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격랑 속에서: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 1장 시대적 상황, 환희와 실망 === =====1절 군정 하의 교육 ==== ====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 ===제2장 신탁(信託)통치 둘러싼 혼란=== ==== 제1절 ‘민학’ 대 ‘학련’, 학생들간 격렬한 좌·우익 대립 ==== ==== 제2절 좌익, 동맹휴학 선동 ==== === 제3장 독립운동가 김가전 교장 === ==== 제1절 국민 개학(皆學), ‘모두에게 배움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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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시대적 상황, 환희와 실망 ===
=== 1장 시대적 상황, 환희와 실망 ===
=====1절 군정 하의 교육 ====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한민족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1910
년 8월 29일 나라를 잃은 뒤 정확히 34년 11개월 보름만의 일이었다. 혹독한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
나 암흑기는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 새 광명이 온 세상을 비췄다. 작가 홍명희는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
했다.
{{인용문|아이도 뛰며 만세<br>
어른도 뛰며 만세<br>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br>
만세 만세<br>
산천도 빛이 나고 <br>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br>
유난히 명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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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인은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자주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해야 하는 과업을 안게 됐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곧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현대적인 시민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가장 앞서야 할 전제였다. 그러나 가슴 벅찬 환희가 채 식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한반도를 덮쳤다. 민족의 해방은 한국인 자력으로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어서 주도권을 쥘 수가 없었다. 주도 세력의 부재로 한반도가 혼란에 빠진 사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이 땅을 남북으로 자르고 말았다.
 
8·15와 함께 이 땅에 먼저 진주한 소련군은 재빨리 38선 이북에 군정(軍政)을 시행하고 뒤이어 미국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9월 9일 서울에서 재한(在韓) 일군(日軍)의 정식백범 김구 전주방문. 1949.우남 이승만 전주방문. 전주 YMCA 임원들과 기념촬영했다.1949.4.21.제 4 편 광복의 격랑 속에서 149항복을 받고 군정을 실시했다.
 
뒤이어 1945년 12월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국에 최고 5개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 민족의 통일소망을 또 한 번 짓밟고 말았다. 외세의 지배에서 뼈저린 체험을 해온 한민족에게 또 다시 을사늑약의 재판(再版)이라고 할 수 있는 신
탁통치 결정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이에 전 민족진영은 결연히 이를 결사반대하고 전국적
인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다 함께 반탁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밤사이 소련의 지령(指令)에 좇아 찬탁으
로 전환하여 찬탁시위를 벌였다. 공산당의 속셈이 만 천하에 폭로됨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분단의 분수
령을 이룬 반탁·찬탁 대립은 민족적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1945년 9월8일 남한을 접수한 미군은 9월9일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아
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정 실시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전국 각지의 자치기구
들을 강제로 해산하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했다. 특히 미군정은 남한의 공산당 세력
을 철저히 분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남한은 좌우익으로 갈려 서로를 맹렬히 공격하는 등 큰 혼돈 속
으로 빠지고 말았다
=====1절 미군정 하의 교육 ====
====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
====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

2024년 8월 17일 (토) 08:34 판

1장 시대적 상황, 환희와 실망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한민족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1910 년 8월 29일 나라를 잃은 뒤 정확히 34년 11개월 보름만의 일이었다. 혹독한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 나 암흑기는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 새 광명이 온 세상을 비췄다. 작가 홍명희는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 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이제 한국인은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자주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해야 하는 과업을 안게 됐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곧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현대적인 시민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가장 앞서야 할 전제였다. 그러나 가슴 벅찬 환희가 채 식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한반도를 덮쳤다. 민족의 해방은 한국인 자력으로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어서 주도권을 쥘 수가 없었다. 주도 세력의 부재로 한반도가 혼란에 빠진 사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이 땅을 남북으로 자르고 말았다.

8·15와 함께 이 땅에 먼저 진주한 소련군은 재빨리 38선 이북에 군정(軍政)을 시행하고 뒤이어 미국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9월 9일 서울에서 재한(在韓) 일군(日軍)의 정식백범 김구 전주방문. 1949.우남 이승만 전주방문. 전주 YMCA 임원들과 기념촬영했다.1949.4.21.제 4 편 광복의 격랑 속에서 149항복을 받고 군정을 실시했다.

뒤이어 1945년 12월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국에 최고 5개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 민족의 통일소망을 또 한 번 짓밟고 말았다. 외세의 지배에서 뼈저린 체험을 해온 한민족에게 또 다시 을사늑약의 재판(再版)이라고 할 수 있는 신 탁통치 결정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이에 전 민족진영은 결연히 이를 결사반대하고 전국적 인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다 함께 반탁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밤사이 소련의 지령(指令)에 좇아 찬탁으 로 전환하여 찬탁시위를 벌였다. 공산당의 속셈이 만 천하에 폭로됨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분단의 분수 령을 이룬 반탁·찬탁 대립은 민족적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1945년 9월8일 남한을 접수한 미군은 9월9일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아 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정 실시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전국 각지의 자치기구 들을 강제로 해산하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했다. 특히 미군정은 남한의 공산당 세력 을 철저히 분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남한은 좌우익으로 갈려 서로를 맹렬히 공격하는 등 큰 혼돈 속 으로 빠지고 말았다

=1절 미군정 하의 교육

제2절 ‘국대안’ 반대 파동

제3절 학교정상화에 진력

제2장 신탁(信託)통치 둘러싼 혼란

제1절 ‘민학’ 대 ‘학련’, 학생들간 격렬한 좌·우익 대립

제2절 좌익, 동맹휴학 선동

제3장 독립운동가 김가전 교장

제1절 국민 개학(皆學), ‘모두에게 배움을

제2절 ‘전북공립중학교’ 개칭, 혁신과 건설

. 신입생 ‘1천명’ 모집
2북중 새 교가·교훈 제정
3 1947년 전북공립중학교 현황

제4장 북종 교사 신축과 김가전 교장 타계

제1절 학생들 자재 운반, ‘내 손으로 학교를

제2절 개교30주년 맞춰 신축 ‘독립기념관’ 낙성

제3절 김가전 교장 도지사 영전과 순직

제4절 김가전 교장의 가계(家系)

제5절 ‘미래주의자’ 김가전을 돌아보며

제5장 정부수립과 교육

제1절 새 교육법 제정 공포

제2절 학도호국단 창설

제6장 에너지 넘친 북중 체육과 예술

1. 축구부
2. 야구부
3. 광복 후 ‘전북중’ 주요 스포츠 대회 전적
4. 올림피언’ 홍종오
5. 연극반
6. 문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