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1930~40년대 줄기찬 항일

제 1장 관립에서 공립 전환

1906년, 일제(日帝) 사범학교령과 동시에 고등보통학교령이 공포, 실시된 이래 서울·대구·평양 등에 고등보통학교가 설치됐다. 이로부터 13년 후인 1919년, 전고는 전국에서 관립(官立)으로는 다섯 번째인 관립 전주고등보통학교(官立 全州高等普通學校)로 개교를 했다.

개교 직후엔 비교적 평온하게 초기 4년제에서 차츰 5년제 정규 고등보통학교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25년 관립 고등보통학교가 공립(公立) 전주고등보통학교로 바뀌면서부터 평온한 듯하던 전고 내부 분위기가 실은 표면적인 일면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점차 학생수가 증가했고,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이 다감한 청년학도의 가슴마다 서서히 일고 있던 이 시기 전주고보는 대한의 민족혼이 영구히 망각의 피안(彼岸)에 버려진 것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줬다.

제 1절 광주학생만세운동 이후 교내 움직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만세운동이 터지자 그 운동은 결국 독립운동으로 요원의 불길이 되어 전국 중, 고, 전문학교에 번져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위정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격문이 전국 각지에 전달되고 각 지방에서는 일본 배척운동이 계속 일어났으며, 전주고보에서도 일인 배격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졌던 두 차례의 맹휴 사건 이래 전고는 경찰의 주목과 대처가 삼엄하여 좀처럼 그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30년 1월 24일, 광주학생운동 관련자로 전주고보 3학년 유돌기(柳乭基)가 검거됨에 자극된 학생들이 4학년 은학기(殷學基), 김후수(金後琇) 등이 주동이 되어 일본인 배척운동을 벌여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는 친일학생들의 밀고로 사전에 탄로되어 수업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일경에 잡혀갔다. 이 사건으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학생 14명이 퇴학 또는 자퇴를 강요당해 학교를 떠났거나 정학을 당했다.

이 무렵, 전주고보와 전주농업학교가 제휴하여 동시에 각각 거사를 단행하기로 전주농업학교 스케이트장에서 모의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발각되어 주모자가 검거됨에 따라 전농생(全農生) 6명과 함께 전고생 5학년 고정동(高晶東)을 비롯한 10여 명이 경찰에 구속, 퇴학되었거나 혹은 자택에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남은 학생들은 또 다시 일본이 건국했다는 그들의 명절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을 기해 시위를 결행하기로 은밀히 모의하고, 극비리에 각자 태극기를 만들어 남학생은 상의 단을 타고, 여학생들은 치마 단을 타서 감추어 넣고 등교했다. 그러나 그중 한 학생의 부주의로 경찰에 태극기가 발각당해 전국에 비상이 걸렸으며, 전고는 물론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전주농업학교, 전주여고 학생들이 노상에서 몸수색을 당해 수백 명이 검거 구속됐다.

그 당시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퇴학은 물론 재판 끝에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던 한 동문은 “사실 그때 나는 나이 겨우 18세여서 민족사상이 얼마나 뚜렷하고 철저했을까만 그래도 어느 학생에게서 태극기의 모형을 받아 그걸 하숙집에서 잉크로 그려 양복 단에 꾸겨 넣고, 일본 기원절에 참석하기 위해 하숙집을 나설 때는 지금 생각해도 약간 떨리며 가슴이 뿌듯했지만 몸 수색에서 그 태극기를 빼앗겼을 때는 무서운 것을 넘어 분한 마음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 당시 조선인 고등계 형사였던 사람이 생전에 한 동문을 만나 “선생님, 내가 그 죄로 지금까지 죽지 못하고 회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소, 미안하오”라고 했다는데, 이럴 때면 “감개가 또 다르더라”던 동문의 회고는 당시 일제 경찰의 강제 구금과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말해 준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주고보를 비롯한 전주 시내 각 학교의 항일투쟁은 사실상 시위다운 시위도 벌이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견 평온한 듯한 학원 내 학생들 가슴마다 민족혼(民族魂)이 꿈틀댔고, 일제와 일본인 교사에 대한 강한 반발감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제 2절 더욱 강화된 일본화 교육

갈수록 노골화하던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은 마침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송두리째 집어삼켜 버렸다. 일본은 관동군을 중심으로 만주를 강점하고 중국 청말(淸末)의 황족 후예 부의(溥儀)를 내세워 이른바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웠다.

