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개요

1960~70년대 전주고 역사

제2장 1960년대의 전고·북중

제1절 시대의 서막 - 4·19 혁명과 전고생 데모

‘3·15’ 부정선거와 마산(馬山) 의거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여파는 1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소요에 휘말리게 만들고 있었다. 1개월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소요에 이어 3월11일 마산에서 대규모 학생, 시민의 데모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여파는 남원출신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당국의 미온적인 처사가 더욱 더 불을 지른 결과를 가져왔다.

연이어 3월 18일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학생데모는 마산 소요사건을 처리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정국을 다시 극도의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4월 18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다가 해산,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 데모대가 을지로 4가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10여명이 숨지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서울시내 대학생 데모

4월 19일 날이 밝자 이 소식은 서울시내 각급 학교에 전해졌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음대, 미대 및 대광(大光)고등학교의 데모대는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도 불구하고 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의 구호는 ‘민주주의를 바로잡자’, ‘공산주의 타도하자’, ‘민주 위한 학생데모 총칼로 제지 말라’, ‘학원자유 보장하여 구국애족 선봉되자’, ‘이놈 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력이 이적이냐’ 등으로 대부분 구국일념에 불타 있었으며 이 시위가 민주회복을 뜻하는 것이지 절대 용공(容共)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데모는 경찰 곤봉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했고 연도의 시민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19일) 오후 2시 55분 서울신문사가 불타기 시작했고 세종로 파출소, 적선동 파출소가 소각되면서 무질서 상태로 들어갔다. 또한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어 곳곳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 같은 혼란상을 방지하기 위해 19일 오후 5시를 기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전주에서도 학생 데모

평온했던 전주에서도 20일 아침부터 데모가 시작됐다. 이날 오전 9시 조금 지나 전북대생들의 데모가 시작됐는데 이들은 고사동 연초제조창(현 SK뷰아파트) 앞에 모여 두 패로 갈려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다가 역전5거리에서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으며 일부는 연행되어 가기도 했다. 19일 밤 전국에 내린 문교부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이날 아침 등교한 학생들의 일부가 데모를 주동한 것이다.

아침 학교에 나왔다가 굳게 닫힌 교문과 휴교조치를 내린 게시판을 보고 발길을 돌린 전주고 학생 1백여 명도 스크럼을 짜고 시내 중앙동 거리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 전고생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어깨동무를 한 후 시민들의 궐기를 외쳤다. 시내 곳곳을 누빈 전주고 데모대는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행진을 계속했고 통일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들 데모대는 도청(현 전라감영 신축부지) 앞에 이르러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했으나 시위 도중 전북대, 공고, 상고생 및 시민들이 합류되어 숫자는 훨씬 불어나 있었다. 이 데모대가 해산되면서 학생 79명이 연행되었으며 주소와 성명, 보호자 등 조사를 받고 오후 5시가 넘어 귀가조치됐다

전고생들의 연좌 데모

전주고는 24일 오후 2시부터 있을 ‘4·19사건 희생 학생 합동장례식’에 앞서 오전 9시부터 도청앞 광장에 모여 또 다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이 데모는 전북대와 시내 각급 고교의 호응을 얻어 남문~배차장~KBS(고사동)~역전5거리~오스카극장(현재 전북예술회관 건너편)~도청 앞으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데모대는 박정근(朴定根) 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고 ‘계엄령 해제’, ‘학교의 개교’, ‘전주 데모대에 폭행한 경관 처벌’, ‘4·19 희생학생 동상 건립’, ‘지사 물러가라’ 등의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한편 이날 합동위령제가 끝난 뒤 전북대 법대 정치과 전대열(全大烈·36회) 동문의 주동으로 전주고 등 시내 각 고교 대표들은 ‘4·19 사상자들을 위한 모금위원회’를 구성했다. 모금위원회 명칭은 ‘구급모금단’이라 했고 단장은 전대열, 남학생 총무 이승재(이상 전주고) 여학생 총무 강혜자(姜惠子, 전여고) 등이 각각 맡게 됐다.

희생자 위한 모금과 질서회복 앞장

이때 결의로 학생들은 학교 모금과 가두모금을 시작했으며 적지 않은 액수가 모였다. 4월 24일 오후 4시에는 당시 전주고 2학년(39회) 박천규(朴天圭), 문현호(文賢豪), 홍영재, 박풍창(朴豊昌) 등 4명이 1만 3천환을 신문사에 기탁했고 1학년(40회) 유정상(柳征相), 윤성섭(尹性燮)(재미), 최효진(崔孝鎭)(재미), 육완태(陸完泰·전북일보), 유종상(柳宗相·외항선 항해사), 이진흥(在美), 소팔낭(蘇八郞)(건축업) 등도 자진해서 모금반을 조직, 모금한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전주 학생혁명 주체 중 한 명인 전대열(36회) 동문이 후배들에게 ‘4·19’에 관해 특강하고있다. 276 전고 100년사20일부터 시작된 학생 데모는 24일 위령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됐다. 전주고 재학생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질서유지와 희생 학생을 위한 모금, 헌혈 등에 앞장 서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일 내려진 휴교 조치 후 26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함으로써 27일에 전주시내 중학교가, 29일엔 고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학교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제2절 전고 중흥 시대의 개막

