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시대적 배경
제2장 1980년대 교육제도와 전고
제1절 7·30 교육개혁 조치 및 4차 교육과정
1980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과감한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했다. 1980년 7월 30일 ‘학교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방안’을 포함한 ‘7·30 교육개혁조치’를 발표했다. 재학생의 경우 학원 교습을 포함한 일체의 과외 행위를 금지시키고, 이를 어길 경우 엄중한 책임을 묻기로 했다. 이 밖에 ‘7·30 교육개혁조치’ 내용은 1981학년도부터 대학 입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출신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과 예비고사만으로 대학 입학자를 선발하도록 했다. 또한 대학 졸업 정원제를 실시하여 정원보다 많은 신입생을 선발하되 정원 수 만큼만 졸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각 대학에서는 1981학년도에 정원의 130%를 모집하고, 1982학년도에는 150%를 모집한 후 대학 2학년 말까지 전체 졸업 정원의 18%를 탈락시켜야 했다.
제5공화국의 교육 정상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1981학년도부터 대입 본고사가 폐지되고 내신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각 대학에서는 내신 성적과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게 되었다. 과외 금지 조치는 일부 학부모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으나 과외로 학비를 조달했던 일부 대학생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일부 부유층 사이에 불법 과외가 성행하는 등의 부작용과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자 개인 과외를 허용하고, 재학생의 방학 중 학원 수강도 허용했다. 졸업 정원제 역시 당초 의도와 달리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정부는 1985학년도부터는 졸업 정원의 100~150% 범위 안에서 대학 자율로 신입생을 모집할 수 있도록 수정하였다.
이와 함께 문교부는 ‘7·30 교육개혁조치’에 따라 1981년 12월 31일 초중등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제4차 교육과정’을 고시했다. 1983학년도 고등학교 신입생부터 적용된 4차 교육과정의 기본 방향은 ‘국민정신 교육의 체계화, 전인 교육의 충실, 과학-기술 교육의 강화’로 집약할 수 있다. 고교 교과는 일반계 학생들이 주로 이수하는 보통 교과와 실업계 및 특수 목적계 학생들을 위한 전문 교과로 구분되는데 모든 고교생들이 공통과목을 설정하여 이수하게끔 함으로써 자아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일반 교육을 강화했다. 보통 교과 아래 공통 필수와 선택 과정으로서의 인문 사회 과정 교과 및 자연 과정별 교과 및 과목에 따른 단위 수가 제시되는 편제를 이루었다. 이후 과학 분야 영재들을 위한 과학고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각 시·도로 확대되었다.
실업계고 교육과정은 총 204216 단위 중에서 보통 교과가 82122 단위로 상대적으로 비중이 증가했다. 급변하는 사회에 보다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보통 교과를 강조한 것이다.
제2절 5차 교육과정 개정
5차 교육과정은 1987년에 고시된 다섯 번째 전면개정 교육과정으로, 1989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교육과정은 기초교육의 강화,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대응하는 교육, 교육과정의 효율성 제고를 목표로 하였다. 특히,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며 건강하고 도덕적인 인간을 기르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고등학교의 경우, 인문계와 실업계 교육과정이 하나의 문서로 통합되었으며, 국민교육헌장 전문이 포함되었다. ‘총론’과 ‘각론’이 제2장과 제3장으로 명시적으로 구분되었으며, 과학, 체육, 예술 분야의 각론이 다른 계열과 동일하게 안내되는 특징이 있었다.
교육과정의 전반적인 체계는 교과를 ‘공통 필수’와 ‘과정 및 계열 선택’으로 이원화하였으며, 공통 필수과정은 주로 1학년에, 과정 및 계열 선택과목은 주로 2~3학년에 배치되었다.
대학입시는 대학입학 학력고사와 내신 성적을 병행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대학 논술고사가 폐지되었다. 고교 내신 성적을 30% 이상 반영하는 것이 의무화되었고, 과목별 가중치가 도입되었다. 학생 수와 학급 수가 증가하고, 공립 일반고의 증설과 평준화 정책이 확대되면서 외국어 분야의 영재들을 위한 외국어 고등학교가 1990년대 사립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평준화 정책의 지속에 대한 논쟁이 점차 시작되었다.
제3절 교복, 두발 자유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군사력으로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심각한 정통성 결여 문제를 겪었다.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유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7년 단임제를 도입했으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반발을 샀다.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과 사회 운동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동시에, 유화 조치로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1982년 1월 4일에는 중고등학생의 교복 및 두발 자유화를 발표했으며, 1월 5일에는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야간통행금지는 1945년 9월 도입된 이후 37년 만에 사라졌다. 이어 불법 과외 금지, 해외여행 자유화, 프로 스포츠 도입, 졸업 정원제 등의 정책이 발표되었다.
교복 및 두발 자유화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학교 규범이 바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치였다. 교복 자율화는 학생 개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책임감을 기르기 위한 시도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사복 착용으로 인한 유해 환경 노출, 탈선 증가, 교외 생활 지도 어려움, 빈부 격차로 인한 위화감 조성, 사복 구입에 따른 부담 증가 등의 부작용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교복 자율화는 1983년도부터 시행되었으며, 1986년 3월부터는 복장 선택이 학교장 재량으로 돌아갔다. 이후 1991년에는 절반의 학교가 다시 학교별로 디자인된 교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전주고등학교도 1990년부터 교복을 다시 도입했다.
두발 자유화는 남학생의 경우 거의 빡빡머리, 여학생은 단발머리로 획일화된 모습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지나친 자율화로 인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별로 완화된 규정을 두어 시행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이전보다 더 다양한 두발 스타일을 허용받았으나, 각 학교에서 자율성을 발휘하며 학생들의 개별적 필요에 맞춘 규정을 제정하게 되었다.
제4절 대입제도의 변화
제3장 전국 최고 명문으로 도약한 전고
평준화 이후에도 이 고장 명문 전고는 숱한 일꾼을 배출해온 인맥의 산실답게 높은 자부와 긍지를 갖고 영광스런 명문의 전통을 다져나갔다.기미년 개교의 고귀한 정신적인 유산과 3만 동문이 쌓아올린 찬란한 전통 위에 줄기찬 노송의 뿌리를 뻗어가고 있다. ‘자기를 실현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성실하고 유능한 한국인’을 만든다는 교육목표 아래 알찬 교육을 꾀해 전북교육의 본보기가 되었다
제1절 전북 교육의 산실
학력신장을 위한 꾸준한 노력
우선 실력 있는 인간을 만든다는 데 최우선을 두어 학력 신장에 안간힘을 다하였고, 그 구현책으로는 입시 위주의 교수 학습 방법을 지양하고 탐구 실험 실습, 실기 중심의 학습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83학년도부터 교과별 학력에 따른 이동식 학급 편성을 통해 좋은 학습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평준화에서 나타나는 학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영어와 수학을 대상으로 능력별로 상, 중, 하로 구분하여 각기 자기 능력과 수준에 맞는 수업을 받도록 함으로써, 우수한 학생은 우수한 학생으로서, 열등한 학생은 열등한 학생으로서 학력 수준에 맞는 전반적인 향상을 목표로 하였다. 이 방법은 상향식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지속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탐구 능력 배양을 위해 아침 일찍 등교하고 방과 후 남아서 자율 학습을 생활화하도록 하며, 각 교과 영역별로 균형 있는 지도를 실시하여 전인 교육에 기여하였다. 학습 성취도의 평가도 결과뿐만 아니라 의욕 상승과 학습 동기 유발에 초점을 맞추었고, 장기적인 포석으로 객관식 일변도의 집필 검사를 지양하고 주관식 등의 다양한 평가 방법을 동원했다. 시험 위주의 결과 평가보다는 선행 학습을 평가하는 진단 평가와 학습 내용을 평가하는 형성 평가 등을 중시하였다.