이 무렵 전주고보에는 오우치(大內) 교장 후임으로 이시카와(石川賴彦)란 일본인이 부임해 왔는데 그는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일본 신민화(臣民化)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시카와 교장의 일본화 지도 방침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강행되어 학교는 실로 감옥으로 급변해 갔다.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쓰라고 강요했고 정진일지(精進日誌)라는 반성문을 매일 기록, 담임교사에게 제출하여 검열을 받게 했다.

또한 비교적 유연하게 실시하던 교련과목을 체육과의 일부가 아니라 군대식 훈련으로 강화해 갔다. 이에 따라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던 학원 생활은 딱딱해지고 일본인 교사들의 명령에 조금이라도 위배되면 무조건 퇴학이요 정학일 뿐 아니라 걸핏하면 학부형을 호출하여 호된 힐책을 했다.

이에 울분을 느낀 많은 학생들이 서울의 사립학교로 전학해 가고 별다른 대책이 없어 학교에 남은 학생들도 매일 ‘오늘은 어떻게 지낼까’ 하고 전전긍긍하거나 혹은 고초 속에 그저 교문을 들고나는 형편이었다. 이시카와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은 심지어 일부 특정 학생들을 매수, 밀정으로 삼아 동료 학생들을 감시하게까지 했다.

정진일지의 강요

당시 이른바 ‘정진일지’는 특히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요,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당국은 학생들에게 매일 일지를 써 내고 가정생활에서, 학교생활에서, 부모에게, 교사에게, 친구 간에 행동한 착한 일을 기록하고 잘못된 일을 반성하라고 무조건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알맞은 사례가 매일 일어날 수 없어 학생들은 ‘오늘은 몇 시에 아침밥을 먹고 몇 시에 집을 나와 몇 시에 학교에 도착했다’는 식으로 쓰고 교사들은 또 이같은 관성에 대해 신경질을 내곤 했다.

교사들은 “일지(日誌)는 오늘은 누구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으며 학교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좋은 일을 했고 교장 선생님 훈화에 어떻게 반성하였는지 등을 기록하라”고 성화였으나 학생들은 그저 곤혹스럽기만 했다. 이 일지를 제출하는 시각이면 고민하지 않는 학생이 없었고 간혹 깜박 잊고 일지를 못 내면 으레 교무실에 불려가서 몇 시간이고 벌을 받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

특히 ‘교무실에 와 서 있어’라는 교사들의 지시는 학생들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체벌이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교사 기분만 나빠도 이 벌책(罰責)이 가해지지만 수시로 가해지는 이 벌이 학생들에게는 극심한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이 벌이 내려지면 가슴이 철렁하고 ‘또 죽었구나’ 하며 무서워했다.

때로는 교사들이 이 벌을 가하고도 거의 잊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우두커니 교무실 밖에 서 있으면 다리도 뻣뻣하게 아프려니와 오고 가는 교사들 눈총이 따갑고 동료 학생들에 대한 창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떤 교사는 퇴근할 때에 “오늘은 가고 내일 또 서 있어” 하며 체벌을 이틀간 지속시키기도 했다.

한 동문은 재학 당시 이 “서 있어” 체벌의 단골학생이었는데 하루는 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이 벌을 당했다. 교무실 밖에 서서 해가 지고 교원들이 모두 퇴근을 했는데도 담임선생에게서는 아무 지시가 없었다. 마침 숙직하는 교사로부터 “네 담임이 퇴근했으니 오늘은 가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캄캄한 교실로 가 책 보따리를 챙겨 교문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튿날 담임교사가 또 아무 말도 없어 등교 직후부터 다시 교무실 밖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병영훈련 강화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전국토 병영화는 학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군대 병영에 나가 실시했던 소위 ‘병영숙박’이라는 훈련은 교련과의 한 과정으로 5학년 전학생이 2주일간의 입영생활을 통해 군인정신을 익히는 훈련인데 한참 나이의 학생들이 일본 군인들에게 걸핏하면 죽도록 얻어맞고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어쩌다 밥을 한 공기 더 달라면 일본 군인들은 금세 ‘한국인은 돼지 같다’는 식으로 욕하기 일쑤였다.

1934.10.6.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병영숙박 훈련. 1937. 정진일지. 1934.8.31.

