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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4일 (수) 14:52 판
전주고 북중 100년사와
사진으로 보는 전주고·북중 100년사 책의 내용입니다
역대 교장
제1대 김용환, 제 2대 김가전 제3대 유청, 제4대 배운석, 제5대 김신직, 제6대 공원택, 제7대 이종표, 제8대 최도철, 제9대 신강호, 제 10대 최득엽, 제11대 김병문, 제12대 김순만, 제13대 유재신, 제14대 하재홍, 제15대 이기원, 제16대 김성하, 제17대 공귀섭, 제 18대 황기연, 제 19대 오근량, 제20대 지영호, 제21대 백창기, 제22대 이원택,제 23대 신정균, 제24대 박진홍, 제25대 김정기, 제26대 라구한
1910~1920년대
전주고등보통학교[1] 설립 과정
1919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앞서 도내에서 설립된 남자 인문 중등 교육기관은 1907년에 미국남장로선교회에 의해 개교한 전주신흥학교가 있었다. 1910년 공립학교로 설립된 전주 농림학교는 농업분야. 1916년에 설립된 전주 공업직업학교(현 전주공고)는 공업분야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같은상황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도내 30여개 공립보통학교에서 보통교육을 마친 자녀들의 중등교옥 수요에 부응하는 인문 중등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요구가 급속히 커지고 있었다.
제1절 사립으로 추진 후 관립 전환
1917년 12월 도, 부, 군 참사 및 실업가대회 개최를 계기로 이에 참석한 지역 유지들은 전주에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기로 의결했다. 이들은 또한 학교 설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집을 허가해 줄 것을 당국에 신청했다. 기부금은 토지 10결 이상 또는 이에 상당하는 자산을 가진 도내 유지인사 501명이 설립자가 되어 각출키로 했다. 개인당 기부액은 토지(자산) 10결 당 10원 씩을 표준으로 하고 매년 출자총액 약 1만 천원(12,977원)과 여기에 학생들의 수업료를 더해 학교 유지비에 충당키로 했다.
제2절 신입생 모집과 역사적 개교
개교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19년 2월 신입생 모집에 착수한 직후 기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모집에 별 영향은 없었으나 서울 각 관립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전주에서도 신학년도 시작 시점에 맞추려던 개교 일자는 불가피하게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교일자만 제외하고 다른 사항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1919년 3월 31일 칙령 제59호로 '고등보통학교 관제개정의 건이 발포되어 전주고등보통고등학교 작원 정원과 이날로부터 시행된다는 요지가 공시됐고 4월 1일엔 초대 교장으로 다카기 요시토 당시 경성중학교 교사가 취임했다. 이어 4월 19일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임시 사무소를 전주시내 중앙동 141번지의 전주학교조합 사무소(전 전북도청 구내, 구 비장청 현 복원 전라감영 자리)에 우선 개설하였다.
4월16일 전주제일보통학교(현 전주초등학교 자리)에서 신입생 입학시험을 치렀으며 5월28일 학칙 인가 신청에 이어 마침내 6월 16일 오전 10시 전북공회당 ,구 부립도서관 . 현 전라 일보 자리) 임시 교사에서 역사적인 개교식을 갖고 첫 수업을 시작했으니 현재까지 이날을 개교일로 기념 하고 있다. 첫 입학생은 96명(2학급)이었으며 이날 개교식엔 91명 출석, 5명 결석한 것으로 되어있다.
" 원래 학교 부지로 신청했던 전주군 이동면 (=현 노송동)의 교사 본관은 개교 2개월 전인 4월20일 이미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중 우천체조장(건평 250평) 등 일부를 본관에 앞서 먼저 준공시키고 같은 해 12월 27일 시내 임시 교실에서 이곳으로 학생들을 이전시켜 본격적인 수업을 계속했 다. 본관 등 나머지 교사와 직원관사 (경원동)도 곧 국비로 신축 낙성돼 전주 유일의 관립 고등보통학교로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전국 다섯 번째 관립 '제 5고보'의 자부심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는 약칭 '전주고보 또는 '제5고보라고 불리었다. 관립학교로는 전국에서 다섯 번 째로 개교했기 때문이다.
최초로 개교한 관립 '제1고보는 1900년 10월 문을 연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였다. 이어'제2고보' 평양고등보통학교(1909년, '평양고보'), '제3고보' 대구고등보통학교(1916년, 현 경북고)와 '계4고보 함함흥보고등통학교(1918년)가 속속 개교했으며 '제5고보'인 전주고보(1919년)가 뒤를 이었다.