이는 시험을 통해 몇 점을 따느냐보다는 자율적으로 학습하게 하는 학습 자세와 태도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20년이 넘는 3층의 도서관을 철야로 개방하는 한편, 아침 새벽부터 저녁 11시까지 학교 교실을 개방하고 교실의 독서실화 운영을 꾀하여 자율적인 탐구 학습 풍토를 조성하였다. 이런 자율 학습 풍토에 알맞는 교실의 조명을 충분하게 조정하고, 학생 체위에 맞도록 책걸상을 조정하며, 곰보책상을 없애고 사철 꽃 있는 학교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대한의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다.
인성교육에도 중점
특히 1983년 9월 부임한 모교 출신 이기원(李起元·19회) 교장은 학력 신장에 못지않게 인성 교육에 진력하였다. ‘노송원(老松苑)의 시간운영’은 본교의 자랑이며 모교애와 긍지를 심고 긍정적인 생활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다. 이는 매주 1회, 총 4회 한 달 간 실시되었다.
첫 주는 설계와 다짐의 시간으로 학급 단위 활동을 통해 명상의 시간과 생활 계획을 수립하고, 둘째 주에는 선배와 은사님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하여 전고인의 얼과 긍지를 심기 위한 교양 강좌를 실시하였다. 셋째 주에는 ‘우리들의 광장’을 마련하여 다 함께 노래 부르기, 음악 감상, 특기 자랑, 우리 고장 소개 등을 진행하였고, 넷째 주에는 자기 점검과 감사의 시간을 마련하여 명상의 시간, 자기 점검표 작성, 자경문(自警文) 쓰기, 감사의 편지 쓰기 등을 실시하였다.
1983년과 1984년에는 사회정화위원회 및 문교부 지정 정화 시범학교로서 각기 과제를 선정하여, 교사는 소명의식을 가진 교원상을 정립하기 위해 알찬 수업하기, 사랑으로 학생과 대화하기, 학생은 바른 생활관 형성을 위해 전고인으로서 품위 지키기, 질서 지키기, 공유물 아껴쓰기, 건전한 취미 기르기 등을 꾀하였다.
또한, 반공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매년 9월 28일에 교정 서쪽에 있는 충혼비에서 6·25 때 희생된 교직원 10명과 무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여 산화한 38위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고자 위령제(慰靈祭)를 실시하여 반공 교육의 장으로 삼았다. 체육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야구와 농구에서 모든 힘을 쏟았고, 문예 활동과 미술 전시회, 수학 경시대회와 지속적 교지 발간은 전고인의 긍지를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입학력고사 3백점이상, 45명이나
평준화 이후에 명문고로서의 전고의 이미지가 흐려지지 않느냐는 일반적인 우려는 한낱 기우임을 확신케 해주었다. 이 근거로는 학력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들 수 있다. 1982학년도 서울대 합격자는 33명, 1983년도에는 38명이었으며, 대입학력고사 300점 이상 고득점자는 전북 307명 중 본교가 45명에 달했다. 1984년도에도 대입학력고사 300점 이상 전북 도내 총 193명 중 전고생이 33명이었으며, 서울대 합격자는 35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과는 다른 학교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문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번 세워진 전통이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쉽게 이룰 수도 없다. 선배들의 채찍질과 격려, 모교의 우수 교사들과 후배들의 노력 덕분에 명문 전고는 평준화 이후 1980년대에도 그 전통을 이어갔다.
제2절 서울대 입시 4년 연속 전국 최고
1978년~81년까지 연 4년간 서울대 합격이 전국 수위를 차지하게 된 데는 먼저 학생들의 상위 목표에 대한 기대감 고취와 교사들의 진정어린 열의, 부모님들의 호응과 적극적인 뒷받침이 밑바탕이 되었다
. 상위목표에 대한 기대감
학습 동기 유발에서 상위 목표에 대한 불붙이기 작전으로, 입학하는 날 최우선적으로 심어 놓는 말은 전고학생이 선발된 학생이라는 지나칠 정도의 우월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이렇고, 우리의 선배들 중 훌륭한 인물의 예를 들어 하늘을 향해 치솟는 큰 꿈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서울대라는 손에 잡히는 목표의식을 심어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서울대만이 대학교냐는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서울대에 많이 합격하는 해에 다른 대학교에도 많이 합격된다는 확실하고 엄연한 논리는 이러한 반론을 일축하기에 충분했다.
교사들 진정에서 나온 열의
학생이야말로 전고의 주역이고 핵이지만, 이들을 이끌어 주는 당시의 교사는 훌륭한 리더였다. 교사들은 자신의 영달보다는 학생의 교육에 헌신하였고, 또한 전고에 근무한다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러한 지고(至高)의 소명의식은 학생에게 내일을 향한 도약에 힘을 주는 발판이었고, 타오르는 열기에 기름이 되었다.
일면으로는 대학교수에게 외국어를 개인 지도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실질적인 대우 면에서도 보충 수업에서 대학의 시간당 강사료의 2~3배 높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교사들의 콧대와 그에 비례해 자기 책임 완수에 몰두하는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학부모와 교사, 혼연일체
자식을 잘 키워야 하겠다는 학부모들의 열의는 다른 지역보다 강했고, 이것은 지역사회 발전이라는 큰 목표와 조화가 되었다. 이는 현실적인 면에서 안전한 직장과 장래성 있는 직장을 갖게 하겠다는 의지적 지향이었고, 생명을 건 사투의 공부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학생, 교사, 학부모들의 혼연일체가 된 힘이 전국 제일의 명문으로 이끌었고, 이는 지역사회의 기대였다.
1980년대의 교육 방법은 우선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통학거리 1km 이내만 인정하여 무조건 학교 근처에 살도록 하여 공부하게 하였고, 아침 학습은 새벽부터 교실이 꽉 메워졌으며, 야간에도 불야성을 이루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서울의 K고, S고와 서울의 이름있는 학원의 시험문제를 그대로 가져와 자율적으로 풀도록 해 자기 확인의 방법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
55~57회, 대학 입시 전국 수위(首位)
제3절 58회 동문, ‘최고 중 최고’
비평준화 입시의 종지부를 찍는 제58회 졸업생은 영재집단의 고별기로서 지난 62년사에서 가장 찬란히 솟으리라는 우리 모두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이들은 입학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모였는데 응시자 중 타도 출신이 118명에 이르렀다. 당시의 입학 커트라인은 연합고사 성적이 200점 만점에 194점으로 가히 놀랄만한 점수였다.
