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고 100년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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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
== 1950년대 ==
===제 1장===
===.===
===제 2장===
===.===
===제 3장===
===.===
====제 1절 도전과 응전 - 6.25와 전고====
====도전과 응전 - 6.25와 전고====
* 전북 학도병, 전국 최다 희생
* 전북 학도병, 전국 최다 희생
전쟁 회오리 바람 속에서 9·28 서울 수복 후 본교는 10월 4일 다시 문을 열고 적은 수 학생으로나마  
전쟁 회오리 바람 속에서 9·28 서울 수복 후 본교는 10월 4일 다시 문을 열고 적은 수 학생으로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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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본교생은 48인(교사 포함)이나 되는 아픔을 겪었다. 시·도별 전몰학도 수는 이렇다.  
그중에서도 본교생은 48인(교사 포함)이나 되는 아픔을 겪었다. 시·도별 전몰학도 수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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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절 전쟁의 광풍====
====전쟁의 광풍====
전쟁은 초반부터 맹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전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출처불명 소문만 난무한 상
전쟁은 초반부터 맹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전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출처불명 소문만 난무한 상
황에서 학생들은 자원해서, 또는 정부 입대 소집에 응해 전장에 나갔다.  
황에서 학생들은 자원해서, 또는 정부 입대 소집에 응해 전장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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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나는 절규는 마찬가지였다.
물 나는 절규는 마찬가지였다.


====제 3절 충혼비 건립====
====충혼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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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자 본교에서도 적기(赤旗)가 내려졌다. 본교가 휴교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자 본교에서도 적기(赤旗)가 내려졌다. 본교가 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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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에 이승만(李承晩) 당시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 깊게 새겼고 후면(서쪽)에는 유청 교장이 쓴  
쪽)에 이승만(李承晩) 당시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 깊게 새겼고 후면(서쪽)에는 유청 교장이 쓴  
비문이 새겨졌다. 전면 하단에는 당시 본교에서 국어과 교사이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시를 새겼다.
비문이 새겨졌다. 전면 하단에는 당시 본교에서 국어과 교사이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시를 새겼다.
====제 4절====
====.====
====제 5절 6.25 참전 전주북중, 전주고등학교 학생 명단 ====  
====6.25 참전 전주북중, 전주고등학교 학생 명단 ====  
대한민국 육군은 6·25 발발 43주년을 맞아 지난 2013년 6월12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1950년 6월 전
대한민국 육군은 6·25 발발 43주년을 맞아 지난 2013년 6월12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1950년 6월 전
주북중과 전주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동문 총 145명에게 ‘전주고등학교 6·25 참전용사 감
주북중과 전주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동문 총 145명에게 ‘전주고등학교 6·25 참전용사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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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절====
====.====
====제 7절====
====.====
====제 8절====
====.====
===4장 교가,교훈 제정, 장학회 설립===
===교가,교훈 제정, 장학회 설립===
* 교가
* 교가
중·고 분리 학제 개편으로 인해 1951년 9월 1일 전주고등학교가 새로 개교하자 기존 북중과 다른 새  
중·고 분리 학제 개편으로 인해 1951년 9월 1일 전주고등학교가 새로 개교하자 기존 북중과 다른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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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70년대 ==
== 1960~70년대 ==
===1960년대의 전고 북중===
===1960년대의 전고 북중===
====제 1절 시대의 서막, 4,19혁명과 전고생 데모====
====시대의 서막, 4,19혁명과 전고생 데모====
=====1. ‘3·15’ 부정선거와 마산(馬山) 의거 =====
=====‘3·15’ 부정선거와 마산(馬山) 의거 =====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여파는 1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소요에 휘말리게 만들고 있었다. 1개월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소요에 이어 3월11일 마산에서 대규모 학생, 시민의 데모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여파는 남원출신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당국의 미온적인 처사가 더욱 더 불을 지른 결과를 가져왔다. 연이어 3월 18일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학생데모는 마산 소요사건을 처리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정국을 다시 극도의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4월 18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다가 해산,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 데모대가 을지로 4가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10여명이 숨지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여파는 1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소요에 휘말리게 만들고 있었다. 1개월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소요에 이어 3월11일 마산에서 대규모 학생, 시민의 데모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여파는 남원출신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당국의 미온적인 처사가 더욱 더 불을 지른 결과를 가져왔다. 연이어 3월 18일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학생데모는 마산 소요사건을 처리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정국을 다시 극도의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4월 18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다가 해산,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 데모대가 을지로 4가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10여명이 숨지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2. 서울시내 대학생 데모 =====
=====2. 서울시내 대학생 데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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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결의로 학생들은 학교 모금과 가두모금을 시작했으며 적지 않은 액수가 모였다. 4월 24일 오후 4시에는 당시 전주고 2학년(39회) 박천규(朴天圭), 문현호(文賢豪), 홍영재, 박풍창(朴豊昌) 등 4명이 1만 3천환을 신문사에 기탁했고 1학년(40회) 유정상(柳征相), 윤성섭(尹性燮)(재미), 최효진(崔孝鎭)(재미), 육완태(陸完泰·전북일보), 유종상(柳宗相·외항선 항해사), 이진흥(在美), 소팔낭(蘇八郞)(건축업) 등도 자진해서 모금반을 조직, 모금한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20일부터 시작된 학생 데모는 24일 위령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됐다. 전주고 재학생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질서유지와 희생 학생을 위한 모금, 헌혈 등에 앞장 서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일 내려진 휴교 조치 후 26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함으로써 27일에 전주시내 중학교가, 29일엔 고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학교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다음은 전대열 동문이 회고하는 4·19 혁명에서 전주고의 주도적 역할이다
이때 결의로 학생들은 학교 모금과 가두모금을 시작했으며 적지 않은 액수가 모였다. 4월 24일 오후 4시에는 당시 전주고 2학년(39회) 박천규(朴天圭), 문현호(文賢豪), 홍영재, 박풍창(朴豊昌) 등 4명이 1만 3천환을 신문사에 기탁했고 1학년(40회) 유정상(柳征相), 윤성섭(尹性燮)(재미), 최효진(崔孝鎭)(재미), 육완태(陸完泰·전북일보), 유종상(柳宗相·외항선 항해사), 이진흥(在美), 소팔낭(蘇八郞)(건축업) 등도 자진해서 모금반을 조직, 모금한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20일부터 시작된 학생 데모는 24일 위령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됐다. 전주고 재학생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질서유지와 희생 학생을 위한 모금, 헌혈 등에 앞장 서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일 내려진 휴교 조치 후 26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함으로써 27일에 전주시내 중학교가, 29일엔 고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학교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다음은 전대열 동문이 회고하는 4·19 혁명에서 전주고의 주도적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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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재 사건===
====제 3장 전고 북중 대화재===
====제 1절 반세기의 요람이 잿더미로====
1969년 가을 전고·북중은 개교 50년만에 최대 참사를 맞았다. 10월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전고와 북중 교사에 연속적인 대화재가 발생, 교실 태반을 전소시킨 것이다. 이 화재로 전고 교실 23칸, 북중 교실 24칸이 불타버려 3천여 북중, 전고인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고 망연자실해졌다. 첫날(10월27일) 목조로 된 전고가 불탔고 이튿날 같은 캠퍼스 안의 벽돌조 건물 북중(10월28일)이 또 불탔다. 이로 인한 교사, 학생, 동문의 경악과 슬픔은 말할 나위 없고 지역 중심에서 전북을 이끌어온 명문이 삽시간에 불탔다는 점에서 지역사회 전체가 술렁댈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 재학생으로 밝혀진 일이다. 나중에 조사결과 심신미약자로 나타났지만, 재학생이 모교에 방화를 해서 그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고, 북중 역사상 가장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놀라운 이 재화에 당시 교사, 학생과 동문의 충격, 슬픔, 흥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세간의 충격도 매우 컸다. 불타버린 전고 건물(목조)은 낡고 허술한 교사였지만 거기에는 전고의 전통과 혼이 보물처럼 담겼으며, 일제하 압제와 항일 등 50여 년을 견딘 온갖 풍상 어린 역사적 사적이었다.