6·25 전쟁의 소용돌이가 점차 안정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 혁명기를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 60년대이다. 1960년 4·19 학생혁명에 이어 이듬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 1963년의 제3공화국 출범, 1965년 반만년 한국 역사상 첫 해외 군대 파병(월남), 69년의 3선개헌 파동 등 기록에 남을 정치·사회적인 변화가 거듭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격동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이후 서서히 안정의 기반을 닦아나온 전고는 변함없이 공부하는 학교,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명문고로서의 힘찬 발돋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전고는 특히 엘리트 의식이 강하여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우수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만큼 학교생활이나 교외활동에서 모범적인 행동을 보였으며 체육활동, 문예서클 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여 모교 명예를 빛내는데 기여했다.

당시 대학문화가 빛을 내지 못할 때 전고를 중심으로 사상, 교양적인 모임이 자주 열렸고 미술, 음악, 문학 등의 발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문화예술을 꽃 피운 점은 전고 동문 모두에게 긍지와 자부심 을 느끼게 한 자랑스러운 연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전고교육의 기본 방침 .

1960년대 전고는 5개 기본 교육방향을 ①대한민국 건국이념과 교육목적을 투철히 인식하게 하고 청년학도로서 본질과 부하(負荷)된 사명을 철저히 자각하게 한다. ②자강, 자율, 자립(自彊, 自律, 自立)의 교훈 밑에 자주적인 인격도야와 창의적 활동을 추구하여 독자적 생활 능력을 구유하게 한다. ③반공 방일 사상을 철저히 고취하여 신의, 협동, 애경의 도의심에 입각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철저히 길러 조국의 통일 자주독립을 유지 발전하게 하는 역군이 되게 한다. ④과학적 사고력과 그 기술을 진흥하며 근검절약의 정신함양으로 생 산증강의 역군으로서 현명한 소비자로서 건실한 경제생활을 하게 해서 국가경제 재건의 초석이 되게 한다. ⑤신체의 건전한 발육과 체육의 향상을 기하고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기백을 배양하며 국토방위의 간성이 되게 한다로 정하고 면학풍토 조성에 힘썼다.

면학 분위기 .

1960년 전고에 입학한 학생(40회 졸업생)들은 정치적인 격변과 학원의 불안정 속에서 3년을 보낸 셈이 됐다. 공교롭게도 1960년 입학생들은 6·25전쟁 다음 해인 195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학생들로 본인들이 느끼지 못했다 해도 사회, 학교, 가정에서 정치적인 소용돌이, 사회 혼란, 정돈되어 가는 교육을 접촉하고 살아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서 청소년기를 지낸 신입생들이지만 그들은 학교교육에 잘 길들여진 2, 3학년 선배들과 빠르게 융화할 수 있었고 이같은 기류는 그들이 졸업하는 1963년 2월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1960년대 학생들이 4·19, 5·16, 3선 개헌 등으로 이어지는 정국의 급격한 변화에서도 학생의 본분을 끝까지 지켜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본래부터 전주고가 가지는 이른바 ‘공부하는 학교’, ‘선택된 엘리트 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있어서 학교 전체를 지배했던 기류는 어쩌면 정치적인 면을 떠나 초연해버리는, 일종의 현실 도피주의적인 사고가 팽배해 있었던 듯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재학생들은 문예, 특히 문학, 미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특히 60년대 초반의 학교는 학교 자체가 가지는 교육의 독립이라든가 하는 문제에서 동떨어진 상태였는데 그것은 4·19학생 혁명과 5·16 군사정변이 가지는 정치적 와중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잦은 교사들의 이동, 젊은 교사들의 대거 유입이 이 시기의 학생들의 실력 향상엔 도움을 주지 못했음이 사실이지만 전주고가 가지는 면학분위기의 특수성으로 그런대로 전통의 맥은 이어나갈 수가 있었다.

  • 프라이드 강한 전고생

자부심이 강하다는 이유 때문인지 학생들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들의 프라이드가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것은 당시를 돌아보는 동문들의 똑같은 생각들이었다. 그 때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예로 드는 말은 이렇다. 광복 후 취임한 김가전 교장이 “한국에서 제일 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전북인이고 전북에서 제일 좋은 머리를 가진 학생들이 들어가는 곳이 전고와 북중이다. 따라서 북중 학생은 전국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 그러므로 북중은 전국에서 제일 좋은 학교다. 이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아니 나올 수 없다” 하는 논법이 학생, 나아가서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내외의 분위기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지 않고 학교 환경 또한 깨끗하게 정돈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공부들은 잘해서 대학 진학률은 전국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5·16군사정변 직전까지의 교사진이 좋았던 것도 큰 영향이었다. 50년대 말부터 61년 5·16 직전까지의 전주고 교사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최고 수준이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의 실력은 자연히 대내외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 실력이 뛰어난 교사들[1]

농담 삼아 하던 얘기였겠지만 ‘당시 전고 교사진은 유수한 대학교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고 했고 실제 당시 교사들 대부분이 4·19와 5·16이후 대학으로 진출해 상아탑 안에서 후학을 기르는데 이름을 날린 명교수들이 되었다.