당시 전주고보 재학중 소위 ‘병영숙박’ 훈련에 참가한 T동문은 새까맣게 탄 빵이 배급되어 그걸 바꾸어 달라고 했다가 군대용 슬리퍼로 뺨이 부어 오르도록 맞았으며, 어느 날엔 실탄사격 훈련 때 탄피 하나를 분실했는데 땅거미가 진 후임에도 이를 찾아오라고 했다. 배는 고프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피곤하지만 결국 탄피를 찾지도 못했거니와 호되게 벌을 받은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술회했다.

1936년 중일전쟁 직전, 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 2개 사단에서 이본(梨本)이란 일본 황족대장(皇族大將)이 통제관이 되어 대항연습(對抗演習)을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천황과 인척인 황족대장이니 피식민지 조선에서의 삼엄한 경계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기차나 버스 탑승객에게까지 검열이 극심했다.

이때 앞서 T동문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일본인 동료 학생 소대장에게 한마디 불평을 했다 해서 T동문은 연습을 끝내고 귀교한 후 총기고에서 목검(木劒)으로 엄청 두들겨 맞고 집에 돌아와 며칠 간 등교도 못한 채 앓아 누웠다. 2~3일 후 교관이 찾아와 “네가 일본학생에게 반항해서 그랬으니 이후 주의하라”고 해 그제서야 난타당한 이유를 알았으나 T동문은 졸업할 때까지 혹시 퇴학 등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제 3절 중일전쟁과 전주북중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일전쟁,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일본은 중국 대륙침략의 의도로 중국 북경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중국군이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다고 조작하고 그 구실로 중국을 침공하며 전쟁을 개시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학교는 수업을 아예 도외시하고 모든 학교 운영을 전쟁 수행 목적에 집중시켰다. 북경 함락 축제행렬과 상해 함락 야간 등불행렬 등 전쟁 선전 행사에 예외 없이 학생들이 동원됐다. 전쟁으로 밤낮 영일이 없고 1939년경부터는 근로봉사작업이라는 명목으로 학생 노동력 착취를 아예 정식교과로 만들어 한국 학생들을 몰아 부쳤다.

1940년 2월 민법을 개정하여 한국인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도록 하여 한국어를 아예 말살하려 했으며,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토록 했다. 이를 실행하지 않는 가정을 서로 고발하게 하고 한국과 일본은 원래 뿌리가 같은 이른바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한국말은 방언이란 역사까지 날조하는 등 학생들을 전쟁터에 몰아넣기에 혈안이 되었다. 학생들은 근로 동원 작업이나 각종 행사에 들볶이게 되고 일본인 교원 중에도 하나 둘 군대에 입대하는 교사가 생기고 중좌(中佐) 계급의 배속장교가 소좌(少佐)가 되고, 중위(中尉)가 되는 등 학교가 전쟁터 일색으로 변모해 갔다.

중일전쟁에서 돌아와 전주고보로 배속된 어느 일본인 소위(少尉)는 중국에서 중국인을 살육하던 전쟁 담을 늘어놓고 중국인 재산을 강탈하고 닭이나 돼지를 잡아먹던 이야기를 큰 공훈이나 세운 양 자랑했으니, 학생들은 공포와 혐오 속에서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 4절 이철승 동문의 항일저항

일제는 1930년 후반부터 노골적으로 세계침략 야욕을 드러내면서 전쟁을 주도했다.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다. 재학중 두 번의 전쟁을 겪고, 학교 이름도 입학 당시 전주고보에서 전주 북공립중학교로 바뀌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동문들이 19기다. 이 장에서는 19기들이 겪었던 격랑기 학창생활 증언을 종합해 생생하게 구술식으로 정리한다.

제 2장 격랑 속 학창생활

제 1절 19회 전주고보 마지막 입학생

제 2절 전주고보에서 북중으로 교명 바뀌어

제3절 노다 교사와 스트라이크

제 3장 수학여행 보고회 파문

제 1절 일제의 기만성 폭로

제 2절 사태수습과 야마시다 교사

제 4장 학도동원령, 근로보국, 군사훈련

제 1절일제강점 말기 시대 상황과 태평양전쟁

제 2절 3차 교육령 개정과 학도 동원령

학업 중단하고 강제 노력 동원

제 5장 일제 말기 반전 항일운동

제 1절 더욱 삼엄해진 학생 사찰

제 2절 연행, 구속, 투옥, 사제들의 고난

구속 교사, 학생들에 대한 관제 판결내용
노환 교사 투옥 이유
학생동태 감시 내용

제 3절 전고생들의 묵음시위

동맹휴학, 교장 축출, 수학여행 보고회 파문 등 개교 이래 그치지 않고 이어진 전고인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는 1940년대에 들어 무언(無言)의 묵음(默音)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묵음 시위는 22회 동문들이 입학하던 1940년부터 시작됐다. 행렬이나 대열의 뒤에서부터 ‘음…’ 하는 소리로 집단 시위를 하는 것이다. 주번교사가 “누구냐? 누구냐?”고 다그치면 ‘음…’ 소리는 사라지지만 교사가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또 묵음이 나오는 등 신경질적이고 게릴라적인 시위방식으로 교사들 골머리를 앓게했다.