남한으로만 따질 때 전주고보는 경기고, 경북고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 깊은 학교가 된다.
이들 5개 고등보통학교가 당시 전국의 5대 관립'이었으며 개교 순서에 따라 모표를 중심으로 모자에 두르는 선의 개수로 각각 학교를 구분했다. 경성고보가 모표 '高(고)자 주변에 가는 백선을 한 개, 평양 고보가 같은 '高' 자에 백선 두 개를 둘렸다. 이같은 순서에 따르면 '제5고보인 전주고보는 가는 백선을 다섯 개나 모자에 둘러야 했다. 하지만 백선 다섯 개를 두르기가 번거롭고 잘 보이지도 않아 다섯을 합 아예 굵은 '백선 테' 하나만 두르게 됐다.
1940년대 초반까지 '제5고보'는 한국 중.고등보통학교 중 최상위를 뜻하는 대명사였다. 당시 재학생들 은 "제1고보'(경성고보) 정도나 우리와 맞먹는다"고 자랑할 정도로 '제5고보' 명칭은 전주고보의 또 다른 자부심으로 사랑받았다.
제3절 개교 초기 조선교육령 공포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여 주권을 완전히 탈취한 뒤 식민통치 초기 교육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1911 년 이른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식민지에 대한 교육방침과 제도를 규정한 것으로 오로지 한 국민의 우민화와 교육통치에 그 목적을 뒷다. 모든 학제는 일본과 차등을 두었을 뿐 아니라 지 난날 대한제국 학제보다 오히려 후퇴시킨 것이었다.
전문 30조로 규정된 조선교육령은 제12조에서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 년으로 제한하였다. 동 13조에서는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이는 연령 12세 이상으로 수업연한 4 년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 내용은 일본인 학교와 대체로 같았으나 삭제가 일본인 학교와 차이가 있었다. 일본 인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4년, 대학 6년(예과 2년, 학부 4년)으로 한국인의 일본인 학교로의 진학이 어렵게 학제를 구성했다. 이는 한국인들의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3.1운동 이후 일제 정책변화도 개교에 영향
일제의 초기 식민지 강압 정책이 1919년 3.1운동이라는 전국에 걸친 우리 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뒷히 게 되자 일제는 무력 탄압만으로는 한민족을 억압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통치방향을 소위 무단 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되며, 교육에서도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공포를 통 해 종전의 교육령을 개정하였다. 전주고보 개교 무렵인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교가 잇달 아 개교한 것도 이같은 일제의 체제 변환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일제는 2차 교육렁 공포에 앞서 1920년 11월 조선교육령 일부를 개정하여 종전 4년제였던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6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보통학교 교과목에 새로 일본 역사와 지리를 첨가하 고 이과 도서 및 체로를 필수과목으로 했다. 또한 고등보통학교에 2개년 이내의 보습과를 두도록 하고 교과과정을 고처 일본의 소학교, 중학교와 비슷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 역시 교육적 차별 대우에 대한 피식민지 한국인들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22년 2월 4일 개정 공포된 2차 조선교육령은 한.일 양국의 동일 교육 주의를 채택하고, 초등교육에서 전문교육에 이르기까지 수업연한과 그 정도를 높였으며, 한국인에게도 사범학교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근 2차 조선교육령은 종래 주년이었던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고등보통학교의 경우에 본 취지로 삼고 있다. 도 수업연한을 종래 4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교과목은 일본의 중학교에 준하여 외국어를 추가하고. 종래의 이과를 박물, 물리, 화학으로 나누었고, 실업 및 법제경제는 실업, 법제, 경 제로 고치고, 습자, 수공을 삭제했다. 그리고 한국어가 추가된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개정된 교육령의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에 따른 규정을 신령 5년제라 하여 기존 구령 4년제에 의해 입학한 학생들에게 검정시험의 형식으로 신령 5년제 상당 학년 1품 편입을 시키고, 일부 4년제 합 격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도록 했다. 같은 해 입학하였더라도 구령과 신령에 따라 졸업연도가 달라진 것이다.