58회 졸업생은 1981학년도 서울대 합격자 무려 177명(재수생 63명)을 양산하다시피 함으로써 전국 수위의 명성을 1978(137명), 1979(160명)학년도에 이어 재확인했다.
이해 58회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서울 명문 대학에 총 363명(고대 106명, 연대 80명 포함)의 합격자를 냄으로써 전통과 역사 속에 성장한 노송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1981년도 대학입시 예비고사에서 300점 이상의 고득점자를 122명이나 낸 모교는 전국 유수의 명문들 간의 실력을 겨루어 고교 내신 점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전고 역사에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명문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임에 따라 각계의 후원도 뜨거워져, 명문대 합격하고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등록금을 마련해 주는 등의 지원이 잇따랐다. 특히 24회 서정상(徐廷祥) 동문 장학금과 기린장학회 및 19회 동창장학금 등의 배려가 컸다.
제4장 평준화 이후 전고의 활약상
전주시가 1979년도에 고교 평준화 지역에 포함되면서 전주고도 평준화에 의해 추첨 배정된 학생들을 뽑아야 했다. 고입 연합고사에 의한 신입생이 배정되면서 종전의 선발집단과 달리 학력 수준 면에서 개인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 현상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평준화 이전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동력 삼아 평준화된 상황에서도 다른 학교에 비해 우수한 입시 성적을 올리기 위해 전 교사를 비롯한 학교 당국은 한마음이 되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평준화로 인해 선발집단에서 오는 지역의 엘리트 의식이나 사회적 책무감 등은 종전보다 희석됐지만, 국가와 지역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긍지를 살리기 위한 동창회를 비롯한 학교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합심해 일치 단결 노력한 결과,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을 그대로 계승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노력에, 어느 학교보다 잘 갖춰진 학습 시설의 영향으로 학력 면에서도 전주고 학생들은 다른 학교에 비해 우수한 편으로 해마다 대학입시에서 전국 명문 대학에 높은 진학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제1절 평준화 초기 전고 분위기
악성 루머 만연
평준화 1기였던 제59회 졸업생 입시 결과는 '평준화'에 따른 전주시내 고교 판도의 재편성을 의미했다. 전고를 제외한 전주 지역의 인문계 고교들이 '타도 전고'를 외치며 도내 고교의 재편성을 도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학부형뿐만 아니라 교육 당국과 학교 관계자까지도 초미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노송원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명문고의 몰락을 기대하고 기정사실화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평준화 세대들은 근거 없는 악의의 소문들에 시달리기도 했다. 고교별 입학제로 입학한 선배들이 평준화 이후를 후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출처 없는 풍문이 나돌면서, 당시 재학생들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한 ‘전주고’라는 명칭이 ‘풍남고’로 바뀐다는 악성 루머까지 만연하기도 했다. 재학생들은 ‘어쩌면 이름도 낯선 풍남고 1~3회가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같은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어난 최악의 악재는 오랫동안 ‘노송원’의 터줏대감으로 명성을 이어오던 전고의 선생님들이 하나둘 교정을 떠나는 사건이었다. 십 몇 년씩 근무해온 선생님들이 ‘고교별 입학제’가 사라지면서 타 학교로 전출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또 다른 선생님들은 대학 교수로 옮겨 가시거나 몇몇 분들은 명문 입시학원의 강사로 전직하기도 했다.
당시 적대적인 시선과 악의적인 풍문만이 학교 밖에서 떠돌고 있는 상황에서 외풍을 막아주고 명문 전고의 명맥을 지켜줄 선생님들까지 큰 변화가 생기면서 재학생들은 더욱 위축되어만 갔다.
‘총기 도난’ 해프닝
1981년 4월,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썰렁한 교정에 느닷없는 한파가 몰아쳤다. 분단국가인 이 나라에서, 더구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비극적인 유혈 참극의 시대적 상황에서 ‘총기도난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전고의 교정에서 교련시간에 총기 분해 실습용으로 사용하던 칼빈 소총 1정이 무기고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정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기고의 자물쇠통이 쇠톱으로 절단되어 있었다느니, 경찰 수사관이 학내에 들어와 이미 수사에 착수했다느니 등등 요란하고 불길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고, 당장 그날 오후부터 재학생들은 교내 수색작업에 동원되었다.
당시 1학년 학생이었던 김병용 동문(백제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61회)은 그때의 상황을 “누군가 나를 의심하면 어쩌지, 나는 죄가 없는데 ‘네가 죄인이지’라고 추궁하면 어떡하지 라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누가 훔쳐갔을까 하는 호기심도 잠시, 가슴 한 켠에 서릿발처럼 돋아나는 두려움을 숨겨야 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총기도난사건에 따른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부터 교내에 구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누군가 총을 화장실 ‘똥통’에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똥 푸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학급당 학생 수가 60명이 훨씬 넘었고, 36개 학급이었으니 학생들의 배변량을 짐작할 수 있을 터라 전주시내에 있는 ‘똥차’들이 전부 총출동했으리라.
또한 학생이 학생들을 탐문하는 일도 벌어졌다. 선배 학생이 후배들 학급에 들어와 ‘너희 중에 범인이 있다. 난 알고 있다. 내가 지목할 수 있지만 자수할 기회를 주겠다’며 엄포를 늘어놓는 일장 연설 겸 탐문 수사까지 한 것이다.
게다가 백발이 성성한 노(老) 선생님까지 학급 학생들에게 ‘미움을 미움으로 풀려 하지 마라’는 감동적인 ‘설교 말씀’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교사가 수사관에게 취조를 받고, 또 일부 학생들에게 그 취조 과정이 노출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전주고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온갖 소문과 억측, 불신이 난무할 만큼 난무한 끝에 마침내 총이 발견됐다. ‘범인’은 불순분자도 아니었고 문제학생도 아니었다. 단지 총기류에 관심이 많았던 한 1학년 학생이 교련시간에 총기 분해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직접 총기를 보자 ‘갖고 싶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온갖 소동이 벌어진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학생이 총기를 되돌려 놓으려다 붙잡힌 것이었다.
그러나 범인이 잡혔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당일 숙직교사와 교련교사 네 명이 모두 노송원을 떠나게 됐다. 헌 무기고를 부수고 새 무기고가 지어지는 등 큰 파문이 일었다.
