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고 1960~70년대: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1960년대의 전고 북중=== ====시대의 서막, 4,19혁명과 전고생 데모==== =====‘3·15’ 부정선거와 마산(馬山) 의거 =====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여파는 1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소요에 휘말리게 만들고 있었다. 1개월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소요에 이어 3월11일 마산에서 대규모 학생, 시민의 데모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기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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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건물(벽돌 연와조)은 광복 직후 당시 김가전 교장과 교사들 지휘 하에 학생들이 손수 벽돌을 찍고 완주군 소양 등지에서 손수 재목을 날라다 지은 건물이었으므로 그 애착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48년 완공됐으며 건물 정면 화강석 판에  
북중 건물(벽돌 연와조)은 광복 직후 당시 김가전 교장과 교사들 지휘 하에 학생들이 손수 벽돌을 찍고 완주군 소양 등지에서 손수 재목을 날라다 지은 건물이었으므로 그 애착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48년 완공됐으며 건물 정면 화강석 판에  
태극 마크와 함께 한자로 ‘獨立記念’(독립기념)이 음각된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화재 이틀간 화마의 불길은 전주 시내 먼 데서도 알아볼 정도로 훤히 타올랐다. 날벼락같은 재난을 눈앞에서 겪은 신강호 교장이 현장에서 졸도 했으며 동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화재현장에 들어가 의자 한 개라도 건지려 동분서주했다. 전고·북중을 20년째 지키던 정문 경비직(당시엔 ‘순시’) 홍성신136) 씨는 화재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전주고 2학년이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진입했던 조순래 동문(48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태극 마크와 함께 한자로 ‘獨立記念’(독립기념)이 음각된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화재 이틀간 화마의 불길은 전주 시내 먼 데서도 알아볼 정도로 훤히 타올랐다. 날벼락같은 재난을 눈앞에서 겪은 신강호 교장이 현장에서 졸도 했으며 동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화재현장에 들어가 의자 한 개라도 건지려 동분서주했다. 전고·북중을 20년째 지키던 정문 경비직(당시엔 ‘순시’) 홍성신136) 씨는 화재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전주고 2학년이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진입했던 조순래 동문(48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0월 27일은 선배들 입시가 얼마 안 남은데다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도서관이 꽉 찼습니다. 해 진 지
  “10월 27일은 선배들 입시가 얼마 안 남은데다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도서관이 꽉 찼습니다. 해 진 지 얼마 안 된 초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북중 후배들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도서관으로 피난오듯 몰려오는 거예요. 학교에 불이 났다고요.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우르르 전고 교사로 달려갔지요. 이미 불은 활활 붙었는데 1층 서무과로 달려가 캐비넷, 금고, 타자기 할 것 없이 닥치는대로 꺼내서 운동장에 던지고 또 들어가고 했어요. 학생 수 십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리창 깨진 게 널렸
안 된 초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북중 후배들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도서관으로 피난오듯 몰려오는
던지 그때 새끼 손가락 찢긴 상처가 50년이 지난 아직도 있어요. 제 집은 전고 바로 옆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8일은 집에 있다 불난 걸 봤어요. 야밤에 화광이 충천해서 또 뛰쳐나갔습니다. 안타깝게 발 구르고 혹시라도 화재현장에 도난이 있을까봐 밤새 학우들과 모닥불 피워놓고 지켰습니다. 화재 후 연기 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화재 소식에 전주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동문들은 한결같이 제일성으로 “학적부를 건졌냐”며 물었다. 다행히 재학생들 활약으로 북중, 전고 졸업생 명단과 생활기록부 등이 온전하다는 소식에 동문은 한줄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난날 김가전 교장이 “교장실이 비좁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교내에 즐비하던 수십년 동안의 각종 대회 우승컵과 우승기를 비롯해 학생문집, 교지, 옛 사진, 대통령과 국회의장 휘호 등 수많은 기록물·기념물들이 화재와 함께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교사(校舍) 어느 구석에나 수많은 영재들이 거쳐 간 자취와 흔적이 있었으며 때 묻은 손길이 닿아 있었다. 겨레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얼과 뜻이 담긴 곳이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예요. 학교에 불이 났다고요.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우르르 전고
사로 달려갔지요. 이미 불은 활활 붙었는데 1층 서무과로 달려가 캐비넷, 금고, 타자기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꺼내서 운동장에 던지고 또 들어가고 했어요. 학생 수 십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리창 깨진 게 널렸
던지 그때 새끼 손가락 찢긴 상처가 50년이 지난 아직도 있어요.  
제 집은 전고 바로 옆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8일은 집에 있다 불난 걸 봤어요. 야밤에 화광이 충천
해서 또 뛰쳐나갔습니다. 안타깝게 발 구르고 혹시라도 화재현장에 도난이 있을까봐 밤새 학우들과 모닥
피워놓고 지켰습니다. 화재 후 연기 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습니다.