개교 초기 이같은 교육령 개정에 따라 전주고보의 1919년 첫 입학생 가운데 구령에 따라 4년 수업연한을 마친 학생 26명은 1923 3월 22일 구령 제 1회(4년제)로 첫 졸업생 이 됐으며, 나머지 학생 24명은 신령에 따라 수업연한을 1년 추가 연장한 뒤 1924년 3월 10일 신령 제1회로 졸업했다. 구령에 따른 1920년 입학생 17명도 4년 수업연한을 마치고 1924년 3월 10일 구령 제 2회로 졸업을 했고, 나머지 16명도 1925년 3월에 구령 제3회 로 졸업을 하면서 구령 적용 졸업생의 마지 막 횟수가 됐다. 이후 입학생들은 신령에 따라 수업연한 5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동맹휴학
사건전개
전주고등학교는 개교 당시 조선교육령에 의해 한국인에게만 입학자격을 준 4년제 한국인 학교였으나, 1922년 신 교육령에 의해 일본인도 입학 가능한 5년제 한일 공학 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때 전환기에 처한 재학생들은 시험을 거치고, 5년제 고등보통학교의 상당학년에 편입됐으며, 일본학생들과 갈등을 겪는등 문제가 생겼다,
4년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던 학생들은 일제식 교육이 불만스러운데다, 수학 연한이 연장되는 신학제를 마땅치 않게 여겼으며, 검정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하는 부담마저 안게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쌓인 불만이 터져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벌이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3·1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탄압으로 좋지 않던 분위기에, 일인 교사들은 한인학생들이 한국어를 쓰면 그 벌로 변소 청소를 시키는등, 이른바 당번청소를 시켰다, 학생들은 이러한 처사가 "한국인의 천부적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것이며, 교원 조직도 불만스러우니 무자격 교사를 유자격자로 교체해 줄것과 모든 시설을 학생 편의 의주로 개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내면적으로는 일제와 일본인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유였다, 동맹휴학의 주역들은 전주시 교동 낙수동골에서 희동하여 기념사진을 찍은뒤, 맹휴를 결의하여 결행했다, [2]
이 동맹휴학에는 전교생이 참여했지만, 주동은 3학년이었다, 이는 4,5학년 학생들의 진학과 취직에 지장이 없도록 3학년 학생들이 주모를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로써 3학년 생들은 무더기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일부 학생들은 명퇴학[3]이 됐고, 다른 일부는 자원퇴학[4]으로 처리되었다, 이 자원퇴학은 표면적으로만 자신이 원한것으로 가장됐을뿐, 실제로는 일제와 학교당국이 갖은 수단과 압력으로 학생 스스로 학업을 포기토록한 악랄하고 비열한 경우였다,
영향
전주고등보통학교 최초의 동맹휴학은 지역사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대상이 됐다,
일본인 교장 추방사건
1926년, 한국인 학생을 차별하는 등의 행패를 부렸던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을 학생들이 손을모아 추방한 사건. 전주고보(현 전주고)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전국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전주고보 동맹휴학이 발생한지 2년만에 또 다시 전주고보에서 항일 동맹 휴학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신임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은 평소 한인학생과 일인학생(전체 학생의 약 10%)을 차별대우하고 '한인은 불결한 저질민족'이라는 등의 망언을 하는 등 학생들에게 불쾌한 충격을 주고 민족적 감정을 촉발시켰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걸핏하면 폐교하겠다는 교장은 학교를 폐교하러 온 사람이지 우리의 교육을 담당하러 온 사람이 아니니 그런 교장은 추방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판단, 나카타 도미사쿠 교장의 추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추방 사건의 시작을 알린건 시한부 맹휴였다. 3학년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50여 명의 이름으로 5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6월 2일부터 4일까지 시한부 맹휴에 들어갔다. 학교 당국자들의 답변을 들은 뒤 추후 태도를 결정하자는 학생들의 뜻이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학생들의 교장 및 일본 교원 배척 요구를 무시하지 말 것
② 기숙사를 철시할 것
③ 유도, 검도를 가르칠 것
위의 입장을 밝힌 학생들은 이 문제를 학부형들에게 일임하고 일단 학생 본연으로 돌아가 6월 5일부터 등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장은 학생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곤 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맹휴에 대한 소감을 차례로 말하게 하여 맹휴 당위론을 주장한 학생을 퇴학처분했으며, 한민족에 대한 막말과 멸시 언행을 더욱 심하게 했다. 이에 격양된 학생들은 도미사쿠 교장을 교문 밖으로 강제 추방할 것을 최후 결심하고 2학년 학생들도 가담시키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전화선을 미리 끊어둘 절단반, 운동장 주변 경비반, 교직원 자전거 튜브 바람 빼기반, 숙직실 경비반과 독려반을 미리 편성하고 맡은 부서와 임무를 결정했다.