====서울대 최다 합격====
북중 건물(벽돌 연와조)은 광복 직후 당시 김가전 교장과 교사들 지휘 하에 학생들이 손수 벽돌을 찍고 완주군 소양 등지에서 손수 재목을 날라다 지은 건물이었으므로 그 애착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48년 완공됐으며 건물 정면 화강석 판에
태극 마크와 함께 한자로 ‘獨立記念’(독립기념)이 음각된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화재 이틀간 화마의 불길은 전주 시내 먼 데서도 알아볼 정도로 훤히 타올랐다. 날벼락같은 재난을 눈앞에서 겪은 신강호 교장이 현장에서 졸도 했으며 동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화재현장에 들어가 의자 한 개라도 건지려 동분서주했다. 전고·북중을 20년째 지키던 정문 경비직(당시엔 ‘순시’) 홍성신136) 씨는 화재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전주고 2학년이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진입했던 조순래 동문(48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0월 27일은 선배들 입시가 얼마 안 남은데다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도서관이 꽉 찼습니다. 해 진 지 얼
마 안 된 초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북중 후배들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도서관으로 피난오듯 몰려오는 거
예요. 학교에 불이 났다고요.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우르르 전고 교
사로 달려갔지요. 이미 불은 활활 붙었는데 1층 서무과로 달려가 캐비넷, 금고, 타자기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꺼내서 운동장에 던지고 또 들어가고 했어요. 학생 수 십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리창 깨진 게 널렸
던지 그때 새끼 손가락 찢긴 상처가 50년이 지난 아직도 있어요.
제 집은 전고 바로 옆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8일은 집에 있다 불난 걸 봤어요. 야밤에 화광이 충천
해서 또 뛰쳐나갔습니다. 안타깝게 발 구르고 혹시라도 화재현장에 도난이 있을까봐 밤새 학우들과 모닥
불 피워놓고 지켰습니다. 화재 후 연기 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
습니다.”
 
화재 소식에 전주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동문들은 한결같이 제일성으로 “학적부를 건졌냐”며 물
었다. 다행히 재학생들 활약으로 북중, 전고 졸업생 명단과 생활기록부 등이 온전하다는 소식에 동문은
한줄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난날 김가전 교장이 “교장실이 비좁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
도로 교내에 즐비하던 수십년 동안의 각종 대회 우승컵과 우승기를 비롯해 학생문집, 교지, 옛 사진, 대
통령과 국회의장 휘호 등 수많은 기록물·기념물들이 화재와 함께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교사(校舍) 어느 구석에나 수많은 영재들이 거쳐 간 자취와 흔적이 있었으며 때 묻은 손길이 닿아 있
었다. 겨레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얼과 뜻이 담긴 곳이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제 2절 힘찬 재건 노력====
전북교육의 대표적 전당이고 요람인 북중, 전고 교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비통한
심정이야 비할 데가 없었다.
화재가 발생한 것은 마침 전고·북중 개교 50주년이 되던 해로서 반세기 역사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웅비의 날개를 펼치려던 시점이어서 한층 충격과 슬픔이 컸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교사와 학생, 동문들이 보여준 재기의 몸부림은 세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
다. 그들은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화재 사흘 후 10월30일부터 즉각 정상 수업을 실시했다. 체육관, 강
당, 도서관 신축 중인 건물 등에 얇은 베니어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설치하고 전주시내 각급 학교에서 급
히 보내준 책상과 의자를 배치해 차가운 늦가을 바람 속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와
슬기, 애교심과 학구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의 배움터가 재난에 처했을 때 젊은 학생들이 보여준 애교심은 실로 뜨거운 것이었다. 특히 화재
당시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화재 현장에 뛰어든 북중·전고인들의 용감성과 의
기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으며, 화재 직후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학업에 정진하는 태도는 오
히려 선배 동문에게 귀감이 됐다.
화재 직후부터 북중, 전고를 아끼고 안타까와하는 각계각층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연일 쏟아졌다.
학교 당국은 각계에서 보내준 격려문을 새로 설치된 대형 게시판에 가득 붙여놓아 이를 읽는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격려했다.
====제3절 전고·북중 화재 사건 경위(일간지 보도) ====
전고·북중 대화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 전북일보 등에 연일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첫날은 누전
으로 추정했으나 화재 즉시 한전의 단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이틀 화재가 나자 경찰은 방화로 보고 수
사에 총력, 대화재 며칠 후 범인을 특정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특히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에 재학중
이던 조 아무개 학생으로 밝혀져 동창회 및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의 충격과 긴박상을 생생하
게 전하기 위해 대화재 관련 수사 상황, 시민 표정, 범인체포 및 재판 등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들을 모아
전재한다. [[:File:스크린샷 2024-08-14 194136.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18.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34.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49.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303.png]]
====제4절 사과문, 호소문 ====
====제5절 전국에서 성원 답지, 의연금 기탁 명단====
====제6절 법원, 조 피고에 3년 선고====
전고·북중 화재의 증거보존신청에 따라 전주지법 손제희(孫濟喜) 판사는 11월 5일밤 9시부터 11시 50분까지 화재현장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조불원(趙不遠) 학생(가명·19)은 순순히 방화사실을 시인했고 방화 경위를 재연함으로써 조군이 방화범인 것으로 더욱 굳어졌다. 밤 9시부터 실시된 현장 검증에서 손 판사는 조군이 방화 직전 도서관에서 나갈 때 시간을 물은 학생들과 화재를 처음 목격한 숙직교사들, 조군이 ‘현상금을 타먹어라’고 말한 학생과의 대질심문 등도 청취했다.
 
조군은 처음 화재 얘기를 할 때 이제까지 경찰에서 진술한 ‘울적한 영웅심’과 ‘파괴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말 외에 ‘신축교사에 낡은 책상을 옮긴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불태워 버리고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새로운 동기를 밝혔다. 조군은 시종 여유있는 태도로 범행을 재연했는데 증인으로 나온 학생과 시간차 등이 대립될 때는 자신의 말을 내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조군은 5일밤의 현장검증에서 단독범행임도 시인했다. 조군은 그해 11월 7일 검찰에 송치되어 11월 24일에 전주지검 송두영 검사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27일에 선고공판이 있었고 전북일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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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는 이만용(李萬鎔) 박사(전주뇌병원장)와 김제권 광주뇌병원장이 조아무개 학생의 정신감정을 했다. 감정 결과 그는 심신미약자로 인정되었으나 시비선악(是非善惡)은 분별할 정도의 의식능력은 있으므로 책임은 면하지 못할 것으로 보아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아무개 학생은 3년 복역 후 출소하여 정상인으로 원만한 생활을 하며 생업에 전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 4장, 1970년대의
===서울대 최다 합격===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주고의 입시 능력은 1970년대 들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br>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주고의 입시 능력은 1970년대 들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br>



2024년 8월 14일 (수) 19:49 판

전주고 북중 100년사와
사진으로 보는 전주고·북중 100년사 책의 내용입니다

역대 교장

제1대 김용환, 제 2대 김가전 제3대 유청, 제4대 배운석, 제5대 김신직, 제6대 공원택, 제7대 이종표, 제8대 최도철, 제9대 신강호, 제 10대 최득엽, 제11대 김병문, 제12대 김순만, 제13대 유재신, 제14대 하재홍, 제15대 이기원, 제16대 김성하, 제17대 공귀섭, 제 18대 황기연, 제 19대 오근량, 제20대 지영호, 제21대 백창기, 제22대 이원택,제 23대 신정균, 제24대 박진홍, 제25대 김정기, 제26대 라구한

1910~1920년대

전주고등보통학교[1] 설립 과정

1919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앞서 도내에서 설립된 남자 인문 중등 교육기관은 1907년에 미국남장로선교회에 의해 개교한 전주신흥학교가 있었다. 1910년 공립학교로 설립된 전주 농림학교는 농업분야. 1916년에 설립된 전주 공업직업학교(현 전주공고)는 공업분야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같은상황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도내 30여개 공립보통학교에서 보통교육을 마친 자녀들의 중등교옥 수요에 부응하는 인문 중등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요구가 급속히 커지고 있었다.

제1절 사립으로 추진 후 관립 전환

1917년 12월 도, 부, 군 참사 및 실업가대회 개최를 계기로 이에 참석한 지역 유지들은 전주에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기로 의결했다. 이들은 또한 학교 설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집을 허가해 줄 것을 당국에 신청했다. 기부금은 토지 10결 이상 또는 이에 상당하는 자산을 가진 도내 유지인사 501명이 설립자가 되어 각출키로 했다. 개인당 기부액은 토지(자산) 10결 당 10원 씩을 표준으로 하고 매년 출자총액 약 1만 천원(12,977원)과 여기에 학생들의 수업료를 더해 학교 유지비에 충당키로 했다.

제2절 신입생 모집과 역사적 개교

개교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19년 2월 신입생 모집에 착수한 직후 기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모집에 별 영향은 없었으나 서울 각 관립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전주에서도 신학년도 시작 시점에 맞추려던 개교 일자는 불가피하게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교일자만 제외하고 다른 사항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1919년 3월 31일 칙령 제59호로 '고등보통학교 관제개정의 건이 발포되어 전주고등보통고등학교 작원 정원과 이날로부터 시행된다는 요지가 공시됐고 4월 1일엔 초대 교장으로 다카기 요시토 당시 경성중학교 교사가 취임했다. 이어 4월 19일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임시 사무소를 전주시내 중앙동 141번지의 전주학교조합 사무소(전 전북도청 구내, 구 비장청 현 복원 전라감영 자리)에 우선 개설하였다.