‘총기 도난 해프닝’은 당시 전주고가 직면했던 위기 상황들이 모두 응결되어 터진 사건으로, 당시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추락을 염려하는 전고의 위상, 교사-학생 간의 은밀한 갈등 등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총기 도난 사건은 당시 전주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모욕과 질시, 자중지란을 겪고 난 뒤에야 전고는 ‘새 중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입시 명문’이라는 치우친 전통으로부터 ‘평준화 시대, 평준화 된 학생 지도의 모범적인 학교’라는 균형감을 얻기 위해 1981년의 전주고는 이 같은 호된 시련을 겪은 것이었다 ====제2절 새로운 교과 학습
교과·학력별 이동수업
1979년도 신입생부터 전고에도 평준화 제도가 적용됨에 따라 학력상의 우열의 차이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학력이 우수한 동질집단에 적용해 오던 학습지도 방법의 모순점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으며, 사회 일각에서는 하향 평준화가 아니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학교 당국은 동질성이 강한 평준화 집단에 적합한 새로운 학습지도 방법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즉, 당시 문교시책을 준수하면서 보다 능률적인 학습지도를 위해 1982학년도 2학기부터 교과별 학력별 이동수업이라는 새로운 학습지도 형태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1982학년도 2학기에는 1학년을 대상으로 하여 영어와 수학 교과에 대해 학력별로 상·중·하의 이동 학습반을 편성 운영했고, 1983학년도에는 2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1984학년도에는 1학년을 대상으로 상·하로만 편성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먼저 수학과의 성적 분포를 보면, 우수급의 상위집단이 150명으로 약 2.5학급, 하위집단이 약 100명으로 1.7학급으로 전체의 약 68%가 44점과 74점 사이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편 영어과에서는 상위집단이 150명으로 약 2.5학급, 하위집단이 41명으로 0.7학급에 해당되었으며, 학급 평균 58.9점, 표준편차 13.0으로 전체의 68%가 학급평균 46점과 72점 사이에 분포되어 있었다.
운영 도중 동일한 시간 배정으로 상위 학습반은 진도가 빠르고 하위 학습반은 진도가 느린 경향을 보였다. 이에 따라 수시로 교과협의회를 개최하고 교과 진도를 비슷하게 맞추도록 노력했다. 특히 열등의식을 갖기 쉬운 하위 반에서는 자극적인 언사를 삼가하고, 사기 앙양에 노력을 기울였다.
뚜렷한 학력 신장
전고 학생들의 학업 성적은 비교 대상인 P고교 학생들에 비해 영어과는 평균 1.8점, 수학과는 3.0점 정도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동질집단의 학습반 편성이 가능해서 능률적인 학습지도가 용이했다. 반면에 상·하위 학생 상호 간에 위화감이 조성되었고, 결강 때에는 보강이 어려웠으며 문제성 소지 학생들의 사고 발생 가능성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양질의 프로그램 개발이 요청된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일선 교사들의 역량만으로는 미흡하다고 판단되므로, 도교육청이나 문화교육부 차원에서 전문가에 의한 프로그램 개발이 선행이 요망되기도 했다
. 평가방법의 개선
1969학년도부터 실시해온 대입 예비고사는 대학 입학자격만 부여하는 제도로서, 전고에서는 예비고사 자체보다는 오로지 본고사 준비에 온갖 정열을 쏟아 왔다. 따라서 평소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 제1교시에 국어, 영어, 수학의 순으로 1과목씩 주 고사를 실시하였고, 매월 1회씩 월 고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종합해 대입 본고사에 대한 진학 지도 자료로 활용하였으며, 연 4회 실시되는 정기고사는 생활기록부 작성을 위한 자료로 삼기 위해 형식적으로 실시해 왔다.
그러나 1981학년도부터 대입 본고사 제도가 폐지되고 대입 예비고사 성적과 고교 내신 성적만 가지고 대학 신입생을 선발하게 됨에 따라 평가의 방향도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정기고사의 비중이 격상되는 반면 월고사는 상대적으로 격하되었고, 주 고사는 아예 폐지되었다. 또한 출제 형태도 객관식에서 주관식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1984학년도에는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의 경우 주관식 평가의 비중을 정기고사에서 10% 이상, 월고사에서 30% 이상으로 하여 출제하였다. 또한 1983학년도부터는 정기고사 평가 방법도 개선되어 과목별로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어: 해독 50%, 문법 10%, 작문 20%, 고문 10%, 말하기 듣기 10%, 계 100% 과학: 과학지식 50%, 실험실습 40%, 과제 10%, 계 100% 체육: 이해 30%, 기능 60%, 태도 10%, 계 100% 음악: 이론 30%, 기능 60%, 감상 10%, 계 100% 미술: 이론 20%, 실기 80%, 계 100% 영어: 해독 50%, 문법 10%, 작문 20%, 회화 20%, 계 100%
제3절 정화 시범학교 운영
{틀:-}} 1983년 3월에 전북에서는 처음으로 중앙사회정화위원회 및 문교부 지정 정화시범학교로 지정된 모교는 공개발표를 1984년 11월 전국의 교육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했다. 그 목적은 학교 정화 시범 활동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자율적으로 바른 생활습관을 형성하고 그 효과의 확산으로 의식개혁 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한다는 데 있었다.
그 과제로는 ‘행동으로 도와주는 교사상 정립’과 ‘생각하며 행동하는 습관 기르기’로 정하고 세부과제로 ‘스승의 품위지키기’, ‘사랑으로 학생 대하기’, ‘알찬 수업하기’를 교사의 과제로, ‘긍지 갖고 생활하기’, ‘내가 먼저 질서 지키기’, ‘공공물(公共物) 애용하기’ 등을 학생과제로 정했다.
교복 자율화로 교외 생활지도 어려움
한국에 근대 중등교육이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오던 교복과 머리 모양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1983학년도부터 일제히 자율화됨에 따라 중·고등학교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변화가 일어났다. 전고도 교복시대에는 노송(솔방울)을 상징하는 모표에 흰 선을 산뜻하게 두른 모자에다가 자주 빨아서 약간은 색이 바랜 듯한 교복 차림에서 전고인의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으나 이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모표는 축소되어 배지가 되고 간편한 복장에 머리 모양도 개성 있게 손질함으로써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낄 수는 있게 됐지 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따르기 마련이었다. 우선 다양한 복장으로 학부모들의 부담이 많이 늘어났고 학교마다의 특색이 없어졌으며 학년마다의 구별은 물론 일반인과의 혼동으로 학생 신분에 어긋나는 비행과 사고가 잇달아 학생 교외생활 지도에 어려움을 가져오기 도 했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의 생활지도를 위한 유관기관 활동이 다각적으로 모색되었다. 청소년들에 한해서 야간통금을 부활하고 교복을 자율적으로 다시 착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었으나, 보다 더 적극적인 계도와 홍보로써 과도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학생 생활지도에 임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전고의 자율화 방향
전고는 교복의 자율화에 따른 지침을 마련하고 학생들이 신분에 벗어나는 과도한 사치나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지도하였다. 교복은 개성에 맞는 일반복장을 선택하되 값이 비싸거나 유명 메이커의 제품을 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것도 피하도록 했으며 머리 모양은 장발을 금하고 산뜻하고 청결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했다.
학교를 표시하기 위해 모표를 축소하여 배지로 만들고 이를 왼쪽 가슴 깃에 부착토록 했다. 또한 가방도 책과 교련복이 들어가는 실용적이면서도 학생들의 품위를 잃지 않는 것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교복 자율화는 학생 개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책임의식을 갖게 하는 등 교육적 효과와 긍정적 평가가 있었다. 반면 사복을 착용함으로써 학생들이 유해 환경에 쉽게 노출되는 등의 탈선 우려가 제기되고 학부모들의 의복 비용 부담 증가, 빈부 격차에 따른 학생 간 위화감 조성 등의 문제점이 발생, 사회적으로 사복 착용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뒤따랐다.