1926년 7월 1일, 마침내 결단의 날이 찾아왔다. 아침 8시 5분 타종을 신호로 전교생은 우천체조장에 예정대로 집결하였다. 당시 강당이 없던 까닭에 비오는 날 조회,훈화,체조 등을 하는 곳을 우천체조장이라고 하였다. 행동대원 3학년 이문기, 변영진, 임걸영, 유갑현, 송병채, 김학우, 공점권, 유순도 동문과 2학년 전석권, 김부영, 유훈석 등 10여명은 교장실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교장의 팔 다리를 네 명이 붙들고 이문기는 엉덩이를 쳐들어 올려 합세해서 130m 가량 떨어져 있는 교문까지 끌어낸 뒤 "나가 버리라"며 추방했다.
나가타 교장은 혼비백산 맨발인 채 전라북도 경찰국과 내무국 학무과로 뛰어가서 봉변의 전말을 하소연했고, 이같은 일대거사를 까마득히 모르다 뒤늦게 인지한 일제 경찰은 즉각 출동하여 전주고보 학생이라면 눈에 뜨이는 대로 무차별 포박 연행하였다. 경찰은 학생들을 줄줄이 엮어 사건 전말의 조사와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워낙 연행된 학생수가 많은지라 포승이 부족하여 전주농업학교(현 병무청자리)에서 모내기 못줄을 징발하여 포승 대신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일경은 주모·주동자 10여명을 색출하여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형을 과하고 기타 관련자는 '명 퇴학'또는 '자퇴' 형식으로 학교에서 쫒아냈으며 이때 고창고보, 서울의 중동고보 등으로 전입해 들어간 전주고보 학생도 상당했다.
교장 추방사건의 주동자는 옥구 출신 정태성(당시 3학년)으로 밝혀졌으며 1학년 학생 일부와 2,3학년 대부분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사건에 힘을 받은 1, 4, 5학년 중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은 학교당국과 일제에 항의하면서 2,3학년의 저항에 동조하여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7월 8일에 예정되어있던 전주시민대회가 취소되고 대신 전주청년회가 시민유지회를 열면서 '전주고보 교장추방' 사건은 전주 시민 전체의 관심사이자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제는 1926년 12월 25을 기해서 특사가 있었다고 하나, 이미 타교로 전학한 학생들은 복학을 거절하였고, 극히 제한된 학생에 한해 전주고보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실제로 돌아온 사례는 없었다는 점에서 전고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 당시 한 전주고보 졸업생이 졸업 후 취직이 되어 간 곳이 도내 장수군청이었는데 출근하고 보니 문제의 나가타 도미사쿠 전 교장이 장수군수로 재임하고 있기에 바로 사표를 쓰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일제는 지탄받는 인물들을 군수나 학교장 자리에 앉혀 놓고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해서 한국인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고 괴롭혔으나 전고인들은 어느 자리에서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1926년의 전주고보 맹휴와 교장 추방사건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는 구호를 제시하고 식민지 교육 체제 하수인인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과 일인 교사에 대한 추방운동을 강력히 추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마음 심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항일의식을 표출한 쾌사였다.
1930~ 1940년대
당시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1941년 전국에서 모인 많은 우수한 지원자중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영광의 합격자 명단을 우천체조장 벽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합격자는 3개반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학기는 1년을 3학기로 하고 학년초는 4월초순에 시작하였다. 1학기의 학업 성적에 따라 우수반을 뽑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들기 위해 학업에 정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우수반 제도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여 폐지되었다.그 당시 국방색의 교복을 입고 ‘데바리’ 모자를 쓴 우리 전주북중 학생들은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의 교훈 아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중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에 시간을 빼앗겨 4학년 때는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인 전형적인 일제 식민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전쟁중이라 사열을 받기 위한 군사훈련에는 노일전쟁 당시 사용했던 9·9식,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모의 공포탄을 쏘아 실전을 방불케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전주시내의 중등학교들은 남중학교에 집합하여 사열을 받고 수류탄 던지기, 포복, 총검술 등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습득하기 위한 국방경기(國防競技)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북도내의 중등학교를 남군(전주북중, 전주남중, 전주사범, 전주농업, 전주공업)과 북군(군산중, 군산상업, 이리농림, 이리공업)으로 나누어 총을 메고 야간행군한 다음날 아침 삼례들판에서 양군의 전투 대결훈련이 실시되었다. 치고 밀리는 그 당시 훈련상황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이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심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은 ‘근로 보국대(勤勞 報國 隊)’라는 것을 결성, 학생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이용했다. 덕진 야산 솔밭을 개간해 고구마 밭 일구기, 군산 불이(不二)학교에서 숙 박하면서 비행장 공습에 대비한 비행기 방공호 파기(이 당시 취침전 친구들과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실로 끌려가 몽 둥이질을 당하고 정학처분 당한 암울한 기억이 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모교의 뒷산을 허물어 기숙사를 지을 부지 조성 등 은 좋은 예들이다