4월16일 전주제일보통학교(현 전주초등학교 자리)에서 신입생 입학시험을 치렀으며 5월28일 학칙 인가 신청에 이어 마침내 6월 16일 오전 10시 전북공회당 ,구 부립도서관 . 현 전라 일보 자리) 임시 교사에서 역사적인 개교식을 갖고 첫 수업을 시작했으니 현재까지 이날을 개교일로 기념 하고 있다. 첫 입학생은 96명(2학급)이었으며 이날 개교식엔 91명 출석, 5명 결석한 것으로 되어있다.

" 원래 학교 부지로 신청했던 전주군 이동면 (=현 노송동)의 교사 본관은 개교 2개월 전인 4월20일 이미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중 우천체조장(건평 250평) 등 일부를 본관에 앞서 먼저 준공시키고 같은 해 12월 27일 시내 임시 교실에서 이곳으로 학생들을 이전시켜 본격적인 수업을 계속했 다. 본관 등 나머지 교사와 직원관사 (경원동)도 곧 국비로 신축 낙성돼 전주 유일의 관립 고등보통학교로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전국 다섯 번째 관립 '제 5고보'의 자부심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는 약칭 '전주고보 또는 '제5고보라고 불리었다. 관립학교로는 전국에서 다섯 번 째로 개교했기 때문이다.

최초로 개교한 관립 '제1고보는 1900년 10월 문을 연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였다. 이어'제2고보' 평양고등보통학교(1909년, '평양고보'), '제3고보' 대구고등보통학교(1916년, 현 경북고)와 '계4고보 함함흥보고등통학교(1918년)가 속속 개교했으며 '제5고보'인 전주고보(1919년)가 뒤를 이었다.

남한으로만 따질 때 전주고보는 경기고, 경북고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 깊은 학교가 된다.

이들 5개 고등보통학교가 당시 전국의 5대 관립'이었으며 개교 순서에 따라 모표를 중심으로 모자에 두르는 선의 개수로 각각 학교를 구분했다. 경성고보가 모표 '高(고)자 주변에 가는 백선을 한 개, 평양 고보가 같은 '高' 자에 백선 두 개를 둘렸다. 이같은 순서에 따르면 '제5고보인 전주고보는 가는 백선을 다섯 개나 모자에 둘러야 했다. 하지만 백선 다섯 개를 두르기가 번거롭고 잘 보이지도 않아 다섯을 합 아예 굵은 '백선 테' 하나만 두르게 됐다.

1940년대 초반까지 '제5고보'는 한국 중.고등보통학교 중 최상위를 뜻하는 대명사였다. 당시 재학생들 은 "제1고보'(경성고보) 정도나 우리와 맞먹는다"고 자랑할 정도로 '제5고보' 명칭은 전주고보의 또 다른 자부심으로 사랑받았다.

제3절 개교 초기 조선교육령 공포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여 주권을 완전히 탈취한 뒤 식민통치 초기 교육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1911 년 이른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식민지에 대한 교육방침과 제도를 규정한 것으로 오로지 한 국민의 우민화와 교육통치에 그 목적을 뒷다. 모든 학제는 일본과 차등을 두었을 뿐 아니라 지 난날 대한제국 학제보다 오히려 후퇴시킨 것이었다.

전문 30조로 규정된 조선교육령은 제12조에서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 년으로 제한하였다. 동 13조에서는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이는 연령 12세 이상으로 수업연한 4 년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 내용은 일본인 학교와 대체로 같았으나 삭제가 일본인 학교와 차이가 있었다. 일본 인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4년, 대학 6년(예과 2년, 학부 4년)으로 한국인의 일본인 학교로의 진학이 어렵게 학제를 구성했다. 이는 한국인들의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3.1운동 이후 일제 정책변화도 개교에 영향

일제의 초기 식민지 강압 정책이 1919년 3.1운동이라는 전국에 걸친 우리 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뒷히 게 되자 일제는 무력 탄압만으로는 한민족을 억압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통치방향을 소위 무단 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되며, 교육에서도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공포를 통 해 종전의 교육령을 개정하였다. 전주고보 개교 무렵인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교가 잇달 아 개교한 것도 이같은 일제의 체제 변환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일제는 2차 교육렁 공포에 앞서 1920년 11월 조선교육령 일부를 개정하여 종전 4년제였던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6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보통학교 교과목에 새로 일본 역사와 지리를 첨가하 고 이과 도서 및 체로를 필수과목으로 했다. 또한 고등보통학교에 2개년 이내의 보습과를 두도록 하고 교과과정을 고처 일본의 소학교, 중학교와 비슷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 역시 교육적 차별 대우에 대한 피식민지 한국인들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22년 2월 4일 개정 공포된 2차 조선교육령은 한.일 양국의 동일 교육 주의를 채택하고, 초등교육에서 전문교육에 이르기까지 수업연한과 그 정도를 높였으며, 한국인에게도 사범학교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근 2차 조선교육령은 종래 주년이었던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고등보통학교의 경우에 본 취지로 삼고 있다. 도 수업연한을 종래 4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교과목은 일본의 중학교에 준하여 외국어를 추가하고. 종래의 이과를 박물, 물리, 화학으로 나누었고, 실업 및 법제경제는 실업, 법제, 경 제로 고치고, 습자, 수공을 삭제했다. 그리고 한국어가 추가된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개정된 교육령의 고등보통학교 수업연한에 따른 규정을 신령 5년제라 하여 기존 구령 4년제에 의해 입학한 학생들에게 검정시험의 형식으로 신령 5년제 상당 학년 1품 편입을 시키고, 일부 4년제 합 격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도록 했다. 같은 해 입학하였더라도 구령과 신령에 따라 졸업연도가 달라진 것이다.

개교 초기 이같은 교육령 개정에 따라 전주고보의 1919년 첫 입학생 가운데 구령에 따라 4년 수업연한을 마친 학생 26명은 1923 3월 22일 구령 제 1회(4년제)로 첫 졸업생 이 됐으며, 나머지 학생 24명은 신령에 따라 수업연한을 1년 추가 연장한 뒤 1924년 3월 10일 신령 제1회로 졸업했다. 구령에 따른 1920년 입학생 17명도 4년 수업연한을 마치고 1924년 3월 10일 구령 제 2회로 졸업을 했고, 나머지 16명도 1925년 3월에 구령 제3회 로 졸업을 하면서 구령 적용 졸업생의 마지 막 횟수가 됐다. 이후 입학생들은 신령에 따라 수업연한 5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동맹휴학

사건전개

전주고등학교는 개교 당시 조선교육령에 의해 한국인에게만 입학자격을 준 4년제 한국인 학교였으나, 1922년 신 교육령에 의해 일본인도 입학 가능한 5년제 한일 공학 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때 전환기에 처한 재학생들은 시험을 거치고, 5년제 고등보통학교의 상당학년에 편입됐으며, 일본학생들과 갈등을 겪는등 문제가 생겼다,

4년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던 학생들은 일제식 교육이 불만스러운데다, 수학 연한이 연장되는 신학제를 마땅치 않게 여겼으며, 검정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하는 부담마저 안게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쌓인 불만이 터져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벌이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3·1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탄압으로 좋지 않던 분위기에, 일인 교사들은 한인학생들이 한국어를 쓰면 그 벌로 변소 청소를 시키는등, 이른바 당번청소를 시켰다, 학생들은 이러한 처사가 "한국인의 천부적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것이며, 교원 조직도 불만스러우니 무자격 교사를 유자격자로 교체해 줄것과 모든 시설을 학생 편의 의주로 개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내면적으로는 일제와 일본인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유였다, 동맹휴학의 주역들은 전주시 교동 낙수동골에서 희동하여 기념사진을 찍은뒤, 맹휴를 결의하여 결행했다, [2]

이 동맹휴학에는 전교생이 참여했지만, 주동은 3학년이었다, 이는 4,5학년 학생들의 진학과 취직에 지장이 없도록 3학년 학생들이 주모를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로써 3학년 생들은 무더기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일부 학생들은 명퇴학[3]이 됐고, 다른 일부는 자원퇴학[4]으로 처리되었다, 이 자원퇴학은 표면적으로만 자신이 원한것으로 가장됐을뿐, 실제로는 일제와 학교당국이 갖은 수단과 압력으로 학생 스스로 학업을 포기토록한 악랄하고 비열한 경우였다,

