받은 쾌거였다.

김 교장은 사령을 받고도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몸은 비록 도청사에 있겠으나, 마음은 늘 전고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고별사를 남기고 전북 도지사로 취임했다. 전고 재학생 모두 어깨가 으쓱해진 가운데 김 교장 후임으로 그간 줄곧 김 교장을 보좌했던 유청(柳靑) 교감이 임명됐다. 당시 유 교장의 나이 불과 31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영전의 기쁨도 잠시, 전북 도지사로 자리를 옮긴 김가전 전 교장은 6·25 전쟁의 사회 혼란과 도세의 빈곤 해결에 밤낮 없이 노력하다가 끝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51년 10월 5일 군산 출장 중 순직해 전라북도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특히 김 교장이 애지중지하던 전주고·북중인들의 비애는 컸다. 당시 전고 교사던 박노선(16회) 동문은 10월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교무실에 날아든 그 충격과 슬픔의 순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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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전 교장의 갑작스런 비보에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졸업생 및 학생들은 앞다퉈 스승의 묘 다듬고 상여라도 매겠다고 나섰다. 함께 근무했던 교직원들 역시 밤 새워 빈소를 지켰다. 제자를 사랑하고 학교 발전에 불철주야 노력한 김 교장의 열정적인 교육열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지사 재임 시에도 전주고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인의 후일담들이 이어졌다. 김가전 교장 영결식은 전북 도민장으로 10월 11일 거행됐으며 그가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하던 전북공립중학교 교정에서 출발했다. 김 교장 주도로 불과 이태전 완성된 새 교사 ‘독립기념관’이 그의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많은 도민과 제자들이 운구 뒤를 따랐으며 전주시내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조기를 내걸었다.

김 교장은 타계 후에도 오랫동안 전고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 교장 타계 45주(周) 기일인 1995년 10월 5일, 그와 함께 전주고에서 봉직했던 교직원 모임인 송운회(松雲會)가 주축이 된 ‘김가전 교장 숭모비 제막식’이 전주고 교정에서 열렸다. 송운회 회원들은 스승 타계 후 매년 기일이 되면 전주 삼천동에 영면한 김 교장 묘소와 학교 교내 추모비를 직접 찾아 참배했다. 학교에 세워진 숭모비에는 전면에 김 교장과 함께 교사로 재직했던 장경순(張坰淳) 전 국회부의장 글씨로 ‘석운 김가전 선생 숭모비’(石雲 金嘉全 先生 崇慕碑)라는 비명이, 뒷면에는 그가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다음은 숭모비 뒷면 비문 내용이다.

가락국 수로왕(駕洛國 首露王)의 후예이시요 상해 임시정부 지도자이셨던 김인전(金仁全) 목사의 영제 로 일제의 혹심한 감시와 핍박에도 불구 신사참배(神社參拜)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의 강요를 단호히 물리 치고 서원 고개 너머로 볕바른 언덕의 삼간초목에 한운야학(閒雲野鶴)을 벗 삼아 은거하셨던 우국지사 석 운 김가전 목사님!

8·15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각종 정당 사회단체의 영입과 초빙을 외면한 채 주경야독으로 고고 한 생활을 지키시던 1946년, 호남의 명문 전주고등학교의 교장 궐위에 즈음하여 다수 동문 학부형과 교직 원 일동이 삼방(三訪)의 예로써 간청함을 고사치 못하여 마침내 ‘건국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는 신념으로 용약출려(勇躍出廬) 하신 전고 제2대 교장 김가전 선생!

취임 당년 배움에 굶주린 학생들과 가르침에 목마른 부형들의 원과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15학급 신입 생 천여 명을 감연히 모집, 부족한 교실을 한 푼의 국가보조금 없이 학부형의 성금과 학생, 교사의 노역으 로 단시일에 건립하여 전고 웅비의 기틀을 다지신 육영의 거성 김가전 선생!

6년제의 3000학도와 100여 명의 교직원을 가족처럼 애고(愛顧)하며 자유, 정의, 박애의 정신을 고취 실천하고 청렴, 결백, 무사, 공정의 모범을 드리우신 희세(稀世)의 사표(師表) 김가전 선생!