따라서 전주고 학생들은 고교 때부터 대학 교수에게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교사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은 고교 수준을 벗어난 학자풍의 재담들이었으며, 교육 전수의 수준은 초고교급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요즈음과 같이 대입 위주의 교육이 아닌 진정한 전인(全人)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에 바탕을 두어서인지 3학년에 진학한 후 대입준비를 서둘러도 항상 성적은 뛰어났다 할 수 있다.

  • 문약한 기질 속에서도 인재 많아

1960년, 61년 전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교내의 기풍은 문약(文弱)에 흐른 감이 없지않았다. 원래 인문계 학교여서인지 특히 문약(文弱)에 흐르는 풍조를 보인데다 두 번의 혁명을 거치는 동안 일종의 현실도피의 사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후 1960년대 공업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그에 따른 공업계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아졌고 실제로 그 당시 이과(理科)에 지원했던 졸업생들이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생산직의 책임자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 사범 병설고생(師範 倂設高生)의 편입

1963년 교육대학이 생기면서 사범병설고등학교(師範倂設高等學校)가 폐쇄되고 그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전고에 편입되어 왔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한 사람만 전학을 가거나 와도 영향이 있을 터인데 3개 학급의 1백90여명(41회 졸업)이 한꺼번에 편입이 되어 왔으니 편입되어 온 학생들은 물론 받아들이는 기존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동안 학생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이리저리 휩쓸리며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대학입시 제도의 혼선
일류 고교 공동 입시 관리 .
학교 시설

제3절 학생 특별 활동

각부 활동 상황

1. 각 부 활동 상황 1962년 5·16군사정변 직후에 그간 학생활동을 주도했던 학도호국단이 해산되고 대신 재건학생회가 구성되었다. 이와 별도로 전고생들은 각 부서별로 활발한 활동과 노력을 했으며, 이는 자연히 재건학생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재건학생회는 다시 학생회로 바뀌어 어려운 여건과 예산 속에서도 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소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각자의 명예를 빛내고 각자의 꿈을 키웠다. 학생회 산하에는 10여개의 특별활동부서가 있었는데 체육, 문예, 음악 등 각 분야별로 지도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이었다.

체육분야를 보면 전고가 문교부 지정 체육연구 학교가 되면서부터 더욱 더 활발한 활동을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축구부는 62년에만 전국규모대회에 전북대표로 3회 출전했고 호남지역 대회만 다섯 번 출전해서 패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전고 축구부는 지방에서는 가장 강력한 팀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농구부 또한 좋은 전적을 거두었다. 농구부는 패하긴 했지만 국제친선 농구대회에 출전, 일본 경도고와 싸웠으며 전국농구 선수권대회에서는 강적인 중동고와 휘문고를 꺾기도 했었다. 농구부 또한 전북 지역에서는 상대가 될 만한 팀이 없을 정도였다.

새로 조직되어 일천한 역사를 가진 검도부는 신생팀이지만 전국 학생 검도대회와 전국체전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다. 태권도부 역시 신설됐지만 각종 대회에 다섯 번 출전하여 네 번 우승하는 등 압도적 전력으로 지난날 ‘무술 전고’ 전통을 계승했다. 특히 전국체전에서 고등부 우승을 한 것은 학교 안팎의 경사였다.

미술반도 인문계 학교의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활동을 해서 각종 대회에 입상했다. 특히 처음으로 미술전시회를 공보관에서 열어 대외적으로 그 면모를 과시했으며, 이는 또한 전고미전(全高美展)의 효시이기도 했다.

문예반은 전고생 모두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자질과 문학적 소양을 갖춘 학생이 많았다. 일반 학생들의 호응도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학기별로 발간하는 학보와 교지를 통해 문예활동을 하고 각종 대회와 현상문예에 참가, 입상하면서 그 수준을 과시했다.

웅변반도 몇몇 사람이 중심이 되어 틈나는 대로 연습과 활동을 했는데 1962년 한 해 동안 다섯 번이나 입상을 했다. 이 밖에 소년단의 활동도 컸는데, 그중 국가대표 사절단으로 해외에 다녀온 학생도 있었다. 3학년 허현과 한상용이 각각 미국과 홍콩에 한 달간 다녀왔으며 2학년 이정규와 박찬엽 학생은 일본에 건너가 한국을 소개했었다.

