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고 북중 100년사와
사진으로 보는 전주고·북중 100년사 책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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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장
제1대 김용환, 제 2대 김가전 제3대 유청, 제4대 배운석, 제5대 김신직, 제6대 공원택, 제7대 이종표, 제8대 최도철, 제9대 신강호, 제 10대 최득엽, 제11대 김병문, 제12대 김순만, 제13대 유재신, 제14대 하재홍, 제15대 이기원, 제16대 김성하, 제17대 공귀섭, 제 18대 황기연, 제 19대 오근량, 제20대 지영호, 제21대 백창기, 제22대 이원택,제 23대 신정균, 제24대 박진홍, 제25대 김정기, 제26대 라구한
1919~1929
동맹휴학
사건전개
전주고등학교는 개교 당시 조선교육령에 의해 한국인에게만 입학자격을 준 4년제 한국인 학교였으나, 1922년 신 교육령에 의해 일본인도 입학 가능한 5년제 한일 공학 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때 전환기에 처한 재학생들은 시험을 거치고, 5년제 고등보통학교의 상당학년에 편입됐으며, 일본학생들과 갈등을 겪는등 문제가 생겼다,
4년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던 학생들은 일제식 교육이 불만스러운데다, 수학 연한이 연장되는 신학제를 마땅치 않게 여겼으며, 검정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하는 부담마저 안게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쌓인 불만이 터져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벌이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3·1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탄압으로 좋지 않던 분위기에, 일인 교사들은 한인학생들이 한국어를 쓰면 그 벌로 변소 청소를 시키는등, 이른바 당번청소를 시켰다, 학생들은 이러한 처사가 "한국인의 천부적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것이며, 교원 조직도 불만스러우니 무자격 교사를 유자격자로 교체해 줄것과 모든 시설을 학생 편의 의주로 개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내면적으로는 일제와 일본인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유였다, 동맹휴학의 주역들은 전주시 교동 낙수동골에서 희동하여 기념사진을 찍은뒤, 맹휴를 결의하여 결행했다, [1]
이 동맹휴학에는 전교생이 참여했지만, 주동은 3학년이었다, 이는 4,5학년 학생들의 진학과 취직에 지장이 없도록 3학년 학생들이 주모를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로써 3학년 생들은 무더기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일부 학생들은 명퇴학[2]이 됐고, 다른 일부는 자원퇴학[3]으로 처리되었다, 이 자원퇴학은 표면적으로만 자신이 원한것으로 가장됐을뿐, 실제로는 일제와 학교당국이 갖은 수단과 압력으로 학생 스스로 학업을 포기토록한 악랄하고 비열한 경우였다,
영향
전주고등보통학교 최초의 동맹휴학은 지역사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대상이 됐다,
일본인 교장 추방사건
1926년, 한국인 학생을 차별하는 등의 행패를 부렸던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을 학생들이 손을모아 추방한 사건. 전주고보(현 전주고)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전국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전주고보 동맹휴학이 발생한지 2년만에 또 다시 전주고보에서 항일 동맹 휴학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신임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은 평소 한인학생과 일인학생(전체 학생의 약 10%)을 차별대우하고 '한인은 불결한 저질민족'이라는 등의 망언을 하는 등 학생들에게 불쾌한 충격을 주고 민족적 감정을 촉발시켰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걸핏하면 폐교하겠다는 교장은 학교를 폐교하러 온 사람이지 우리의 교육을 담당하러 온 사람이 아니니 그런 교장은 추방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판단, 나카타 도미사쿠 교장의 추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추방 사건의 시작을 알린건 시한부 맹휴였다. 3학년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50여 명의 이름으로 5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6월 2일부터 4일까지 시한부 맹휴에 들어갔다. 학교 당국자들의 답변을 들은 뒤 추후 태도를 결정하자는 학생들의 뜻이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학생들의 교장 및 일본 교원 배척 요구를 무시하지 말 것
② 기숙사를 철시할 것
③ 유도, 검도를 가르칠 것
위의 입장을 밝힌 학생들은 이 문제를 학부형들에게 일임하고 일단 학생 본연으로 돌아가 6월 5일부터 등교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장은 학생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곤 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맹휴에 대한 소감을 차례로 말하게 하여 맹휴 당위론을 주장한 학생을 퇴학처분했으며, 한민족에 대한 막말과 멸시 언행을 더욱 심하게 했다. 이에 격양된 학생들은 도미사쿠 교장을 교문 밖으로 강제 추방할 것을 최후 결심하고 2학년 학생들도 가담시키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전화선을 미리 끊어둘 절단반, 운동장 주변 경비반, 교직원 자전거 튜브 바람 빼기반, 숙직실 경비반과 독려반을 미리 편성하고 맡은 부서와 임무를 결정했다.
1926년 7월 1일, 마침내 결단의 날이 찾아왔다. 아침 8시 5분 타종을 신호로 전교생은 우천체조장에 예정대로 집결하였다. 당시 강당이 없던 까닭에 비오는 날 조회,훈화,체조 등을 하는 곳을 우천체조장이라고 하였다. 행동대원 3학년 이문기, 변영진, 임걸영, 유갑현, 송병채, 김학우, 공점권, 유순도 동문과 2학년 전석권, 김부영, 유훈석 등 10여명은 교장실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교장의 팔 다리를 네 명이 붙들고 이문기는 엉덩이를 쳐들어 올려 합세해서 130m 가량 떨어져 있는 교문까지 끌어낸 뒤 "나가 버리라"며 추방했다.