인후(仁厚), 관용의 덕행과 탁월한 영도력으로 중외(中外)의 신망을 받아 도백(道伯)의 사령을 받고도 누차 사양하시다가 ‘몸은 비록 도청사에 있겠으나, 마음은 늘 전고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고별사를 남기고 전북 지사에 취임, 6·25 한국전쟁 직후의 도정 혼란의 광정(匡正)과 도세 빈곤의 해결에 주야진췌(晝夜盡悴) 하시다가 끝내 과로로 순직하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지방 장관 김가전 선생!

선생 재임 시 전고에 봉직하셨던 교직원 35인이 송운회라는 친목회로 뭉쳐 매년 선생 기일에 묘소에 참배하고 전고의 약진을 기망(祈望)하여 오는 터에 오늘 선생 45주기일을 맞게 되어 회원의 미성(微誠)으로 노송대에 흠모의 비를 세워 불멸의 유덕을 높이 기리는 뜻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1995년 10월 5일

건립 송운회, 찬문(贊文) 유청, 제서(題書) 장경순

숭모비 제막 당시 전주고 교장이던 공귀섭 동문(29회)은 다음과 같이 추모사를 했다.

오늘 석운 김가전 선생님의 45주기를 맞이하여, 그 당시 재학생이었던 제가 본교 제17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석운 교장 선생님을 추모하게 되니, 그 감회가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김가전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생전에 고고하셨던 모습이 눈앞에 어리고, 애국 충정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저는 지금도 교장 선생님의 유훈을 잊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교장 선생님께서는 상해 임시정부의 지도자이셨던 김인전 목사님의 아우로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의 강요 등도 거부하셨던 우국지사이셨다고 합니다. 1946년 교직원과 동문, 그리고 학부모들이 전주고등학교를 호남 인재의 산실로 만들고자, 석운 김가전 선생님을 전주고 제2대 교장 선생님으로 모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신생독립국가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는 믿음과 ‘인재 양성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신념 하에서, 타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지도로 훌륭한 동량재를 길러낸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평소에 ‘천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의 봉황이 나온다’는 교육관을 지니고, 학급 수를 15학급으로 대폭 증설하여 신입생 천여 명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을 수용할 교실이 부족하여, 1947년에 독립 기념으로서 신축건물 30여 교실분을 준공하였습 니다. 이 건물은 국가의 보조금이 전혀 없이 지역사회 인사와 학부모의 성금, 그리고 학생과 교사의 노역으 로 건축되었으나 1969년 본교 대화재로 인하여 그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같이 전주고 발전의 기틀을 세우신 분이 바로 김가전 교장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소 ‘자유, 박애, 지성, 노력’의 교육 방침으로 일관하였으며, 교직원에게는 귀감이 되었고, 재학생에게는 사도의 표상이셨습니다. 1949년 전라북도 도지사로 부임하신 후에도 전주고의 발전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사랑으로 훈도하시고, 교사를 자애로 이끌었기에, 수많은 제자들이 국가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의 교육자적 양심과 고결하신 인격이 더욱 더 가슴에 사무쳐 옵니다. 광복 후 격변기 속에서도 전주고를 호남 최고의 명문고로 기반을 닦으신 김가전 교장 선생님! 이제 우리 노송인은 선생님의 높고 큰 유덕에 머리 숙여 감사하며 길이길이 추모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고명하신 가르침을 노송인 모두의 가슴에 새기어, 전주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교장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애국애족의 교육자이셨던 선생님! 부디 영면하옵소서, 그리고 유족에게도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빌며 추모사에 가름합니다. 1995년 10월 5일

전주고등학교장 공귀섭

제4절 김가전 교장의 가계(家系)

김가전 교장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인 경재 김인전(鏡齋 金仁全, 1876~1923)의 친동생이다. 김해 김씨 약촌공파인 김 교장 집안은 충남 서천군에서 세거하다가 1900년대 초 전주에 정착했다. 경재 김인전은 1914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서문밖교회(현재 서문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전도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던 그는 1919년 전주 군산 일대의 3·1 만세 운동 배후로 일경의 지목을 받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현재 국회의장) 등을 지내며 해외 독립 운동을 하다가 순국했다.