명 퇴학자[5]
자원 퇴학자[6]

영향

전주고등보통학교 최초의 동맹휴학은 지역사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대상이 됐다,

일본인 교장 추방사건

1926년, 한국인 학생을 차별하는 등의 행패를 부렸던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을 학생들이 손을모아 추방한 사건. 전주고보(현 전주고)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전국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전주고보 동맹휴학이 발생한지 2년만에 또 다시 전주고보에서 항일 동맹 휴학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신임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은 평소 한인학생과 일인학생(전체 학생의 약 10%)을 차별대우하고 '한인은 불결한 저질민족'이라는 등의 망언을 하는 등 학생들에게 불쾌한 충격을 주고 민족적 감정을 촉발시켰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걸핏하면 폐교하겠다는 교장은 학교를 폐교하러 온 사람이지 우리의 교육을 담당하러 온 사람이 아니니 그런 교장은 추방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판단, 나카타 도미사쿠 교장의 추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추방 사건의 시작을 알린건 시한부 맹휴였다. 3학년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50여 명의 이름으로 5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6월 2일부터 4일까지 시한부 맹휴에 들어갔다. 학교 당국자들의 답변을 들은 뒤 추후 태도를 결정하자는 학생들의 뜻이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학생들의 교장 및 일본 교원 배척 요구를 무시하지 말 것

② 기숙사를 철시할 것

③ 유도, 검도를 가르칠 것

위의 입장을 밝힌 학생들은 이 문제를 학부형들에게 일임하고 일단 학생 본연으로 돌아가 6월 5일부터 등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장은 학생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곤 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맹휴에 대한 소감을 차례로 말하게 하여 맹휴 당위론을 주장한 학생을 퇴학처분했으며, 한민족에 대한 막말과 멸시 언행을 더욱 심하게 했다. 이에 격양된 학생들은 도미사쿠 교장을 교문 밖으로 강제 추방할 것을 최후 결심하고 2학년 학생들도 가담시키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전화선을 미리 끊어둘 절단반, 운동장 주변 경비반, 교직원 자전거 튜브 바람 빼기반, 숙직실 경비반과 독려반을 미리 편성하고 맡은 부서와 임무를 결정했다.

1926년 7월 1일, 마침내 결단의 날이 찾아왔다. 아침 8시 5분 타종을 신호로 전교생은 우천체조장에 예정대로 집결하였다. 당시 강당이 없던 까닭에 비오는 날 조회,훈화,체조 등을 하는 곳을 우천체조장이라고 하였다. 행동대원 3학년 이문기, 변영진, 임걸영, 유갑현, 송병채, 김학우, 공점권, 유순도 동문과 2학년 전석권, 김부영, 유훈석 등 10여명은 교장실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교장의 팔 다리를 네 명이 붙들고 이문기는 엉덩이를 쳐들어 올려 합세해서 130m 가량 떨어져 있는 교문까지 끌어낸 뒤 "나가 버리라"며 추방했다.
나가타 교장은 혼비백산 맨발인 채 전라북도 경찰국과 내무국 학무과로 뛰어가서 봉변의 전말을 하소연했고, 이같은 일대거사를 까마득히 모르다 뒤늦게 인지한 일제 경찰은 즉각 출동하여 전주고보 학생이라면 눈에 뜨이는 대로 무차별 포박 연행하였다. 경찰은 학생들을 줄줄이 엮어 사건 전말의 조사와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워낙 연행된 학생수가 많은지라 포승이 부족하여 전주농업학교(현 병무청자리)에서 모내기 못줄을 징발하여 포승 대신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일경은 주모·주동자 10여명을 색출하여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형을 과하고 기타 관련자는 '명 퇴학'또는 '자퇴' 형식으로 학교에서 쫒아냈으며 이때 고창고보, 서울의 중동고보 등으로 전입해 들어간 전주고보 학생도 상당했다.

교장 추방사건의 주동자는 옥구 출신 정태성(당시 3학년)으로 밝혀졌으며 1학년 학생 일부와 2,3학년 대부분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사건에 힘을 받은 1, 4, 5학년 중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은 학교당국과 일제에 항의하면서 2,3학년의 저항에 동조하여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7월 8일에 예정되어있던 전주시민대회가 취소되고 대신 전주청년회가 시민유지회를 열면서 '전주고보 교장추방' 사건은 전주 시민 전체의 관심사이자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제는 1926년 12월 25을 기해서 특사가 있었다고 하나, 이미 타교로 전학한 학생들은 복학을 거절하였고, 극히 제한된 학생에 한해 전주고보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실제로 돌아온 사례는 없었다는 점에서 전고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 당시 한 전주고보 졸업생이 졸업 후 취직이 되어 간 곳이 도내 장수군청이었는데 출근하고 보니 문제의 나가타 도미사쿠 전 교장이 장수군수로 재임하고 있기에 바로 사표를 쓰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일제는 지탄받는 인물들을 군수나 학교장 자리에 앉혀 놓고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해서 한국인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고 괴롭혔으나 전고인들은 어느 자리에서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1926년의 전주고보 맹휴와 교장 추방사건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는 구호를 제시하고 식민지 교육 체제 하수인인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과 일인 교사에 대한 추방운동을 강력히 추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마음 심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항일의식을 표출한 쾌사였다.

1930~ 1940년대

당시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1941년 전국에서 모인 많은 우수한 지원자중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영광의 합격자 명단을 우천체조장 벽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합격자는 3개반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학기는 1년을 3학기로 하고 학년초는 4월초순에 시작하였다. 1학기의 학업 성적에 따라 우수반을 뽑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들기 위해 학업에 정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우수반 제도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여 폐지되었다.그 당시 국방색의 교복을 입고 ‘데바리’ 모자를 쓴 우리 전주북중 학생들은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의 교훈 아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중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에 시간을 빼앗겨 4학년 때는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인 전형적인 일제 식민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전쟁중이라 사열을 받기 위한 군사훈련에는 노일전쟁 당시 사용했던 9·9식,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모의 공포탄을 쏘아 실전을 방불케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전주시내의 중등학교들은 남중학교에 집합하여 사열을 받고 수류탄 던지기, 포복, 총검술 등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습득하기 위한 국방경기(國防競技)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북도내의 중등학교를 남군(전주북중, 전주남중, 전주사범, 전주농업, 전주공업)과 북군(군산중, 군산상업, 이리농림, 이리공업)으로 나누어 총을 메고 야간행군한 다음날 아침 삼례들판에서 양군의 전투 대결훈련이 실시되었다. 치고 밀리는 그 당시 훈련상황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이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심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은 ‘근로 보국대(勤勞 報國 隊)’라는 것을 결성, 학생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이용했다. 덕진 야산 솔밭을 개간해 고구마 밭 일구기, 군산 불이(不二)학교에서 숙 박하면서 비행장 공습에 대비한 비행기 방공호 파기(이 당시 취침전 친구들과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실로 끌려가 몽 둥이질을 당하고 정학처분 당한 암울한 기억이 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모교의 뒷산을 허물어 기숙사를 지을 부지 조성 등 은 좋은 예들이다

묵음 시위

동맹휴학, 교장 축출 등 개교 이래 그치지 않고 이어진 일제에 대한 항거는 1040년대 들어 무언의 묵음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묵음 시위는 22회 동문들이 입학하던 1940년대부터 시작됐다, 행렬이나 대열의 뒤에서부터 음...하는 소리로 집단 시위를 하는것이다, 주변 교사가 다그치면 소리는 사라지지만 교사가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또 묵음이 나오는 등 신경질적이고 게릴라적인 시위방식으로 교사들 골머 리를 앓게했다. 당시 5학년 유승렬 동문은 남들이 다 조용한 데도 혼자서 음.:하다가 그만 들 통이 나서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줄 나기도 했다. 평소 운동장 조회 때 일본인 교사가 지휘대 단상에 올라 한국인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얕잡 아 혈뜬는 훈화를 하거나 행렬 중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음...음.." 하며 입을 다물고 여기저기서 콧속으로 소리를 내는 항변의 시간을 가졌다. 일본인 선생들은 아무리 단속하려고 해도 아예 허사였다.