당시 5학년 유승렬(柳承㤠) 동문은 남들이 다 조용한 데도 혼자서 ‘음…’하다가 그만 들통이 나서 교무실에 불려가서 혼쭐 나기도 했다. 평소 운동장 조회 때 일본인 교사가 지휘대 단상에 올라 한국인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얕잡아 헐뜯는 훈화를 하거나 행렬 중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음…음…” 하며 입을 다물고 여기저기서 콧속으로 소리를 내는 항변의 시간을 가졌다.

일본인 선생들은 아무리 단속하려고 해도 아예 허사였다. 왜냐면 “음…음…”하는 소리는 입을 열지 않아도 가능하였고, 따라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내기 때문에 주동자를 색출해내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교사들이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면 그쪽에서는 소리가 멎고, 다른 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면 또 다른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 등 숨바꼭질이 되풀이됐다.그 당시 이 “음…음…” 소리는 전주북중에 다니는 학생이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신호였다. 즉 인기 없고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일본인 교사에 대한 일종의 레지스탕스요,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욕구 불만의 표시였다

제 4절 유청동문의 증언, 전고와 항일정신

제 5절 전주고 교지 회지 발간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전주고보의 교지가 발간됐다. 일본어로만 제작된 이 교지 제호는 <회지>(會誌)며 발행소는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우회(校友會)’로 되어 있다. ‘교우회’는 요즘의 ‘학생회’와 같다.현재 확보돼 있는 <회지>는 제 6호, 제 7호, 제 10호 단 3권 뿐으로 언제 창간호가 발간됐으며, 언제까지 발간됐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제 10호에 개교 20주년(1939년) 기념 특집을 다룬 점으로 볼 때 도중에 발간 중단이 없었다 치면 1930년에 창간호가 발간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지>는 국판 크기로 제 6호는 174페이지, 제 7호는 182페이지, 제 10호는 200페이지로 제작됐다.<회 지>의 인쇄는 국내가 아닌 일본 후꾸오카(福岡)시의 인쇄소에서 했으며,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80년이 지난 현재도 알아보기에 전혀 불편이 없을 정도이다.

개교 20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제작된 제10호 <회지>를 기준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첫 장에 일본 제국주의 상징인 교내 ‘봉안전’20)(奉安殿)을 비롯해 교사(校舍)와 개교 20주년을 맞아 낙성된 강당 전경 모습이 실려있고,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새 교가(校歌)와 전·현 학교장 사진, 전체 교직원과 강당 조회 사진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개교 20주년을 맞아 개최한 기념전람회의 각 부문별 사진 및 학교생활인 미화작업, 등교 모습, 운동장 조회, 분열, 전교 운동회 사진 등이 실려 있다. 이밖에 벌채와 모내기 벼 수확 등 근로작업에 동원된 학생들 모습 등이 16페이지 분량의 흑백 사진 화보로 실려 있다. 본문 내용으로는 조선 총독의 ‘근화’(謹話)에 이어 당시 학교장인 모리(森廣美) 교장의 개교 20주년 기념사와 교사 및 졸업 동문들의 회고 글 등이 실려 있다.