이에 따라 교복 자율화는 시행 3년 뒤인 1986년 3월부터 선택을 학교장 재량에 맡겨 다시 교복을 입는 학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주고도 1990년부터 교복을 선택해 다시 입기 시작했다.
제6장 학생 특별활동
제1절 문예·미술·음악 등 활발
전고학생들의 특별활동은 개교 이래 다재다능한 학생들이 많아서 문예, 체육, 미술, 음악 등 각종 방면마다 뛰어난 기량을 나타내면서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왔다. 학교에서 정규수업으로 전주고보시절부터 실시해오던 유도를 비롯하여 체육, 음악, 미술시간 등을 마련해 학생들의 정서 함양과 체력 증진에 힘써왔다.
- 교내 구기대회
오랫동안 실시해 오던 교내 단축마라톤대회가 교통문제 등을 이유로 1970년대에 사라진 아쉬움이 있지만, 대신 ‘교내구기대회’가 신설되어 학생들의 체력 향상에 노력했다. 1980년대 ‘교내체육대회’로 명칭이 바뀐 이 대회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실시됐으며 종목으로는 육상, 배구, 농구, 테니스, 유도, 줄다리기가 겨뤄졌다.
- 동아리 조직
1980년 7월 30일 교육정상화조치 이후에 학생들의 특별활동이 강화되어 교내에는 30여 개에 달하는 동아리들이 구성됐다. 동아리들을 보면 서예, 웅변, 문예, 미술, 합창, 현악, 원예, 낚시, 바둑, 레슬링, 사진, 유도, 고전연구, 한문, 지구과학, 화학, 영어회화, MRA(도덕재무장), 청소년연맹, 독서, 태권도, 농구, 야구, 테니스, 등산, 배구, 핸드볼, 배드민턴 등 체육의 거의 모든 분야와 문화, 예술, 취미 등 다양한 분야에 학생들이 활동했다. 이 모임에는 1, 2학년 전원이 의무적으로 선택 가입해야 하며, 이는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됐다. 학생 활동시간은 매주 1학기에는 2시간, 2학기에는 1시간씩을 배정하여 쉬지 않고 연중 계속됐다. 각자가 쌓은 실력은 1년에 한두 차례씩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서로 닦은 기량을 선보이도록 되었다. 각 분야에는 지도교사가 있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학생들 또한 학업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방과 후 또는 휴일에도 열심히 활동했다.
- 각종 대회에서 두각
전주고는 종래의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와 정서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학생들도 나름대로의 소질과 취미를 살려 개인적으로는 원만한 성격 형성과 신체 단련을 이루게 되므로 학습 능력 향상에도 크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도 많아서 각종 대회와 모임에도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학교의 명예를 빛내기도 했다. 이렇게 학교에서 많은 분야에서 특별활동을 실시하니, 재정적인 지원도 많이 요하며 이 점에서 각계의 각별한 관심과 성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학교의 분위기도 교육 평준화 조치 이후 모든 명문학교가 그렇지만 전주고도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유도시간이면 잉크 묻은 유도복이 많아 공부하는 면이 엿보이고 학생 얼굴마다 학구열에 불타는 모습이 역력했으나, 1980년도 이후 학생마다 개성이 뚜렷하며 밝고 활달한 분위기였다. 특별활동을 통해 인성도 많이 순화되므로 사고도 적어졌고, 인간관계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 문예부
문예부에서는 교지를 해마다 발행하여 학생들의 글 솜씨를 싣고 있다. 교내에서 실시하는 문예활동으로는 교내 백일장을 비롯한 반공 독후감 쓰기, 반공 백일장 등이 있어 학생들의 문장력을 길러줬다. 대외적으로는 통일 글짓기 대회, 자유 교양 경시대회, 고전 읽기 독후감, 반공 글짓기, 질서 확립 글짓기대회, 예능 경연대회 등에 참가하여 1, 2위를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 미술부
미술부에서는 학교 밖에서 개최하는 전고 미전을 해마다 열어 그 솜씨를 과시했고 각종 대회에도 참가하여 여러 차례 입상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국 청소년지도자협회 주최 학생서예대회, 이동천 최우수상 △전국 자연보 호 포스터 모집, 고병구(금상), 한광희(동상) △전국 과학포스터 모집, 이병규 우 수상 △홍익대 조선대 청주대 등 개최 전국 미술실기대회, 다섯 번 우수상, 아홉 번 특선 △전북도교육위원회주최 미술실기 대회, 다섯 차례 특상, 여덟 번 우수
상“
- . 음악부
그동안 특별활동으로 합창부를 조직하여 매년 교내 음악회를 열어오고 있으며 특히 1981년에는 현악 부를 조직하여 각종 예능경연대회에 참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입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북 중등예능경연대회(80.10.31), 이사열 독창부 우수상. 82년 시 예선 합창부문 우수상, 현악합주 특상 △도(道) 본선(82.10.21), 현악합주 장려상 △청주대 음악경연대회(83.6.20), 김호성 독창부 3위 △전북중 등예능경연(83.6.22) 합창부 우량상, 현악 4중주 특상, 현악합주 특상, 독창 장려상 △중등예능경연 도 본선,
현악 4중주 특상, 현악합주 우수상. 이같은 수상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전고는 3학년에겐 일체의 공식적인 동아리 활동을 금지하고 대입준비에 온 정력을 쏟도록 독려했다“
제1절 문예·미술·음악 등 활발
제2절 과학, 기타 및 체육활동
제7장 전고 체육부 활약
제1절 개요
전주고등학교의 체육부 활동은 일찍이 전주고보 시절부터 활발하여 야구나 축구, 농구 등은 그 전통이 50년 가까운 오랜 연륜을 쌓고 있다. 특히 광복 후 1948년 5월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올림픽에 홍종오(洪鍾五·24회) 동문이 육상 마라톤 부문 대표선수로 출전하여 모교의 영예뿐 아니라 국위를 선양했다. 또한 아시아경기대회 육상 넓이뛰기 부문에서 신기록을 수립하고 그 후 여러 차례 국제경기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서영주(徐永珠·30회) 동문의 활약과 육상 장거리 부문 한석동(34회) 동문의 장거도 전고의 자랑으로 남았다. 구기 부문에서도 광복 공간부터 1950년대까지 전주고 체육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이후 뜸하다 1970년대 야구부와 테니스부가 재건됨으로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체육 기금 모금으로 야구부가 재창단됐다. 이어 1980년대 들어 야구부, 농구부 등이 더욱 활성화되자 이를 육성 발전시키기 위한 기금 마련이 절실해졌다. 전고·북중 총동창회에서는 동문 결집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개교 65주년(1984년 6월 16일)을 즈음해 대대적인 체육 기금 모금 활동에 들어갔다.
모금 활동 시행방안으로 당시 발간된 ‘전고·북중 65년사’를 동문에게 전달하면서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 동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졌는데 특히 서정상 동창회장(24회·전북신문 사장)이 800만원, 송삼석(宋 三錫) 재경동창회장(23회·모나미화학 사장)이 1,000만원, 김선홍 재경동창회 부회장(28회·기아산업 회장)이 1,200만원을 내는 등 거액 기탁이 잇따랐다. 아울러 이기원 당시 모교 교장(19회)의 진심어린 호소로 재학생까지 동참하는 등 동창 선후배의 정성으로 총 1억 4,000만여원이 모금됐다. 이중 필요경비 4,000만원을 제외한 1억 30만원을 1987년 6월 15일 총동창회 정기총회 석상에서 동창회가 모교에 전달, 전주고 체육 기금의 종자돈이 됐다.