왜냐면 "음...음."하는 소리는 입을 열지 않아도 가능하였고, 따라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내기 때문에 주동자를 색출해내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교사들이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면 그쪽에서는 소리가 멎고, 다른 쪽에서 또 소 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면 또 다른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 등 숨바꼭질이 되풀이 됐다. 그 당시 이 "음..-음..." 소리는 전주북중에 다니는 학생이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신호였다. 즉 인기 없고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일본인 교사에 대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요,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욕구 불만의 표시였다.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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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응전 - 6.25와 전고

  • 전북 학도병, 전국 최다 희생

전쟁 회오리 바람 속에서 9·28 서울 수복 후 본교는 10월 4일 다시 문을 열고 적은 수 학생으로나마 수업을 재개했다. 학교 교사(校舍)는 처음엔 제 11사단이 사단본부로 쓰기 위하여 징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제 8 사단 본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북중학교는 당시 인근 전주중학교(현 제일고등학교)의 교 사(校舍)를 빌어서 수업을 실시했다. 1951년 5월 19일에 제 8 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본교생들은 약 11개 월만인 5월 20일 그리던 교사(校舍)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대부분 학교에 복귀했으나 군데군데 빈 책상이 많았다. 6·25 전쟁 직후 붓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간 본교 총 400여명 중 숨진 학생들이었다. 전선에서 조국 수호 신이 된 전국의 중·고생 전몰학도 수는 총 1,394명이다. 이중 전라북도가 396명으로 전국 최다희생이며, 그중에서도 본교생은 48인(교사 포함)이나 되는 아픔을 겪었다. 시·도별 전몰학도 수는 이렇다.

전쟁의 광풍

전쟁은 초반부터 맹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전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출처불명 소문만 난무한 상 황에서 학생들은 자원해서, 또는 정부 입대 소집에 응해 전장에 나갔다. 6·25 발발 직후 신태영 소장이 호남 위수사령관으로 부임, 국군과 경찰을 장악하고 신병을 모집했다. 신태영 사령관과 육군보병학교 교장 민기식 대령이 전주 북중 강당에 와 학도병 지원을 격려했다. 당시 북중학교는 7월4일부터 임시 휴교에 들어갔고 전북도청은 7월18일 해산돼 부산으로 향했다.

이같은 무 정부, 무학업의 급박한 와중에서 전주 일대의 18세 이상 입대 학도57)들은 전북중학 교정에 일차 집결, 7 월13일 전주지역 제 1,2,3,4기 학도병 장행회(壯行會)58)를 가진 다음 전북 각처에서 온 학도병들과 이리(= 현재 익산)에서 만나 순천을 거쳐 경상도 대구, 포항 등지로 가 초스피드 집중 훈련과 빈약한 장비로 불 과 한달 이내 실전에 투입됐다. 대부분 소총 분해 조립만 배우고 몇 차례 실전 사격 후 훈련된 적군에 맞 서는 식이었다. 군용 헬멧은 물론 군화, 군복도 지급될 처지가 아니어서 대부분 평상복과 운동화 차림으 로 총을 잡은 이들은 그야말로 육탄(肉彈) 그 자체였다. 군번은 받았으나 기록이 남지 않아 대부분 ‘군번 없는 병사’가 되고 말았다. 전종환(28회·전 군산시장) 동문은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은 누구의 가슴에나 피멍으로 남았다. 학도병 학생도, 의용군 학생도, 숨어버린 학생도 모두 10대 학우들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북측 의용군으로 간 학우는 물론 빨치산 체포 후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한 동문들도 있다. 이들은 아예 역사현장에서 잊혀져버렸다. 전쟁은 동시대 누구에게나 미친 바람, 광풍이 었다. 9·28 수복 후 이듬해 엄동에 1·4 후퇴를 하는 등 장기간 시달린 중부권 학교들과 달리 전북에는 그 바람이 머문 기간이 약간 짧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디서건 급우 친지를 잃은 피눈 물 나는 절규는 마찬가지였다.

충혼비 건립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자 본교에서도 적기(赤旗)가 내려졌다. 본교가 휴교 에 들어간 7월4일 후 약 3개월만이었다. 학도병으로 출전했던 400여 학생들이 드문드문 돌아오고 10월 3 일엔 임시학교 사무소가 유청 교장댁에 개설됐으며 이튿날인 4일 복교를 선언했다. 10월 21일엔 휴교 후 첫 직원회의를 풍남동 전주여중에서 개최했다. 본교는 국군 11사단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교와 함께 전장에서 스러진 전몰(戰歿) 꽃봉오리와 교직원들을 기리는 운동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북중·전고인 모두의 가슴에서 용솟음 쳐 터져 나왔다. 전몰 학도병과 순직 교직원의 위국단충(爲國 丹忠)을 기리는 충혼비(忠魂碑)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인공(人共) 치하에서 여러 차례 사경을 당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피 흘리는 제자들 생각에 끝내 지조를 지켰던 유청(柳靑) 교장의 의지는 한층 각별했다. 모교 후배이자 어린 제자들의 입대 상황에서 ‘가라, 말라’ 말도 못하고 차마 그들을 떠나보낸 스승의 심정은 언설로 이루 담기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들 모두의 뜻을 모은 충혼비가 1951년 9월 28일, 9·28 수복 1주년을 맞아 제막됐다. 정면(동 쪽)에 이승만(李承晩) 당시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 깊게 새겼고 후면(서쪽)에는 유청 교장이 쓴 비문이 새겨졌다. 전면 하단에는 당시 본교에서 국어과 교사이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시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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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전주북중, 전주고등학교 학생 명단

대한민국 육군은 6·25 발발 43주년을 맞아 지난 2013년 6월12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1950년 6월 전 주북중과 전주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동문 총 145명에게 ‘전주고등학교 6·25 참전용사 감 사패’를 전달했다. 이 패는 “위국헌신의 정신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눈부신 선 진 조국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참전 학생들에 게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76) 정부로부터 6·25 참전이 인정돼 감사패를 받은 동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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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교훈 제정, 장학회 설립

  • 교가

중·고 분리 학제 개편으로 인해 1951년 9월 1일 전주고등학교가 새로 개교하자 기존 북중과 다른 새 교가, 새 교훈이 필요하게 됐다. 8·15 광복 직후 1945년 10월 1일 정식 개교한 전북공립중학 교가인 “麒 麟(기린)의 높은 峰巒(봉만) 구름을 뚫고 ~”는 북중학교에서 그대로 사용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전주고등학교는 1951년 마침 낙향하여 전고에서 국어를 강의하던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 시인에게 새 교가 작사를 의뢰했다. 작곡은 역시 전고 음악 담당 박용흡(朴鏞洽, 1919~1976) 교사가 맡았다. 미당 서정주는 당시에 이미 한국 시단의 거목이었거니와 작곡자인 박용흡 교사 역시 동 경 중앙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인재였다. 경남 사천 출생인 그는 1946년부터 1951년까지 본교에 재직하며 전북 음악발전에 기여했다.

박 교사는 밝은 음색의 바리톤으로 6·25 전쟁 후 부산에 정착하여 부산여고, 경남여고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박 교사에게 가르침 받은 본교 원로 동기들은 아직 까지 박 교사 작사, 작곡인 ‘옹달샘’ 86)을 기억하고 있다. 마침내 교가가 완성되자 학생들은 새 전고 교가를 강당에서 학년별로 배웠다. 전란 와중에 쓸 만한 등 사시설 하나 없던 당시 사정상, 학생들은 악보는 물론 가사까지 일일이 노트에 받아써야만 했다. 당시 건 물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붉은 벽돌 강당(1940년 준공) 마룻바닥에 앉은 채로였다. 첫 부분인 “백두(白頭)와 금강(金剛)과”가 음악교사 입에서 나왔을 때 학생 일부에서 웃음이 나왔다. 접속조사 반복이 좀 어색하게 들렸던 탓이다. 이어 “태백(太白)과”가 나오자 웃음이 한층 커졌다. “~와 ~ 과 ~과”로 세 번 접속조사가 반복되자 그 다음 또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며 와르르 웃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가사를 끝까지 받아 쓰고 난 뒤엔 “과연!” 하는 탄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었다. 평범한 접속조 사 반복으로 역사와 전통, 스케일, 조국애를 표현한 대(大) 시인의 기량에 감탄한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교가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고인에 의해 애창되고 있다. 그런데 1절의 맨 끝 소절에 이르면 졸업 세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가사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풍운(風雲)을 뚫고”로, 어떤 이는 “풍설(風雪)을 뚫고”로 부른다. 연로한 동문들 간에 “분명히 1960년대까지는 ‘풍운을 뚫고’로 배워 불렀다”고도 하는데 어찌 해서 ‘풍설’로 바뀌게 되었는지 연유가 분명치 않다. 심지어 같은 횟수끼리조차 ‘풍운’, ‘풍설’을 두고 설왕설래가 다반사였다.87) 정식 절차를 밟아 개정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원래 가사를 확인하자는 여론이 일자 시인이자 교수인 김해성 동문(당시 서울여자대학교 교수)이 지난 1996년 9월26일 스승인 미당 서정주 시인을 방문, 직접 문의를 했다.

이에 따라 이후 전고 교가는 공식적으로 ‘풍운’으로 통일됐다.