개교 20주년 기념 특집답게 <회지> 제10호는 개교 이후 학교 연혁과 약사(略史) 등이 기록돼 있고, 당시까지 재직했던 교직원들의 직위 및 재직기간, 학교를 떠난 뒤 발령 받은 학교 등 개인 신상이 상세히 소개됐다. 또한 개교 20주년 당시 근무하고 있던 교직원 신상도 기록돼 있고, 특히 당시의 학교 교세(校勢)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개교 20주년을 맞아 1940년 10월25일 강당 낙성식과 겸해 열린 기념식 관련 내용을 많은 부분을 할애해 실었다. 식전(式典) 개요부터 학교장 식사, 전북도지사 축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축전을 보내온 인사들 명단도 게재했다. 이어 개교 20주년을 맞아 시행한 각종 기념사업 내용과 교내에서 진행한 기념 전람회의 분야별 세부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기념 전람회에서는 전주고 재학생을 비롯 도내 및 전국 다른 학교 학생들이 출품한 각종 작품도 함께 전시됐다. 작품은 서예·수채화등 도서(圖書) 수공(手工) 작품을 비롯, 이과(理科) 제작품등 여러 분야에서 갈고 닦은 솜씨를 겨뤄 분야별로 심사를 거쳐 우수 작품에 대한 시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관련 포스터, 전사자 유물 등도 전시하고있어 순수 전람회라고 할 수는 없다. 이밖에 <회지>에서는 1년 동안의 각종 학교 행사 및 소식 뿐만 아니라 개교 당시부터 20년 동안의 학 교일지도 실었다. 또한 교지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학생들의 산문과 시, 단가(短歌)등 문예작품도 실었으나 이중 상당수는 역시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각 특별활동부의 활동내용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육상경기부·야구·축구·농구부등 체육부의 경우는 1년동안 출전했던 각종대회 성적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아울러 교우회(=학생회)의 한해 예산을 세입·세출 항목별로 공개했으며 끝 부분엔 당시까지 졸업생 전체 명단 및 주소를 실었다. 개교 20주년을 맞아 낙성된 강당은 180평 규모로 실내조회 등 각종 행사 때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건립된 학교 건물 중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현재도 학생들의 유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39년 당시 교세
학교일지 20년사

제 6장 강점기 말 교사,교정과 학생의 모습

전고가 관립 전주고보로 설립 개교한 상황은 이미 기술했거니와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전주군 이동면(全州郡 伊東面)인 현 위치에 교사(校舍)를 신축, 가(假) 교사에서 이전했던 당시에는 시멘트 합벽으로 된 목조 2층 건물 1동으로 1층에 교장실 교무실 등이 있었고 2층엔 교실 5개가 있는 지금의 전고의 위용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제 1절 학교시설

제 2절 자긍심 대단했던 전주고생

당시 전주고생들이 교복에 구두를 갖춰 신고 교문을 나서면 타교생이나 시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주시 남자 중학교는 전주고 외에 전주농업교(全州農業校)와 신흥학교 그리고 중일전쟁 이후 개교한 본 전주사범학교가 있었지만 신흥학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22) 되었기에 몇 안 되는 전주시내 소수의 중학교 학생들이 기념행사 등에서 대열을 지어 시내를 행진할 때는 전주시민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개중에서도 명문 전주고 학생들은 어깨를 펴고 으스댔다.

도내 각지는 물론 충남 등지에서 모여든 많은 입학 지원자 중에서 소수만이 선발되어 입학했기에 북중 뱃지를 붙인 학생은 잘해야 한 면(面)에 한 두 명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전고를 졸업해도 대부분 학생들은 취직을 해야 했고 상급대학에 진학하는 수라야 한 학년에 10명 정도였다. 하지만 북중학교를 졸업하면 그 당시 한국사람으로서는 쌀 속의 뉘처럼 희 소한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장차 희망이 있었기에 북중생은 긍지가 하늘을 찌르고 젊은이 특유의 허세까지 곁들여 자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일쑤였다. 두꺼운 백선(白線) 하나에 높을 ‘高’(고) 모표가 덩실한 교모(校帽)에다 상의 깃에 학년을 표시한 양복을 입고 나서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고 동문들은 술회한다.

이와 같은 자랑의 바탕은 역시 민족정신, 민족전고 자부심에서 비롯했다. 무언중에 일제에 항상 항거하는 반일정신과 때로는 선배 동문 다수가 일경에 체포되고 영어의 몸이 되는 곤욕을 치렀으며 5년의 학교 생활 동안 같은 횟수 동문 거의 반수가 사상불온이니 폭행이니 하는 죄 아닌 죄로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를 강요당해 잡초처럼 교문을 쫓겨나는 것을 직접 곁에서 지켜본 전고생들의 가슴속에는 민족 정기와 함께 항일 저항정신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이로 인해 전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전주고보는 일제에 항거하여 맹휴를 자주 하는 학교’란 인식이 퍼져 있었다.

