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제 5장 교세와 교풍=== ====제 1절 전주 북중학교==== ===== 열정 넘친 동문 교사들 ===== ===== 초대, 2대, 3대 교장 ===== ===== 제4대, 5대 교장과 김일옥 교감 ===== ===== 전국제일 교사진-은사록(恩師錄) ===== ===== 교사면모와 에피소드 ===== =====통지표 세목 및 입학금 부담 가중===== ====제 2절 전주고등학교==== =====면학전통 계승, 학습규정 강화 ===== =====개교기념식 풍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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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절 전주 북중학교==== | ====제 1절 전주 북중학교==== | ||
===== 열정 넘친 동문 교사들 ===== | ===== 열정 넘친 동문 교사들 ===== | ||
1953년 2월 15일 1백원을 1환으로 하는 제1차 화폐개혁 단행, 6월18일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 석방, | |||
7월 27일 6·25한국전쟁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 등 국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제3대 유 청(柳 靑) 교장이 | |||
11월 27일 전주상고와 전주남중 교장으로 옮겨갔다. 이어 제4대 전주북중학교 교장으로 69세의 김영배 | |||
(金永培) 교장이 취임했으며, 전주고등학교에는 48세의 배운석(裴雲石) 교장이 취임했다. | |||
북중학교 교사의 연령은 김재권(金在權) 국어 교사의 58세를 제외하면 평균 30대로 김일옥(金一玉) 교 | |||
감의 33세를 기준으로 30대가 15명, 20대가 18명이었으며 전체 교사 35명 가운데 전주 북중 출신이 15명 | |||
이나 되었다. | |||
이처럼 젊은 스승들은 제자이자 후배인 북중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 |||
===== 초대, 2대, 3대 교장 ===== | ===== 초대, 2대, 3대 교장 ===== | ||
1919년 한국에 육고보(六高普)를 세운 일본은 학생들을 통해 침략의 앞잡이로 삼으려고 했으나 북중 | |||
생들은 대한 남아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 |||
이럴수록 일본은 허울 좋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전주북공립중학교로 개칭하고 | |||
식민지정책을 노골화했다. | |||
8·15 해방을 맞아 유청 선생과 김일옥 교감은 북중혼(魂)을 살리는 데 헌신적으로 몸 바쳤다. 초대교 | |||
장이었던 김용환(金龍煥) 교장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목표 아래 사상통일을 강조했고 제2대 김가전 교 | |||
장은 ‘자유, 박애, 지성, 노력’ 교훈 밑에 유청 선생의 보좌로 대 북중(大 北中)의 초석을 다졌다. | |||
개교 30주년을 맞은 1949년 6월 16일, 그 동안 27개월간에 걸쳐 우전면에서 벽돌을 나르고 심지어는 | |||
송광사에까지 가서 목재를 날랐으며 전주천 자갈을 모조리 주워 나를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1백여 교사 | |||
와 2천여 학생의 손으로 신교사(新校舍)가 낙성됐다. 벽돌 2층에 길이 120m의 교사는 23개나 되는 교실 | |||
을 갖추었다. | |||
그 해 12월 23일 김가전 교장이 전라북도 도지사로 영전하며 교감이던 유청 동문이 제4대 교장으로 | |||
취임했다. 유 교장은 오직 실력과 인화만을 내세우고 열성적으로 교육에 전념하다 이듬해 불의의 6·25 | |||
를 맞았다. 본교 교사(校舍)는 7사단에 양도하고 사무 연락은 전주여중으로 정한 학생들은 대부분 학도 | |||
병으로 출정했다. | |||
공산군이 전주에서 퇴각하고 1950년 10월 초 다시 교사를 되찾은 전주북중은 다시 이듬해인 1951년 3 | |||
월 국군 8사단 주둔으로 풍남국교와 남중학교에서 이동수업을 했다. 유청 교장은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 |||
출정했다가 산화한 꽃다운 학생들의 넋을 북중의 애국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1951년 9월 28일 충혼비를 | |||