제2절 야구
전주고 야구는 1925년 창단된 후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1940년대 해체됐으며 광복후 다시 결성, 전국최강을 구가하다 1967년 다시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 10여년 후 3만여 동문의 성 원과 모금에 힘입어 1977년 3월26일 본격적인 팀으로 창단된 전고 야구부는 그간의 야구 갈증을 한꺼번
에 씻어버리려는 듯 창단 초부터 전국 구장에 ‘전고’ 깃발을 휘날리더니 마침내 한국고교야구 정상에 서 게 된다. 1985년 ‘황금사자기’ 우승이 그 클라이막스였다.
창단 8년만에 황금사자기 우승
전주고 야구부는 창단 불과 2년 열흘 만에 전라북·남도를 통틀어 호남을 제패(호남우수고교 초청야구대회 우승·1979년 4월 6일)하고 그해 가을 사상 첫 전국대회(제60회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우승 시상대에 오르는 감격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전국 고교야구대회 메이저급 우승 트로피가 필요했다. 동아일보사 주최 1985년 ‘제39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절호의 기회였다.
전고는 2년 전인 제37회 황금사자기 지역예선 1차전에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에 오히려 역전승하며 황금사자기 꿈을 부풀렸으나 이후 부진으로 예선 탈락, 서울행 본선 티켓을 놓친 적이 있다. 이 같은 경험 때문에 전고의 ‘황금사자기’ 열망은 더욱 컸다. 마침내 2년 뒤 찬스가 왔다. 전고는 지역예선을 통과하며 '황금사자기'에 한 발짝 다가섰다.
‘야구동호인회’ 발족, 전고야구회보’ 발간
. 전고 야구 후원회, 기금 기탁자 및 야구부 명단
제3절 농구
‘농구전고’ 바탕을 닦다
전고 농구는 이미 전주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어 50여 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나 일제 강점기나 광복 직후에는 별다른 특징 없이 그저 체육 과목의 하나로 경기를 갖는 정도였다. 농구가 이론 실기 면에서 차츰 체계가 잡히고 본격적인 훈련을 통해 틀을 갖춘 것은 1950년대 모교 제32회 졸업생 재학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용근 교사가 특히 농구에 관심을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열성을 기울였던 것이다. 지금 70대 중반의 동문들은 당시 전고 농구 선수들이 교문 바로 옆 농구코트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열심히 뛰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어려운 실정에서 시작된 전고 농구는 불행히도 경기 운이 따르지 않아 전국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지원도 원활치 않아 1960년대 한때 해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교 코치던 박광준 동문(朴光準·40회, 전 전북농구협회 경기이사)이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서 농구부를 존속시키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함으로써 전고 농구는 구사일생, 해체를 면하게 됐다. 당시 박광준 코치는 팀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열흘간만 말미를 달라”고 사정한 후 곧바로 상경, 농구를 좋아하는 몇몇 동문들을 찾아다니며 통사정 끝에 호응을 얻어낸 것이다. 당시 대법원 재판연구관이던 이강국 동문(李康國·40회, 전 헌법재판소장·현 제17대 총동창회장)이 앞장서서 100만원의 성금을 모아줬으니, 이것이 전고 농구 재기의 발판, 오늘날 영광 시대의 단초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 농구 원로인 오수철 교사가 북중학교 체육담당으로 재직, 전고 농구의 중흥을 예고했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출신으로 1948년 제4회 런던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 가드였던 오 교사는 학생들에게 고급 농구 기술을 알려주고 수업 시간에 올림픽 참가 경험 등을 들려줬다. 특히 그는 훗날 국가대표 스타 박인규(52회)를 북중에서 직접 발굴, 훈련시켜 전고와 연세대에 진학시키며 대기의 기틀을 닦았다.
1962년 준공된 실내 체육관도 전고 농구의 화려한 앞날을 가능케 한 인프라였다. 준공 당시 ‘한강 이남 국내 최고시설’이란 찬사를 받은 전주고 실내 체육관은 농구 전용 경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전국체육대회 농구 지역예선은 물론 김영기, 신동파, 문현장 등 당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출동한 국가대표 경기, 전국종별 농구 선수권 등 굵직한 경기가 전고 실내체육관에서 열려 전고생들의 눈높이를 한껏 높였다. 당시 라이벌 군산고와의 경기가 있는 날엔 실내체육관이 떠나갈 듯 응원 열기에 휩싸였다. 북중, 전고생들은 이를 보기 위해 수업과 수업 사이 휴식시간 10분을 이용해 짧은 ‘4분 관전’을 즐기기도 했다. 본관에서 체육관까지 뛰어 와(3분) 잠깐 경기를 본(4분) 후 다시 부리나케 교실로 달려가 수업 시작 직전 자리에 앉았던(3분) 것이다.
농구부 숙소 마련과 전주고-군산고 농구제전
전고 농구부는 동문들의 성원에 힘입어 차츰 전력이 향상되었고, 1979년에는 전국 3위라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박광준(朴光準) 코치를 비롯한 농구 애호 동문들은 농구부를 근본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수들이 침식을 같이하며 훈련에 열중할 수 있도록 숙소를 마련해야겠다는데 뜻을 모았다. 어려운 일이지만 숙소 건립에 나서기로 했다. 김용철 동문(46회·대도중기 대표)이 골재를 책임지기로 하고, 한영귀 동문(49회·한영상사 대표)이 시멘트 100포대를 희사했으며, 특히 모교 재직 동문들 또한 수도와 전기 시설을 맡아 주면서, 어렵게만 생각되던 농구부 숙소 건립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총 350여만 원이 투입된 27평 크기의 농구 숙소가 이같은 눈물겨운 노력 끝에 1979년 12월 27일 체육관 뒤편에 아담하게 세워져 준공을 보게 되었다.