1940년대 초 북중생의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1941년 전국에서 모인 많은 우수한 지원자중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영광의 합격자 명단을 우천체조장 벽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합격자는 3개반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학기는 1년을 3학기로 하고 학년초는 4월초순에 시작하였다. 1학기의 학업 성적에 따라 우수반을 뽑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들기 위해 학업에 정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우수반 제도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여 폐지되었다.그 당시 국방색의 교복을 입고 ‘데바리’ 모자를 쓴 우리 전주북중 학생들은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의 교훈 아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중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에 시간을 빼앗겨 4학년 때는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인 전형적인 일제 식민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전쟁중이라 사열을 받기 위한 군사훈련에는 노일전쟁 당시 사용했던 9·9식,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모의 공포탄을 쏘아 실전을 방불케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전주시내의 중등학교들은 남중학교에 집합하여 사열을 받고 수류탄 던지기, 포복, 총검술 등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습득하기 위한 국방경기(國防競技)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북도내의 중등학교를 남군(전주북중, 전주남중, 전주사범, 전주농업, 전주공업)과 북군(군산중, 군산상업, 이리농림, 이리공업)으로 나누어 총을 메고 야간행군한 다음날 아침 삼례들판에서 양군의 전투 대결훈련이 실시되었다. 치고 밀리는 그 당시 훈련상황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이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심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은 ‘근로 보국대(勤勞 報國隊)’라는 것을 결성, 학생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이용했다. 덕진 야산 솔밭을 개간해 고구마 밭 일구기, 군산 불이(不二)학교에서 숙박하면서 비행장 공습에 대비한 비행기 방공호 파기(이 당시 취침전 친구들과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실로 끌려가 몽둥이질을 당하고 정학처분 당한 암울한 기억이 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모교의 뒷산을 허물어 기숙사를 지을 부지 조성 등은 좋은 예들이다

제 7장 광복이전의 교사들

제 1절 한국인교사

백용희
고(高) 교사
김성율
이진문
김용환
정학모
노환

제2절 일본인 교사

야마다 다이고로
야마시다
구와타
구와모토
우치다

제3절 한국인 고용직원

제 8장 수업 외 특별활동

개교 초기 학생들의 과외 특별활동은 무척 미미한 실정이었다. 민족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축구를 즐기는 정도였고 그것도 타교와 경기를 갖는 게 아니고 때로 개최되는 지역대항 시합에 몇 몇 학생이 끼어 불려 다니는 형편에 지나지 않았다. 정구(=연식 정구)가 일찍 유행되어 학교 설립 당시 학교 동쪽과 북편에 하나씩 설치되었던 코트에서 일부 교사와 학생들이 정구를 즐겼다. 야구는 서원(書院) 너머(=지금의 중화산동 ‘선너머’) 예수병원에 근무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돼 점차 동호인을 넓혔다. 개교 초엔 주로 투수와 포수만이 글러브를 끼고 야구 흉내를 냈으나 1930년대부터 정식 구단이 생기고 유니폼과 장비도 갖췄다. 개교초 스포츠 특별활동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고 미술부와 음악부 활동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축구부, 정구부에 이어 야구부가 생기고 1930년 앞뒤로 중학교 간의 경기도 벌어지게 됐다. 다음은 주로 6, 7회 졸업생(1929, 1930년) 이후 각 부 활동 양상의 개관이다

미술부

일본 미술학교 출신인 복택(卜澤) 교사가 부임해 비로소 정식 미술교육을 실시했다. 다만 미술부라고 해서 특별한 지도를 받았다기보다 교내 미술전람회에 대비해 출품작을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전람회에는 후쿠사와(卜澤) 교사의 특별출품작을 위시로 지련해(池蓮海·10회), 김대옥(金大玉·10회) 등 여러 동문 작품이 눈길을 끌었고 후일 한국 서양화 화단의 대가가 된 천칠봉(千七峰·17회) 동문도 재학 당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밖에 오래 미술 교사로 활동한 김용봉(金用鳳·11회) 동문과 김형수(金亨洙·13회), 문윤모(文鈗模·14회) 동문도 재학 당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졸업한 후로는 일본 미술학교를 거친 정용식(鄭龍植) 동문,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퇴임한 김주익(金周益·17회) 동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들도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수채화가 주가 되었고 유화나 동양화, 서예는 특별히 지도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또 그 당시 한국에서 열린 유일한 전람회인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학생이 있는 것도아니어서 교내 미술전이 끝나면 전시 작품들이 복도에 게시되어 환경미화를 하는 정도가 미술교원들의 자랑거리였다. 일부 한 두 학생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술공부를 계속하지도 않았다. 미술부는 구와모토(森本) 교사 부임 후 점차 활기를 띠기도 했으나 강점기 말 일제가 전쟁 일변도로 달리면서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져 버렸다

