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1919년 역사적 개교 | |||
==제 1장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 | ===제 1장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 | ||
===제 1절 개교 당시 시대 상황=== | ====제 1절 개교 당시 시대 상황=== | ||
===제 2절 개교 무렵 전북의 교육=== | ====제 2절 개교 무렵 전북의 교육==== | ||
===제 3절 개교 전후 전주부 부세=== | ====제 3절 개교 전후 전주부 부세==== | ||
==제 2장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 과정== | ===제 2장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 과정=== | ||
[[File:스크린샷 2024-08-13 130840.png|400px]]{{틀:-}} | [[File:스크린샷 2024-08-13 130840.png|400px]]{{틀:-}} | ||
1919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앞서 도내에서 설립된 남자 인문 중등 교육기관은 1907년에 미국남장로선교회에 의해 개교한 전주신흥학교가 있었다. 1910년 공립학교로 설립된 전주 농림학교는 농업분야. 1916년에 설립된 전주 공업직업학교(현 전주공고)는 공업분야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같은상황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도내 30여개 공립보통학교에서 보통교육을 마친 자녀들의 중등교옥 수요에 부응하는 인문 중등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요구가 급속히 커지고 있었다.<br> | 1919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앞서 도내에서 설립된 남자 인문 중등 교육기관은 1907년에 미국남장로선교회에 의해 개교한 전주신흥학교가 있었다. 1910년 공립학교로 설립된 전주 농림학교는 농업분야. 1916년에 설립된 전주 공업직업학교(현 전주공고)는 공업분야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같은상황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도내 30여개 공립보통학교에서 보통교육을 마친 자녀들의 중등교옥 수요에 부응하는 인문 중등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요구가 급속히 커지고 있었다.<br> | ||
17번째 줄: | 17번째 줄: | ||
" 원래 학교 부지로 신청했던 전주군 이동면 (=현 노송동)의 교사 본관은 개교 2개월 전인 4월20일 이미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중 우천체조장(건평 250평) 등 일부를 본관에 앞서 먼저 준공시키고 같은 해 12월 27일 시내 임시 교실에서 이곳으로 학생들을 이전시켜 본격적인 수업을 계속했 다. 본관 등 나머지 교사와 직원관사 (경원동)도 곧 국비로 신축 낙성돼 전주 유일의 관립 고등보통학교로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 " 원래 학교 부지로 신청했던 전주군 이동면 (=현 노송동)의 교사 본관은 개교 2개월 전인 4월20일 이미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중 우천체조장(건평 250평) 등 일부를 본관에 앞서 먼저 준공시키고 같은 해 12월 27일 시내 임시 교실에서 이곳으로 학생들을 이전시켜 본격적인 수업을 계속했 다. 본관 등 나머지 교사와 직원관사 (경원동)도 곧 국비로 신축 낙성돼 전주 유일의 관립 고등보통학교로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 ||
====제 3절 개교 초기 조선 교육령 공포==== | |||
====제 4절 신입생 입학시험==== | |||
====제 5절 개교 당시 주요 신축 건물 배치==== | |||
===제 3장 초창기 학제와 졸업생=== | |||
==== 제 1절 학제 및 학사 관리==== | |||
====제 2절 4년제 첫 졸업생 26명 배출==== | |||
===제 4장 불타오르는 항일 운동=== | |||
====제 1절 1924년 첫번째 동맹휴학==== | |||
=====주모학생 무더기 퇴학 처분===== | |||
=====전국적 파문으로 확산===== | |||
====제 2절 일본인 교장 ===== | |||
=====학부형까지 나서 맹휴 문제 협의 ===== | |||
=====학생들 치밀한 사전계획 세워 ===== | |||
=====참여학생들에게 가차없는 처벌 ===== | |||
=====악랄한 수법으로 저항의식 억눌러 ===== | |||
=====중앙 언론에 비친 전주고보 맹휴 ===== | |||
====제 3절 불발에 그친 1929년 맹휴 ===== | |||
===== 일본화 교육 가속 ===== | |||
===== 학생들 항일의식 키운 노송원 ===== | |||
=====시위 시작과 동시에 경찰 출동 ===== | |||
===== 주동학생들의 집행유예 퇴학 처분 ===== | |||
=====동아일보 집중보도 ===== | |||
====전국 다섯 번째 관립 '제 5고보'의 자부심==== | ====전국 다섯 번째 관립 '제 5고보'의 자부심==== | ||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는 약칭 '전주고보 또는 '제5고보라고 불리었다. 관립학교로는 전국에서 다섯 번 째로 개교했기 때문이다. <br> |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는 약칭 '전주고보 또는 '제5고보라고 불리었다. 관립학교로는 전국에서 다섯 번 째로 개교했기 때문이다. <br> |
2024년 8월 15일 (목) 11:46 판
1919년 역사적 개교
제 1장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
=제 1절 개교 당시 시대 상황
제 2절 개교 무렵 전북의 교육
제 3절 개교 전후 전주부 부세
제 2장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 과정
1919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앞서 도내에서 설립된 남자 인문 중등 교육기관은 1907년에 미국남장로선교회에 의해 개교한 전주신흥학교가 있었다. 1910년 공립학교로 설립된 전주 농림학교는 농업분야. 1916년에 설립된 전주 공업직업학교(현 전주공고)는 공업분야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같은상황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도내 30여개 공립보통학교에서 보통교육을 마친 자녀들의 중등교옥 수요에 부응하는 인문 중등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요구가 급속히 커지고 있었다.