‘스포츠 전고’ 연도별 대회성적
북중 전국체육대회 출전 성과
‘대(大) 전고 소(小) 왕국’ - 동아리 전성시대

1960년대엔 전후 폐허가 어느 정도 복구된 가운데 우후죽순 교내 동아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북중, 전고 내에서 당시 드러난 것만 50개며 실은 그보다 많다고 했다. 가히 ‘클럽’(=동아리) 전성시대였다. 대부분 마음맞는 친구들끼리 어울려 학교나 학교 밖에서 자주 만나 우정을 나누고 취미활동이나 오락을 함께 하며 청운의 꿈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특히 병설고등학교 학생들의 편입으로 낯선 친구들과 만나게 된 학생들은 너나 없이 모임을 만들어 당시 학생들 중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 이름도 다양해서 ‘보리수’, ‘죽순(竹筍)’,‘3H’, ‘라매불(裸魅佛)’, ‘거송(巨松)’ 등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중에는 선배로부터 대를 이어받아 다시 후배에게 물려주는 ‘뼈대’ 있는 것도 있었고 ‘우리도 한 번 클럽을 조직하자’ 해서 생겨난 것도 많았다.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리 중에 ‘Friday’와 ‘EDMOS’를 빼놓을 수 없다. 둘 다 영어회화를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당시 도내 여고 중 명문이었던 전주여고 학생들과의 혼성 클럽이었다. 여학생과의 데이트가 금기로 되어있던 당시 상황에서 두 써클은 학교의 승인 아래 매주 한 차례 씩 공식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었으니 커다란 ‘특혜’로 학생들 부러움을 샀다.

이전까진 어느 형태의 동아리이건 조직하지도 말고 가입해서도 안 된다고 교칙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클럽 열풍’을 막기엔 유명무실이고 사회도 변화해서 이때부터 동아리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었다

대부분 동아리가 건전했지만 1950년대 전국 폭력조직인 ‘화랑동지회’와 연계된 전주고 ‘피아골’ 이후 여전히 가장 큰 골칫거리는 시내 폭력조직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이른바 주먹 써클이었다. ‘이십세기’, ‘정글’, ‘TNT’, ‘블랙스타’ 등 살벌한 느낌을 안겨주는 이 써클들은 서로 간에 판도를 휘어잡기 위해 가끔씩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소문은 빠른 것이어서 다음 날 등교하면 ‘누가 누구에게 맞았다더라, 어느 클럽이 어느 클럽과의 패싸움에서 이겼다더라’ 하는 얘기들이 떠돌아 혈기넘친 10대들의 흥미를 돋우곤 했다. 전고인들은 공부 뿐 아니라 혈기도 제일이었다. 전고의 주먹 또는 어깨들은 시내에 나가서도 같은 또래 의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결코 눌리거나 맞는 일은 없었다. 또한 당시의 학생들은 싸움을 벌여도 결코 흉기를 사용하거나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때리는 등의 비겁하고 치사한 짓은 하지 않았다. 1대 1로 맞붙어 싸우다 지면 깨끗이 승복하고 이긴 사람은 악수를 청하는 멋과 낭만이 있었다. 폭력 써클이 있었지만 주먹세계와 무관한 대부분 학생들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체육시간에 나갔다 오면 다른 친구들의 도시락을 까먹어 버리거나 어쩌다 영어사전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금품을 빼앗기거나 괜히 얻어맞는 일은 없었다. 교내 주먹들은 그들 나름의 멋에 겨워서 어울려 다니고 젊은 혈기에 넘쳐 힘도 겨뤄보려 했던 것이다.

제4절 교직원 진용과 면면

교장

1. 교장 1960년 4·19 혁명과 이듬해 5·16 군사정변을 거치면서 정치 사회적인 변혁은 물론 교육행정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따라서 60년대 전반에는 교장 인사에도 난맥상을 보여 잦은 교체로 학교 행정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예로 1960년에서 1962년까지 사이에 전고의 교장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처음 배운석(裴雲石) 교장(校長)이 4·19 혁명과 함께 물러났고 이어서 김신직(金信稷), 공원택(孔元澤), 이종표(李鍾杓), 최도철(崔渡喆) 교장이 차례로 전고 교장직을 맡았다. 이처럼 학교 책임자가 자주 바뀌게 되자 교내 분위기가 안정되지 않았고 교장과 교사, 교사끼리, 교사와 학생 사이의 분위기가 한때 서먹서먹했음도 사실이다.

1962년에 부임한 8대 최도철 교장은 1966년까지 4년간 재직하면서 ‘공부하는 학교’로서의 전통을 가꾸어 나갔으며 체육대회 때는 운동장에 나가 직접 공을 차는 등 정력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일했다. 최도철(崔渡喆) 교장이 1966년 전고를 떠나고 9대 교장으로 신강호(申剛浩) 동문(18회)이 부임해 왔다. 오랫동안 교사로 전고 북중에 몸담았던 신강호(申剛浩) 교장은 전고중흥을 위해 불철주야 일했으나 뜻하지 않게 발생한 전고·북중의 대 화재 사건에 책임을 지고 1969년 11월 물러났다. 이어 최득엽(崔得燁·14회) 동문이 교장으로 부임해 화재로 사라진 교사를 일신하며 1975년 2월말까지 봉직했다.