육상경기부

육상부 역시 개교 초기에는 가을철 운동회에 대비한 연습이 과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나 광주학생만세운동(1929년) 이후 교내 육상경기 기록대회가 열리고 일본 체육학교 출신의 체육전문 야마시다(山下) 교사가 부임한 이래 과외활동이 시작돼 각종 육상경기가 제법 활발해졌다.
장대높이뛰기(봉고도·棒高跳), 높이뛰기(주고도走高跳), 넓이뛰기(주폭도·走幅跳) 선수가 생겼고 1932년부터는 육상경기에 뛰어난 군산중학과의 학교 대항 육상경기도 열렸다. 단거리에서는 야구선수를 겸한 윤기병(尹麒炳), 유태백산(劉太白山) 동문이 명성을 날렸다. 특히 윤기병 동문의 100m 기록(11초 2)은 가히 ‘비호’(飛虎)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는 유태백산 동문의 기록(11초 5)과 함께 전(全) 한국적인 기록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윤, 유 두 동문의 기록은 깨어지지 않았다.

단거리에서는 정응진(鄭應珍), 김창순 동문에 이어 박대근(朴大根), 김인득(金仁得), 김응만(金應萬) 동문도 대단한 활약을 했다. 결국 일본체육학교를 나와 광복 후 이화여대(梨花女大) 체육학교 교수를 역임한 김종섭(金鍾燮) 동문이 위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장거리 기록은 지금에 비하면 저조한 기록이었겠지만 전북중학교가 전주-군산 역전마라톤대회에서 좋 은 성적을 거두었고, 400m 800m의 계주도 정응진(鄭應珍), 윤기병, 유태백산 등 여러 동문의 대를 이어 박대근, 김응만 동문이 있었고 다음으로 차재인(車在仁), 최경선(崔京善) 동문의 활약 또한 컸다.

또 조수연(趙壽衍)·홍정표(洪正杓) 동문의 장거리, 강대원(姜大元)·차재인 동문의 허들 3단도(3段跳), 넓이뛰기의 박대근, 장대높이뛰기의 유수복(柳壽福), 투포환의 김대옥(金大玉)·손동순(孫東順)·임남수(林南秀), 투원반·투창의 박병선(朴炳鮮), 높이뛰기의 이기순(李基順) 동문의 활약과 기록들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박병선 동문은 1937년 8월 개최된 제4회 전(全)조선중등육상선수권대회 투창부문 3위를 차지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에피소드는 1936년부터 교내 단축마라톤이 실시되었는데 제2회 대회 때 당시의 오귀남(吳貴男) 동문을 중심으로 한 마라톤 선수 10여명이 서로 짜고 발을 맞춰 결승 테이프를 끊고 들어오자 야마시다(山下) 체육교사가 화가 나 그 선수들을 호되게 꾸짖고 제1회 기록을 경신한 이들 모두에게 기록경신 기념메달 수여를 거부한 일이다. 기록경기 마라톤에서 동시 골인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이들은 물론 스포츠정신을 위배한 게 사실이지만 당시 활동 선수들의 일면을 말해 주는 이 에피소드는 장난꾸러기들의 해프닝으로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다.

육상경기 역시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로는 다른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수행 목적을 위한 각종 훈련으로 대체되고 그 명목마저 사라져갔다.

야구부

전주고보 야구부는 1925년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취미와 소질이 있는 학생들이 팀을 이뤄 창설돼 특별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에 남아 연습 했다. 전라북도 체육회가 펴낸 ‘전북체육 1백년사’(2002년)의 기록에 따르면 1925년 9월27일 전주에서 전주고보 대 이리농림과의 야구경기가 열렸는데 이 경기가 도내 학교간 대항 야구경기의 효시라고 한다. 이 경기에서 전주고보가 3대2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 팀 창설 초기 전주고보 야구부 실력이 축구와 더불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1931년 7월에는 오사카 매일신문사 주최 중학야구선수권대회 호남예선에 전주고보가 출전하여 전주농업, 광주중을 차례(15대3, 13대1)로 물리치고 군산중과 예선결승을 치러 4대1로 승리, 호남대표로 중학야구선수권대회 본선에 출전했으나 준결승에서 경성상업에 2대7로 패했다. 같은 해 10월 열린 제7회 조선 신궁(神宮)경기대회에 출전해 1회전에서 용산중에게 4대6으로 아쉽게 패했고, 1933년 7월에 열린 중등학교 야구 호남예선에서는 전주고보가 목포상업에 8대14로 패해 1회전 탈락했다. 특히 이날 경기에서 전주고보 팀이 초반 활발한 공격으로 홈런을 친 공이 운동장 옆에 있던 기숙사 옥상에 날아가 경기가 한때 중단되기까지 했다는 일화도 남겼다.