  • 교훈 - ‘자유·박애·지성·노력’과 ‘자강·자율·자립’

전북공립중학교 제2대 김가전 교장은 1946년 4월1일 부임하자마자 일제 강점기 교훈이던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을 폐기하고 ‘자유·박애·지성·노력(自由·博愛·至誠·努力)’을 새 교훈으로 제정했다. 이는 1951년 9월 중·고 분리 전까지 북중과 전고에서 한동안 같이 쓰였다. 그러다 1952년 말 전주고등학교 제4대 배운석 교장 부임 이후 전고는 새 교훈인 ‘자강·자율·자립(自彊·自律·自立)’을 따로 제정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북중 교훈 ‘자유·박애·지성·노력’은 1959년까지 이어지다 배운석 전고 교장이 북중 교장(제9대)을 겸임한 1960년 이후엔 전고와 같은 ‘자강·자율·자립’으로 통합, 변경됐다. 북중학교 학도호국단이 발행한 교지 <북중> 창간호(1952년)부터 7호(1959년)까지는 속 표지에 옛 교훈(왼쪽·1952년)이,8호(1960년)부터는 전고와 통합된 새 교훈(오른쪽·1960년)이 인쇄돼 있다

  • 모표

모자에 붙인 모표는 1950년 전북공립고등학교(全北公立高等學校, 2학급)가 전주고등학교로 개칭되면서 이전까지 학생들이 달았던 ‘高’(고)자를 삼각구도의 노송 솔잎 한 가운데 ‘高’자를 배치한 현행 디자인으로 확정했다. 당시 유청(13회) 교장은 무려 10만원을 걸고 새 모표 디자인을 교내 현상 모집했다. 현재 화폐가치로 치면 1,000만원이 넘는 거금이었기에 응모자도 많았으나 정작 당선자는 시인이던 전고 국어교사 이철균 동문(21회)이었다. 시인의 디자인이 모표로 확정되던 상황을 유청 당시 교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1960~70년대

1960년대의 전고 북중

시대의 서막, 4,19혁명과 전고생 데모

‘3·15’ 부정선거와 마산(馬山) 의거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여파는 1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소요에 휘말리게 만들고 있었다. 1개월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소요에 이어 3월11일 마산에서 대규모 학생, 시민의 데모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여파는 남원출신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당국의 미온적인 처사가 더욱 더 불을 지른 결과를 가져왔다. 연이어 3월 18일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학생데모는 마산 소요사건을 처리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정국을 다시 극도의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4월 18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다가 해산,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 데모대가 을지로 4가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10여명이 숨지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2. 서울시내 대학생 데모

4월 19일 날이 밝자 이 소식은 서울시내 각급 학교에 전해졌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음대, 미대 및 대광(大光)고등학교의 데모대는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도 불구하고 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의 구호는 ‘민주주의를 바로잡자’, ‘공산주의 타도하자’, ‘민주 위한 학생데모 총칼로 제지 말라’, ‘학원자유 보장하여 구국애족 선봉되자’, ‘이놈 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력이 이적이냐’ 등으로 대부분 구국일념에 불타 있었으며 이 시위가 민주회복을 뜻하는 것이지 절대 용공(容共)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데모는 경찰 곤봉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했고 연도의 시민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19일) 오후 2시 55분 서울신문사가 불타기 시작했고 세종로 파출소, 적선동 파출소가 소각되면서 무질서 상태로 들어갔다. 또한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어 곳곳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제 6 편 1960, 70년대-교육환경 격변과 도전 275정부는 이 같은 혼란상을 방지하기 위해 19일 오후 5시를 기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3. 전주에서도 학생 데모

평온했던 전주에서도 20일 아침부터 데모가 시작됐다. 이날 오전 9시 조금 지나 전북대생들의 데모가 시작됐는데 이들은 고사동 연초제조창(현 SK뷰아파트) 앞에 모여 두 패로 갈려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다가 역전5거리에서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으며 일부는 연행되어 가기도 했다. 19일 밤 전국에 내린 문교부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이날 아침 등교한 학생들의 일부가 데모를 주동한 것이다. 아침 학교에 나왔다가 굳게 닫힌 교문과 휴교조치를 내린 게시판을 보고 발길을 돌린 전주고 학생 1백여 명도 스크럼을 짜고 시내 중앙동 거리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 전고생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어깨동무를 한 후 시민들의 궐기를 외쳤다. 시내 곳곳을 누빈 전주고 데모대는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행진을 계속했고 통일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들 데모대는 도청(현 전라감영 신축부지) 앞에 이르러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했으나 시위 도중 전북대, 공고, 상고생 및 시민들이 합류되어 숫자는 훨씬 불어나 있었다. 이 데모대가 해산되면서 학생 79명이 연행되었으며 주소와 성명, 보호자 등 조사를 받고 오후 5시가 넘어 귀가조치됐다.

4. 전고생들의 연좌 데모

전주고는 24일 오후 2시부터 있을 ‘4·19사건 희생 학생 합동장례식’에 앞서 오전 9시부터 도청앞 광장에 모여 또 다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이 데모는 전북대와 시내 각급 고교의 호응을 얻어 남문~배차장~KBS(고사동)~역전5 거리~오스카극장(현재 전북예술회관 건너편)~도청 앞으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데모대는 박정근(朴定根) 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고 ‘계엄령 해제’, ‘학교의 개교’, ‘전주 데모대에 폭행한 경관 처벌’, ‘4·19 희생학생 동상 건립’, ‘지사 물러가라’ 등의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한편 이날 합동위령제가 끝난 뒤 전북대 법대 정치과 전대열(全大烈·36회) 동문의 주동으로 전주고 등 시내 각 고교 대표들은 ‘4·19 사상자들을 위한 모금위원회’를 구성했다. 모금위원회 명칭은 ‘구급모금단’이라 했고 단장은 전대열, 남학생 총무 이승재(이상 전주고) 여학생 총무 강혜자(姜惠子, 전여고) 등이 각각 맡게 됐다.

5. 희생자 위한 모금과 질서회복 앞장

이때 결의로 학생들은 학교 모금과 가두모금을 시작했으며 적지 않은 액수가 모였다. 4월 24일 오후 4시에는 당시 전주고 2학년(39회) 박천규(朴天圭), 문현호(文賢豪), 홍영재, 박풍창(朴豊昌) 등 4명이 1만 3천환을 신문사에 기탁했고 1학년(40회) 유정상(柳征相), 윤성섭(尹性燮)(재미), 최효진(崔孝鎭)(재미), 육완태(陸完泰·전북일보), 유종상(柳宗相·외항선 항해사), 이진흥(在美), 소팔낭(蘇八郞)(건축업) 등도 자진해서 모금반을 조직, 모금한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20일부터 시작된 학생 데모는 24일 위령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됐다. 전주고 재학생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질서유지와 희생 학생을 위한 모금, 헌혈 등에 앞장 서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일 내려진 휴교 조치 후 26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함으로써 27일에 전주시내 중학교가, 29일엔 고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학교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다음은 전대열 동문이 회고하는 4·19 혁명에서 전주고의 주도적 역할이다

대화재 사건

=제 3장 전고 북중 대화재

제 1절 반세기의 요람이 잿더미로

1969년 가을 전고·북중은 개교 50년만에 최대 참사를 맞았다. 10월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전고와 북중 교사에 연속적인 대화재가 발생, 교실 태반을 전소시킨 것이다. 이 화재로 전고 교실 23칸, 북중 교실 24칸이 불타버려 3천여 북중, 전고인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고 망연자실해졌다. 첫날(10월27일) 목조로 된 전고가 불탔고 이튿날 같은 캠퍼스 안의 벽돌조 건물 북중(10월28일)이 또 불탔다. 이로 인한 교사, 학생, 동문의 경악과 슬픔은 말할 나위 없고 지역 중심에서 전북을 이끌어온 명문이 삽시간에 불탔다는 점에서 지역사회 전체가 술렁댈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 재학생으로 밝혀진 일이다. 나중에 조사결과 심신미약자로 나타났지만, 재학생이 모교에 방화를 해서 그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고, 북중 역사상 가장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놀라운 이 재화에 당시 교사, 학생과 동문의 충격, 슬픔, 흥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세간의 충격도 매우 컸다. 불타버린 전고 건물(목조)은 낡고 허술한 교사였지만 거기에는 전고의 전통과 혼이 보물처럼 담겼으며, 일제하 압제와 항일 등 50여 년을 견딘 온갖 풍상 어린 역사적 사적이었다.