묵음 시위
동맹휴학, 교장 축출 등 개교 이래 그치지 않고 이어진 일제에 대한 항거는 1040년대 들어 무언의 묵음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묵음 시위는 22회 동문들이 입학하던 1940년대부터 시작됐다, 행렬이나 대열의 뒤에서부터 음...하는 소리로 집단 시위를 하는것이다, 주변 교사가 다그치면 소리는 사라지지만 교사가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또 묵음이 나오는 등 신경질적이고 게릴라적인 시위방식으로 교사들 골머 리를 앓게했다. 당시 5학년 유승렬 동문은 남들이 다 조용한 데도 혼자서 음.:하다가 그만 들 통이 나서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줄 나기도 했다. 평소 운동장 조회 때 일본인 교사가 지휘대 단상에 올라 한국인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얕잡 아 혈뜬는 훈화를 하거나 행렬 중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음...음.." 하며 입을 다물고 여기저기서 콧속으로 소리를 내는 항변의 시간을 가졌다. 일본인 선생들은 아무리 단속하려고 해도 아예 허사였다. 왜냐면 "음...음."하는 소리는 입을 열지 않아도 가능하였고, 따라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내기 때문에 주동자를 색출해내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교사들이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면 그쪽에서는 소리가 멎고, 다른 쪽에서 또 소 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면 또 다른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 등 숨바꼭질이 되풀이 됐다. 그 당시 이 "음..-음..." 소리는 전주북중에 다니는 학생이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신호였다. 즉 인기 없고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일본인 교사에 대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요,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욕구 불만의 표시였다.
1950년대
제 1장
제 2장
제 3장
제 1절 도전과 응전 - 6.25와 전고
- 전북 학도병, 전국 최다 희생
전쟁 회오리 바람 속에서 9·28 서울 수복 후 본교는 10월 4일 다시 문을 열고 적은 수 학생으로나마 수업을 재개했다. 학교 교사(校舍)는 처음엔 제 11사단이 사단본부로 쓰기 위하여 징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제 8 사단 본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북중학교는 당시 인근 전주중학교(현 제일고등학교)의 교 사(校舍)를 빌어서 수업을 실시했다. 1951년 5월 19일에 제 8 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본교생들은 약 11개 월만인 5월 20일 그리던 교사(校舍)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대부분 학교에 복귀했으나 군데군데 빈 책상이 많았다. 6·25 전쟁 직후 붓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간 본교 총 400여명 중 숨진 학생들이었다. 전선에서 조국 수호 신이 된 전국의 중·고생 전몰학도 수는 총 1,394명이다. 이중 전라북도가 396명으로 전국 최다희생이며, 그중에서도 본교생은 48인(교사 포함)이나 되는 아픔을 겪었다. 시·도별 전몰학도 수는 이렇다.
제 2절 전쟁의 광풍
전쟁은 초반부터 맹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전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출처불명 소문만 난무한 상 황에서 학생들은 자원해서, 또는 정부 입대 소집에 응해 전장에 나갔다. 6·25 발발 직후 신태영 소장이 호남 위수사령관으로 부임, 국군과 경찰을 장악하고 신병을 모집했다. 신태영 사령관과 육군보병학교 교장 민기식 대령이 전주 북중 강당에 와 학도병 지원을 격려했다. 당시 북중학교는 7월4일부터 임시 휴교에 들어갔고 전북도청은 7월18일 해산돼 부산으로 향했다. 이같은 무 정부, 무학업의 급박한 와중에서 전주 일대의 18세 이상 입대 학도57)들은 전북중학 교정에 일차 집결, 7 월13일 전주지역 제 1,2,3,4기 학도병 장행회(壯行會)58)를 가진 다음 전북 각처에서 온 학도병들과 이리(= 현재 익산)에서 만나 순천을 거쳐 경상도 대구, 포항 등지로 가 초스피드 집중 훈련과 빈약한 장비로 불 과 한달 이내 실전에 투입됐다. 대부분 소총 분해 조립만 배우고 몇 차례 실전 사격 후 훈련된 적군에 맞 서는 식이었다. 군용 헬멧은 물론 군화, 군복도 지급될 처지가 아니어서 대부분 평상복과 운동화 차림으 로 총을 잡은 이들은 그야말로 육탄(肉彈) 그 자체였다. 군번은 받았으나 기록이 남지 않아 대부분 ‘군번 없는 병사’가 되고 말았다. 전종환(28회·전 군산시장) 동문은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은 누구의 가슴에나 피멍으로 남았다. 학도병 학생도, 의용군 학생도, 숨어버린 학생도 모두 10대 학우들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북측 의용군으로 간 학우는 물론 빨치산 체포 후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한 동문들도 있다. 이들은 아예 역사현장에서 잊혀져버렸다. 전쟁은 동시대 누구에게나 미친 바람, 광풍이 었다. 9·28 수복 후 이듬해 엄동에 1·4 후퇴를 하는 등 장기간 시달린 중부권 학교들과 달리 전북에는 그 바람이 머문 기간이 약간 짧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디서건 급우 친지를 잃은 피눈 물 나는 절규는 마찬가지였다.