1892년 2월 28일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김가전 교장 역시 평양 신학교를 나와 형 경재 김인전과 함께 목회자이자 교육자로 일제에 맞섰다. 이들 형제는 전북 도내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해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또한 북중학교 제4대(1952.11. ~ 1953.11.) 춘곡 김영배(春谷 金永培) 교장은 김인전·가전 형제의 숙부였다. 김영배 교장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학교였던 한영학교(서천) 교장과 군산 멜본딘 여학교 교감을 지냈으며 3·1 만세운동으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북중 교가인 ‘기린의 높은 봉만 …’을 작곡한 김홍전 박사는 김영배 교장의 맏아들로서 김가전 교장과 사촌간이다.

김가전 교장은 한국 민화의 아름다움을 연구한 미술사가이자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김철순(金哲淳·27회) 동문을 아들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지낸 박노경 교수를 며느리로 두었다. 김 교장 일가는 일제의 갖은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와 창씨 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은 채 교육사업과 기독교 목회일에 전념했다.

1951년 전고 교정에 건립된 충혼비 비문은 전임 김가전 교장 및 유청 당시 교장 집안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책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어 장렬히 스러진 전고 출신 학도병과 교직원들을 기리기 위해 당시 유청 교장은 충혼비 건립을 서둘렀다. 충혼비는 1951년 9월 28일 9·28수복 1주년을 맞아 제막됐다. 정면에는 이승만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고 새겨졌고, 후면에는 당시 국회의장이던 해공 신익희의 친필 ‘투필종융 충렬천고’(投筆從戎 忠烈千古)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당시 두 거물 정치지도자의 글을 한 충혼비에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각각 여당과 야당 지도자로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원활치 않던 사이였다. 이 대목에서 김가전 교장의 형인 고(故) 김인전의 유덕(遺德)이 힘을 발휘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의장은 평소 김인전 의정원장을 존경해 마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어렵지 않게 충혼탑에 글을 받을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또한 유청 교장의 부친 유직양(柳直養) 공이 당시 한국민주당 전북도와 전주시 지부장을 겸하고 있어 두 지도자가 전주에 들를 때면 빠짐없이 유교장의 집을 방문하거나 묵어갔다. 그 같은 인연으로 유 교장이 직접 부탁한 충혼비 글을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의장 모두 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전국 어느 충혼탑에도 두 지도자는 물론 한 사람의 글도 새겨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전주고 충혼비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제5절 ‘미래주의자’ 김가전을 돌아보며

제5장 정부수립과 교육

한국의 독립 문제가 난항만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1947년 미국은 이 문제를 UN(국제연합)에 제출하였다. 이에 UN은 한국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즉시 실현케 한다는 전제 아래 UN 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하고, 그 감시 아래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 비례에 따른 보통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 공산당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위원단이 기대한 북한에서의 활동은 결국 불가능하게 되었다. UN은 마침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UN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우리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 방식의 총선거를 38선 이남 전역에서 실시하였다. 여기서 선출된 대표들로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7월 17일에는 역사적인 새 헌법을 제정 공포한 다음,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부를 조직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되었다

제1절 새 교육법 제정 공포

정부 수립과 함께 교육 정책도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우선, 1949년 12월 31일 새 교육법이 공포됐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은 교육법 제정에 착수하여, ‘민주주의 민족교육, 민주적 민족교육’을 이념으로 교육활동의 기본이 되는 교육법 제정에 나섰다. 관련 법들은 국회와 위원회 등의 심의를 거쳐 법률 제86호로 확정됐다.

이 법은 광복 이후 종래의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불식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채택하였으며, 문교정책의 기본 노선을 교육의 민주화에 두었다. 문교부는 구체적으로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문맹 퇴치 등 기초 교육에 충실하기로 하여 이를 1950년 6월 1일 공고했다.

