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개요
제 2장 교육제 변화와 한국전쟁
제 1절 6.25 직전 3년제 전북고등학교 창설
제 2절 6.25발발, 휴교, 재개교
제 3절 혼재된 졸업장, 6년제 4년제 3년제
제 4절 정부 전시 교육방침
제 5절 문교부 교육제도 개선
중등교육 학제 변경
사상 첫 중학교 입학 국가고시제
제 3장 도전과 응전 - 6.25와 전주고
제 1절전북 학도병, 전국 최다 희생
전쟁 회오리 바람 속에서 9·28 서울 수복 후 본교는 10월 4일 다시 문을 열고 적은 수 학생으로나마 수업을 재개했다. 학교 교사(校舍)는 처음엔 제 11사단이 사단본부로 쓰기 위하여 징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제 8 사단 본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북중학교는 당시 인근 전주중학교(현 제일고등학교)의 교 사(校舍)를 빌어서 수업을 실시했다. 1951년 5월 19일에 제 8 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본교생들은 약 11개 월만인 5월 20일 그리던 교사(校舍)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대부분 학교에 복귀했으나 군데군데 빈 책상이 많았다. 6·25 전쟁 직후 붓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간 본교 총 400여명 중 숨진 학생들이었다. 전선에서 조국 수호 신이 된 전국의 중·고생 전몰학도 수는 총 1,394명이다. 이중 전라북도가 396명으로 전국 최다희생이며, 그중에서도 본교생은 48인(교사 포함)이나 되는 아픔을 겪었다. 시·도별 전몰학도 수는 이렇다.
제 2절 전쟁의 광풍
전쟁은 초반부터 맹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전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출처불명 소문만 난무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원해서, 또는 정부 입대 소집에 응해 전장에 나갔다. 6·25 발발 직후 신태영 소장이 호남 위수사령관으로 부임, 국군과 경찰을 장악하고 신병을 모집했다. 신태영 사령관과 육군보병학교 교장 민기식 대령이 전주 북중 강당에 와 학도병 지원을 격려했다. 당시 북중학교는 7월4일부터 임시 휴교에 들어갔고 전북도청은 7월18일 해산돼 부산으로 향했다.
이같은 무정부, 무학업의 급박한 와중에서 전주 일대의 18세 이상 입대 학도57)들은 전북중학 교정에 일차 집결, 7월13일 전주지역 제 1,2,3,4기 학도병 장행회(壯行會)58)를 가진 다음 전북 각처에서 온 학도병들과 이리(=현재 익산)에서 만나 순천을 거쳐 경상도 대구, 포항 등지로 가 초스피드 집중 훈련과 빈약한 장비로 불과 한달 이내 실전에 투입됐다. 대부분 소총 분해 조립만 배우고 몇 차례 실전 사격 후 훈련된 적군에 맞서는 식이었다. 군용 헬멧은 물론 군화, 군복도 지급될 처지가 아니어서 대부분 평상복과 운동화 차림으로 총을 잡은 이들은 그야말로 육탄(肉彈) 그 자체였다. 군번은 받았으나 기록이 남지 않아 대부분 ‘군번 없는 병사’가 되고 말았다. 전종환(28회·전 군산시장) 동문은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은 누구의 가슴에나 피멍으로 남았다. 학도병 학생도, 의용군 학생도, 숨어버린 학생도 모두 10대 학우들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북측 의용군으로 간 학우는 물론 빨치산 체포 후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한 동문들도 있다. 이들은 아예 역사현장에서 잊혀져버렸다. 전쟁은 동시대 누구에게나 미친 바람, 광풍이었다. 9·28 수복 후 이듬해 엄동에 1·4 후퇴를 하는 등 장기간 시달린 중부권 학교들과 달리 전북에는 그 바람이 머문 기간이 약간 짧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디서건 급우 친지를 잃은 피눈물 나는 절규는 마찬가지였다.
남 학도병
북 의용군
제 3절 충혼비 건립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자 본교에서도 적기(赤旗)가 내려졌다. 본교가 휴교 에 들어간 7월4일 후 약 3개월만이었다. 학도병으로 출전했던 400여 학생들이 드문드문 돌아오고 10월 3 일엔 임시학교 사무소가 유청 교장댁에 개설됐으며 이튿날인 4일 복교를 선언했다. 10월 21일엔 휴교 후 첫 직원회의를 풍남동 전주여중에서 개최했다. 본교는 국군 11사단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교와 함께 전장에서 스러진 전몰(戰歿) 꽃봉오리와 교직원들을 기리는 운동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북중·전고인 모두의 가슴에서 용솟음 쳐 터져 나왔다. 전몰 학도병과 순직 교직원의 위국단충(爲國 丹忠)을 기리는 충혼비(忠魂碑)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인공(人共) 치하에서 여러 차례 사경을 당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피 흘리는 제자들 생각에 끝내 지조를 지켰던 유청(柳靑) 교장의 의지는 한층 각별했다. 모교 후배이자 어린 제자들의 입대 상황에서 ‘가라, 말라’ 말도 못하고 차마 그들을 떠나보낸 스승의 심정은 언설로 이루 담기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들 모두의 뜻을 모은 충혼비가 1951년 9월 28일, 9·28 수복 1주년을 맞아 제막됐다. 정면(동 쪽)에 이승만(李承晩) 당시 대통령 친필로 ‘忠魂碑’(충혼비)라 깊게 새겼고 후면(서쪽)에는 유청 교장이 쓴 비문이 새겨졌다. 전면 하단에는 당시 본교에서 국어과 교사이던 시인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시를 새겼다.