제 3절 충혼비 건립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자 본교에서도 적기(赤旗)가 내려졌다. 본교가 휴교 에 들어간 7월4일 후 약 3개월만이었다. 학도병으로 출전했던 400여 학생들이 드문드문 돌아오고 10월 3 일엔 임시학교 사무소가 유청 교장댁에 개설됐으며 이튿날인 4일 복교를 선언했다. 10월 21일엔 휴교 후 첫 직원회의를 풍남동 전주여중에서 개최했다. 본교는 국군 11사단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교와 함께 전장에서 스러진 전몰(戰歿) 꽃봉오리와 교직원들을 기리는 운동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북중·전고인 모두의 가슴에서 용솟음 쳐 터져 나왔다. 전몰 학도병과 순직 교직원의 위국단충(爲國 丹忠)을 기리는 충혼비(忠魂碑)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인공(人共) 치하에서 여러 차례 사경을 당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피 흘리는 제자들 생각에 끝내 지조를 지켰던 유청(柳靑) 교장의 의지는 한층 각별했다. 모교 후배이자 어린 제자들의 입대 상황에서 ‘가라, 말라’ 말도 못하고 차마 그들을 떠나보낸 스승의 심정은 언설로 이루 담기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들 모두의 뜻을 모은 충혼비가 1951년 9월 28일, 9·28 수복 1주년을 맞아 제막됐다. 정면(동 쪽)에 이승만(李承晩) 당시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 깊게 새겼고 후면(서쪽)에는 유청 교장이 쓴 비문이 새겨졌다. 전면 하단에는 당시 본교에서 국어과 교사이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시를 새겼다.
제 4절
제 5절 6.25 참전 전주북중, 전주고등학교 학생 명단
대한민국 육군은 6·25 발발 43주년을 맞아 지난 2013년 6월12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1950년 6월 전 주북중과 전주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동문 총 145명에게 ‘전주고등학교 6·25 참전용사 감 사패’를 전달했다. 이 패는 “위국헌신의 정신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눈부신 선 진 조국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참전 학생들에 게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76) 정부로부터 6·25 참전이 인정돼 감사패를 받은 동문은 다음과 같다.
제 6절
제 7절
제 8절
1960~70년대
서울대 최다 합격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주고의 입시 능력은 1970년대 들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1978년 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전주고 졸업생(55회)들은 서울대 137명을 비롯해 고려대 27명, 연세대 20명, 전북대 290명을 합격시킴으로써, 전국 유수의 명문을 따돌리고 전국 1위의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해도 재학생 합격자가 88명이나 돼 명문 중 명문임을 입증했다,
1979년 입시에서도 전주고의 영광은 이어졌다, 1979년 전주고 졸업생(56회)들은 서울대 160명을 비롯하여 고려대 40명, 연세대 27명, 전북대에 312명이 합격하여 다시 한번 전국1위 학교임을 과시했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한 재학생만 11명이나 되어 전교생 7명 중 1명이상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1990년대
2000년대
동아리 활동
1990년대의 동아리 활동은 기촌의 동아리들은 물론 신생 동아리들이 우후축순처럼 생겨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1997년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라매불 동아리 회원 중 3명이 물속에 젊음을 묻어야 했던 의사자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앞에서(1980년대의 전고) 소개되었던 동아리들 외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동아리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7].