제1절 사립으로 추진 후 관립 전환
1917년 12월 도, 부, 군 참사 및 실업가대회 개최를 계기로 이에 참석한 지역 유지들은 전주에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기로 의결했다. 이들은 또한 학교 설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집을 허가해 줄 것을 당국에 신청했다. 기부금은 토지 10결 이상 또는 이에 상당하는 자산을 가진 도내 유지인사 501명이 설립자가 되어 각출키로 했다. 개인당 기부액은 토지(자산) 10결 당 10원 씩을 표준으로 하고 매년 출자총액 약 1만 천원(12,977원)과 여기에 학생들의 수업료를 더해 학교 유지비에 충당키로 했다.
제2절 신입생 모집과 역사적 개교
개교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19년 2월 신입생 모집에 착수한 직후 기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모집에 별 영향은 없었으나 서울 각 관립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전주에서도 신학년도 시작 시점에 맞추려던 개교 일자는 불가피하게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교일자만 제외하고 다른 사항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1919년 3월 31일 칙령 제59호로 '고등보통학교 관제개정의 건이 발포되어 전주고등보통고등학교 작원 정원과 이날로부터 시행된다는 요지가 공시됐고 4월 1일엔 초대 교장으로 다카기 요시토 당시 경성중학교 교사가 취임했다. 이어 4월 19일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임시 사무소를 전주시내 중앙동 141번지의 전주학교조합 사무소(전 전북도청 구내, 구 비장청 현 복원 전라감영 자리)에 우선 개설하였다.
4월16일 전주제일보통학교(현 전주초등학교 자리)에서 신입생 입학시험을 치렀으며 5월28일 학칙 인가 신청에 이어 마침내 6월 16일 오전 10시 전북공회당 ,구 부립도서관 . 현 전라 일보 자리) 임시 교사에서 역사적인 개교식을 갖고 첫 수업을 시작했으니 현재까지 이날을 개교일로 기념 하고 있다. 첫 입학생은 96명(2학급)이었으며 이날 개교식엔 91명 출석, 5명 결석한 것으로 되어있다.
" 원래 학교 부지로 신청했던 전주군 이동면 (=현 노송동)의 교사 본관은 개교 2개월 전인 4월20일 이미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중 우천체조장(건평 250평) 등 일부를 본관에 앞서 먼저 준공시키고 같은 해 12월 27일 시내 임시 교실에서 이곳으로 학생들을 이전시켜 본격적인 수업을 계속했 다. 본관 등 나머지 교사와 직원관사 (경원동)도 곧 국비로 신축 낙성돼 전주 유일의 관립 고등보통학교로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제 3절 개교 초기 조선 교육령 공포
제 4절 신입생 입학시험
제 5절 개교 당시 주요 신축 건물 배치
제 3장 초창기 학제와 졸업생
제 1절 학제 및 학사 관리
제 2절 4년제 첫 졸업생 26명 배출
제 4장 불타오르는 항일 운동
제 1절 1924년 첫번째 동맹휴학
주모학생 무더기 퇴학 처분
전국적 파문으로 확산
제 2절 일본인 교장 =
학부형까지 나서 맹휴 문제 협의
학생들 치밀한 사전계획 세워
참여학생들에게 가차없는 처벌
악랄한 수법으로 저항의식 억눌러
중앙 언론에 비친 전주고보 맹휴
제 3절 불발에 그친 1929년 맹휴 =
일본화 교육 가속
학생들 항일의식 키운 노송원
시위 시작과 동시에 경찰 출동
주동학생들의 집행유예 퇴학 처분
동아일보 집중보도
전국 다섯 번째 관립 '제 5고보'의 자부심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는 약칭 '전주고보 또는 '제5고보라고 불리었다. 관립학교로는 전국에서 다섯 번 째로 개교했기 때문이다.