제막했다. | |||
1952년 11월7일 유청 교장은 자신보다 사랑했던 정든 모교를 떠나고 11월20일 제4대 김영배 교장이 취 | |||
임했다. | |||
===== 제4대, 5대 교장과 김일옥 교감 ===== | ===== 제4대, 5대 교장과 김일옥 교감 ===== | ||
부임 당시 고령 69세의 애국지사 제4대 김영배 교장이 김일옥 교감 보좌로 약 1년을 헌신한 뒤 1953년 | |||
9월 3일 고별식을 했다. | |||
이어 그해 11월 24일 5대 정익성(鄭益成) 교장이 취임하여 인간교육으로 긍지를 심어주었다. 개교부터 | |||
5대 교장까지를 살펴볼 때 인간교육, 의리교육에 치중했으니 이는 광복 이후 혼란과 6·25 전후 사회적 | |||
요구에 본교가 그만큼 충실했기 때문이다. | |||
이 기간 특히 김일옥 교감은 교장 다섯 분을 보좌하며 1943년 9월 30일부터 10년 9개월을 근속했다. | |||
그는 광복과 6·25 한국전쟁을 지낸 전주북중 산 증인이었으며 그의 재직 기간 동안 본교는 전주북공립 | |||
중학교에서 전북중학교로, 다시 전주북중학교로 세 번이나 교명이 바뀌었다. | |||
개교 당시 교장 1명, 일본인 교사 3명이 교직원으로 공회당 건물에서 50명씩 2개반으로 출범한 북중학 | |||
교는 개교 34주년을 맞은 1953년 중·고 합쳐 교사 72명, 학생 3,000명의 명실공히 전국 최고 고등교육 | |||
기관 중 하나로 성장했다 | |||
===== 전국제일 교사진-은사록(恩師錄) ===== | ===== 전국제일 교사진-은사록(恩師錄) ===== | ||
===== 교사면모와 에피소드 ===== | ===== 교사면모와 에피소드 ===== | ||
유재신(柳在新) 전(前) 전라북도 교육감은 1953년 당시 서울법대 출신 27세의 본교 영작문 영어 교사로 | |||
목소리와 체구가 작아 별명이 ‘촌색시’였다. | |||
초임 첫 시간에 영어 단어 중 제일 짧은 단어와 긴 단어를 묻는 학생이 왜 없느냐고 부끄럼을 타면서 | |||
말하던 이 ‘촌색시’ 유 교사는 얼굴이 약간 얽고 호방했던 이윤오(李倫吾) 영어교사와는 대조적이었다. | |||
또한 부임인사 때 영어 교사로 착각했던 미남 이광수(李光壽) 교사는 이미지와 달리 지리를 가르쳤는데 | |||
마침 재학생 중에 처남이 있는 관계로 수업 중 약간 떠들어도 못들은 척 넘어가면서 곧잘 여성편력 얘 | |||
기로 인기를 모았다. | |||
체육 이중엽(李重曄) 교사와 수학 이중필(李重弼) 교사는 형제였는데 별명이 ‘합죽이’던 형 이중엽 교 | |||
사는 체육 이외에도 교련을 담당, 무섭기가 호랑이였으나 뒤에서 학생들이 ‘합죽이, 합죽이’ 부르며 수근 | |||
대면 필경 웃어 버리기 일쑤였다. 동생인 이중필 수학 교사는 학생들이 수업 도중 아무리 수군거리든 말 | |||
든 종이에 적어온 수학문제를 칠판 가득히 써가면서 열강하기로 유명했는데 본교 재직 후 몇 해 안 돼 | |||
타계했다고 전해진다. | |||
당시 생물 담당 오정수(吳丁洙) 교사는 수업시간에 자칭 ‘배구 지도’란 벌을 주며 연습을 잘못 했다거 | |||
나 수업시간에 기침만 해도 “이를 악물어라” 하고 주먹으로 난타한 사나운 선생으로 유명했다. | |||
‘바이올린 약장수’란 별명을 가진 박평수(朴枰洙) 음악 교사는 실기 시험으로 음악 점수를 주다 바쁘 | |||
면 한꺼번에 열 명씩 앞에 세워 놓고 가곡을 부르라고 했다. 음악책조차 없던 궁핍한 시절 그는 수업 중 | |||
에도 혼자 작곡에 열중, 학생들의 무단결석으로 음악시간엔 빈 자리가 많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 |||
훈육주임을 겸한 영어 진종현(晋琮鉉) 교사에게 얻어 맞지 않고서 졸업했다면 그는 아마 북중 졸업생 | |||
이 아니라고 할 만큼 진 교사는 무서웠다. 하지만 진 교사는 호랑이인 반면 아무리 낙제점수 이하가 되 | |||
어도 평균적으로 60점 이상 후하게 줌으로써 학생들을 과락시키지 않은 후한 인간적 면모도 있었다. 영 | |||
어의 또 다른 양종의(梁琮懿) 교사는 항상 깨끗한 더블 보턴 양복 차림으로 ‘외교관이 되지 않고 왜 영 | |||
어 선생이 되었느냐’는 학생들 질문을 곧잘 받기도 했다. | |||
6·25 직후 영어가 강조되던 사회분위기 탓인지 6명이나 되던 당시 본교 영어교사 중 김용관(金容寬) | |||
교사는 행동이나 말솜씨가 꼭 미국인을 닮았기로 유명했다. | |||
역사의 강희술(姜熙述) 교사는 꾸지람할 때면 말 한 마디 없이 칠판을 닦아 백묵가루 투성이인 칠판 | |||
닦개로 머리를 곧잘 때렸으나 학생들은 무서워 말 한 마디 못할 정도였다. | |||
당시 서무과에 머리가 노란 소녀가 사환으로 있었다. 학생들 간 인기가 높아 수업료를 일부러 소녀에 | |||