또한 교육 자치도 제도적으로는 확립됐다. 교육법에 관련 규정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교육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할 지방의회가 성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 자치제는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후 1952년 5월에 이르러서야 구와 시 단위 교육위원회가 발족했다.

안 장관은 건국 초기의 많은 시책을 수행했으며, 특히 민주주의 민족교육을 강력히 주장하고 국 민 사상을 귀일시켜 반공 정신을 확립하기 위하여 일민주의 사상(一民主義 思想) 보급에 시정(施政)의 중점을 두었다.

전북의 교육도 서서히 정비돼 갔다. 미군정 시절인 1947년 1월, 도내 교육자들을 위한 교육강습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설명과 학생 지도 방안 등이 시달됐다. 또한 도청 학무국장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행정기구도 만들어졌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육법의 제정 공포와 함께 교육 자치제를 추진했다. 비록 한국전쟁으로 인해 실시 시기는 1952년으로 늦춰지기는 했지만, 군 단위에는 교육구를, 시 단위에는 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각각 책임자로 교육감을 두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집권적 교육 행정이 지방 분권적으로 변하게 됐다. 교육 자치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민주화였다고 할 수 있다

제2절 학도호국단 창설

한국 전쟁 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학원의 사상적 안정과 반공 체제의 확립은 시급한 과제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와 민족의 재생 운동은 항상 비판적인 젊은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일제의 압박과 미·소 강대국의 갈등 속에서 민족의식이 흐려지고, 국민들의 사상은 좌우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흐려진 의식과 사상을 바로잡아 민족의 통일과 재생을 이루기 위해서는 젊은 학생들의 자유정신에 기반한 민주 교육이 필수적이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내부의 힘으로 학원 내의 공산 분자들의 파괴 행동을 막아내고 진리 탐구에 전념하기 위해, 씩씩하고 협동하며 조직적이고 자치적인 기풍을 기르기 위해 매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율적이며 자치적인 새로운 학생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문교부는 1948년 12월, 단체 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며, 학원 내의 불순 세력의 책동을 분쇄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설치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의 유기적인 조직으로서 사상 통합과 단체적 훈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직은 중앙학도호국단 산하에 시도 및 각 대학 학도호국단이 설립되었고,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교사 및 학생들이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전북에서는 1949년 3월, 각급 학교별로 조직을 완료하고 중앙에 맞춰 훈련을 진행했다. 1949년 4월에는 서울 운동장에서 수만 명의 전국 남녀 학도호국단 대원이 모여 중앙학도호국단이 결성되었다.

문교부는 조직의 사전 준비로 1948년 12월부터 전국 각 중등학교의 학생 간부 2,400여 명을 선발하여 서울 을지로 5가에 있는 사대부고 자리에 중앙학도호국단 간부 훈련소를 설치하고, 그들을 입소시켜 2주간의 단기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 중에는 비상 소집 훈련이 진행되었고, 야간 훈련 도중 학생 대원이 유리 창문을 박차고 연병장으로 도주하는 등의 에피소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지리산 주변 학교에서는 공비들이 출몰하여, 대한민국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분열과 국토 분단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학생들에게 직접 체감되기도 했다.

학생 간부 훈련이 끝난 후, 각급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려 했으나, 이를 지도할 교관이 부족했다. 당시 국군에서도 장교가 부족하여, 학교에 군 장교를 배속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교부는 체육 교사 387명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켜 군사에 관한 지식과 훈련을 받게 한 뒤, 육군 소위로 임관시켜 해당 학교에 배속하였다.

안호상 문교부장관의 발의로 조직된 학도호국단은 승공 이념(勝共理念)을 북돋기 위한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매일 시가 행진과 도주 훈련을 시키며, 학원 내에 잠입하려는 좌익 세력을 분쇄하고 철저한 애국 애족 및 정신 무장을 강조하였다

제6장 에너지 넘친 북중 체육과 예술

한국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각종 스포츠 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축구의 경우 국기(國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야구는 국내최강이었다. 전고 축구의 스승인 김용식, 야구 감독 김영조 등이 모두 당대 아시아 최고의 스타였다는 점에서 전고인들은 행운과 자부심을 느꼈다.