최초로 개교한 관립 '제1고보는 1900년 10월 문을 연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였다. 이어'제2고보' 평양고등보통학교(1909년, '평양고보'), '제3고보' 대구고등보통학교(1916년, 현 경북고)와 '계4고보 함함흥보고등통학교(1918년)가 속속 개교했으며 '제5고보'인 전주고보(1919년)가 뒤를 이었다.
남한으로만 따질 때 전주고보는 경기고, 경북고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 깊은 학교가 된다.
이들 5개 고등보통학교가 당시 전국의 5대 관립'이었으며 개교 순서에 따라 모표를 중심으로 모자에 두르는 선의 개수로 각각 학교를 구분했다. 경성고보가 모표 '高(고)자 주변에 가는 백선을 한 개, 평양 고보가 같은 '高' 자에 백선 두 개를 둘렸다. 이같은 순서에 따르면 '제5고보인 전주고보는 가는 백선을 다섯 개나 모자에 둘러야 했다. 하지만 백선 다섯 개를 두르기가 번거롭고 잘 보이지도 않아 다섯을 합 아예 굵은 '백선 테' 하나만 두르게 됐다.
1940년대 초반까지 '제5고보'는 한국 중.고등보통학교 중 최상위를 뜻하는 대명사였다. 당시 재학생들 은 "제1고보'(경성고보) 정도나 우리와 맞먹는다"고 자랑할 정도로 '제5고보' 명칭은 전주고보의 또 다른 자부심으로 사랑받았다.
제3절 개교 초기 조선교육령 공포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여 주권을 완전히 탈취한 뒤 식민통치 초기 교육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1911 년 이른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식민지에 대한 교육방침과 제도를 규정한 것으로 오로지 한 국민의 우민화와 교육통치에 그 목적을 뒷다. 모든 학제는 일본과 차등을 두었을 뿐 아니라 지 난날 대한제국 학제보다 오히려 후퇴시킨 것이었다.
전문 30조로 규정된 조선교육령은 제12조에서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 년으로 제한하였다. 동 13조에서는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이는 연령 12세 이상으로 수업연한 4 년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 내용은 일본인 학교와 대체로 같았으나 삭제가 일본인 학교와 차이가 있었다. 일본 인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4년, 대학 6년(예과 2년, 학부 4년)으로 한국인의 일본인 학교로의 진학이 어렵게 학제를 구성했다. 이는 한국인들의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3.1운동 이후 일제 정책변화도 개교에 영향
일제의 초기 식민지 강압 정책이 1919년 3.1운동이라는 전국에 걸친 우리 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뒷히 게 되자 일제는 무력 탄압만으로는 한민족을 억압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통치방향을 소위 무단 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되며, 교육에서도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공포를 통 해 종전의 교육령을 개정하였다. 전주고보 개교 무렵인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교가 잇달 아 개교한 것도 이같은 일제의 체제 변환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일제는 2차 교육렁 공포에 앞서 1920년 11월 조선교육령 일부를 개정하여 종전 4년제였던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6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보통학교 교과목에 새로 일본 역사와 지리를 첨가하 고 이과 도서 및 체로를 필수과목으로 했다. 또한 고등보통학교에 2개년 이내의 보습과를 두도록 하고 교과과정을 고처 일본의 소학교, 중학교와 비슷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 역시 교육적 차별 대우에 대한 피식민지 한국인들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22년 2월 4일 개정 공포된 2차 조선교육령은 한.일 양국의 동일 교육 주의를 채택하고, 초등교육에서 전문교육에 이르기까지 수업연한과 그 정도를 높였으며, 한국인에게도 사범학교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근 2차 조선교육령은 종래 주년이었던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고등보통학교의 경우에 본 취지로 삼고 있다. 도 수업연한을 종래 4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교과목은 일본의 중학교에 준하여 외국어를 추가하고. 종래의 이과를 박물, 물리, 화학으로 나누었고, 실업 및 법제경제는 실업, 법제, 경 제로 고치고, 습자, 수공을 삭제했다. 그리고 한국어가 추가된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개정된 교육령의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에 따른 규정을 신령 5년제라 하여 기존 구령 4년제에 의해 입학한 학생들에게 검정시험의 형식으로 신령 5년제 상당 학년 1품 편입을 시키고, 일부 4년제 합 격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도록 했다. 같은 해 입학하였더라도 구령과 신령에 따라 졸업연도가 달라진 것이다.