게 납부하겠다고 수차례 서무과 갔다가 그 소녀가 없어서 못 내고 결국 수업료 미납으로 시험을 보지 | |||
못한 학생이 있었을 정도라는 로맨틱한 일화도 있다. | |||
=====통지표 세목 및 입학금 부담 가중===== | =====통지표 세목 및 입학금 부담 가중===== | ||
====제 2절 전주고등학교==== | ====제 2절 전주고등학교==== | ||
1954년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치욕을 남겼다. 연초부터 집권 자유당의 일방적인 계획으로 마침내 11월 | |||
29일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대한민국 헌정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이승만 | |||
대통령은 3월 27일 ‘현행 한글 맞춤법을 3개월 내에 폐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는가 하면 사찰 정화 | |||
를 유시함으로써 비구승과 대처승 간 불교분쟁이 일어나는 등 혼란기가 계속되었다. | |||
이같은 상황에서 전주고등학교는 ‘조국보위(祖國保衛)는 오직 교육’이라는 장학방침을 굳혔다. 교사들 | |||
은 ‘교사 즉 교육’(敎師卽敎育)이라는 신조 아래 ‘교사 10훈’을 주창하고 실천을 결의했다. ‘항상 수도적(修 | |||
道的) 정신을 가지라. 이것이 사도(師道)의 본령이다’고 시작하는 ‘교사10훈’은 말보다 실천으로, 교육에 대 | |||
한 열성과 순정, 애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참교육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52년 10월 27일 취임한 | |||
제2대 배운석 교장은 이듬해에 문교부령에 의해 문·이(文·理)과 구별이 폐지된 교육상황에서 ‘첫째도 공 | |||
부, 둘째도 공부, 셋째도 공부’를 강조했으며 교훈 ‘자강, 자율, 자립’을 제정했다. | |||
본교의 전(前) 화학 담당 서정상(徐廷祥) 교사는 당시 전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겼음에도 개인적으로 경 | |||
영하던 삼화약국의 이익을 교육에 재투자하겠다는 신념으로 6·25 이후 혼란기에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 |||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장학 혜택을 받은 학생 가운데 김춘영은 전고 개 | |||
교 이래 평균 99.9라는 신화를 남겼다. 서정상 전(前) 교사의 장학제도 제정은 이 고장 장학사업의 효시 | |||
였다고 할 수 있다. | |||
학생들 규율은 무척 엄격했다. | |||
당시 북중과 전고의 2학년 이하를 강당에 모아 놓고 눈 감고 무릎 꿇은 상태에서 실눈만 떠도 목총으 | |||
로 세례를 가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 북중과 전고생이라는 긍지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했 | |||
다. 이같은 엄한 기강, 기율은 우수한 학업을 뒷받침 했지만 한편 전쟁 포연이 가시지 않은 당시 상황에 | |||
서 군대문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 |||
멀리서 상급생이 나타나기만 해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하는 등 상하급생 간의 기율은 자못 긴장 | |||
감이 감돌 정도였으며 만일 타 학교 학생이 본교생을 놀리기라도 하면 전교생이 우루루 달려들 정도로 | |||
애교심과 단합심이 하늘을 찔렀다 | |||
=====면학전통 계승, 학습규정 강화 ===== | =====면학전통 계승, 학습규정 강화 ===== | ||
1950년대 전주고등학교는 4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명문교답게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한동 | |||
안 후관 건물을 사용하던 전북대학이 1954년 10월16일자로 이사를 가자 이곳을 도서실 화학실 물리실 | |||
운영위원회의실 등으로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으며 교육시설 등도 점차 확충되어 면학 분위기가 고조되 | |||
어 가고 있었다. | |||
도내 중학교 졸업생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어려운 입학시험의 관문을 뚫고 입학했기 | |||