문예부문에서는 전고(=전북공립중학교, 약칭 ‘전북중’) 연극이 태평양 전쟁으로 황폐화된 전북의 성인 연극을 이끌다시피 했으며 전고 문예지 ‘죽순’이 광복후부터 1949년말까지 11호나 발행됐다.

1. 축구부

제 강점기 ‘한국 축구의 아버지’인 김용식(1910~1985)에게 훈련받아 1936년 10월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준우승하는 등 축구명가로 성장하던 전고 축구는 일제말 단절기를 거쳐 다시 도약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전주고에서 열린 남선 전국축구대회 및 같은 달 공주 전국축구대회, 10월 전국체육대회 우승 등 광복 직후 고교 축구무대를 휩쓸었다. 또한 1947년 수원농림(현 서울대 농대) 주최 전국 중등학교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광복공간을 축구 전성기로 수놓았다.

당시 주축 선수로는 24회 강동구 동문을 비롯해 26회 유도수·김종근, 27회 유평수·온영돈·곽규섭, 28회 노정수 동문 등으로 이들의 눈부신 활약은 전고 축구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평수 동문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중 선수들이 군산 해양대학에서 열린 전국 축구대회에 군산 해양대학 선수로 위장등록해 출전했는데 결승까지 올라 당시 국가대표가 5명이나 포진한 연세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 파란을 일으켰다. 후일 국가대표까지 지낸 유평수 동문은 기량이 출중해 대학 진학 당시 여러 대학에서 눈독을 들였으나 스카웃 전쟁 끝에 동국대에 납치당해 동국대 선수가 됐다.

이후 전고 축구는 전국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 했지만 명맥은 유지해 1960년대 들어 41회 동문인 최길수, 김경중 선수와 북중 40회 동문인 배기면 선수가 국가대표로 발탁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축구열기는 대단했다. 전통 있는 학교 간 축구 시합은 과열되기 일쑤였다. 1947년 5월 한 도내 대회가 그 예이다. 결승전에서 본교와 이리공립공업학교(裡里公立工業學校)가 맞붙게 되자 김가전 교장의 인솔 하에 임시 열차(지붕 있는 화차) 14량을 대절하여 전고 전교생 2,000여 명이 응원전에 참가하였다.

운동경기 못지않게 응원전도 대단하였다. 홈팀인 ‘이공’(裡工)의 사기도 충천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만 하여도 인문숭상(人文崇尙)의 사회적 조류에 실업고의 소외감이 팽배하고 있던 시대였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안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 도중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리공고 선수 하나가 전고 선수를 경기 도중 구타하기 시작하자 양교 선수와 응원단 학생이 뒤범벅이 되어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기동경찰이 동원되고 총성까지 울리어 소동은 제지되었으나 경기는 중단되고 다시 소동이 이리 시내에 파급되어 곳곳에서 양교생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역시 전고 학생은 전통적으로 정규학과 시간에 배워온 유도 실력을 발휘하여 타지에서의 열세를 극복하기도 하였다. 전고 일부 인솔 교사들은 하급생들을 소집 인솔하여 대절했던 임시열차 편으로 전주에 돌아왔으나 이리 방면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당장 이튿날부터 등교에 곤란을 겪었다. 이공(裡工)의 텃밭인 이리에서 전고생들 수난이 며칠 간 이어졌다. 다행히 각 유관기관 또는 이리에서 근무하는 전고 선배들과 지역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학교 당국, 학부형 간 대화가 이뤄졌고 시일이 흐름에 따라 사태도 무마돼 큰 충돌 없이 이리 지역 모든 학생이 전주로 등교할 수 있었다.

2. 야구부

전고 야구부는 전주북(北)공립중학교 시절인 1930년대 유철수(2회) 동문을 주축으로 창단돼 윤기병, 유태백산, 차재영, 허영목 동문까지 명맥을 유지해오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팀이 해체됐다.