개교 초기 이같은 교육령 개정에 따라 전주고보의 1919년 첫 입학생 가운데 구령에 따라 4년 수업연한을 마친 학생 26명은 1923 3월 22일 구령 제 1회(4년제)로 첫 졸업생 이 됐으며, 나머지 학생 24명은 신령에 따라 수업연한을 1년 추가 연장한 뒤 1924년 3월 10일 신령 제1회로 졸업했다. 구령에 따른 1920년 입학생 17명도 4년 수업연한을 마치고 1924년 3월 10일 구령 제 2회로 졸업을 했고, 나머지 16명도 1925년 3월에 구령 제3회 로 졸업을 하면서 구령 적용 졸업생의 마지 막 횟수가 됐다. 이후 입학생들은 신령에 따라 수업연한 5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동맹휴학
사건전개
전주고등학교는 개교 당시 조선교육령에 의해 한국인에게만 입학자격을 준 4년제 한국인 학교였으나, 1922년 신 교육령에 의해 일본인도 입학 가능한 5년제 한일 공학 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때 전환기에 처한 재학생들은 시험을 거치고, 5년제 고등보통학교의 상당학년에 편입됐으며, 일본학생들과 갈등을 겪는등 문제가 생겼다,
4년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던 학생들은 일제식 교육이 불만스러운데다, 수학 연한이 연장되는 신학제를 마땅치 않게 여겼으며, 검정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하는 부담마저 안게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쌓인 불만이 터져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벌이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3·1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탄압으로 좋지 않던 분위기에, 일인 교사들은 한인학생들이 한국어를 쓰면 그 벌로 변소 청소를 시키는등, 이른바 당번청소를 시켰다, 학생들은 이러한 처사가 "한국인의 천부적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것이며, 교원 조직도 불만스러우니 무자격 교사를 유자격자로 교체해 줄것과 모든 시설을 학생 편의 의주로 개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내면적으로는 일제와 일본인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유였다, 동맹휴학의 주역들은 전주시 교동 낙수동골에서 희동하여 기념사진을 찍은뒤, 맹휴를 결의하여 결행했다, [1]
이 동맹휴학에는 전교생이 참여했지만, 주동은 3학년이었다, 이는 4,5학년 학생들의 진학과 취직에 지장이 없도록 3학년 학생들이 주모를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로써 3학년 생들은 무더기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일부 학생들은 명퇴학[2]이 됐고, 다른 일부는 자원퇴학[3]으로 처리되었다, 이 자원퇴학은 표면적으로만 자신이 원한것으로 가장됐을뿐, 실제로는 일제와 학교당국이 갖은 수단과 압력으로 학생 스스로 학업을 포기토록한 악랄하고 비열한 경우였다,
영향
전주고등보통학교 최초의 동맹휴학은 지역사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대상이 됐다,
일본인 교장 추방사건
1926년, 한국인 학생을 차별하는 등의 행패를 부렸던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을 학생들이 손을모아 추방한 사건. 전주고보(현 전주고)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전국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전주고보 동맹휴학이 발생한지 2년만에 또 다시 전주고보에서 항일 동맹 휴학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신임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은 평소 한인학생과 일인학생(전체 학생의 약 10%)을 차별대우하고 '한인은 불결한 저질민족'이라는 등의 망언을 하는 등 학생들에게 불쾌한 충격을 주고 민족적 감정을 촉발시켰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걸핏하면 폐교하겠다는 교장은 학교를 폐교하러 온 사람이지 우리의 교육을 담당하러 온 사람이 아니니 그런 교장은 추방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판단, 나카타 도미사쿠 교장의 추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추방 사건의 시작을 알린건 시한부 맹휴였다. 3학년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50여 명의 이름으로 5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6월 2일부터 4일까지 시한부 맹휴에 들어갔다. 학교 당국자들의 답변을 들은 뒤 추후 태도를 결정하자는 학생들의 뜻이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학생들의 교장 및 일본 교원 배척 요구를 무시하지 말 것
② 기숙사를 철시할 것
③ 유도, 검도를 가르칠 것
위의 입장을 밝힌 학생들은 이 문제를 학부형들에게 일임하고 일단 학생 본연으로 돌아가 6월 5일부터 등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장은 학생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곤 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맹휴에 대한 소감을 차례로 말하게 하여 맹휴 당위론을 주장한 학생을 퇴학처분했으며, 한민족에 대한 막말과 멸시 언행을 더욱 심하게 했다. 이에 격양된 학생들은 도미사쿠 교장을 교문 밖으로 강제 추방할 것을 최후 결심하고 2학년 학생들도 가담시키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전화선을 미리 끊어둘 절단반, 운동장 주변 경비반, 교직원 자전거 튜브 바람 빼기반, 숙직실 경비반과 독려반을 미리 편성하고 맡은 부서와 임무를 결정했다.