1930년대 전주고보 야구부 멤버로는 유철수(柳喆壽) 동문을 주축으로 유태규(柳泰圭) 동문이 크게 활약했고, 명 중견수 윤기병(尹麒炳) 동문, 명 포수로 전고 야구부 창단에 진력한 송창문(宋昌文), 김병관(金炳寬), 김종순(金鍾順) 동문을 필두로 육상선수를 겸한 김광호(金光鎬), 씨름에다 정구, 육상 선수까지 겸한 만능선수 김창순(金昌順), 명유격수 유태백산(劉太白山) 동문들의 활동이 대단했다. 투수였던 중본(中本)이란 일인 동문은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해 명투수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초기 선배들에 이어 명 유격수 이영식(李榮植) 동문이 있었고 대를 이어받아 명 유격수 남궁세원(南宮世元), 투수로, 1루수로 혹은 중견수로 명성을 날렸던 차재인(車在仁) 등 여러 동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타 선수로 박병훈(朴炳勳), 이갑상(李甲相), 박병래(朴炳來), 김재진(金栽進), 김만용(金萬容) 동문, 그 후로는 다시 송문규(宋文奎), 박기철(朴奇哲), 차재영(車在榮) 동문, 그리고 김제병(金濟炳), 이윤오(李倫吾), 김금용(金金瑢), 이용희, 허영목(許永穆) 동문, 일제 말기 무렵에는 차재철(車在喆), 이기안(李起安), 최병기, 이용재, 김종두, 김교상 동문들이 대를 이어가며 활동했다. 1936년 7월 전일본중등학교 야구선수권 호남예선대회에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대전고에 2대6으로 패하면서 탈락했고, 1937년 전일본중등학교 야구선수권 호남대회에서는 이리농림에 10대21로 패했다. 이후 야구부 또한 태평양전쟁과 더불어 유명 무실해 졌다.

정구부
축구부
농구부
문학 동인지 산호초
특수체육 교련과목

당시 학창생활

이 절에서는 임실군 교육장을 역임한 한송수 동문(23회)이 일제 강점기 말을 회고하면서 당시 북중(=5 년제 전주북공립중학교) 학생들의 교내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동창회로 보내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1941년 전국에서 모인 많은 우수한 지원자중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영광의 합격자 명단을 우천체조장 벽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합격자는 3개반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학기는 1년을 3학기로 하고 학년초는 4월초순에 시작하였다. 1학기의 학업 성적에 따라 우수반을 뽑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들기 위해 학업에 정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우수반 제도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여 폐지되었다.그 당시 국방색의 교복을 입고 ‘데바리’ 모자를 쓴 우리 전주북중 학생들은 ‘지성일관 정진역행(至誠一貫 精進力行)’의 교훈 아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중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에 시간을 빼앗겨 4학년 때는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인 전형적인 일제 식민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전쟁중이라 사열을 받기 위한 군사훈련에는 노일전쟁 당시 사용했던 9·9식,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모의 공포탄을 쏘아 실전을 방불케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전주시내의 중등학교들은 남중학교에 집합하여 사열을 받고 수류탄 던지기, 포복, 총검술 등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습득하기 위한 국방경기(國防競技)대회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북도내의 중등학교를 남군(전주북중, 전주남중, 전주사범, 전주농업, 전주공업)과 북군(군산중, 군산상업, 이리농림, 이리공업)으로 나누어 총을 메고 야간행군한 다음날 아침 삼례들판에서 양군의 전투 대결훈련이 실시되었다. 치고 밀리는 그 당시 훈련상황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이 모든 군사훈련이 끝나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심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은 ‘근로 보국대(勤勞 報國 隊)’라는 것을 결성, 학생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이용했다. 덕진 야산 솔밭을 개간해 고구마 밭 일구기, 군산 불이(不二)학교에서 숙 박하면서 비행장 공습에 대비한 비행기 방공호 파기(이 당시 취침전 친구들과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실로 끌려가 몽 둥이질을 당하고 정학처분 당한 암울한 기억이 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모교의 뒷산을 허물어 기숙사를 지을 부지 조성 등 은 좋은 예들이다