때문에 전주고등학교 학생이라 하면 그 실력을 인정해 줬을 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이나 학부모들 | |||
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 |||
매일 방과 후에도 전고생들은 스스로 예습, 복습을 하며 학력을 쌓아 나갔으며 특별활동이나 체육 문 | |||
예부문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보였다. | |||
1955년 문교부장학방침은 ① 반공사상을 투철히 기르고 민주도의(民主道義) 생활을 확립시킴으로써 | |||
통일독립의 전통이 되게 한다 (정신교육) ② 과학기술을 진흥하여 생산을 증강함으로써 경제재건에 이바 | |||
지한다 (생산교육) ③건강교육을 철저히 하여 학도의 체위를 향상시킴으로써 국토방위의 간성(干城)이 | |||
된다 (건강교육) 등이었다. 전라북도 장학 방침은 ① 반공 민주 도의교육 ② 과학기술 생산교육 ③ 건강 | |||
위생 안전교육으로 반공을 위하고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
전고에서는 교육연구위원회를 발족하고 교과 학습규정도 아울러 제정했다. 당시의 경제, 사회 및 문화 | |||
적 여러 현상에 기초를 둔 효율적인 실천교육의 향상을 위해 총무, 기획 분과위원회를 비롯하여 교조사 | |||
(敎組師=학급담임), 학습지도, 생활지도, 특별활동, 환경위생, 교육평가 등 7개 분과위원회를 두었다. | |||
제정된 학습규정의 예를 들면 이렇다. 국어 현대문의 경우 한 수험자가 고사 채점결과 80점 만점에 70 | |||
점을 얻었으면 이를 2배(2단위이므로)하여 140점이 되는데 여기서 그 학생이 평소 교과시간 중에 학습태 | |||
도가 불량(여러 차례 질문에 대답을 못했거나 숙제를 태만했을 경우, 자주 행하는 소(小) 고사(考査) 성 | |||
적이 불량할 때 등)하였음이 수 차 있어 불량점수가 12점(2단위에는 20점까지 적용)이 되면 140점에서 | |||
이를 감하여 128점이 된다. 거기 더해 수업 출석 성적 40점 만점(1단위 20점) 중 수업을 빠진 결과(缺課) | |||
점수 16점(결과 1시간에 1점씩 감점. 즉 16번 결과한 경우)을 감한 24점(40-16=24)을 가산하면 152점이 | |||
되는 셈이다. | |||
그러므로 이전까지는 결과(缺課)가 교과 성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교과시간의 | |||
학습태도와 아울러 수업참여 여부도 학과성적에 반영토록 한 것이다. | |||
조행(組行=학급생활 행실) 평가규정도 제정, 그동안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조행평가 방법을 시정, 객관 | |||
적이며 과학적인 입장에서 개개 학생의 조행상황을 평가토록 했는데 우는 90점 이상, 양은 70~89점, 가 | |||
는 60~69점, 불가는 60점 이하로 했다. | |||
이러한 학사 운영규정에 의해서 영재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전고 전통은 더욱 튼튼한 기반을 다져갔다. | |||
=====개교기념식 풍경===== | =====개교기념식 풍경===== | ||
[[File:스크린샷 2024-08-19 205943.png|400px]] | |||
1954년 6월16일 개교 35주년을 맞은 전고와 북중의 3천여 건아 | |||
들은 이 고장명문으로서의 그 역사와 전통을 다시 한 번 다짐했 | |||
다. 개교 기념 전날 제1회 동창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고광만(高 | |||
光萬) 학장과 제6회 동창인 대검찰청 이정우(李玎雨) 검사가 후 | |||
배를 위한 강연회를 가졌다. | |||
개교 기념일인 16일 아침 9시, 교정에는 내빈 동창 학부형 교직 | |||
원 학생 등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전고 김종철(金鍾喆) 교감 | |||
의 개회 선언이 있었고 전고 사친회 이우식(李愚軾) 이사장의 축 | |||
사, 제1회 동창인 김영배(金英培) 동창회장의 축사가 파란만장한 역사의 감동을 안겨줬다. | |||
북중 정익성 교장과 전고 배운석 교장에게 감사장 증정이 있었고 지사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의 축사 | |||
후에 북중생 대표 이헌재(李憲宰), 전고생 대표 김원기(金元基)의 답사가 있었다. | |||