그러나 종전 후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야구 거성 김영조 감독의 지도 아래 재창단된 전고(=전북공립중학교) 야구부는 그간 공백기 설움을 씻으려는 듯 단숨에 전국 최강으로 도약했다. 26회 이용재, 조병식, 정승균, 전문수, 이창, 27회 양남식, 이문수 동문들이 주전으로 활약한 당시 야구부는 전국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전국 최강(1949년까지)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에는 “교장실이 비좁다”(김가전 교장) 할 만큼 우승기를 가져왔으나 뜻하지 않은 6·25 전쟁으로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이들 26, 27회 동문 선수들은 대부분 연세대에 진학해 대학야구 최강을 구성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전고 야구는 이후 1950년대 30회 박종석 동문을 비롯해 32회 장세권, 37회 김만두, 형성우 동문으로 맥이 이어지다 재해체(1962), 거교적인 재창단(1977)을 거쳐 마침내 황금사자기 우승(1985)의 정점까지 치닫게 된다.

3. 광복 후 ‘전북중’ 주요 스포츠 대회 전적

◇ 전주군산역전경기대회(1947): 1위 이리농림(2시간 58분 40초), 2위 이리공업, 3위 고창중학 / 8위 전북중(3시간 8분 20초). ※ 도내 총 18개 팀 참가.

◇ 전주군산역전경기대회(1949): 1위 남원농업(2시간 51분 30초), 2위 전주공업, 3위 군산사범 / 6위 전북중(2시간 55분 25초). ※ 도내 총 23개 팀 참가.

◇ 중등축구선수권 대회(1949): 우승 전북중. 결승에서 정읍농림에 3대 0 승리.

◇ 전북중, 전국체육대회 전북예선전 우승 종목:

1947년: 야구, 정구 우승 1948년: 농구, 정구, 송구(핸드볼) 우승 1949년: 축구, 정구, 배구, 송구 우승 ◇ 전북중, 1949년 전국체육대회 전북예선 전적 및 기록(육상):

100m: 1위 정해승(11초 9) 400m: 2위 최성삼(57초 1) 800m: 2위 김영환(2분 95초), 3위 최성삼 1,500m: 1위 김영환(4분 21초 6) 서전경주(瑞典競走): 3위 전북중(2분 18초 2) 넓이뛰기(走廣跳): 3위 이광수(5m 71㎝) 높이뛰기(走高跳): 1위 이광수(1m 50㎝), 2위 이강진(1m 50㎝) 세단뛰기: 2위 정해승(11m 60㎝) ◇ 전북중, 1949년 전국체육대회 전북예선 우승 종목(구기):

축구 우승, 대(對) 전주농림 3대 0 정구 우승 배구 우승, 대 전주사범 2대 1 송구 우승, 대 남성중 5대 1.

4. 올림피언’ 홍종오

제14회 런던올림픽(1948)과 제15회 헬싱키올림픽(1952) 마라톤 국가대표로 출전한 홍종오 동문(24회)은 전주북공립중학교 재학 시절 3천m, 5천m 선수로 전국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16일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 남녀 중등학교 육상경기대회에서 홍 동문은 1500m와 5000m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염무룡 동문 역시 같은 대회에서 높이뛰기 3위, 3단 뛰기 4위의 호성적을 냈다.