1926년 7월 1일, 마침내 결단의 날이 찾아왔다. 아침 8시 5분 타종을 신호로 전교생은 우천체조장에 예정대로 집결하였다. 당시 강당이 없던 까닭에 비오는 날 조회,훈화,체조 등을 하는 곳을 우천체조장이라고 하였다. 행동대원 3학년 이문기, 변영진, 임걸영, 유갑현, 송병채, 김학우, 공점권, 유순도 동문과 2학년 전석권, 김부영, 유훈석 등 10여명은 교장실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교장의 팔 다리를 네 명이 붙들고 이문기는 엉덩이를 쳐들어 올려 합세해서 130m 가량 떨어져 있는 교문까지 끌어낸 뒤 "나가 버리라"며 추방했다.
나가타 교장은 혼비백산 맨발인 채 전라북도 경찰국과 내무국 학무과로 뛰어가서 봉변의 전말을 하소연했고, 이같은 일대거사를 까마득히 모르다 뒤늦게 인지한 일제 경찰은 즉각 출동하여 전주고보 학생이라면 눈에 뜨이는 대로 무차별 포박 연행하였다. 경찰은 학생들을 줄줄이 엮어 사건 전말의 조사와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워낙 연행된 학생수가 많은지라 포승이 부족하여 전주농업학교(현 병무청자리)에서 모내기 못줄을 징발하여 포승 대신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일경은 주모·주동자 10여명을 색출하여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형을 과하고 기타 관련자는 '명 퇴학'또는 '자퇴' 형식으로 학교에서 쫒아냈으며 이때 고창고보, 서울의 중동고보 등으로 전입해 들어간 전주고보 학생도 상당했다.
교장 추방사건의 주동자는 옥구 출신 정태성(당시 3학년)으로 밝혀졌으며 1학년 학생 일부와 2,3학년 대부분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사건에 힘을 받은 1, 4, 5학년 중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은 학교당국과 일제에 항의하면서 2,3학년의 저항에 동조하여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7월 8일에 예정되어있던 전주시민대회가 취소되고 대신 전주청년회가 시민유지회를 열면서 '전주고보 교장추방' 사건은 전주 시민 전체의 관심사이자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제는 1926년 12월 25을 기해서 특사가 있었다고 하나, 이미 타교로 전학한 학생들은 복학을 거절하였고, 극히 제한된 학생에 한해 전주고보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실제로 돌아온 사례는 없었다는 점에서 전고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 당시 한 전주고보 졸업생이 졸업 후 취직이 되어 간 곳이 도내 장수군청이었는데 출근하고 보니 문제의 나가타 도미사쿠 전 교장이 장수군수로 재임하고 있기에 바로 사표를 쓰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일제는 지탄받는 인물들을 군수나 학교장 자리에 앉혀 놓고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해서 한국인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고 괴롭혔으나 전고인들은 어느 자리에서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1926년의 전주고보 맹휴와 교장 추방사건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는 구호를 제시하고 식민지 교육 체제 하수인인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과 일인 교사에 대한 추방운동을 강력히 추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마음 심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항일의식을 표출한 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