만세 3창으로 정오에 일단 기념식을 마치고 뒤이어 강당에서 양교 교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동창들이 | |||
참석하여 임시 동창회를 1시까지 가졌다. | |||
1시부터는 친목 도모를 위한 체육경기를 벌였는데 특히 개교 기념으로 본교가 주최한 초등학교 400m | |||
계주경기 종목에서는 완주 봉동초등학교가 1위를 차지했고 단 하나의 여자 선수로 참가했던 풍남초등학 | |||
교의 성초영 어린이가 개인상을 받았다. 부자 동창 일체경기, 동창생 경기, 학생 청백전, 사제 일체경기, | |||
맹인 경주는 석양이 짙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잔치 규모에서 북중·전고 개교기념식은 가히 도민 축제 | |||
를 방불케 했다. | |||
또한 전고·북중 개교 37주년 기념일인 1956년 6월16일엔 전고 3학년 최공엽이 ‘모교송’을 읊기도 했다 | |||
=====은사록(恩師錄)===== | =====은사록(恩師錄)===== | ||
=====전국제일 ‘학력’ 전고===== | =====전국제일 ‘학력’ 전고===== |
2024년 8월 19일 (월) 21:00 판
제 5장 교세와 교풍
제 1절 전주 북중학교
열정 넘친 동문 교사들
1953년 2월 15일 1백원을 1환으로 하는 제1차 화폐개혁 단행, 6월18일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 석방, 7월 27일 6·25한국전쟁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 등 국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제3대 유 청(柳 靑) 교장이 11월 27일 전주상고와 전주남중 교장으로 옮겨갔다. 이어 제4대 전주북중학교 교장으로 69세의 김영배 (金永培) 교장이 취임했으며, 전주고등학교에는 48세의 배운석(裴雲石) 교장이 취임했다. 북중학교 교사의 연령은 김재권(金在權) 국어 교사의 58세를 제외하면 평균 30대로 김일옥(金一玉) 교 감의 33세를 기준으로 30대가 15명, 20대가 18명이었으며 전체 교사 35명 가운데 전주 북중 출신이 15명 이나 되었다. 이처럼 젊은 스승들은 제자이자 후배인 북중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초대, 2대, 3대 교장
1919년 한국에 육고보(六高普)를 세운 일본은 학생들을 통해 침략의 앞잡이로 삼으려고 했으나 북중 생들은 대한 남아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이럴수록 일본은 허울 좋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전주북공립중학교로 개칭하고 식민지정책을 노골화했다. 8·15 해방을 맞아 유청 선생과 김일옥 교감은 북중혼(魂)을 살리는 데 헌신적으로 몸 바쳤다. 초대교 장이었던 김용환(金龍煥) 교장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목표 아래 사상통일을 강조했고 제2대 김가전 교 장은 ‘자유, 박애, 지성, 노력’ 교훈 밑에 유청 선생의 보좌로 대 북중(大 北中)의 초석을 다졌다. 개교 30주년을 맞은 1949년 6월 16일, 그 동안 27개월간에 걸쳐 우전면에서 벽돌을 나르고 심지어는 송광사에까지 가서 목재를 날랐으며 전주천 자갈을 모조리 주워 나를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1백여 교사 와 2천여 학생의 손으로 신교사(新校舍)가 낙성됐다. 벽돌 2층에 길이 120m의 교사는 23개나 되는 교실 을 갖추었다.
그 해 12월 23일 김가전 교장이 전라북도 도지사로 영전하며 교감이던 유청 동문이 제4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유 교장은 오직 실력과 인화만을 내세우고 열성적으로 교육에 전념하다 이듬해 불의의 6·25 를 맞았다. 본교 교사(校舍)는 7사단에 양도하고 사무 연락은 전주여중으로 정한 학생들은 대부분 학도 병으로 출정했다. 공산군이 전주에서 퇴각하고 1950년 10월 초 다시 교사를 되찾은 전주북중은 다시 이듬해인 1951년 3 월 국군 8사단 주둔으로 풍남국교와 남중학교에서 이동수업을 했다. 유청 교장은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출정했다가 산화한 꽃다운 학생들의 넋을 북중의 애국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1951년 9월 28일 충혼비를 제막했다. 1952년 11월7일 유청 교장은 자신보다 사랑했던 정든 모교를 떠나고 11월20일 제4대 김영배 교장이 취 임했다.