  • 신강호 교장 일화

신강호 교장은 1969년 10월 27, 28일 이틀 동안에 전고와 북중에 잇달아 화재가 발생, 그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까지 3년여 간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북중 45회 졸업생부터 49회 졸업생들까지가 신교장 재임시절에 재학 중이었다). 언제나 오른 어깨가 약간 올라가 있고 옷맵시가 도대체 나질 않아 ‘비맞은 장닭’이린 애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신 교장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56년에 전고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군산 공군비행장에 파견돼 유엔 감시위원단으로 주둔하고 있던 체코와 폴란드 대표의 축출을 위한 궐기대회가 열렸는데 신 교장은 만주 하얼빈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배워두었던 러시아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주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영어 참고서까지 서술하기도 했던 신 교장은 조회를 비롯 언제나 말끝마다 “우리나라는 머리밖에 믿을 자원이 없다. 다른 나라보다 열배 이상 공부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도서관을 밤 늦게까지 개방하였으며 시험 때 일부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날을 새기도 하였고 아침에는 자율학습을 강조하여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매월 실력고사를 치러 그 성적을 강당 전면 벽에 석차순으로 붙여 놓아 학생들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끌어당기고 자극을 주었다
교사
  • 정열과 패기의 스승들[2]

1960년 4·19와 이듬해 1961년 5·16 군사정변 등 196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학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학교 안에 밀려온 변화의 돌풍은 교사나 학생이나 다 함께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고 어떤 형태로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 전고의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오히려 겁을 먹을 정도의 발언을 서슴치 않았었다. 그때의 스승들에게는 정의나 진리가 그렇게 애매하지 않고 불확실하지 않았었다. 무엇이 정의이고 어느 쪽이 불의인지 분명했고 제자들에게는 올곧게 일러주는 기백과 패기가 있었다. 교사들은 가난하지만 떳떳할 수 있었고 학생들은 스승을 따르고 그 권위에 감복했다. 학교는 무엇보다도 교사에 의해서 그 성격과 자질이 결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시설도 오랜 전통도 궁극적으로는 그 학교를 지키는 교사들에 의해 더욱 빛이 나고 내실을 다져간다고 할 때 전고는 그런 점에서 소중한 자산을 가진 학교였다

교지 ‘전고’에 비친 교사상(敎師像) /

지금의 전주고 실내체육관 자리는 애초 방죽이었고 여름이면 동네 어린이들이 이곳에 와서 잠자리를 잡기도 했다. 도서관 자리는 자그마한 동산이었는데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서 있어 한여름 이 곳에서 듣는 매미소리는 공부에 지친 학생들의 머리를 식혀 줬고 일부 되바라진 학생들의 은닉 흡연처로도 애용됐다.

1950년대 말엽부터 학생들은 체육관 건립기금을 수업료에 포함하여 납부하기 시작했다. 오랜 준비기간과 공사기간을 거쳐 마침내 대망의 실내체육관을 건립하고 1962년 6월 16일 개교기념일에 맞춰 낙성식을 갖게 됐다. 각지에서 선배 동창들이 모여들고 도내 명사들이 참석, 국내 굴지의 실내체육관 개관을 기념한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전주 시내 중심가 ‘공보관’에서는 시화전이 열리고 그 밖에 각종 행사가 벌어져 학교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신축 체육관에서는 여흥 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나와 저마다 노래나 악기 연주 등의 장기자랑을 하고 모두 다 박수와 환성을 보내며 즐거움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때 북중학교 미술 교사가 흥에 겨워 무대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 했다. 곡목은 ‘한 많은 대동강’으로 가사 하이라이트인 “모란봉아, 을밀대야…”로 구성지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전고 음악 교사가 벌떡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중단시키는 촌극이 벌어졌다. “신성한 학원에서, 그것도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사가 유행가를 부르다니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민망한 것은 그 뒤 두 교사의 모습이었다.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하던 두 교사 다툼이 마침내 멱살을 붙잡는 사태로까지 번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해프닝도 교육에의 열성과 신념이 넘치던 당시의 일화였다.

체육관 낙성식과 ‘한 많은 대동강’

제5절 교단의 시련 ― 전국 첫 교원노조 결성

1960년대 초의 정치적인 불안정은 급기야 교사들을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려고까지 했다. 1959년부터 정·부통령 선거 분위기는 이전 1956년의 선거부정을 한 단계 뛰어 넘어 상상을 초월했고 결국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키게까지 했다. 여당인 자유당이 교원들에게 자유당 입당을 권유하고 나섰던 것이다. 학원에서의 정치적 중립을 원하고 있던 교사들이었지만 정치적 입김이나 음양으로 압력을 넣는 자유당의 단말마적 작태에 항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주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여당의 압력에 순응, 교사 대부분이 자유당 입당원서를 썼다. 결국 끝까지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교사는 천건(千建·역사 담당, 전 전주해성고 교장), 방춘원(房春源), 김재후(金載厚·이상 생물 담당) 교사 등 3명뿐이었다. 이 때의 분위기는 자유당에 입당한 교사들도 내심 부끄럽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입당하지 않은 3명의 교사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정도였다.