박광준 코치는 숙소가 마련되자 더욱 선수들을 채찍질하여 전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으나, 계속 예산이 부족해 선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그의 부인과 어머니까지 동원, 숙소에 같이 기거하면서 15명이나 되는 선수들의 수발을 도맡기도 했다. 박 동문은 모교에서 6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으며 11년 동안 세 차례 코치를 맡아 통산 17년간 모교 농구를 위해 심혈을 쏟아온 산 증인이다. 이와 함께 숙소 마련을 위해 아끼지 않고 지원해준 후원회장 이춘영(李春永) 동문, 부회장 권재택 동문, 한상석, 유철종, 이길구, 홍석신, 김용철, 김현수 동문 등의 노고도 전고 농구사에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전주고 농구와 군산고등학교 농구는 1960년대부터 도내 고등부 농구의 쌍벽을 이루며 가히 용호상박이었고, 그 우의(友誼)도 매우 깊었다. 흡사 고·연전을 방불케 하는 친선 경기를 1981년 11월 양교가 기분 좋게 합의하여 ‘전·군고 농구제전’을 만들었다. 그간 두 도시를 오가며 매회 2차례씩 경기를 가졌으며, 1회 때는 전주, 2회 때는 군산, 3회 때는 전주에서 교대로 경기를 가졌다. 이때마다 재학생 경기와 올스타 경기를 함께 진행하였으며, 승패보다는 친선을 도모하고 향토 화합과 발전을 위한 큰 잔치로 키웠다. 경기 개최지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우의를 다짐하는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는 전국 어느 지방에도 없는 매우 뜻깊은 제전으로, 1983년 10월의 전주 대회 때는 1승 1패를 기록하며 매회 화합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동문 농구선수와 구단
박인규 동문
제4절 테니스, 유도, 전국체육대회
전주고등학교는 1972년에 대화재 사건 이후 교내에 새롭게 테니스 코트를 신설하며 테니스부를 창설했다. 이 신설된 테니스부는 창설 1년 만에 전국 강호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단숨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코치를 중심으로 선수들은 매일같이 강행되는 고된 훈련을 마다하지 않고 기량을 착실히 다져, 불과 1년 만에 전국 코트를 평정한 것이다.
특히 신생팀 전고 테니스는 1973년 대통령기 전국 테니스 대회 남고부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당시 10년 이상 우승을 독차지하던 대구상고를 물리치고 최강의 명성을 떨쳤다. 이 승리는 전국을 놀라게 하며 모교의 명예를 한껏 드높였다. 같은 해, 오원식(53회) 동문을 비롯한 전고 테니스부의 주전 멤버들은 한·일 교류 경기에서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해외에까지 국위를 선양하며 '테니스 전고'를 널리 알렸다.
이후 전고 테니스는 1980년대까지 10여 년 이상 전국 최강의 자리를 지키며,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 전고 테니스부의 성장은 팀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동문들의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며, 이는 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아 있다.
제5절 역도 ‘작은 거인’ 전병관의 쾌거
전병관(全炳寬·65회) 동문에게는 ‘세계의 역사(力士)’, ‘작은 거인’ 등 별명이 따라다닌다. 모두 놀라움과 애정, 신뢰가 담긴 별명이다. 전 동문은 산골짜기인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177에서 농사를 짓는 전덕린 씨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령중 1년 때 체육교사 권유로 바벨을 들기 시작한 전 동문은 불과 2년 뒤인 1984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될 만큼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다. 이듬해 전고로 진학한 전 동문은 1학년 때 127.5kg란 경이적인 기록으로 바벨을 들어 올려 ‘소년 역사’(力士) 칭호를 받았다. 이후 전 동문은 꾸준한 연습을 통해 계속해서 기록을 경신했으며 52kg급과 56kg급에서 한국 학생, 한국 주니어, 한국 최고기록을 모두 보유하게 됐다.
고려대 체육과에 진학한 전 동문은 한때 운이 따르지 않아 아쉽게 메달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지난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가 금메달은 떼어논 당상이라고 여겼지만 전 동문은 그만 체중 조절에 실패해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전 동문은 이 같은 실패를 거울삼아 1988년 서울 올림픽 52kg급에서 은메달을 획득,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동메달(김창희) 이후 32년 동안 올림픽에서 침묵을 지키던 한국 역도의 숙원을 풀었다. 이어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역도에서 마침내 ‘금’을 들어 올려 한국 역도 사상 첫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1948년 런던올림픽 미들급 김성집의 동메달 이후 한국 역도가 들어올린 44년 만의 금빛 개가였다.
‘학력 제일’과 ‘개인주의’란 이미지가 짙던 인문계 고등학교 전고에서 전병관 동문은 무척 소중한 존재다. 그는 성실과 신뢰, 배려의 상징으로 전고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개교 이래 70여 년 간 수많은 영재들의 ‘명문대 입학’으로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병관 동문은 묵묵히 바벨을 들어올리며 혼자서 해냈다. 모교를 보통 사람들의 땀과 꿈의 본산으로 각인시킨 것이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전고를 빛낸 사람들’ 상(1999년)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8장 학교시설 및 학생 동아리 활동
학교시설 및 학생 동아리 활동
개요
시설현황
제2절 학생 동아리 활동
- 죽순(竹筍)
전고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교내 동아리(=서클, 클럽) 활동도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동아리가 ‘죽순’이다. 죽순은 1954년 창립됐다. 당시 2학년이던 김진홍, 송대섭, 최동률, 김종익, 김철현, 송원섭(이상 33회) 동문들이 주축돼 만들었다. 동아리 명칭은 아무리 거친 땅과 불리한 기후에서도 곧게 자라나는 대나무의 곧고 지조 있는 정신을 따라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자는 뜻에서 그 대나무의 학창시절이라 할 수 있는 새순, 곧 죽순을 따게 됐다. 1957년 전주 시내 조직 폭력배들과 다툼(투구봉 사건)에서 ‘죽순’이 동료 학생에 대한 책임감으로 선봉에 선 이후 거친 인상이 있었으나 죽순은 언제나 기본 취지인 친목과 학업 정진을 벗어나지 않았다. 교내 동아리 중 처음 생긴 ‘원조’ 급이다. 전고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단성 서클로서 매년 하·동계 수련회, 춘·추계 체육대회, 매월 실시하는 학습 등을 되풀이하면서 선후배간 우정을 돈독히 하고 학교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노력해왔다. 고등학교 친목 서클인 만큼 그 활동 범위를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로 제한하고 있다. 동아리 역사가 오래된 만큼 1980년대 이선희(46회·전 김제 청하중학교 교장) 동문 등 ‘죽순’ 출신 선배가 학내 지도 교사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죽순’의 학습은 생활과 밀접한 ‘사색과 한자성어 풀이’, ‘영어 독해’ 등으로 이루어지며 매달 학습위원을 정해 번갈아 가며 학습 준비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E.D.M.O.S
‘미래가 요구하는 참된 청소년이 되자’는 다짐 아래 전고생 8명이 학교장 승인 아래 1966년 창립했다. 전주시내 여고와 합동 모임을 가지는 전고 내 혼성 서클 다섯 개 중 하나이다. E.D.M.O.S는 ‘English Dialogue Meeting On Saturday’(토요 영어 회화 모임)의 첫 글자를 따 이름 지은 것이다. 선후배와의 유대관계를 다지고 학교생활에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성실을 기하자는 뜻을 두고 동아리의 첫째 활동인 영어 학습도 종래 입시 위주 학습을 떠나 회화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를 다루었다. 처음엔 영어 회화, 학습 위주로 활동했지만 역사가 깊어지고 회원들의 창조성과 진취적 기상으로 점차 다양하게 폭을 넓혔다. 매년 2월에 가지는 총회가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이다. 서울과 전주에서 번갈아 열리는 이 행사는 부자뻘, 모자뻘 이상 나이 차가 되는 선후배 간에 격의 없는 대화로 동아리에 깊이와 활력을 준다. 여름과 겨울의 동아리 MT(멤버십 트레이닝, 회원 친목) 또한 중요한 행사이다. 잠시 학업을 떠나 자연에 도취되어 나를 알고 친구를 알며 나라를 생각하는 구심점이 되고, 회원 간의 협동심 함양에도 한 몫을 담당한다. 봄, 가을로는 교내 혼성 5개 서클 체육대회(FEMPB)에 참가하여 서클 간 친분과 화합을 다진다.