제4대, 5대 교장과 김일옥 교감
부임 당시 고령 69세의 애국지사 제4대 김영배 교장이 김일옥 교감 보좌로 약 1년을 헌신한 뒤 1953년 9월 3일 고별식을 했다. 이어 그해 11월 24일 5대 정익성(鄭益成) 교장이 취임하여 인간교육으로 긍지를 심어주었다. 개교부터 5대 교장까지를 살펴볼 때 인간교육, 의리교육에 치중했으니 이는 광복 이후 혼란과 6·25 전후 사회적 요구에 본교가 그만큼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특히 김일옥 교감은 교장 다섯 분을 보좌하며 1943년 9월 30일부터 10년 9개월을 근속했다. 그는 광복과 6·25 한국전쟁을 지낸 전주북중 산 증인이었으며 그의 재직 기간 동안 본교는 전주북공립 중학교에서 전북중학교로, 다시 전주북중학교로 세 번이나 교명이 바뀌었다. 개교 당시 교장 1명, 일본인 교사 3명이 교직원으로 공회당 건물에서 50명씩 2개반으로 출범한 북중학 교는 개교 34주년을 맞은 1953년 중·고 합쳐 교사 72명, 학생 3,000명의 명실공히 전국 최고 고등교육 기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전국제일 교사진-은사록(恩師錄)
교사면모와 에피소드
유재신(柳在新) 전(前) 전라북도 교육감은 1953년 당시 서울법대 출신 27세의 본교 영작문 영어 교사로 목소리와 체구가 작아 별명이 ‘촌색시’였다. 초임 첫 시간에 영어 단어 중 제일 짧은 단어와 긴 단어를 묻는 학생이 왜 없느냐고 부끄럼을 타면서 말하던 이 ‘촌색시’ 유 교사는 얼굴이 약간 얽고 호방했던 이윤오(李倫吾) 영어교사와는 대조적이었다. 또한 부임인사 때 영어 교사로 착각했던 미남 이광수(李光壽) 교사는 이미지와 달리 지리를 가르쳤는데 마침 재학생 중에 처남이 있는 관계로 수업 중 약간 떠들어도 못들은 척 넘어가면서 곧잘 여성편력 얘 기로 인기를 모았다. 체육 이중엽(李重曄) 교사와 수학 이중필(李重弼) 교사는 형제였는데 별명이 ‘합죽이’던 형 이중엽 교 사는 체육 이외에도 교련을 담당, 무섭기가 호랑이였으나 뒤에서 학생들이 ‘합죽이, 합죽이’ 부르며 수근 대면 필경 웃어 버리기 일쑤였다. 동생인 이중필 수학 교사는 학생들이 수업 도중 아무리 수군거리든 말 든 종이에 적어온 수학문제를 칠판 가득히 써가면서 열강하기로 유명했는데 본교 재직 후 몇 해 안 돼 타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생물 담당 오정수(吳丁洙) 교사는 수업시간에 자칭 ‘배구 지도’란 벌을 주며 연습을 잘못 했다거 나 수업시간에 기침만 해도 “이를 악물어라” 하고 주먹으로 난타한 사나운 선생으로 유명했다. ‘바이올린 약장수’란 별명을 가진 박평수(朴枰洙) 음악 교사는 실기 시험으로 음악 점수를 주다 바쁘 면 한꺼번에 열 명씩 앞에 세워 놓고 가곡을 부르라고 했다. 음악책조차 없던 궁핍한 시절 그는 수업 중 에도 혼자 작곡에 열중, 학생들의 무단결석으로 음악시간엔 빈 자리가 많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훈육주임을 겸한 영어 진종현(晋琮鉉) 교사에게 얻어 맞지 않고서 졸업했다면 그는 아마 북중 졸업생 이 아니라고 할 만큼 진 교사는 무서웠다. 하지만 진 교사는 호랑이인 반면 아무리 낙제점수 이하가 되 어도 평균적으로 60점 이상 후하게 줌으로써 학생들을 과락시키지 않은 후한 인간적 면모도 있었다. 영 어의 또 다른 양종의(梁琮懿) 교사는 항상 깨끗한 더블 보턴 양복 차림으로 ‘외교관이 되지 않고 왜 영 어 선생이 되었느냐’는 학생들 질문을 곧잘 받기도 했다. 6·25 직후 영어가 강조되던 사회분위기 탓인지 6명이나 되던 당시 본교 영어교사 중 김용관(金容寬) 교사는 행동이나 말솜씨가 꼭 미국인을 닮았기로 유명했다. 역사의 강희술(姜熙述) 교사는 꾸지람할 때면 말 한 마디 없이 칠판을 닦아 백묵가루 투성이인 칠판 닦개로 머리를 곧잘 때렸으나 학생들은 무서워 말 한 마디 못할 정도였다. 당시 서무과에 머리가 노란 소녀가 사환으로 있었다. 학생들 간 인기가 높아 수업료를 일부러 소녀에 게 납부하겠다고 수차례 서무과 갔다가 그 소녀가 없어서 못 내고 결국 수업료 미납으로 시험을 보지 못한 학생이 있었을 정도라는 로맨틱한 일화도 있다.