한누리
우리의 것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아쉬위하며, 북고풍을 주장하는 친구들이 만든 풍물패. 그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한누리는 풍물로써 하나가 되는 동아리이다. 선후비나 동기들 잔의 우예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과 하나로 어우러져 디불어 사는 세상을 반들고자 한다. 또, 풍물, 민요, 탈춤 등을 익 허는데, 그치지 않고 주위에 우리 것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솔
차를 뜻하는 다와 늘 푸름을 뜻하는 소나무의 솔을 합하여 만든 합성어인 동시에 하나의 모임명이다. 이 다솔 모임은 말 그대로 싱싱한 젊은이들이 푸른 차를 마시며, 젊음을 애기하자는 것 이다. 이 모임은 아주 생기발랄하고 화기애애한 가족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미네르바
"미래가 원하는 성실하고 정직한 젊은이가 되자." 는 다짐 아래 지난 1964년 7명의 학생이 모여 만든 영어 회화 모임. '미네르바'란 사전에서 "지혜와 무용의 여신"이란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동아리 는 단순히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의 영화 회화 모임에 그치지 않고, 체육대회, MT, 대면식 등을 통해 선 후배 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고 자연의 싱그러움과 푸르름을 맛보면서 올바른 젊은이가 되기 위한 하 나의 사회화 과정을 터득해 간다.
빛과 소금
빛과 소금이라는 이름에서와 같이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하는 일꾼들이 되고자 하여 10년 전에 만들어진 종교모임. 모임의 활동은 크계 예배모임과 기도모임으로 나뉘어져 있다. 예배모원은. 일 점심시간에 이루어지는데, 크리스찬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자신을 보며 반성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매월 들째, 넷째 주에는 기도 모임을 가져 회원 간의 개인적인 문제와 공통된 문제에 대해 함께 기도하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한다.
부름
1970년대 초에 결성된 문학 동아리. 부름이라는 이름은 '노래를 하다: 말이나 글로 남을 오라고 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부르다'의 명사형이다, 다독, 다작, 다상량을 기본으로 삼는 부름은 미리 정해진 문학 작품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해 이해가 되치 않는 부분이나 의문점을 수업 시간에 제시하고, 토의 사항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설정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여 여러 의견 속에서 자사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는 방식으로 수업을 친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는 능력은 물론 논리적 사고와 비판정신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덕유심
유도는 매개체를 통해 선후배간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하 이내당 고 예절을 배운으로써, 한번뿐인 고교 생활을 좀더 재미있고 유익 >iva| 하게 보내기 위해 결성된 동아리. 공격과 방어의 연습을 통하여 신 체를 단련하고, 정신력, 지구력, 침착성 등을 길러 장차 사회에 유용 한 사람이 되고, 강인한 체력 바탕으로 학습 의욕을 고취시켜 유능 한 전고인이 되는데 목표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겟세마네
학생들에 대한 전도와 기독교인의 신앙심 고취를 위해 설립된 기독교단체로서 정식명칭은 '전주고등 교 켓세마네 기독선교 중창단. 매주 금요일 저녁 시간에 교내 음악실에서 찬양 예배를 가지며, 사내코 회의 찬양 드립찬조, 찬양 집회의 인도 및 로방 찬양과 정기 찬양드림 등의 활동을 한다.
GENIUS
1978년에 결성된 전주고등학교의 농구 동아리다, 청소년층의 인기스포츠인 농구를 통해 농구 실력 향상과 체력 중진은 물론 선후배와 교우간의 친목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오래된 역사 만큼 농구 실력도 뛰어나 타 고등학교들과의 시합에서 최다우승과 준우승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4강안에 못 든 적이 한 번도 없는 좋은 성적을 자랑으로 여긴다
FRIDAY
지난 1960년대 전주 예수병원의 원장 내외가 미국인이었는데 그 미국인 부인에게 전고생들이 회화를 배우게 되었다. 이 모임이 금요일에 이루어졌다고 해서 동아리명을 FRIDAY라 했다. FRIDAY는 수업지를 통해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체육대회를 통해 체력을 보강시키는 등 문무를 겸비하게 하고., MT와 총회를 통해 선후배간 동기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있다.
T.A.P
1985년 창단된 농구 동아리. T.A.P는 Ten Ablaze Players의 약자. 주요 활동목표는 심신을 단련해서 안으로는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으로 성적향상에 이바지하고,밖으로는 일년에두 번 방학 때마다개최되는 농구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냄으로써 전주고의 위상을 떨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매일 점심시간과 주말시간을 쪼개어 연습을 하고 종종 타 학교와 친선경기도 가진다.