북중 건물(벽돌 연와조)은 광복 직후 당시 김가전 교장과 교사들 지휘 하에 학생들이 손수 벽돌을 찍고 완주군 소양 등지에서 손수 재목을 날라다 지은 건물이었으므로 그 애착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48년 완공됐으며 건물 정면 화강석 판에 태극 마크와 함께 한자로 ‘獨立記念’(독립기념)이 음각된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화재 이틀간 화마의 불길은 전주 시내 먼 데서도 알아볼 정도로 훤히 타올랐다. 날벼락같은 재난을 눈앞에서 겪은 신강호 교장이 현장에서 졸도 했으며 동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화재현장에 들어가 의자 한 개라도 건지려 동분서주했다. 전고·북중을 20년째 지키던 정문 경비직(당시엔 ‘순시’) 홍성신136) 씨는 화재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전주고 2학년이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진입했던 조순래 동문(48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0월 27일은 선배들 입시가 얼마 안 남은데다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도서관이 꽉 찼습니다. 해 진 지 얼

마 안 된 초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북중 후배들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도서관으로 피난오듯 몰려오는 거 예요. 학교에 불이 났다고요.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우르르 전고 교 사로 달려갔지요. 이미 불은 활활 붙었는데 1층 서무과로 달려가 캐비넷, 금고, 타자기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꺼내서 운동장에 던지고 또 들어가고 했어요. 학생 수 십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리창 깨진 게 널렸 던지 그때 새끼 손가락 찢긴 상처가 50년이 지난 아직도 있어요. 제 집은 전고 바로 옆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8일은 집에 있다 불난 걸 봤어요. 야밤에 화광이 충천 해서 또 뛰쳐나갔습니다. 안타깝게 발 구르고 혹시라도 화재현장에 도난이 있을까봐 밤새 학우들과 모닥 불 피워놓고 지켰습니다. 화재 후 연기 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 습니다.”

화재 소식에 전주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동문들은 한결같이 제일성으로 “학적부를 건졌냐”며 물 었다. 다행히 재학생들 활약으로 북중, 전고 졸업생 명단과 생활기록부 등이 온전하다는 소식에 동문은 한줄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난날 김가전 교장이 “교장실이 비좁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 도로 교내에 즐비하던 수십년 동안의 각종 대회 우승컵과 우승기를 비롯해 학생문집, 교지, 옛 사진, 대 통령과 국회의장 휘호 등 수많은 기록물·기념물들이 화재와 함께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교사(校舍) 어느 구석에나 수많은 영재들이 거쳐 간 자취와 흔적이 있었으며 때 묻은 손길이 닿아 있 었다. 겨레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얼과 뜻이 담긴 곳이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제 2절 힘찬 재건 노력

전북교육의 대표적 전당이고 요람인 북중, 전고 교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비통한 심정이야 비할 데가 없었다. 화재가 발생한 것은 마침 전고·북중 개교 50주년이 되던 해로서 반세기 역사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웅비의 날개를 펼치려던 시점이어서 한층 충격과 슬픔이 컸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교사와 학생, 동문들이 보여준 재기의 몸부림은 세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 다. 그들은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화재 사흘 후 10월30일부터 즉각 정상 수업을 실시했다. 체육관, 강 당, 도서관 신축 중인 건물 등에 얇은 베니어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설치하고 전주시내 각급 학교에서 급 히 보내준 책상과 의자를 배치해 차가운 늦가을 바람 속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와 슬기, 애교심과 학구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의 배움터가 재난에 처했을 때 젊은 학생들이 보여준 애교심은 실로 뜨거운 것이었다. 특히 화재 당시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화재 현장에 뛰어든 북중·전고인들의 용감성과 의 기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으며, 화재 직후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학업에 정진하는 태도는 오 히려 선배 동문에게 귀감이 됐다. 화재 직후부터 북중, 전고를 아끼고 안타까와하는 각계각층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연일 쏟아졌다. 학교 당국은 각계에서 보내준 격려문을 새로 설치된 대형 게시판에 가득 붙여놓아 이를 읽는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격려했다.

제3절 전고·북중 화재 사건 경위(일간지 보도)

전고·북중 대화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 전북일보 등에 연일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첫날은 누전 으로 추정했으나 화재 즉시 한전의 단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이틀 화재가 나자 경찰은 방화로 보고 수 사에 총력, 대화재 며칠 후 범인을 특정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특히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에 재학중 이던 조 아무개 학생으로 밝혀져 동창회 및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의 충격과 긴박상을 생생하 게 전하기 위해 대화재 관련 수사 상황, 시민 표정, 범인체포 및 재판 등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들을 모아 전재한다. File:스크린샷 2024-08-14 194136.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18.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34.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49.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303.png

제4절 사과문, 호소문

제5절 전국에서 성원 답지, 의연금 기탁 명단

제6절 법원, 조 피고에 3년 선고

전고·북중 화재의 증거보존신청에 따라 전주지법 손제희(孫濟喜) 판사는 11월 5일밤 9시부터 11시 50분까지 화재현장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조불원(趙不遠) 학생(가명·19)은 순순히 방화사실을 시인했고 방화 경위를 재연함으로써 조군이 방화범인 것으로 더욱 굳어졌다. 밤 9시부터 실시된 현장 검증에서 손 판사는 조군이 방화 직전 도서관에서 나갈 때 시간을 물은 학생들과 화재를 처음 목격한 숙직교사들, 조군이 ‘현상금을 타먹어라’고 말한 학생과의 대질심문 등도 청취했다.

조군은 처음 화재 얘기를 할 때 이제까지 경찰에서 진술한 ‘울적한 영웅심’과 ‘파괴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말 외에 ‘신축교사에 낡은 책상을 옮긴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불태워 버리고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새로운 동기를 밝혔다. 조군은 시종 여유있는 태도로 범행을 재연했는데 증인으로 나온 학생과 시간차 등이 대립될 때는 자신의 말을 내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조군은 5일밤의 현장검증에서 단독범행임도 시인했다. 조군은 그해 11월 7일 검찰에 송치되어 11월 24일에 전주지검 송두영 검사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27일에 선고공판이 있었고 전북일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재판에서는 이만용(李萬鎔) 박사(전주뇌병원장)와 김제권 광주뇌병원장이 조아무개 학생의 정신감정을 했다. 감정 결과 그는 심신미약자로 인정되었으나 시비선악(是非善惡)은 분별할 정도의 의식능력은 있으므로 책임은 면하지 못할 것으로 보아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아무개 학생은 3년 복역 후 출소하여 정상인으로 원만한 생활을 하며 생업에 전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 4장, 1970년대의

서울대 최다 합격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주고의 입시 능력은 1970년대 들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1978년 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전주고 졸업생(55회)들은 서울대 137명을 비롯해 고려대 27명, 연세대 20명, 전북대 290명을 합격시킴으로써, 전국 유수의 명문을 따돌리고 전국 1위의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해도 재학생 합격자가 88명이나 돼 명문 중 명문임을 입증했다,

1979년 입시에서도 전주고의 영광은 이어졌다, 1979년 전주고 졸업생(56회)들은 서울대 160명을 비롯하여 고려대 40명, 연세대 27명, 전북대에 312명이 합격하여 다시 한번 전국1위 학교임을 과시했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한 재학생만 11명이나 되어 전교생 7명 중 1명이상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1990년대

2000년대

동아리 활동

1990년대의 동아리 활동은 기촌의 동아리들은 물론 신생 동아리들이 우후축순처럼 생겨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1997년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라매불 동아리 회원 중 3명이 물속에 젊음을 묻어야 했던 의사자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앞에서(1980년대의 전고) 소개되었던 동아리들 외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동아리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7].

한누리
우리의 것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아쉬위하며, 북고풍을 주장하는 친구들이 만든 풍물패. 그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한누리는 풍물로써 하나가 되는 동아리이다. 선후비나 동기들 잔의 우예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과 하나로 어우러져 디불어 사는 세상을 반들고자 한다. 또, 풍물, 민요, 탈춤 등을 익 허는데, 그치지 않고 주위에 우리 것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솔
차를 뜻하는 다와 늘 푸름을 뜻하는 소나무의 솔을 합하여 만든 합성어인 동시에 하나의 모임명이다. 이 다솔 모임은 말 그대로 싱싱한 젊은이들이 푸른 차를 마시며, 젊음을 애기하자는 것 이다. 이 모임은 아주 생기발랄하고 화기애애한 가족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미네르바
"미래가 원하는 성실하고 정직한 젊은이가 되자." 는 다짐 아래 지난 1964년 7명의 학생이 모여 만든 영어 회화 모임. '미네르바'란 사전에서 "지혜와 무용의 여신"이란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동아리 는 단순히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의 영화 회화 모임에 그치지 않고, 체육대회, MT, 대면식 등을 통해 선 후배 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고 자연의 싱그러움과 푸르름을 맛보면서 올바른 젊은이가 되기 위한 하 나의 사회화 과정을 터득해 간다.