통지표 세목 및 입학금 부담 가중
제 2절 전주고등학교
1954년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치욕을 남겼다. 연초부터 집권 자유당의 일방적인 계획으로 마침내 11월 29일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대한민국 헌정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은 3월 27일 ‘현행 한글 맞춤법을 3개월 내에 폐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는가 하면 사찰 정화 를 유시함으로써 비구승과 대처승 간 불교분쟁이 일어나는 등 혼란기가 계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주고등학교는 ‘조국보위(祖國保衛)는 오직 교육’이라는 장학방침을 굳혔다. 교사들 은 ‘교사 즉 교육’(敎師卽敎育)이라는 신조 아래 ‘교사 10훈’을 주창하고 실천을 결의했다. ‘항상 수도적(修 道的) 정신을 가지라. 이것이 사도(師道)의 본령이다’고 시작하는 ‘교사10훈’은 말보다 실천으로, 교육에 대 한 열성과 순정, 애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참교육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52년 10월 27일 취임한 제2대 배운석 교장은 이듬해에 문교부령에 의해 문·이(文·理)과 구별이 폐지된 교육상황에서 ‘첫째도 공 부, 둘째도 공부, 셋째도 공부’를 강조했으며 교훈 ‘자강, 자율, 자립’을 제정했다. 본교의 전(前) 화학 담당 서정상(徐廷祥) 교사는 당시 전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겼음에도 개인적으로 경 영하던 삼화약국의 이익을 교육에 재투자하겠다는 신념으로 6·25 이후 혼란기에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장학 혜택을 받은 학생 가운데 김춘영은 전고 개 교 이래 평균 99.9라는 신화를 남겼다. 서정상 전(前) 교사의 장학제도 제정은 이 고장 장학사업의 효시 였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 규율은 무척 엄격했다. 당시 북중과 전고의 2학년 이하를 강당에 모아 놓고 눈 감고 무릎 꿇은 상태에서 실눈만 떠도 목총으 로 세례를 가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 북중과 전고생이라는 긍지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했 다. 이같은 엄한 기강, 기율은 우수한 학업을 뒷받침 했지만 한편 전쟁 포연이 가시지 않은 당시 상황에 서 군대문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멀리서 상급생이 나타나기만 해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하는 등 상하급생 간의 기율은 자못 긴장 감이 감돌 정도였으며 만일 타 학교 학생이 본교생을 놀리기라도 하면 전교생이 우루루 달려들 정도로 애교심과 단합심이 하늘을 찔렀다
면학전통 계승, 학습규정 강화
1950년대 전주고등학교는 4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명문교답게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한동 안 후관 건물을 사용하던 전북대학이 1954년 10월16일자로 이사를 가자 이곳을 도서실 화학실 물리실 운영위원회의실 등으로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으며 교육시설 등도 점차 확충되어 면학 분위기가 고조되 어 가고 있었다. 도내 중학교 졸업생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어려운 입학시험의 관문을 뚫고 입학했기 때문에 전주고등학교 학생이라 하면 그 실력을 인정해 줬을 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이나 학부모들 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방과 후에도 전고생들은 스스로 예습, 복습을 하며 학력을 쌓아 나갔으며 특별활동이나 체육 문 예부문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보였다. 1955년 문교부장학방침은 ① 반공사상을 투철히 기르고 민주도의(民主道義) 생활을 확립시킴으로써 통일독립의 전통이 되게 한다 (정신교육) ② 과학기술을 진흥하여 생산을 증강함으로써 경제재건에 이바 지한다 (생산교육) ③건강교육을 철저히 하여 학도의 체위를 향상시킴으로써 국토방위의 간성(干城)이 된다 (건강교육) 등이었다. 