제 4절 최복수 준장 순국과 장의식
제 5절 6.25 참전 전주북중, 전주고등학교 학생 명단
대한민국 육군은 6·25 발발 43주년을 맞아 지난 2013년 6월12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1950년 6월 전주북중과 전주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동문 총 145명에게 ‘전주고등학교 6·25 참전용사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 패는 “위국헌신의 정신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눈부신 선진 조국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신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참전 학생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6·25 참전이 인정돼 감사패를 받은 동문은 다음과 같다.
제 6절 유청 교장 퇴임과 배운석,김영배 교장 부임
제 7절 교정 내 전시 연합대학교, 전북대학교 개교
제 8절 학도호국단 활성화와 정전 반대
학도호국단 운영위 발족
휴전반대의 함성
제 4장교가,교훈 제정, 장학회 설립
제 1절 교가, 교훈, 교기
교가
중·고 분리 학제 개편으로 인해 1951년 9월 1일 전주고등학교가 새로 개교하자 기존 북중과 다른 새 교가, 새 교훈이 필요하게 됐다. 8·15 광복 직후 1945년 10월 1일 정식 개교한 전북공립중학 교가인 “麒 麟(기린)의 높은 峰巒(봉만) 구름을 뚫고 ~”는 북중학교에서 그대로 사용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전주고등학교는 1951년 마침 낙향하여 전고에서 국어를 강의하던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 시인에게 새 교가 작사를 의뢰했다. 작곡은 역시 전고 음악 담당 박용흡(朴鏞洽, 1919~1976) 교사가 맡았다. 미당 서정주는 당시에 이미 한국 시단의 거목이었거니와 작곡자인 박용흡 교사 역시 동 경 중앙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인재였다. 경남 사천 출생인 그는 1946년부터 1951년까지 본교에 재직하며 전북 음악발전에 기여했다.
박 교사는 밝은 음색의 바리톤으로 6·25 전쟁 후 부산에 정착하여 부산여고, 경남여고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박 교사에게 가르침 받은 본교 원로 동기들은 아직 까지 박 교사 작사, 작곡인 ‘옹달샘’ 86)을 기억하고 있다. 마침내 교가가 완성되자 학생들은 새 전고 교가를 강당에서 학년별로 배웠다. 전란 와중에 쓸 만한 등 사시설 하나 없던 당시 사정상, 학생들은 악보는 물론 가사까지 일일이 노트에 받아써야만 했다. 당시 건 물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붉은 벽돌 강당(1940년 준공) 마룻바닥에 앉은 채로였다. 첫 부분인 “백두(白頭)와 금강(金剛)과”가 음악교사 입에서 나왔을 때 학생 일부에서 웃음이 나왔다. 접속조사 반복이 좀 어색하게 들렸던 탓이다. 이어 “태백(太白)과”가 나오자 웃음이 한층 커졌다. “~와 ~ 과 ~과”로 세 번 접속조사가 반복되자 그 다음 또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며 와르르 웃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가사를 끝까지 받아 쓰고 난 뒤엔 “과연!” 하는 탄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었다. 평범한 접속조 사 반복으로 역사와 전통, 스케일, 조국애를 표현한 대(大) 시인의 기량에 감탄한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교가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고인에 의해 애창되고 있다. 그런데 1절의 맨 끝 소절에 이르면 졸업 세대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가사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풍운(風雲)을 뚫고”로, 어떤 이는 “풍설(風雪)을 뚫고”로 부른다. 연로한 동문들 간에 “분명히 1960년대까지는 ‘풍운을 뚫고’로 배워 불렀다”고도 하는데 어찌 해서 ‘풍설’로 바뀌게 되었는지 연유가 분명치 않다. 심지어 같은 횟수끼리조차 ‘풍운’, ‘풍설’을 두고 설왕설래가 다반사였다.87) 정식 절차를 밟아 개정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원래 가사를 확인하자는 여론이 일자 시인이자 교수인 김해성 동문(당시 서울여자대학교 교수)이 지난 1996년 9월26일 스승인 미당 서정주 시인을 방문, 직접 문의를 했다.
이에 따라 이후 전고 교가는 공식적으로 ‘풍운’으로 통일됐다.