쿠오바디스
쿠오다비스란 희랍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뜻, 일주일에 3번 씩 모임을 가지며, 또한 한달에 한번씩은 토요일 방과후 2시간 정도의 모임을 가져 성가도 배우고 종교사 연구도 하며, 신앙심을 키워 나간다, 1997년에 창립됐다, 양로원 고아원 등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며, 회원 모두가 단합된 신앙심으로 모범 동아리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Unfixed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여 1997년 컴퓨터를 사랑하는 전고의 학생들이 모여 만튼 신생 동아리, 고정된 사고와 관념에서 탈피하자는 의미에서 동아리 을 Unfixed라 있다 컴퓨터실에 있는 30대의 페티엄급 컴퓨터를 활용해 점심시간 컴퓨터 교육 컴퓨터 통신을 통한 전고 홍보, 컴퓨터를 통한 전고인의 친선도 모 활동을 하며, 21세기 정보 통신시대를 이끌어갈 주역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송원
학교의 전통과 더불어 전고의 긴 역사와 함께 해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기 위해 창립된 동아리로 교지를 통한 전주고둥 교지의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조직체계를 바탕으 학교 홍보, 교지를 통한 전고인의 친선 도모를 목표로 활동한다. 각종 설문조사, 취재, 여러 행사의 사진촬영, 대내외적 백일장 대회 참가 및 투고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정한사
우리 역사 탐구를 통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올바른 주체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1996년예 창립된 동 아리,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하여 문화유산에 대한 탐방과 향토자료 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정한사'란 바른 한국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3H
3H는 HOPE(희망), HEALTH(건강), HAPPINESS(행복)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1950년 전주고 30회부터 그 모임을 결성, 29대(전주고 58회)까지 활발히 활동하다가, 이후 명맥이 이어지지 못했으나 90년대에 재 창립됐다. 협심상조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동고동락으로 친목을 도모하며, 적극 편달로 연속부절의 향상을 도모함을 강령으로 삼고 있다. 백제문화 유산의 답사 및 연구, 토론회, 재학생회원 수련회 활동, 연구물 및 책자 발간 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PIONEER
영어 회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고, 사회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기량을 기르며. 선후배간의 돈독 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1971년에 만들어진 동아리. 영어 회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나, 보다 홉룡한 인격 형성과 학생들의 실력향상을 위해 회보 및 회지 발간, 창작 발표회 및 토론회, 수업지 발간 등이 주요 활동 내용이다.
전검회
한국 전통무예의 하나인 검도를 통하여 심신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함은 물론 옛것을 숭상하고 계승 발전시키며,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선, 후배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여, 전주고등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1998년 창립된 동아리
검도의 기본자세를 수련하고, 회워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올바른 예절 및 심신 수련을 활동 목표로 삼는다
규칙을 준수하는 모법생으로 국가관이 투철하고, 예의바른 학생이면 회원자격이 있다. 검도의 기본자세를 수련하고, 회워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울바른 예절 및 심신 수련을 활동 목표로 삼는다
ELF& NIX
선, 후배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인맥을 넓히고, 문학활동을 통해 정서순화 및 논술 대비를 꾀하는 신생 동아리로서 1997년에 창립되었다. 매주 월요일 학습관련 모임은 문학작품 감독과 독후감 발표, 동아리 지 만들기 등으로 이루어지며, 주 금요일 친복관련모임은 토론, 레크레이션 활동, 봉사활동 등으로 이루어진다. 추구하는 학생상은 순수한 학생, 이타적인 학생.
Wanna be pop Mania
진정한 pop mania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모임. pop 음악을 들으면서 정서적 순화를 꾀하는 동시에, 영어학습능력 신장과 외국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무조건 유행만을 쫓아가는 대중음악을 거부하고 월 4편의 음악 감상문과 음악 평론을 제출, 우수작은 일정양식에 보관한다. 매월 2장의 CD를 공동 구입하여 회원들에게 대여해 주기도 한다.
ELF
꼭 짜여진 일정 속에서 약해져가는 체력과 환기를 되찾기 위하여 자투리시간을 최대한 활용, 음악과 댄싱을 즐기는 동아리.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연습을 통해 서로의 소질을 개발해 주고 선후배간의 친목도 다진다. 단합대회, MT, 각종 대회 참가를 통해 실력을 다지는데 1998년에는 JTV 청소년 뮤직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Spotive
간접적 사회 체험과 봉사활동을 통해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배우고 선, 후배간의 친목을 도모하면 서 보다 나은 학교 활동을 하기 위해 창립된 동아리. 추구하는 학생상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예절 바르며, 사나이다운 의리가 있는 학생이며, 공공기관은 물론 고아원, 양로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방학 중에는 문학기행 및 도내 문화재 탐방을 통해 애향심을 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