전라북도 장학 방침은 ① 반공 민주 도의교육 ② 과학기술 생산교육 ③ 건강 위생 안전교육으로 반공을 위하고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고에서는 교육연구위원회를 발족하고 교과 학습규정도 아울러 제정했다. 당시의 경제, 사회 및 문화 적 여러 현상에 기초를 둔 효율적인 실천교육의 향상을 위해 총무, 기획 분과위원회를 비롯하여 교조사 (敎組師=학급담임), 학습지도, 생활지도, 특별활동, 환경위생, 교육평가 등 7개 분과위원회를 두었다. 제정된 학습규정의 예를 들면 이렇다. 국어 현대문의 경우 한 수험자가 고사 채점결과 80점 만점에 70 점을 얻었으면 이를 2배(2단위이므로)하여 140점이 되는데 여기서 그 학생이 평소 교과시간 중에 학습태 도가 불량(여러 차례 질문에 대답을 못했거나 숙제를 태만했을 경우, 자주 행하는 소(小) 고사(考査) 성 적이 불량할 때 등)하였음이 수 차 있어 불량점수가 12점(2단위에는 20점까지 적용)이 되면 140점에서 이를 감하여 128점이 된다. 거기 더해 수업 출석 성적 40점 만점(1단위 20점) 중 수업을 빠진 결과(缺課) 점수 16점(결과 1시간에 1점씩 감점. 즉 16번 결과한 경우)을 감한 24점(40-16=24)을 가산하면 152점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전까지는 결과(缺課)가 교과 성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교과시간의 학습태도와 아울러 수업참여 여부도 학과성적에 반영토록 한 것이다. 조행(組行=학급생활 행실) 평가규정도 제정, 그동안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조행평가 방법을 시정, 객관 적이며 과학적인 입장에서 개개 학생의 조행상황을 평가토록 했는데 우는 90점 이상, 양은 70~89점, 가 는 60~69점, 불가는 60점 이하로 했다. 이러한 학사 운영규정에 의해서 영재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전고 전통은 더욱 튼튼한 기반을 다져갔다.
개교기념식 풍경
1954년 6월16일 개교 35주년을 맞은 전고와 북중의 3천여 건아 들은 이 고장명문으로서의 그 역사와 전통을 다시 한 번 다짐했 다. 개교 기념 전날 제1회 동창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고광만(高 光萬) 학장과 제6회 동창인 대검찰청 이정우(李玎雨) 검사가 후 배를 위한 강연회를 가졌다. 개교 기념일인 16일 아침 9시, 교정에는 내빈 동창 학부형 교직 원 학생 등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전고 김종철(金鍾喆) 교감 의 개회 선언이 있었고 전고 사친회 이우식(李愚軾) 이사장의 축 사, 제1회 동창인 김영배(金英培) 동창회장의 축사가 파란만장한 역사의 감동을 안겨줬다. 북중 정익성 교장과 전고 배운석 교장에게 감사장 증정이 있었고 지사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의 축사 후에 북중생 대표 이헌재(李憲宰), 전고생 대표 김원기(金元基)의 답사가 있었다. 만세 3창으로 정오에 일단 기념식을 마치고 뒤이어 강당에서 양교 교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동창들이 참석하여 임시 동창회를 1시까지 가졌다. 1시부터는 친목 도모를 위한 체육경기를 벌였는데 특히 개교 기념으로 본교가 주최한 초등학교 400m 계주경기 종목에서는 완주 봉동초등학교가 1위를 차지했고 단 하나의 여자 선수로 참가했던 풍남초등학 교의 성초영 어린이가 개인상을 받았다. 부자 동창 일체경기, 동창생 경기, 학생 청백전, 사제 일체경기, 맹인 경주는 석양이 짙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잔치 규모에서 북중·전고 개교기념식은 가히 도민 축제 를 방불케 했다. 또한 전고·북중 개교 37주년 기념일인 1956년 6월16일엔 전고 3학년 최공엽이 ‘모교송’을 읊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