전고 교사, ‘교권 옹호운동’과 노조 결성 주도

교사들 모두가 요즈음 반상회와 같은 회의에 참석, 주민들에게 자유당을 선전하는 데 앞장서야 했다. 그러나 회의에 다녀온 교사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했고 집권당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기 일쑤였다. 이런 와중에서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끝나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니 시대의 조류는 학원 안의 자율을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변해갔으며 그동안 움추리고 있던 교권이 일시에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불만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교사는 정권의 노예나 시녀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독립된 교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교사들이 내건 명제였다. 전주고가 전국에서 제일 먼저 ‘교권 옹호운동’을 시작해 몇몇 뜻있는 교사들에 의해 정치적 바람에 휘말리지 말자는 다짐과 회의가 수 차례 거듭됐다. 당시 카리스마적 권위로 교사들에 군림하던 배운석(裴雲石) 교장을 회의에 참석케 해서 당당히 독립된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전주고 교사들에 의해 이러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서는 교사들이 노조를 결성했다는 소식이 매스컴에 보도됐다.

이에 전주고에서도 젊은 교사들 주도로 ‘교조’(=교원노조)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순전히 자발적으로 시작된 교권옹호운동이 노동조합 형태로 발전된 것이다. 이 때 젊은 교사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준 이들이 당시 전주고 원로교사인 전성욱(全性旭·한문 담당), 신석정(辛夕汀), 김해강(金海剛·이상 국어 담당) 교사였다. 전주고에서 노조 결성의 주동을 맡았던 천건(千建·역사 담당) 교사는 이 사실을 전주 시내 각급 학교에 알리고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고 거의 모든 학교가 호응해 1960년 초 전주시 교원노조가 결성됐다.

당시 일부 교사의 반대도 있었다. 김모 교사는 “교원이 노동자일 수 없으며 정치적인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교원들이 정치적 색채를 띤 노조를 결성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이 같은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았으나 당시 대한교련(전북지회장 최일운)의 주장과 대동소이해 교사들에 의해 일축되고 만다. 마침내 교원노조 전고 위원장이던 천건(千建) 교사는 전북대회 위원장까지 겸하면서 노조를 1년간 끌어오고 다음해(1961년) 4월에도 재선되었다.

‘5·16’군사정변과 교사들의 수난 /
전주고 교원조합 규약

제6절 1960년대 후반 전고 중흥 운동=

제41회 졸업생부터 50회 졸업생까지 약10년간(1964~73) 전고는 군사정부 교육정책에 따라 교사 대 이 동과 한일회담 및 6·8 부정선거 반대 소요에 대비한 몇 차례의 휴교 조치 등 사회의 불안정과 동요로 큰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전고는 전국 규모의 각종 학술대회, 경연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며 명문의 위상을 한껏 드높이고 있었다.

당시 ‘명문’의 기준이던 서울대학의 입시경쟁에서 경쟁 명문고들을 제치고 발군의 성적을 올렸다. 이로 써 전고 동문들의 위풍에 힘을 더하게 되고, 전북 지역사회의 격려와 기대에 대한 열망은 가히 침체를 해소하는 청량제로서 사회 심리적 기능을 보상하는 효과도 나타났다.여기에는 동창회의 몫도 매우 컸다. 사회 각계에 명성을 떨치는 졸업생들의 모교애를 바탕으로 학교 시설 확충에 놀라운 힘이 발휘된 것이다. 동창, 학부형, 전국의 동문 유지들이 힘을 모아 한 푼의 정부나 도비 보조도 없이 국내 굴지의 고교 체육관을 세워(1962.6.16. 낙성식) 기존 유도장과 드넓은 운동장 등 시설과 보완작용을 배가시킴으로써 학교체육의 획기적인 실효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더욱 훌륭한 점은 체육관 건립과 똑같은 방법과 과정으로 전국 고교 굴지의 대 도서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1964.6.16. 낙성식). 이 도서관은 입시 준비의 용광로가 되어 전고 중흥의 기폭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전고생의 프라이드는 선배로부터 전통화되어 물려진 지예쌍전(知藝雙全)의 능력을 갖추고 국가 사회의 역군(役軍)으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함에 있었다. 한 동문은 당시 서울의 모 대학 과별 체육대회에서 축구, 농구, 배구, 테니스 등 전 종목 주전 멤버로 전고 동문이 끼어 무척이나 흥겹고 자랑스런 기분이 들었노라고 술회했다.

전고는 1969년 대 화재 이후 1970 6월16일 현대식 매머드 교사(校舍)가 완공돼 학교 면모를 일신했다. 신축 교사는 전장 125m, 3 층, 37 개 교실을 갖춘, 당시로서는 국내 제일의 웅장한 시설이었다. 신축 교사와 함께 무도관, 분수대, 수영장, 테니스 코트 등 갖가지 시설들이 속속 세워졌다.

열성적인 교사들

1962년 부임한 최도철(崔渡喆) 교장은 1966년 이임할 때까지 교사의 사기진작에 공이 컸다. 최 교장의 달변은 입학식 때마다 학부형들 심금을 울렸으며 대학입시 때는 교사들과 같이 상경해 숙식을 같이하며 수험생들을 격려했다.