교훈
- ‘자유·박애·지성·노력’과 ‘자강·자율·자립’ 전북공립중학교 제2대 김가전 교장은 1946년 4월1일 부임하자마자 일제 강점기 교훈이던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을 폐기하고 ‘자유·박애·지성·노력(自由·博愛·至誠·努力)’을 새 교훈으로 제정했다. 이는 1951년 9월 중·고 분리 전까지 북중과 전고에서 한동안 같이 쓰였다. 그러다 1952년 말 전주고등학교 제4대 배운석 교장 부임 이후 전고는 새 교훈인 ‘자강·자율·자립(自彊·自律·自立)’을 따로 제정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북중 교훈 ‘자유·박애·지성·노력’은 1959년까지 이어지다 배운석 전고 교장이 북중 교장(제9대)을 겸임한 1960년 이후엔 전고와 같은 ‘자강·자율·자립’으로 통합, 변경됐다. 북중학교 학도호국단이 발행한 교지 <북중> 창간호(1952년)부터 7호(1959년)까지는 속 표지에 옛 교훈(왼쪽·1952년)이,8호(1960년)부터는 전고와 통합된 새 교훈(오른쪽·1960년)이 인쇄돼 있다
모표
모자에 붙인 모표는 1950년 전북공립고등학교(全北公立高等學校, 2학급)가 전주고등학교로 개칭되면서 이전까지 학생들이 달았던 ‘高’(고)자를 삼각구도의 노송 솔잎 한 가운데 ‘高’자를 배치한 현행 디자인으로 확정했다. 당시 유청(13회) 교장은 무려 10만원을 걸고 새 모표 디자인을 교내 현상 모집했다. 현재 화폐가치로 치면 1,000만원이 넘는 거금이었기에 응모자도 많았으나 정작 당선자는 시인이던 전고 국어교사 이철균 동문(21회)이었다. 시인의 디자인이 모표로 확정되던 상황을 유청 당시 교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교복
전고는 1951년 9월 신학교 개교와 함께 이미지를 쇄신하고 명문 전고 신입생으로서 자부심을 기른다 는 의미에서 일제 잔재인 ‘쓰메 에리’ (=‘호크’ 식) 대신 노타이 식의 깃을 단 교복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 는 학생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해 1년 후 원상 환원, 1983년 3월 교복 자율화 전까지 ‘호크’ 스타일을 입 게 되었다.
교기
역사와 전통의 상징인 푸른 바탕에 백선(白線), 그리고 그 중앙에 황금빛 ‘노송 모표’가 그려진 교기는 1951년 모표 제정과 동시에 제작됐다.
전고인들에게 무한한 자부심과 영예의 상징으로 길이 가슴 속에 새겨지는 이 교기는 제3대 유청(柳靑) 교장이 제정하여, 1952년 11월 7일 전고 제4대 배운석 교장 취임식에서 새 교기로 전달했다.
제 2절 장학생 설립과 시행
개교 34주년을 넘기고 제30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도 전주고와 북중에는 장학제도가 없었다. 전라북도는 물론 이웃 전남과 충남 등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명문이었지만, 수석 입학생에게조차 장학금이나 학비 감면 혜택이 없었고, 오히려 기부금 명목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돈을 징수해 왔다.
이를 통감한 전주고 제4대 배운석 교장은 결단을 내려 장학회를 설립하고, 다음과 같이 장학회 규약을 제정했다. 이 규약은 1953년 10월 1일부터 시행됐다.
전주고등학교 장학생 규약
전주고 장학생
북중 장학생
3절 교육방침, 지도목표
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가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됨에 따라 1950년대에는 정부와 교육 지자체의 교육 방침과 지도 방침이 수시로 하달되었다. 각급 학교들은 교훈과는 별도로 교사 지도 방침과 목표 등을 강조해 교육의 대강을 명확히 하려 했다.
당시 교지인 **<북중>**과 **<전고>**에는 이러한 노력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1950년대 초반 교지 앞부분에 필수적으로 인쇄된 ‘본교 학사 지도 방침’, ‘본교 교육의 목표’ 등이 그 반영이다. 이러한 구호적인 분위기는 1960년대 국민교육헌장으로 이어지는 전초가 되며, 시대가 요구하는 목표와 그 진지함을 엿볼 수 있다.
새 교장이 부임할 때마다 교내 지도 중점, 방침, 목표 등이 바뀌었지만, 1950년대에는 기본적으로 ‘도의’(道義), ‘생산’, ‘건강’, ‘체력증진’ 등이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다. 특히 물자가 열악하고 식량이 빈곤한 전시 상황 아래서 학생 건강은 국가사업에 비견될 정도로 중시되었다.
다음은 북중과 전고 학도호국단이 펴낸 1950년대 중·후반 교지에 나타난 교육 방침과 목표 등이다. 전란 와중에 구호적 색채가 짙었던 1950년대 초반의 교육 방침과 지도 목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세하게 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