화재 소식에 전주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동문들은 한결같이 제일성으로 “학적부를 건졌냐”며 물
었다. 다행히 재학생들 활약으로 북중, 전고 졸업생 명단과 생활기록부 등이 온전하다는 소식에 동문은
한줄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난날 김가전 교장이 “교장실이 비좁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
도로 교내에 즐비하던 수십년 동안의 각종 대회 우승컵과 우승기를 비롯해 학생문집, 교지, 옛 사진, 대
통령과 국회의장 휘호 등 수많은 기록물·기념물들이 화재와 함께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교사(校舍) 어느 구석에나 수많은 영재들이 거쳐 간 자취와 흔적이 있었으며 때 묻은 손길이 닿아 있
었다. 겨레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얼과 뜻이 담긴 곳이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제 2절 힘찬 재건 노력====
====제 2절 힘찬 재건 노력====
전북교육의 대표적 전당이고 요람인 북중, 전고 교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비통한  
전북교육의 대표적 전당이고 요람인 북중, 전고 교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비통한  

2024년 8월 14일 (수) 19:59 판

1960년대의 전고 북중

시대의 서막, 4,19혁명과 전고생 데모

‘3·15’ 부정선거와 마산(馬山) 의거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여파는 1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소요에 휘말리게 만들고 있었다. 1개월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소요에 이어 3월11일 마산에서 대규모 학생, 시민의 데모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여파는 남원출신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당국의 미온적인 처사가 더욱 더 불을 지른 결과를 가져왔다. 연이어 3월 18일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학생데모는 마산 소요사건을 처리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정국을 다시 극도의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4월 18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다가 해산,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 데모대가 을지로 4가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10여명이 숨지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2. 서울시내 대학생 데모

4월 19일 날이 밝자 이 소식은 서울시내 각급 학교에 전해졌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음대, 미대 및 대광(大光)고등학교의 데모대는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도 불구하고 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의 구호는 ‘민주주의를 바로잡자’, ‘공산주의 타도하자’, ‘민주 위한 학생데모 총칼로 제지 말라’, ‘학원자유 보장하여 구국애족 선봉되자’, ‘이놈 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력이 이적이냐’ 등으로 대부분 구국일념에 불타 있었으며 이 시위가 민주회복을 뜻하는 것이지 절대 용공(容共)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데모는 경찰 곤봉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했고 연도의 시민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19일) 오후 2시 55분 서울신문사가 불타기 시작했고 세종로 파출소, 적선동 파출소가 소각되면서 무질서 상태로 들어갔다. 또한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어 곳곳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제 6 편 1960, 70년대-교육환경 격변과 도전 275정부는 이 같은 혼란상을 방지하기 위해 19일 오후 5시를 기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3. 전주에서도 학생 데모