나가타 교장은 혼비백산 맨발인 채 전라북도 경찰국과 내무국 학무과로 뛰어가서 봉변의 전말을 하소연했고, 이같은 일대거사를 까마득히 모르다 뒤늦게 인지한 일제 경찰은 즉각 출동하여 전주고보 학생이라면 눈에 뜨이는 대로 무차별 포박 연행하였다. 경찰은 학생들을 줄줄이 엮어 사건 전말의 조사와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워낙 연행된 학생수가 많은지라 포승이 부족하여 전주농업학교(현 병무청자리)에서 모내기 못줄을 징발하여 포승 대신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일경은 주모·주동자 10여명을 색출하여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형을 과하고 기타 관련자는 '명 퇴학'또는 '자퇴' 형식으로 학교에서 쫒아냈으며 이때 고창고보, 서울의 중동고보 등으로 전입해 들어간 전주고보 학생도 상당했다.
교장 추방사건의 주동자는 옥구 출신 정태성(당시 3학년)으로 밝혀졌으며 1학년 학생 일부와 2,3학년 대부분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사건에 힘을 받은 1, 4, 5학년 중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은 학교당국과 일제에 항의하면서 2,3학년의 저항에 동조하여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7월 8일에 예정되어있던 전주시민대회가 취소되고 대신 전주청년회가 시민유지회를 열면서 '전주고보 교장추방' 사건은 전주 시민 전체의 관심사이자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제는 1926년 12월 25을 기해서 특사가 있었다고 하나, 이미 타교로 전학한 학생들은 복학을 거절하였고, 극히 제한된 학생에 한해 전주고보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실제로 돌아온 사례는 없었다는 점에서 전고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 당시 한 전주고보 졸업생이 졸업 후 취직이 되어 간 곳이 도내 장수군청이었는데 출근하고 보니 문제의 나가타 도미사쿠 전 교장이 장수군수로 재임하고 있기에 바로 사표를 쓰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일제는 지탄받는 인물들을 군수나 학교장 자리에 앉혀 놓고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해서 한국인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고 괴롭혔으나 전고인들은 어느 자리에서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1926년의 전주고보 맹휴와 교장 추방사건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는 구호를 제시하고 식민지 교육 체제 하수인인 나가타 도미사쿠 교장과 일인 교사에 대한 추방운동을 강력히 추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마음 심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항일의식을 표출한 쾌사였다.
1930~ 1940년대
묵음 시위
동맹휴학, 교장 축출 등 개교 이래 그치지 않고 이어진 일제에 대한 항거는 1040년대 들어 무언의 묵음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묵음 시위는 22회 동문들이 입학하던 1940년대부터 시작됐다, 행렬이나 대열의 뒤에서부터 음...하는 소리로 집단 시위를 하는것이다, 주변 교사가 다그치면 소리는 사라지지만 교사가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또 묵음이 나오는 등 신경질적이고 게릴라적인 시위방식으로 교사들 골머 리를 앓게했다. 당시 5학년 유승렬 동문은 남들이 다 조용한 데도 혼자서 음.:하다가 그만 들 통이 나서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줄 나기도 했다. 평소 운동장 조회 때 일본인 교사가 지휘대 단상에 올라 한국인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얕잡 아 혈뜬는 훈화를 하거나 행렬 중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음...음.." 하며 입을 다물고 여기저기서 콧속으로 소리를 내는 항변의 시간을 가졌다. 일본인 선생들은 아무리 단속하려고 해도 아예 허사였다. 왜냐면 "음...음."하는 소리는 입을 열지 않아도 가능하였고, 따라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내기 때문에 주동자를 색출해내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교사들이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면 그쪽에서는 소리가 멎고, 다른 쪽에서 또 소 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면 또 다른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 등 숨바꼭질이 되풀이 됐다. 그 당시 이 "음..-음..." 소리는 전주북중에 다니는 학생이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신호였다. 즉 인기 없고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일본인 교사에 대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요,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욕구 불만의 표시였다.
1950년대
1960~70년대
서울대 최다 합격
1919년 개교 이래 60년간 학력 제일을 놓치지 않던 전주고의 입시 능력은 1970년대 들어 그 진면목을 과시했다,
1978년 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전주고 졸업생(55회)들은 서울대 137명을 비롯해 고려대 27명, 연세대 20명, 전북대 290명을 합격시킴으로써, 전국 유수의 명문을 따돌리고 전국 1위의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해도 재학생 합격자가 88명이나 돼 명문 중 명문임을 입증했다,
1979년 입시에서도 전주고의 영광은 이어졌다, 1979년 전주고 졸업생(56회)들은 서울대 160명을 비롯하여 고려대 40명, 연세대 27명, 전북대에 312명이 합격하여 다시 한번 전국1위 학교임을 과시했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재수생을 제외한 재학생만 11명이나 되어 전교생 7명 중 1명이상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