- 보이스카우트
전고 보이스카우트로는 전북 첫 고교 제 ‘501 연장대’로서 지난 1959년 생긴 유서 깊은 동아리다. 녹색 베레모, 빨간 항건, 가운데 세 손가락을 모으는 ‘삼지’ 등으로 상징되는 보이스카우트는 자칫 잘못하면 잃기 쉬운 자연과의 대화를 찾아 활동하는 모임이다. 텐트와 캠프 파이어, 오리엔티어링, 하이킹, 잠행, 암벽 등반 등 활기찬 야외 활동과 ‘1일 1선’(一日一善)의 봉사활동으로 건전한 심신 배양을 도모한다. 다른 스카우트와는 다른 전고 스카우트만의 특색이 있다. 바로 교훈에 있는 ‘자율’이다. 대장은 단지 선배 스카우트의 자리에서 지켜볼 뿐이다. 계획에서 정리까지 모든 활동을 대원 스스로 결정해서 행하도록 한다. 대부분의 활동이 교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이스카우트는 대외적으로 전고를 대표하는 동아리이다. 61년 역사, 전고 보이스카우트도 이미 ‘환갑’을 지났다. 전통의 동아리라는 자부심과 함께 전고 보이스카우트는 오는 2023년 전북 새만금에서 열리는 세계잼버리대회에도 참가해 모교를 빛낼 계획이다.
- C.S.S.C
C.S.S.C는 과학 분야에 목적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서 과학에의 진로를 굳히고 또 흥미 있는 과학 문제에 관하여 실험하고 서로 토의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쌓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혜 보따리를 풀어 나누어 가지는 서클이다. 서클 명칭은 ‘Cheon-ju Highschool Science Study Club’(전주고 과학 학습 클럽)의 약자이다. 2학년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정기 학습은 현재 과학 원서를 중심으로 한 영어 장문 독해와 학력고사 문제를 중심으로 한 수학 문제 풀이, 수업 진도에 쫓겨 미처 해보지 못했던 여러 과학 분야의 기초 이론의 토론 등으로 순서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학습에만 그치지 않고 딱딱하고 모난 책상을 떠나 여러 단체 체육 활동과 겨울이나 여름 방학을 이용한 MT를 통해서 야외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고 이러한 단체 생활을 통해 회원 간의 친목을 한층 더 도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회원들 간의 단결 및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에 힘쓰고 학습 시간 동안 서로 이야기하며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해줌으로써 진로 결정과 학과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 라매불
1966년 창립, 전주고등학교와 함께 반세기 이상을 동행한 라매불은 “꾀를 벗어라(라·裸)”, “매력 있는 생물이 되어라(매·魅)”, “태양을 씹어라(불·佛)”라는 3강령 아래 재학 당시에는 상호 친목 도모와 관계 증진으로 보다 바람직하고 건전하며 모교와 서클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청소년상 건립에 주력하고 있다. 졸업과 사회 진출 후에도 여러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여 선후배 간 친목 유지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라매불의 첫째 축자인 ‘라’(=‘꾀를 벗어라’)는 황폐해진 현대 사회에서 서로의 가식적이고 허식적인 옷을 모두 벗고 잠시나마 순수하고 푸른 마음으로 돌아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자는 뜻이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토론회를 마련하여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자체 모임과 전고 내 타 서클과의 친목 체육대회, 대학 선배와의 만남, MT, 총회 등 활동을 하고 있다. 졸업생들 역시 전주, 서울, 부산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상호 긴밀한 연락과 간담회, 운동회를 통해 긴밀히 접촉하고 있다.
둘째 ‘매’(=‘매력 있는 생물이 되어라’)는 사회와 세계가 요구하고 있는 매력 있는 인간이 되자는 뜻이다. 이에 따라 재학생의 토론회 주제도 철학, 문학, 역사, 문화, 시사 등 다양하며 지덕체의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며, 졸업생들도 모교와 지역 사회 발전에 힘이 되고자 불철주야 뛰고 있다.
셋째 ‘불’(=‘태양을 씹어라’)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절인 고교 시절에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창조적이며 능동적인 전고인, 라매불인이 되자는 뜻이다.
- 청소년연맹 ‘한별단’
올바른 청소년 가치관 확립과 우리 주체의식을 확고히 하도록 노력하는 서클이 청소년연맹 한별단이다. 전고 한별단은 1983년 3월 20일 발단식을 했다. 봉사활동과 협동 생활을 통하여 건전한 청소년이 나가야 할 길을 배우며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본받고 고적지 답사, 전통문화 조사 등을 통해 민족의 뿌리를 찾고 계승하는 청소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올바른 국민정신을 갖기 위해 우리말 찾기, 준법정신 실천 운동 등의 활동을 하며, 땅굴 견학, 호국 유적 탐방, 사관학교 생활 등을 통해 호국 정신을 키우고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이 여름방학을 통한 야영 활동과 수상 훈련이다. 야외 야영을 통하여 단원들 간의 협동심을 고취하고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자립심 등을 키운다. 수상 훈련을 통해서는 물 위에서 지켜야 할 안전 수칙, 인명 구조 요령 등을 배워 나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사고 발생 시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다른 학교 한별단과 유대를 통해 폭넓은 친구를 사귀고 건전한 이성 관계를 통해 이성 간에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배우며, 희망자에 한해 해외 연수를 통해 국제교류 상호 친교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며 민족 주체의식 함양과 국제 사회에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갖기도 한다. 또 사회봉사 활동으로 학교 행사장에서의 안내, 교통질서 운동 참가, 불우이웃 돕기, 복지시설 위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요즘은 새 생활 새 질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제9장 ‘졸업 30주년’ 기념행사
지나치게 나열적인 내용이므로 제외했습니다.
제10장 민주화와 언론 자유에 헌신한 전고인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단재 신채호)이기도 하다. 전주고 1백년사에 흐르는 이 투쟁의 정 체성은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일제 강점기 항일의 혼에서 비롯돼 광복공간·한국전쟁 시기에 의기 (意氣)로 분출되면서 주로 ‘민족’에 바쳐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4·19 학생혁명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 환·노태우 독재시대를 거쳐 최근까지 도도하게 흐른 전고인의 ‘민주화’ 투쟁이다. 이중 후자는 특히 1980 년대에 극점에 이르러 오늘날까지 영광과 상처로 남았다. 수많은 동문들이 학교와 직장에서 쫓겨나고 심 지어 삶 자체로부터 추방됐다. 1980년대는 그런 의미에서, 명문대 진학률이 전국 최고였다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고가 ‘명문고’ 역할을 한 시기다. 그것은 지식인의 의무다. 이 장에서는 전고인들이 외면할 수 없었던 시대적 고통과 양심을 두 동문의 기고로 증언한다. 이 장을 기고로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제단에 바친 전고인들의 처절한 투신을 팩트와 무기명만으로 대하기엔 오 히려 미흡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장은 아직 현재진행형의 역사고 이른바 ‘호남의 영재’들에게 남 겨진 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