최교장의 뒤를 이어 부임한 신강호(申剛浩) 교장은 모교 중흥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하였다. 큰 포부를 박진하게 추진하던 중 불의의 대(大) 화재사건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두 교장의 우수 교사 확보 노력은 여건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각별하였다.

‘옥동자론’의 교육철학이 확고했던 최득엽(崔得燁) 교장은 교사 재건과 훌륭한 시설을 확보하고 개교기념 행사 등을 가질 때마다 문교부 장관과 국회의원 등 유력 인사를 대거 참여시킴으로써 모교가 전국 굴지의 명문임을 입증했다.

최득엽 교장은 1972년 입학시험 경쟁체제가 부활, 전고에 우수한 학생을 대거 확보했다는 자신감으로 경영의 대전환을 시도하여 과외활동과 운동의 ‘일인일기(一人一技)’ 갖기 등 교육의 다면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옥동자로 추켜세우며 큰 기대를 가졌던 1972년 입학생[3]이 서울대에 20명 합격(1975년) 하는 등 일류대학 입시에서 참패를 당해 최득엽 교장을 실망시켰다.

다행히 1970년대 중후반부터 서울 등 대도시 일류교 평준화 반작용으로 인해 전고는 서울대 합격자 수가 전국 톱 랭킹에 오르는 쾌거로써 동창과 학부모 등 관계자를 흐뭇하게 했다. 이러한 명성에 따라 전남과 대전 심지어는 멀리 서울에서까지 본교에 유학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2. 진학지도의 성과

온세종 교감은 부임 인사말부터 무척 도전적이었다. “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는 것이다.” 온 교감은 보강 시간에 들어가서 수학 문제를 풀어주었으며, 매년 70~80명 선의 서울대 합격 숫자에 만족치 않고 100명 이상 합격시켜야겠다고 교사 선두에 서서 학생들의 학업 매진을 독려했다. 마침내 43회 졸업 시기에 서울대 113명의 합격자를 냈다. 43회 한 학생이 전국고교 학력경시대회에서 우승하자 그 학생 담임 교사의 단칸 월세방을 두 칸 전세방으로 바꾸어주기도 했다. ‘학업 제일’ 전고를 진두지휘한 온 교감은 46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하고 1970년 2월 승진 전임했다.

온 교감은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몸매로 강단에 서서 차분히 호소하듯 학생들에게 전고생의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두터운 안경 속에서 배어나오는 그의 신뢰와 의지가 담긴 눈길과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철학이 있는 훈화에 전고생들은 가슴으로 밀려오는 그 무엇을 느꼈다. 온 교감은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팔복동 용산 다리를 돌아오는 교내 단축 마라톤 대회 때였다. 큰소리치고 달려 나갔던 학생들이 덕진을 지나면서 숨을 헐떡이며 하나둘 쳐지기 시작하더니 걷거나 주저앉고 할 무렵, 이미 반환점을 돌아 차분하고 고른 속력으로 뛰어오는 온세종 교감의 모습을 보고 모든 학생들은 다시 힘을 얻어 뛰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큰 교훈이 어디 있으랴. 이처럼 말없이 꾸준히 실천에 옮기는 온세종 교감과 호흡을 함께 한 여러 스승들의 노고로 전고는 그 험난한 시기를 지나 전통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다.

당시 교사들은 온 교감을 중심으로 혼연일체 되어 학생들 실력 향상에 최선을 다했다. 몇 년간에 걸친 입시 자료들을 정리하여 서울대 각 학과와 일류대학 합격 가능 점수를 제시해 줌으로써 진학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 3. 도서관과 면학열풍, 진학성적

전고생들이 우수하고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물론 학생들 자체가 선발집단이며 교사들의 실력과 열성적인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면학 열풍을 불러 일으켜 준 도서관의 역할도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도서관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 보존 이외에도 학생이나 교사들의 학습활동을 돕고 독서의 생활화를 통해 정서 함양과 바람직한 사회 생활 태도를 기른다는 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1964년에 신축된 전고 도서관은 당시만 해도 전국 제일의 시설과 장서, 직원 조직을 갖춘 노송대의 등불이었다. 1만 5천여 권에 달하는 장서 중에는 조선사를 비롯한 귀중한 고전들과 동서양의 역사, 지리, 교양, 문학서적 등 질적인 면에서 어느 대학 도서관의 자료와도 바꿀 수 없다는 평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500여 석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가방을 갖다 놓고 방과 후에도 밤 늦도록 학과 공부를 계속하거나 책을 읽는 등 면학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서울대 입학률과 도서관 이용률이 비례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으니 당시 학생들의 도서관 점거를 위한 경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고생들의 독서열도 대단하여 매년 대출 장서가 1만 3천여 권에 이르렀다.이같은 면학 열풍에 힘입어 1960년대 전고생들의 학업 성적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매년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대학 합격자가 많이 나와 명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서울대, 고대, 연대 등 일류대학 진학상황을 보면, 1962년에 서울대가 38명·고대 15명·연대 18명, 1963년에 서울대 44명·고대 13명·연대 15명, 1964년에 서울대 54명·고대 17명·연대 18명, 1965년에 서울대 79명·고대 23명·연대 24명 등이며 1970년까지 해마다 일류대학 합격자 수가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육사, 공사, 해사 등 3군 사관학교에 진학한 학생도 1백 40여 명에 이르고 있는데 특기할 것은 1966년도와 1969년도 졸업생들은 놀라울 만한 서울대 합격률을 보인 점이다. 전고 동문 중 40회부터 46회까지가 특히 공부를 열심히 한 횟수인데 1966년 졸업한 43회는 서울대에만 1백 13명이 합격했고 고대에 25명, 연대에도 19명이 들어갔다. 또한 1969년 졸업한 46회도 서울대에 1백 21명, 연대에 21명, 고대에 25명이 합격함으로써 그야말로 영재 배출교로 지방 명문 중의 명문으로서 명성을 전국에 떨쳤다