평온했던 전주에서도 20일 아침부터 데모가 시작됐다. 이날 오전 9시 조금 지나 전북대생들의 데모가 시작됐는데 이들은 고사동 연초제조창(현 SK뷰아파트) 앞에 모여 두 패로 갈려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다가 역전5거리에서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으며 일부는 연행되어 가기도 했다. 19일 밤 전국에 내린 문교부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이날 아침 등교한 학생들의 일부가 데모를 주동한 것이다. 아침 학교에 나왔다가 굳게 닫힌 교문과 휴교조치를 내린 게시판을 보고 발길을 돌린 전주고 학생 1백여 명도 스크럼을 짜고 시내 중앙동 거리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 전고생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어깨동무를 한 후 시민들의 궐기를 외쳤다. 시내 곳곳을 누빈 전주고 데모대는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행진을 계속했고 통일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들 데모대는 도청(현 전라감영 신축부지) 앞에 이르러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했으나 시위 도중 전북대, 공고, 상고생 및 시민들이 합류되어 숫자는 훨씬 불어나 있었다. 이 데모대가 해산되면서 학생 79명이 연행되었으며 주소와 성명, 보호자 등 조사를 받고 오후 5시가 넘어 귀가조치됐다.

4. 전고생들의 연좌 데모

전주고는 24일 오후 2시부터 있을 ‘4·19사건 희생 학생 합동장례식’에 앞서 오전 9시부터 도청앞 광장에 모여 또 다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이 데모는 전북대와 시내 각급 고교의 호응을 얻어 남문~배차장~KBS(고사동)~역전5 거리~오스카극장(현재 전북예술회관 건너편)~도청 앞으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데모대는 박정근(朴定根) 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고 ‘계엄령 해제’, ‘학교의 개교’, ‘전주 데모대에 폭행한 경관 처벌’, ‘4·19 희생학생 동상 건립’, ‘지사 물러가라’ 등의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한편 이날 합동위령제가 끝난 뒤 전북대 법대 정치과 전대열(全大烈·36회) 동문의 주동으로 전주고 등 시내 각 고교 대표들은 ‘4·19 사상자들을 위한 모금위원회’를 구성했다. 모금위원회 명칭은 ‘구급모금단’이라 했고 단장은 전대열, 남학생 총무 이승재(이상 전주고) 여학생 총무 강혜자(姜惠子, 전여고) 등이 각각 맡게 됐다.

5. 희생자 위한 모금과 질서회복 앞장

이때 결의로 학생들은 학교 모금과 가두모금을 시작했으며 적지 않은 액수가 모였다. 4월 24일 오후 4시에는 당시 전주고 2학년(39회) 박천규(朴天圭), 문현호(文賢豪), 홍영재, 박풍창(朴豊昌) 등 4명이 1만 3천환을 신문사에 기탁했고 1학년(40회) 유정상(柳征相), 윤성섭(尹性燮)(재미), 최효진(崔孝鎭)(재미), 육완태(陸完泰·전북일보), 유종상(柳宗相·외항선 항해사), 이진흥(在美), 소팔낭(蘇八郞)(건축업) 등도 자진해서 모금반을 조직, 모금한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20일부터 시작된 학생 데모는 24일 위령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됐다. 전주고 재학생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질서유지와 희생 학생을 위한 모금, 헌혈 등에 앞장 서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일 내려진 휴교 조치 후 26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함으로써 27일에 전주시내 중학교가, 29일엔 고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학교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다음은 전대열 동문이 회고하는 4·19 혁명에서 전주고의 주도적 역할이다

대화재 사건

=제 3장 전고 북중 대화재

제 1절 반세기의 요람이 잿더미로

1969년 가을 전고·북중은 개교 50년만에 최대 참사를 맞았다. 10월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전고와 북중 교사에 연속적인 대화재가 발생, 교실 태반을 전소시킨 것이다. 이 화재로 전고 교실 23칸, 북중 교실 24칸이 불타버려 3천여 북중, 전고인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고 망연자실해졌다. 첫날(10월27일) 목조로 된 전고가 불탔고 이튿날 같은 캠퍼스 안의 벽돌조 건물 북중(10월28일)이 또 불탔다. 이로 인한 교사, 학생, 동문의 경악과 슬픔은 말할 나위 없고 지역 중심에서 전북을 이끌어온 명문이 삽시간에 불탔다는 점에서 지역사회 전체가 술렁댈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 재학생으로 밝혀진 일이다. 나중에 조사결과 심신미약자로 나타났지만, 재학생이 모교에 방화를 해서 그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고, 북중 역사상 가장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놀라운 이 재화에 당시 교사, 학생과 동문의 충격, 슬픔, 흥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세간의 충격도 매우 컸다. 불타버린 전고 건물(목조)은 낡고 허술한 교사였지만 거기에는 전고의 전통과 혼이 보물처럼 담겼으며, 일제하 압제와 항일 등 50여 년을 견딘 온갖 풍상 어린 역사적 사적이었다.