빛과 소금
빛과 소금이라는 이름에서와 같이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하는 일꾼들이 되고자 하여 10년 전에 만들어진 종교모임. 모임의 활동은 크계 예배모임과 기도모임으로 나뉘어져 있다. 예배모원은. 일 점심시간에 이루어지는데, 크리스찬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자신을 보며 반성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매월 들째, 넷째 주에는 기도 모임을 가져 회원 간의 개인적인 문제와 공통된 문제에 대해 함께 기도하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한다.

부름
1970년대 초에 결성된 문학 동아리. 부름이라는 이름은 '노래를 하다: 말이나 글로 남을 오라고 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부르다'의 명사형이다, 다독, 다작, 다상량을 기본으로 삼는 부름은 미리 정해진 문학 작품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해 이해가 되치 않는 부분이나 의문점을 수업 시간에 제시하고, 토의 사항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설정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여 여러 의견 속에서 자사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는 방식으로 수업을 친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는 능력은 물론 논리적 사고와 비판정신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덕유심
유도는 매개체를 통해 선후배간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하 이내당 고 예절을 배운으로써, 한번뿐인 고교 생활을 좀더 재미있고 유익 >iva| 하게 보내기 위해 결성된 동아리. 공격과 방어의 연습을 통하여 신 체를 단련하고, 정신력, 지구력, 침착성 등을 길러 장차 사회에 유용 한 사람이 되고, 강인한 체력 바탕으로 학습 의욕을 고취시켜 유능 한 전고인이 되는데 목표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겟세마네
학생들에 대한 전도와 기독교인의 신앙심 고취를 위해 설립된 기독교단체로서 정식명칭은 '전주고등 교 켓세마네 기독선교 중창단. 매주 금요일 저녁 시간에 교내 음악실에서 찬양 예배를 가지며, 사내코 회의 찬양 드립찬조, 찬양 집회의 인도 및 로방 찬양과 정기 찬양드림 등의 활동을 한다.

GENIUS
1978년에 결성된 전주고등학교의 농구 동아리다, 청소년층의 인기스포츠인 농구를 통해 농구 실력 향상과 체력 중진은 물론 선후배와 교우간의 친목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오래된 역사 만큼 농구 실력도 뛰어나 타 고등학교들과의 시합에서 최다우승과 준우승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4강안에 못 든 적이 한 번도 없는 좋은 성적을 자랑으로 여긴다

FRIDAY
지난 1960년대 전주 예수병원의 원장 내외가 미국인이었는데 그 미국인 부인에게 전고생들이 회화를 배우게 되었다. 이 모임이 금요일에 이루어졌다고 해서 동아리명을 FRIDAY라 했다. FRIDAY는 수업지를 통해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체육대회를 통해 체력을 보강시키는 등 문무를 겸비하게 하고., MT와 총회를 통해 선후배간 동기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있다.

T.A.P
1985년 창단된 농구 동아리. T.A.P는 Ten Ablaze Players의 약자. 주요 활동목표는 심신을 단련해서 안으로는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으로 성적향상에 이바지하고,밖으로는 일년에두 번 방학 때마다개최되는 농구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냄으로써 전주고의 위상을 떨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매일 점심시간과 주말시간을 쪼개어 연습을 하고 종종 타 학교와 친선경기도 가진다.

쿠오바디스
쿠오다비스란 희랍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뜻, 일주일에 3번 씩 모임을 가지며, 또한 한달에 한번씩은 토요일 방과후 2시간 정도의 모임을 가져 성가도 배우고 종교사 연구도 하며, 신앙심을 키워 나간다, 1997년에 창립됐다, 양로원 고아원 등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며, 회원 모두가 단합된 신앙심으로 모범 동아리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Unfixed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여 1997년 컴퓨터를 사랑하는 전고의 학생들이 모여 만튼 신생 동아리, 고정된 사고와 관념에서 탈피하자는 의미에서 동아리 을 Unfixed라 있다 컴퓨터실에 있는 30대의 페티엄급 컴퓨터를 활용해 점심시간 컴퓨터 교육 컴퓨터 통신을 통한 전고 홍보, 컴퓨터를 통한 전고인의 친선도 모 활동을 하며, 21세기 정보 통신시대를 이끌어갈 주역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송원
학교의 전통과 더불어 전고의 긴 역사와 함께 해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기 위해 창립된 동아리로 교지를 통한 전주고둥 교지의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조직체계를 바탕으 학교 홍보, 교지를 통한 전고인의 친선 도모를 목표로 활동한다. 각종 설문조사, 취재, 여러 행사의 사진촬영, 대내외적 백일장 대회 참가 및 투고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정한사
우리 역사 탐구를 통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올바른 주체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1996년예 창립된 동 아리,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하여 문화유산에 대한 탐방과 향토자료 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정한사'란 바른 한국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3H
3H는 HOPE(희망), HEALTH(건강), HAPPINESS(행복)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1950년 전주고 30회부터 그 모임을 결성, 29대(전주고 58회)까지 활발히 활동하다가, 이후 명맥이 이어지지 못했으나 90년대에 재 창립됐다. 협심상조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동고동락으로 친목을 도모하며, 적극 편달로 연속부절의 향상을 도모함을 강령으로 삼고 있다. 백제문화 유산의 답사 및 연구, 토론회, 재학생회원 수련회 활동, 연구물 및 책자 발간 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PIONEER
영어 회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고, 사회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기량을 기르며. 선후배간의 돈독 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1971년에 만들어진 동아리. 영어 회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나, 보다 홉룡한 인격 형성과 학생들의 실력향상을 위해 회보 및 회지 발간, 창작 발표회 및 토론회, 수업지 발간 등이 주요 활동 내용이다.

전검회
한국 전통무예의 하나인 검도를 통하여 심신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함은 물론 옛것을 숭상하고 계승 발전시키며,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선, 후배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여, 전주고등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1998년 창립된 동아리

검도의 기본자세를 수련하고, 회워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올바른 예절 및 심신 수련을 활동 목표로 삼는다 규칙을 준수하는 모법생으로 국가관이 투철하고, 예의바른 학생이면 회원자격이 있다. 검도의 기본자세를 수련하고, 회워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울바른 예절 및 심신 수련을 활동 목표로 삼는다

ELF& NIX
선, 후배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인맥을 넓히고, 문학활동을 통해 정서순화 및 논술 대비를 꾀하는 신생 동아리로서 1997년에 창립되었다. 매주 월요일 학습관련 모임은 문학작품 감독과 독후감 발표, 동아리 지 만들기 등으로 이루어지며, 주 금요일 친복관련모임은 토론, 레크레이션 활동, 봉사활동 등으로 이루어진다. 추구하는 학생상은 순수한 학생, 이타적인 학생.

Wanna be pop Mania
진정한 pop mania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모임. pop 음악을 들으면서 정서적 순화를 꾀하는 동시에, 영어학습능력 신장과 외국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무조건 유행만을 쫓아가는 대중음악을 거부하고 월 4편의 음악 감상문과 음악 평론을 제출, 우수작은 일정양식에 보관한다. 매월 2장의 CD를 공동 구입하여 회원들에게 대여해 주기도 한다.

ELF
꼭 짜여진 일정 속에서 약해져가는 체력과 환기를 되찾기 위하여 자투리시간을 최대한 활용, 음악과 댄싱을 즐기는 동아리.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연습을 통해 서로의 소질을 개발해 주고 선후배간의 친목도 다진다. 단합대회, MT, 각종 대회 참가를 통해 실력을 다지는데 1998년에는 JTV 청소년 뮤직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Spotive
간접적 사회 체험과 봉사활동을 통해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배우고 선, 후배간의 친목을 도모하면 서 보다 나은 학교 활동을 하기 위해 창립된 동아리. 추구하는 학생상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예절 바르며, 사나이다운 의리가 있는 학생이며, 공공기관은 물론 고아원, 양로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방학 중에는 문학기행 및 도내 문화재 탐방을 통해 애향심을 기른다.

  1. 줄여서 전주고보라고 부른다
  2. 다만 그 당시 학교장이였던 다카기 요시토가 학생문제는 학내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으로, 경찰의 개입을 적극 제지하여 체포된 학생은 없었다
  3. 학교 명령으로 퇴학
  4. 스스로 원해서 퇴학함
  5. 서병우, 정사섭, 조동빈, 장운종, 김종주, 김형태, 김태용, 김화봉, 김동석, 유격근, 유한상, 이준형, 고수장, 성경주, 이은영, 김영흡
  6. 백상용, 백남진, 이종기, 문중현
  7.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아리도 몇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