졸업 후 고려대에 진학한 홍 동문은 21살의 나이로 마라톤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서윤복, 함기용, 최윤칠 등과 함께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어서 홍 동문은 조선올림픽위원회 명의의 선수증을 가지고 출발했다. 조선올림픽위원회 정환범 위원장이 발행(1948년 5월 31일자)한 선수증에는 "조선대표로 결정함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여 스포츠맨십을 충분히 발휘하는 동시에 정정당당히 분투하여 우리 민족혼을 만국에 발휘하기를 기대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홍 동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교통편이 미비해 국가대표 선수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요코하마로, 다시 선박편으로 상해를 거쳐 일단 홍콩까지 가는 데만 1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홍콩에서 비행기(쌍발기)를 탔으나 이 역시 여의치 않아 방콕, 캘커타, 아프리카, 카이로, 로마, 암스테르담 등지를 경유해 런던까지 가는 데 10여일이 소요되어 서울 출발 20여일 만에 현지 도착함으로써 선수들은 컨디션 최악의 상태로 마라톤 출발점에 서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마라톤 대회 전날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막상 대회 당일에는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로 선수들을 괴롭혔다. 손기정(1936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이후 기대를 모았던 한국의 마라토너들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으나, 노송대 출신 홍종오 동문은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 대회에서 최윤칠은 27km 지점까지 1위로 달리다 중도 기권했고, 홍종오는 25위, 서윤복은 27위를 기록했다.

홍 동문은 1949년 전국체육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했으며,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도 마라톤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5. 연극반

전주북공립중학교(전고)의 연극반은 전북을 대표할 정도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으며, 당시 전고 국어교사였던 백양촌 신근, 하희주 교사들은 직접 각색하거나 창작한 희곡을 통해 학생 연극과 전북 초창기 순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고 연극반은 1947년 9월에 '큰 별'을 상연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에는 '첫 닭이 울기 전에', 10월에는 '안중근 사기', 12월에는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 등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교도소 위안 공연과 국군 위문 공연 등 폭넓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그들의 연극이 단순한 학생 활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도모했다.

특히 1949년 개교 30주년 기념 예술제의 일환으로 전주 시내 백도 극장에서 공연된 '첫 닭이 울기 전에'는 농촌 마을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시민들이 좌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처럼 전북공립중학교 뿐만 아니라 이리 농림, 전주 사범 등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 연극이 활발하게 발표되며, 성인 연극에도 자극을 주고 있었다.

전북연감은 광복 후 학생 연극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긴 세월을 두고 왜정에 억눌렸던 우리 민족 연극은 8·15 해방을 맞이함과 더불어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으나 아직 이렇다 할 진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일보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반면 각 중등학교 연극부는 점차 씩씩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북중(전고) 연극부에서는 1948년 10월 창작극 '안중근 사기'와 12월 창작극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를 통해 진지한 연구 태도를 보였으며, '첫 닭이 울기 전에'를 통해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학생 연극 활동은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순수 향토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성인 연극에 그 역할을 넘기고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6. 문예부

전주북공립중학교(전고)의 연극반은 전북을 대표할 정도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으며, 당시 전고 국어교사였던 백양촌 신근, 하희주 교사들은 직접 각색하거나 창작한 희곡을 통해 학생 연극과 전북 초창기 순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고 연극반은 1947년 9월에 '큰 별'을 상연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에는 '첫 닭이 울기 전에', 10월에는 '안중근 사기', 12월에는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 등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교도소 위안 공연과 국군 위문 공연 등 폭넓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그들의 연극이 단순한 학생 활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도모했다.

특히 1949년 개교 30주년 기념 예술제의 일환으로 전주 시내 백도 극장에서 공연된 '첫 닭이 울기 전에'는 농촌 마을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시민들이 좌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처럼 전북공립중학교 뿐만 아니라 이리 농림, 전주 사범 등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 연극이 활발하게 발표되며, 성인 연극에도 자극을 주고 있었다.

전북연감은 광복 후 학생 연극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긴 세월을 두고 왜정에 억눌렸던 우리 민족 연극은 8·15 해방을 맞이함과 더불어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으나 아직 이렇다 할 진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일보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반면 각 중등학교 연극부는 점차 씩씩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북중(전고) 연극부에서는 1948년 10월 창작극 '안중근 사기'와 12월 창작극 '물레방아는 다시 돈다'를 통해 진지한 연구 태도를 보였으며, '첫 닭이 울기 전에'를 통해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학생 연극 활동은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순수 향토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성인 연극에 그 역할을 넘기고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전주공립중학교 학생이 신축된 독립기년관을 뒤로 한 채 새마냥 시원스레 바 위로 날아오르고 있다(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