북중 건물(벽돌 연와조)은 광복 직후 당시 김가전 교장과 교사들 지휘 하에 학생들이 손수 벽돌을 찍고 완주군 소양 등지에서 손수 재목을 날라다 지은 건물이었으므로 그 애착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48년 완공됐으며 건물 정면 화강석 판에 태극 마크와 함께 한자로 ‘獨立記念’(독립기념)이 음각된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화재 이틀간 화마의 불길은 전주 시내 먼 데서도 알아볼 정도로 훤히 타올랐다. 날벼락같은 재난을 눈앞에서 겪은 신강호 교장이 현장에서 졸도 했으며 동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화재현장에 들어가 의자 한 개라도 건지려 동분서주했다. 전고·북중을 20년째 지키던 정문 경비직(당시엔 ‘순시’) 홍성신136) 씨는 화재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전주고 2학년이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진입했던 조순래 동문(48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0월 27일은 선배들 입시가 얼마 안 남은데다 중간고사 직전이어서 도서관이 꽉 찼습니다. 해 진 지 얼마 안 된 초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북중 후배들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도서관으로 피난오듯 몰려오는 거예요. 학교에 불이 났다고요.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우르르 전고 교사로 달려갔지요. 이미 불은 활활 붙었는데 1층 서무과로 달려가 캐비넷, 금고, 타자기 할 것 없이 닥치는대로 꺼내서 운동장에 던지고 또 들어가고 했어요. 학생 수 십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리창 깨진 게 널렸

던지 그때 새끼 손가락 찢긴 상처가 50년이 지난 아직도 있어요. 제 집은 전고 바로 옆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8일은 집에 있다 불난 걸 봤어요. 야밤에 화광이 충천해서 또 뛰쳐나갔습니다. 안타깝게 발 구르고 혹시라도 화재현장에 도난이 있을까봐 밤새 학우들과 모닥불 피워놓고 지켰습니다. 화재 후 연기 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화재 소식에 전주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동문들은 한결같이 제일성으로 “학적부를 건졌냐”며 물었다. 다행히 재학생들 활약으로 북중, 전고 졸업생 명단과 생활기록부 등이 온전하다는 소식에 동문은 한줄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난날 김가전 교장이 “교장실이 비좁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교내에 즐비하던 수십년 동안의 각종 대회 우승컵과 우승기를 비롯해 학생문집, 교지, 옛 사진, 대통령과 국회의장 휘호 등 수많은 기록물·기념물들이 화재와 함께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교사(校舍) 어느 구석에나 수많은 영재들이 거쳐 간 자취와 흔적이 있었으며 때 묻은 손길이 닿아 있었다. 겨레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얼과 뜻이 담긴 곳이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제 2절 힘찬 재건 노력

전북교육의 대표적 전당이고 요람인 북중, 전고 교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비통한 심정이야 비할 데가 없었다. 화재가 발생한 것은 마침 전고·북중 개교 50주년이 되던 해로서 반세기 역사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웅비의 날개를 펼치려던 시점이어서 한층 충격과 슬픔이 컸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교사와 학생, 동문들이 보여준 재기의 몸부림은 세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 다. 그들은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화재 사흘 후 10월30일부터 즉각 정상 수업을 실시했다. 체육관, 강 당, 도서관 신축 중인 건물 등에 얇은 베니어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설치하고 전주시내 각급 학교에서 급 히 보내준 책상과 의자를 배치해 차가운 늦가을 바람 속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와 슬기, 애교심과 학구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의 배움터가 재난에 처했을 때 젊은 학생들이 보여준 애교심은 실로 뜨거운 것이었다. 특히 화재 당시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화재 현장에 뛰어든 북중·전고인들의 용감성과 의 기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으며, 화재 직후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학업에 정진하는 태도는 오 히려 선배 동문에게 귀감이 됐다. 화재 직후부터 북중, 전고를 아끼고 안타까와하는 각계각층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연일 쏟아졌다. 학교 당국은 각계에서 보내준 격려문을 새로 설치된 대형 게시판에 가득 붙여놓아 이를 읽는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격려했다.