제7절 ‘반공’의 귀감 소병민(蘇秉玟) 동문

1. 공비 토벌 중 산화 /

전고 28회 동문인 소병민(蘇秉玟)133) 육군 중령이 1968년 11월 3일 충남 서산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출동하여 부대를 지휘하다가 장렬히 산화했다. 당시 ○○○○부대장이던 소(蘇) 중령은 무장공비가 침투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부대를 출동시켜 작전에 들어갔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적이 쏜 탄환을 부하를 대신하여 머리에 맞고 산화한 것이다. 소 동문 전사 사흘 후 전북일보는 다음처럼 그의 죽음을 기렸다.

{{인용문‘가정 불고(家庭 不顧)한 조국의 방패 산화한 소병민(蘇秉玟) 중령 주변’ 134)

○…11월 3일 충남 서산 지구 대간첩작전 중 전사한 소병민(蘇秉玟, 39·전주시 태평동 1가 281) 중령의 가족은 이젠 슬픔마저 메말라 있다. “단란한 가정 한번 이룩해보지 못하고 결국은 산화하고 말다니…” 소 중령 집을 맡고 있는 장모 조판례(60) 여인의 울음이 터질 듯한 말이다.

○…소 중령은 전주국교, 전주북중, 전주고교를 거쳐 조선대 법학과를 졸업, 52년에 육군보병학교를 나와 충무 무공훈장을 비롯 26개의 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근면성실한 군인.

○…한 두 달에 한 번씩 가정을 찾는 소 중령은 그나마도 밤 10시쯤 왔다가 새벽 4시쯤은 떠나버리는 성격, ‘아이들 얼굴도 잊어버리겠다’는 부인 조옥진 여인(35)의 투정엔 으레히 ‘조국이 있고 가정이 있는 법’이라고 설명, 두 부부의 애정은 더욱 깊기만 했다.

○…지난 10월 15일경 ‘부인 위독’이라는 3번의 전보에 잠시 귀가, “11월에 휴가를 얻어 가족 소풍을 가자고 했는데…” 장남 소우섭(8·전주국교 1년)군은 말끝을 못 맺는다.

○…소 중령이 전사하던 날 “내가 어제 밤 꿈속에 윗니(上齒)가 두 개 빠졌으니 너희들은 적에 접근치 말고 각자 몸조심을 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 자기가 타고 온 찝차의 운전병을 멀리 피해 있으라고까지 지휘했다는 것. 적과의 거리 100미터 지점에서 자수를 권고, 서로 간 대화가 오고 간 후 바위에 은신 작전 차 고개를 든 순간 적의 탄환이 두 개의 골에 관통, 대전으로 이송 도중 숨졌다.

2. 모교에 우뚝 선 동상

전북 도민들은 소(蘇) 동문의 장렬한 죽음을 기리고 그 유지를 받들어 길이 귀감으로 삼고자 성금을 모아 동상을 건립하기로 했다.

소 중령 산화 2년 후인 1970년 11월 3일 그의 모교인 전고 교정 남쪽 숲에 소 동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전북 도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이 동상에서는 매년 11월 3일 북중·전고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올리고 9월 28일에는 충혼비와 함께 분향재배를 올려 그의 넋을 달래고 있다

제8절 ‘살신성인’ 김진아 동문

소병민 동문이 산화한 이듬해인 1969년, 그의 14년 후배이자 육군 중위인 김진아 동문(42회) 역시 대(對)간첩 작전 도중 전사했다. 김진아 동문은 무장공비가 던진 수류탄에 몸을 던져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고 전사했다. 그의 고향인 무주군에서는 무주승공지도회 등이 주축이 되어 1981년 김 동문 모교인 무주초등학교 교정에 석상을 건립했다.

김진아 동문 석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고 훼손되어 1997년에 다시 제작하여 같은 장소에 건립했다

전고·북중 대화재(大火災) 사건

  1. 부럽다
  2. 부럽다
  3. 일명 옥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