제3절 전고·북중 화재 사건 경위(일간지 보도)

전고·북중 대화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 전북일보 등에 연일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첫날은 누전 으로 추정했으나 화재 즉시 한전의 단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이틀 화재가 나자 경찰은 방화로 보고 수 사에 총력, 대화재 며칠 후 범인을 특정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특히 방화범이 당시 전고 3학년에 재학중 이던 조 아무개 학생으로 밝혀져 동창회 및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의 충격과 긴박상을 생생하 게 전하기 위해 대화재 관련 수사 상황, 시민 표정, 범인체포 및 재판 등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들을 모아 전재한다. File:스크린샷 2024-08-14 194136.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18.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34.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249.pngFile:스크린샷 2024-08-14 194303.png

제4절 사과문, 호소문

제5절 전국에서 성원 답지, 의연금 기탁 명단

제6절 법원, 조 피고에 3년 선고

전고·북중 화재의 증거보존신청에 따라 전주지법 손제희(孫濟喜) 판사는 11월 5일밤 9시부터 11시 50분까지 화재현장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조불원(趙不遠) 학생(가명·19)은 순순히 방화사실을 시인했고 방화 경위를 재연함으로써 조군이 방화범인 것으로 더욱 굳어졌다. 밤 9시부터 실시된 현장 검증에서 손 판사는 조군이 방화 직전 도서관에서 나갈 때 시간을 물은 학생들과 화재를 처음 목격한 숙직교사들, 조군이 ‘현상금을 타먹어라’고 말한 학생과의 대질심문 등도 청취했다.

조군은 처음 화재 얘기를 할 때 이제까지 경찰에서 진술한 ‘울적한 영웅심’과 ‘파괴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말 외에 ‘신축교사에 낡은 책상을 옮긴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불태워 버리고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새로운 동기를 밝혔다. 조군은 시종 여유있는 태도로 범행을 재연했는데 증인으로 나온 학생과 시간차 등이 대립될 때는 자신의 말을 내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조군은 5일밤의 현장검증에서 단독범행임도 시인했다. 조군은 그해 11월 7일 검찰에 송치되어 11월 24일에 전주지검 송두영 검사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27일에 선고공판이 있었고 전북일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재판에서는 이만용(李萬鎔) 박사(전주뇌병원장)와 김제권 광주뇌병원장이 조아무개 학생의 정신감정을 했다. 감정 결과 그는 심신미약자로 인정되었으나 시비선악(是非善惡)은 분별할 정도의 의식능력은 있으므로 책임은 면하지 못할 것으로 보아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아무개 학생은 3년 복역 후 출소하여 정상인으로 원만한 생활을 하며 생업에 전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 4장, 1970년대의 전고, 북중

서울대 최다 합격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주고의 입시 능력은 1970년대 들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1978년 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전주고 졸업생(55회)들은 서울대 137명을 비롯해 고려대 27명, 연세대 20명, 전북대 290명을 합격시킴으로써, 전국 유수의 명문을 따돌리고 전국 1위의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해도 재학생 합격자가 88명이나 돼 명문 중 명문임을 입증했다,

1979년 입시에서도 전주고의 영광은 이어졌다, 1979년 전주고 졸업생(56회)들은 서울대 160명을 비롯하여 고려대 40명, 연세대 27명, 전북대에 312명이 합격하여 다시 한번 전국1위 학교임을 과시했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한 재학생만 11명이나 되어 전교생 7명 중 1명이상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